[include(틀:역대 조선 왕세자빈)]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0730, #1b0e64 20%, #1b0e64 80%, #0d0730); color: #FFD400" '''조선 세자 이향의 폐빈[br]{{{+1 휘빈 김씨 | 徽嬪 金氏}}}'''}}} || || '''출생''' ||연대 미상 || || '''사망''' ||연대 미상 || || '''능묘''' ||미상 || ||<|2> '''재위기간''' ||'''{{{#gold 조선 왕세자빈}}}''' || ||[[1427년]] [[5월 14일]] ~ [[1429년]] [[8월 27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구 안동 김씨]] || || '''부모''' ||부친 - 김오문(金五文)[br]모친 - 정부인 [[하동 정씨]](貞夫人 河東 鄭氏) || || '''배우자''' ||[[문종(조선)|문종]] || || '''봉작''' ||'''휘빈(徽嬪)'''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세자빈]]. [[세종(조선)|세종]]의 첫 번째 맏며느리이고, [[왕세자]] 시절 [[문종(조선)|문종]]의 첫 정실이다. == 생애 == [[구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 상호군 김오문과 숙경택주 정씨의 딸이자 정총의 외손녀이다. 오빠 김중엄은 세종의 조카사위[* [[태종(조선)|태종]]의 차녀인 [[경정공주]]의 사위이다. 참고로 경정공주의 남편, 즉 김중엄의 장인이 [[조대림 사건]]으로 유명한 [[조대림]]이다.]였고, 고모가 [[태종(조선)|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씨]]이며, 이모부가 [[이숙번]]이다. 이런 가문의 배경으로 1427년(세종 9년)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궁에 들어왔고, 휘빈에 책봉되었다.[* 왕비와 세자빈에게도 후궁처럼 별도의 호를 내려주는 것은 이 당시까지 고려의 관습이 남아 있던 영향으로, 휘빈이 폐출된 이후 [[순빈 봉씨]]가 세자빈으로 있을 때 폐지되었다.] 그러나 세자 [[문종(조선)|문종]]은 아내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야사에 박색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사실 이상한 짓 하다가 쫓겨난 폐세자빈이라 미화할 여지가 없는데도 정사엔 이런 기록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진짜 추녀였다고 볼 근거는 없다. 문종이 그녀를 총애하지 않았다는 것, [[순빈 봉씨]]를 간택할 때 세종이 노골적으로 외모를 봤다는 것 때문에 이런 얘기가 나온 듯하다. 물론 그렇게 외모를 보고 뽑은 순빈도 문종과 금슬이 좋지 않았던 걸 보면 휘빈이 사랑받지 못한 이유가 외모 때문이었다고 보긴 어렵다.] 효동, 덕금이라는 [[궁녀]]들을 더 좋아하였다. 휘빈은 남자에게 사랑받는 술법을 시녀 호초에게 물었다. 호초는 세자의 수발을 드는 궁녀의 신발 앞코를 잘라 그것을 태워 재로 만든 다음 세자의 술에 넣어 마시게 하면 세자가 궁녀들을 잊고 세자빈만 찾게 될 것이라는 내용과, 암수 뱀이 교미할 때 나오는 기운을 손수건에 묻혀서 가지고 있으면 세자를 혹하게 할 수 있다는 내용을 이야기하였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서 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내가 사랑을 받게 되고 저쪽 여자는 멀어져서 배척을 받는다 하니, 효동·덕금 두 시녀의 신을 가지고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는데, 두 여인(효동, 덕금)은 김씨가 시기하는 자들이다. 김씨는 즉시 그 두 여인의 신을 가져다가 자기 손으로 베내어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하여 그 술법을 써 보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틈을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호초가 또 말하기를, ‘그 뒤에 주빈께서 다시 그 밖에 또 무슨 술법이 있느냐고 묻기에 제가 또 가르쳐 말하기를,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107020_003|《세종실록》 세종 11년 7월 20일]] 이상한 술법을 행했다는 흔적이 나오자 [[소헌왕후]]가 세자빈의 시녀 호초를 국문해 세자빈이 술법을 행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소헌왕후가 이를 세자빈에게 추궁하자 김씨는 이를 순순히 인정하였고, 중전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종대왕은 격노하여 시녀 호초를 [[참수]]하고[* [[연좌제]]로 이어질 수 있었는데 호초의 아버지인 원주목사 이반을 파직하는 선에서 끝냈다. 호초의 오빠인 호조좌랑 이종인은 관직을 유지하였다.] 휘빈 김씨를 폐서인하여 궁에서 내쫓았다. [[성종(조선)|성종]] 때 [[폐비 윤씨]]를 폐하려하자 [[임사홍(조선)|임사홍]]이 반대하였는데, 이때 근거 중 하나가 "[[세종대왕]]께서도 휘빈을 쫓아내고 나중에 후회하셨습니다."였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세종은 성급히 휘빈을 쫓아낸 걸 후회했었음을 알게 해준다. 특히 두 번째 세자빈인 [[순빈 봉씨]]가 궁녀와 동침하는 사건을 일으켰기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또한 결과론이지만 이때 휘빈과 문종의 결혼이 정상적으로 이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을 보았다면 그 아들의 정통성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다른 사항 볼 것 없이 그 자식의 나이가 문종 즉위 무렵에 이미 성년의 나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종이 정통성면에서는 완벽 그 자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성년이라는 것과 후견인의 부재라는 빈틈으로 인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말았는데 만약 이때 태어난 아들이 있었고 문종 즉위 당시 성년이었다면 더이상 말 할 가치조차 없다.] [[분류:조선의 왕세자빈]] [[분류:안동 김씨(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