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한신 타이거스 감독)]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후지타 타이라 선수시절.jpg|width=100%]]}}} || ||<-2> '''{{{+2 후지타 타이라}}} [br] 藤田平 | Taira Fujita''' || || '''출생''' ||[[1947년]] [[10월 19일]] ([age(1947-10-19)]세) || || '''출신지'''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일본)] || || '''학력''' ||와카야마 시립 와카야마 고등학교 || || '''신체''' ||177cm, 81kg || || '''투타''' ||[[우투좌타]] || || '''포지션''' ||[[유격수]], [[3루수]], [[2루수]] || || '''프로입단''' ||1965년 드래프트 2순위 || ||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 (1966~1984)''' || || '''지도자''' ||[[한신 타이거스]] 선수 겸 코치 (1981~1984)[br][[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 (1995)[br][[한신 타이거스]] 1군 감독(1995.7~1996.9)[* 1995년 시즌 도중 사임한 [[나카무라 카츠히로]]의 감독대행으로 잔여시즌 동안 팀을 지휘했으며 1996년 시즌부터 정식으로 감독에 취임했으나 본인도 첫 시즌 도중인 1996년 9월 13일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잔여시즌은 시바타 타케시가 감독대행으로 지휘했다.][br]사가와 큐빈[* 일본의 운송회사 사가와 큐빈 산하 [[일본의 사회인야구|사회인야구]]팀. 참고로 [[사가와 규빈 사건]]으로 유명한 회사다.] 감독 (2005)[br]후쿠이 미라클 엘리펀츠[* '''일본해 오션 리그'''(원래는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서부지구 소속이었으나 2022년부터 서부지구 팀들이 신설리그를 형성해 독립했다.)에 소속된 [[독립리그]] 야구팀이다. [[임태훈(야구선수)|임태훈]]이 [[두산 베어스]]에서 방출된 후 이 팀에서 뛰었다.] 감독 (2008)[br]키슈 레인저스[* 칸사이 독립 리그에서 소속되어 있던 [[독립리그]] 야구팀. 2013년 리그 와해와 함께 휴부했고 2017년 정식 해산되었다.] 감독 (2009) || [clearfix] [목차] == 개요 == 전 [[한신 타이거스]]의 명선수로 1970년대 한신의 내야를 책임졌다. 또한 한신 타이거스 역사상 최초로 [[명구회]]에도 가입했다.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그러나 지도자로서는 영 아니었던 인물.]] == 프로 입단 전 == 와카야마 고교 시절부터 고시엔 대회 지역예선에서 맹활약했고, 고시엔 본선에도 두 번 올라갔다. 고졸 이후 [[메이지대학]] 진학이 예정돼 있었으나, 마음을 바꿔 [[한신 타이거스]]에 가기로 했다. 다만 이 일로 [[한신 타이거스]]와 [[메이지대학]] 간의 관계가 험악해지면서 한신 팬이었던 [[호시노 센이치]]가 한신 지명을 포기했을 정도로 절교 상황까지 가기도 했다. == 한신 선수 시절 == 말이 필요없는 '''영광의 선수 시절'''을 보냈다. 1966년 데뷔 첫 해부터 1군 시합에 출전하면서 39경기를 뛰었고, 가능성을 보여주자 1967년엔 1번 타자 유격수 자리에 고정되었다. 당시 [[요시다 요시오]]와 함께 [[테이블 세터]]와 [[키스톤 콤비]]를 구성해 한신의 내야를 지키고 공격에서는 기회를 창출하는 역할을 했다. 1967년에는 154안타로 최다안타를 기록했다. 1970년엔 잠시 3루수를 맡기도 했으나, 1971년 다시 유격수로 복귀, 개인 최다인 28홈런을 기록했다. 1974년엔 개인 첫 3할을, 1981년에는 .358의 타율로 타격왕도 차지했다. 1983년 2000안타를 치면서 [[명구회]]에 가입하였다. 이후 1984년 은퇴를 선언하며 영광의 선수 시절을 마감했다. 통산 2010경기 출전, 2064안타, 207홈런, 타율 .286, 출루율 .336, 장타율 .435, OPS .771을 기록했다. 소속팀 한신이 후지타가 현역이던 시절 동안 [[일본시리즈]] 진출을 단 한 번도 하지 못해서, [[도이 마사히로]]와 같이 '''2천 안타 달성자 중 [[일본시리즈]] 진출 경력이 없는 유이한 선수'''가 되었다. 덧붙여서 후지타의 명구회 가입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순수혈통주의|순수 한신에서만 뛴 선수]]로서 최초'''로 이뤄낸 기록이며 현재까지 '''[[명구회]] 유일의 한신 원클럽맨'''이기도 하다.[* 원래는 [[토리타니 타카시]]도 추가되어야 할 터였지만 토리타니가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하면서 원클럽맨 타이틀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 해설가 및 평론가 시절 == [[백스크린 3연발]] 당시 TV중계 해설이었으며, 한신의 리그 우승이 결정된 경기에서는 라디오 해설을 하고 있었다. 이후 1995년까지 간사이 지역 언론에서 평론가 및 해설자 생활을 하다가, [[나카무라 카츠히로]]의 요청에 따라 1995 시즌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으로 부임했다. == 한신 지도자 시절 == 1995년 2군 감독이 되었다. 당시 [[한신나루오하마 구장|한신 2군]]은 식단이 부실하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이를 프런트에 이야기해 개선했다고 한다. 다만 이 때에도 자신의 야구관 및 지도 방식에 대해 말이 많았는데, 2군 연습에 지각한 [[신조 츠요시]]를 한여름 땡볕에 정좌를 시킨 사건으로 인해 구설수에 올랐다. 얼마 가지 않아 자신을 데려왔던 [[나카무라 카츠히로]]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자, [[감독 대행]]으로 임명되어 1995 시즌 나머지 53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17승 36패에 그치면서 팀의 최하위를 막지 못했다. 1996년 정식 감독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팀은 전년보다 더 심각하게 침체에 빠졌고, 급기야 원정경기 이동을 위해 [[도카이도 신칸센|신칸센]]을 탔더니 [[한신아재]]들이 열차에 난입해 차 안에서 [[청문회]]를 벌이는 등[* 당시 [[신칸센 100계 전동차]]엔 [[그린샤]] 개인실이 존재했고, 후지타 감독은 아재들을 그린샤 개인실로 초빙해 회담을 했다고 한다.] [[총체적 난국]] 상태였다. [[https://www.sanspo.com/article/20200423-TAZQFBA2ORMHXE4WDPQMQSUKXY/|차내 청문회 기사]] 1996년 9월 12일, 결국 후지타 감독 해임이 한신 구단 이사회에서 결의되었으나, 후지타 타이라 본인이 이에 불복해, [[한신 고시엔 구장]] 내 회의실에서 '''[[https://www.daily.co.jp/tigers/2020/05/30/0013381871.shtml|9시간짜리 마라톤 회담]]'''을 벌인 끝에 결국 해임을 수락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96년 잔여시즌은 시바타 타케시가 맡아서 이끌었으나 [[4466566664|446'''6'''566664]]를 막을 수는 없었다. == 한신 감독 사퇴 이후 == 한신 감독에서 물러난 후엔 [[선 텔레비전]] 야구해설가로 복귀했고 이후 [[무라타 쵸지]]가 창설한 "[[쓰시마]] 마사카리 드림즈"에 참여하여 어린이 야구 지도를 위해 각지를 순회하거나 [[사회인야구]]팀 사가와 큐빈 감독, [[독립 리그]] 후쿠이 미라클 엘리펀츠 및 키슈 레인저스의 감독을 역임했다.[* 단 이때도 성적 부진으로 2구단 모두 한 해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추가로 후쿠이 감독 퇴임 후 연봉 미지급 문제로 구단을 기소하기도 했다.] 2019년 [[토리타니 타카시]]가 [[명구회]] 가입을 이뤄내자 축하하러 [[한신 고시엔 구장]]에 방문하기도 했다. == 여담 == 자신의 야구관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던 인물이었고, 이는 팀 내 불화와 충돌의 도화선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특이하게도 현역 선수 시절에는 팀내 불화나 파벌 싸움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으로도 유명했다. 1996 시즌 [[스프링캠프]] 때는 한신 OB들의 연습장 출입을 막아버린 일화도 있었다. 현역 시절에 달았던 등번호 6은 이후로도 한신의 유명 타자들에게 승계되었는데, [[와다 유타카]]와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달았다. 둘 다 이후 한신 감독까지 했으며, 카네모토는 감독 시절에도 6번을 달았다.[* 와다 유타카는 감독 시절엔 86을 달았다.] 카네모토가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로도 현재까지 6번을 아무도 달지 않고 있어, 사실상의 [[영구결번/스포츠|영구결번]] 취급이다. [[한신 타이거스/2023년|2023 시즌]] 한신 타이거스의 1자리 등번호로 현재까지 주인이 있는 번호는 [[키나미 세이야|0]], [[모리시타 쇼타|1]][* 기존 1번 주인 [[토리타니 다카시]]가 치바로 이적한 2020 시즌부터 모리시타가 입단한 2023 시즌 전까지 결번이었다.] [[우메노 류타로|2]][* 입단 초기엔 44번을 사용했다.], [[오오야마 유스케|3]][* 예전엔 대타의 신 [[야기 히로시]]가 달았고, 이후 세키모토 켄타로가 달았다.], [[쿠마가이 타카히로|4]], [[치카모토 코지|5]], [[이토이 요시오|7]][* [[니시오카 츠요시]]가 한신 시절에 이 번호를 달았다.], [[사토 테루아키|8]][* 사토의 입단 전 시즌까지 [[후쿠도메 코스케]]가 달았다.], ~~[[타카야마 슌|9]]~~[* 2023년 10월 3일 전력외 통고와 함께 방출되었다. 타카야마 이전에는 후지타 본인과 같이 현역시절을 보냈던 [[사노 노리요시]], 2010년 최다안타 주인공 [[맷 머튼]] 등이 달았었다.]. [[분류:와카야마시 출신 인물]][[분류:한신 타이거스/은퇴, 이적]][[분류:명구회 멤버]][[분류:1947년 출생]][[분류:1966년 데뷔]][[분류:1984년 은퇴]][[분류:내야수]][[분류:우투좌타]][[분류:원클럽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