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능연각 24 공신)] ||<-2> '''능연각훈신[br]진국공(陳國公)[br]{{{+1 侯君集 | 후군집}}}'''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a2.att.hudong.com/01300000157105121834297310455.jpg|width=100%]]}}} || || '''[[작위|{{{#fff 작호}}}]]''' ||진국공(陳國公) || || '''성''' ||후(侯) || || '''이름''' ||군집(君集) || || '''부친''' ||후정원(侯定遠) || || '''출생''' ||? ~ 643년 || || '''출신''' ||빈주(豳州) 삼수현(三水縣) (現 [[섬서성]] [[셴양시]] 쉰위현 일대)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인물. [[능연각훈신]] 중 한 명이다. == 생애 == 빈주 사람으로 [[능연각훈신]] 중 한 명이며, 고창국, 토욕혼 등을 멸망시키는 것에 큰 공을 세웠다. 626년에 우후이자 거기장군을 지내면서 고사렴, [[울지경덕]]과 함께 [[이건성]], [[이원길]]을 주살하라고 권고했으며, [[당태종]]이 즉위하자 좌위장군에 임명되었다. 겨울 11월에 우위대장군으로 있다가 병부상서에 임명되어 조정의 정치에 참여해 의논했으며, 634년에는 토욕혼을 공격하면서 적석도총관에 임명되었다. 635년에 이도종이 모용복윤을 격파하고 추격하는 것을 주저하는 장수들에게 설득해서 추격하게 했다. 643년에 [[이승건]]의 반란 모의에 가담했다가 발각당하자 참수당했으며, 죽기 전에 폐하(당태종)를 섬기면서 두 나라(고창국, 토욕혼)를 빼앗았으니, 한 명의 아들을 온전하게 제사를 받들게 해 주기를 빈다고 했다. 당태종이 후군집의 처와 아들은 용서했지만 영남으로 귀양보냈다. 이전에 당태종이 이정에게 후군집에게 병법을 가르쳤으며, 이정, 이도종 등은 훗날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 여겼다. 이도종이 후군집에 대해 뜻은 크지만 지혜가 작고 스스로 작은 공로를 자부하면서 방현령, 이정보다 아래에 있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그 뜻을 채울 수 없을 것이라 했다. == 고창국 정벌 당시의 일화 == 전술하였듯 후군집은 고창국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후군집이 고창국 정벌을 맡은 계기는 고창국의 국왕이었던 국문태(麹文泰)가 서역의 교역로를 차단한 것이었다. 당태종이 국문태를 불러 이를 견책하려고 하였지만, 국문태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자, 후군집을 교하도 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고창국 정벌을 맡긴다. 후군집의 군대가 적구(磧口)에 당도하였는데, 고창에서는 일이 어떻게 되려는지 국문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인 국지성(麴智盛)이 고창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고창국은 국문태의 죽음으로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는데, 부하 장수들이 후군집에게 고창을 공격하려면 지금이 기회라고 진언하였다. 하지만 후군집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장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가하다. 천자께서는 고창국의 왕이 오만하고 무례하여 나로 하여금 천벌을 삼가 행하라고 하셨는데, 지금 상중에 남을 습격한다면 그것은 죄를 물을 군대가 아니게 된다. 후군집은 적국이 상중인 상황에서 공격하는 것 대신 북을 울리고 시위하며 진군하였다. 고창국은 당나라에 농성으로 맞섰지만, 후군집은 공성병기들을 동원하여 고창국의 농성을 물리쳤다. 한편 국지성은 [[서돌궐]]의 원군을 기대하였지만, 서돌궐의 원군은 당도하지 않았고, 결국 후군집에게 항복하였다. 후군집은 군대를 나누어 고창을 공략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후군집은 고창을 정벌한 뒤에 죄가 없는 사람들을 노예로 전락시켰고, 재물을 사사로이 취하였다. 게다가 후군집의 부하 장수들도 앞다투어 약탈을 자행하는 바람에, 후군집은 후환이 두려웠지만 굳이 부하 장수들의 약탈을 막지 않았다. 후군집이 장안으로 개선한 뒤에, 관리가 이 사실을 문제삼았고, 후군집은 조사를 받고 투옥되었다.[* 뒤에 [[잠문본]]이 후군집의 죄를 사하는 상소를 올려 풀려나기는 하였다.] == 평가 == >흉적을 쳐부수고 만족이 많았지만, 총애와 공적에 의지하여 세심하지 못하고 법도와 기준이 없었으며, 이전의 공적을 버리고 훗날의 근심에 빠졌으니, 탐욕과 우둔이 장차 드러났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구당서]]』'''}}} >후군집은 장상의 지위에서 사사로이 [[이건성|태자]]를 알현하였고, [[장량(당나라)|장량]]은 500명의 양자를 모았고, [[설만철]]은 분수에 넘는 짓을 획책하여, 모두 죽을 때 다 갚지 못한 죄책이 있었으니, 어찌 다시 꾸짖겠는가? >---- >{{{#!wiki style="text-align: right" '''『[[신당서]]』'''}}}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당나라의 장수]][[분류:중국의 공신]][[분류:개국공신]][[분류:셴양시 출신 인물]][[분류:643년 사망]][[분류:참수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