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소량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3A380 0%, #00C499 20%, #00C499 80%, #03A380); color: #ece5b6" '''소량 제3대 황제[br]{{{+1 세조 효원제 | 世祖 孝元帝}}}'''}}} || ||<|2> '''출생''' ||[[508년]] [[9월 16일]] || ||[[양(남조)|소량]] [[장쑤성|단양군]] [[난징시|건강현]][br](現 [[장쑤성]] [[난징시]]) || ||<|2> '''즉위''' ||[[552년]] [[12월 13일]] || ||[[양(남조)|소량]] [[징저우시|강릉]][br](現 [[후베이성]] [[징저우시]]) || ||<|2> '''사망''' ||[[555년]] [[1월 27일]] (향년 47세) || ||[[양(남조)|소량]] [[징저우시|강릉]] 동각죽전[br](現 [[후베이성]] [[징저우시]]) || || '''능묘''' ||[[영릉]](潁陵) || ||<|2> '''재위기간''' ||'''{{{#ece5b6 소량의 황제}}}''' || ||[[552년]] [[12월 13일]] ~ [[555년]] [[1월 27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소(성씨)|난릉 소씨]] || || '''휘''' ||역(繹) || || '''부모''' ||부황 [[무제(양)|고조]][br]모후 문선태후 || || '''형제자매''' ||8남 6녀 중 7남 || || '''배우자''' ||부인 7명 || || '''자녀''' ||6남 4녀 || || '''아명''' ||칠부(七符) || || '''자''' ||세성(世誠) || || '''작호''' ||상동군왕(湘東郡王) || || '''묘호''' ||'''[[세조]](世祖)''' || || '''시호''' ||효원황제(孝元皇帝) || || '''연호''' ||승성(承聖, [[552년]] ~ [[555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남북조시대]] [[양(남조)|양나라]](梁)의 3대 황제.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효원황제(孝元皇帝). 휘는 소역(蕭繹). 자는 세성. 아명은 칠부. 재위 기간 동안 승성(承聖)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 생애 == === 초기 행적 === 천감 7년(508년) 8월 6일(508년 9월 16일)에 태어났으며 [[양무제]] 소연과 원영영[* 원래는 석씨 성을 가진 궁녀로 무강후 석영보의 딸이었다. 남제 시안왕 소요광의 시첩이었다가 소요광이 죽자 동혼후 [[소보권]]의 후궁이 되었다. 그리고 소보권이 죽고 남제가 멸망한 후 [[무제(양)|소연]]의 후궁이 되어 아들을 낳자 소연이 무척 기뻐하며 '원'이라는 성과 '영영'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사이에서 태어난 7남이다. 7살에 상동왕에 책봉되었다. 태청 원년(547년) 정월, [[형주]], [[옹주]] 등 9주 군사 [[도독]]을 맡고 [[형주]][[자사]]가 되었으며 태청 3년(549년), 하남왕 [[후경]]이 대란을 일으키고 소연을 유폐시켰다가 소연이 굶어 죽자 소역은 작은 아들을 [[우문부|우문씨]]가 권력을 잡고 있던 [[서위]]에 볼모로 보내고, 고씨의 [[북제]]와 화의를 맺었다. 이에 서위는 볼모를 받지 않고 형제 관계를 맺길 원했고 북제는 소역을 [[양(남조)|양나라]] [[상국]]으로 임명했다. 6월, 소역은 후경을 토벌할 작정으로 군대를 모집하고 하동왕, 상동자사였던 [[소예]][* 무제 소연의 장남인 [[소통]]의 차남.]에게 3번이나 사람을 보내 식량을 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소예가 모두 거절하자 소역은 무력으로 소예를 공격했다. 이에 소예의 아우였던 악양왕, 옹주자사 [[소찰]][* 소통의 3남.]은 소역의 근거지였던 [[강릉]]을 공격해서 형 하동왕 [[소예]]를 구원하려다가 [[역관광|오히려 패배하고 도망쳤다.]] 그래서 소찰은 서위에 구원을 보내 번국이 되기를 원했다. 대보 원년(550년) 4월, 평남장군 왕승변이 [[창사|장사]]를 함락시키고 소예를 죽였다. 대보 2년(551년) 6월, 후경은 파릉에서 대패하고 [[건업|건강]]으로 도주했으며 소역은 군사를 이끌고 계속 추격했다. 7월, 후경은 간문제 [[간문제(양)|소강]]을 협박하여 [[예장왕]] 소동에게 양위하게 하고 소동을 황제로 세웠다가 11월, 소동을 폐하고 스스로 [[한나라(동음이의어)|한(漢)나라]] 황제가 되었다. 대보 3년(552년) 3월, 왕승변과 [[시흥]] [[태수]] [[진패선]]의 공격을 받고 후경은 가죽 주머니에 두 아들을 넣어 100여 기를 데리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배를 타고 [[장강]]을 건너 북쪽으로 도주할 생각이었지만 추격병이 계속 쫒아왔다. 이에 빨리 도주하기 위해 자기 자식들을 강물에 집어 넣고, 나름대로 오래 갔지만 지쳐 잠든 사이에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후경의 부하들은 그의 시체를 소금에 절인 후, 그의 처자와 함께 건강으로 보냈다. 왕승변은 후경의 머리를 베어 강릉으로 보내고 그의 팔은 [[북제]](北齊)로 보냈다. 이는 후경이 북제의 전신인 [[동위]](東魏)에서 반역하여 이탈한 장수이므로 북제와의 화평을 위해 그를 죽였다는 증거로 보낸 것이다. 그리고 후경의 시체는 건강 거리에 매달아놓았으며 그의 처자는 모두 참살되었다. 매달아놓은 그의 시체는 백성들이 달려들어 붙어 있는 살을 모두 뜯어먹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왕망]]보다 더 처참했다. 늦게 도착해 살을 먹지 못한 백성들은 억울해하다가 남은 뼈를 불태워 물에 태워 마실 정도로 후경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했다. 후경의 머리는 강릉에 있던 소역이 받아서 후경에 의해 폐위당하여 비참하게 [[아사]]한 아버지 무제 소연의 원혼을 달래는 제물로 사용되었다. 그 다음에는 3일 동안 강릉 거리에 매달았다가 삶아서 색칠한 다음 무기 창고에 보관했다. 이것은 후경이 저지른 악업의 크다큰 대가였다. 후경의 난은 평정되었으나, 양나라의 국력은 크게 쇠약해지고, 영토의 반 이상이 서위와 북제에 넘어갔다. [[파촉]] 지방, 형주 지방, 장강 이북 지방을 서위와 북제에 상실함으로써 영토는 장강 이남으로 한정되었다. 4월, 황제를 칭했던 무릉왕, [[태위]], [[익주]] 자사 [[소기]]는 소역에게 화해를 구걸했으나, 거절당하고 7월에 토벌을 당한 후에 다음해(553년) 피살되었다. === 재위 === 11월, 소역은 강릉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폐허가 된 수도 건강 대신에 자신의 근거지 강릉으로 천도했다. 그는 강릉을 건강을 모델로 그대로 개축했는데 성벽의 표격, 대전, 성문 이름까지 모두 건강과 같았다. 그는 효성이 지극해 아버지가 죽은 정전에서 일을 보지 않고, 용광전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승성 2년(553년) 3월, [[서위]](西魏)의 사신을 접견했다. 하지만 대우가 북제의 사신보다 못하다는 구실로 서위의 [[승상]]이자 권력자였던 [[우문태]]는 불만을 품었다. 이를 구실로 살해당한 소예의 동생이었던 옹주 자사 소찰의 지지와 지원하에 50,000명을 출병시켜 원제 소역을 공격했다. 소역의 조카뻘이었던 소찰은 강릉과 가까운 요충지 [[양양]]을 서위에게 스스로 바치고, 서위군과 함께 [[형주]] 강릉을 공격해왔다. 소역은 진양문에서 열병하고 비파문으로 친히 나가 항전하였다. 승성 3년(554년) 11월, 강릉이 포위되고 외성 서문이 열려서 서위군이 들어오자 소역은 절망하며 '''"10,000권의 책을 읽고 오늘 이렇게 일생을 마치는구나. 죽을 바에 책들이 무슨 소용인가? 문무의 도가 오늘 밤에 끝장나는구나."'''라면서 '''내성 안 동죽각전에 비치된 고금도서 14만 권을 모두 불살라 없애고[* 소역이 모두 정성들여 수집한 것으로 이 때 영원히 소실된 책들도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내성으로 퇴각했다. 이것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보다 심하고 [[항우]]의 [[셴양시|함양]] 파괴[* 의외로 분서갱유의 피해는 심하지 않았다. 책을 수거하거나 불태웠어도 수거한 책은 함양에 학자들 연구 및 열람용으로 보관해주었는데, 문제는 나중에 항우가 함양을 통째로 불태워버렸다.]에 비견할 만하다.''' 결국 12월, 내성마저 함락되면서 사로잡혀 궁중 주의고에 구금되었다가 머지않아 소찰의 지시에 의해 결국 피살되었다{승성 3년(554년) 12월 19일, 555년 1월 27일}. 소찰은 천으로 그의 몸을 감아 부들돗자리에 싸고 흰 띠로 묶어 강릉 진양문 밖에 매장했으며 그가 죽을 때의 나이는 47세였다. 황제 임에도 불구하고 천으로 싸인 돗자리로 감싸 매장된 것은 그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보여준다. == 사후 == 서위는 소찰을 황제로 세우고 강릉성을 두 구역으로 나누어 동쪽에는 소찰을 거주하게 하고, 서쪽은 강릉 총관이 지휘하는 서위군을 주둔시키면서 서위의 [[괴뢰국|괴뢰 국가]]인 [[후량(남북조시대)|후량]]을 탄생시켰다. 나중에 서위가 멸망하고 우문씨의 북주가 들어섰지만 서위의 역할은 그대로 [[북주]]에게 계승되었다. 북주에서 사신을 보내 사소한 일로 소찰을 꾸짖자 소찰은 충격으로 병을 얻어 죽었다. 소찰의 아들 [[소규]]가 즉위하자 북주와 관계가 좋아지면서 신뢰를 얻어 서쪽에 있던 강릉 총관과 북주군은 철수했다. 그러나 북주가 멸망하고 양씨의 [[수나라#s-4|수나라]]가 들어서고 소규의 뒤를 이은 소규의 아들 [[소종(양나라)|소종]] 때 수나라는 다시 강릉 총관과 병력을 주둔시킨다. 결국 수나라는 남조의 [[진(남조)|진나라]]를 치기 앞서 군대를 보내 후량을 멸하면서 양나라는 완전히 사라진다. 그 후 [[수말당초]] 양의 [[황족]] [[소선(당나라)|소선]] 등에 의해서 양나라 부흥 운동(후소량)이 전개되었으나, [[당나라]]가 세워지면서 모두 진압되어 후소량마저 멸망된다. == 평가 == 소역은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이미 대여섯 살 때부터 [[사서오경]]을 암송하여 무제 소연의 칭찬을 받았다. 장성해서는 많은 책을 읽었고, [[눈병]]으로 [[외눈|한쪽 눈을 잃고도]] 그만두지 않았다. 또 책 수집을 즐겨 많은 책들을 모아 창고에 보관했는데 이것은 그의 만행으로 없어졌다. 그래서 중국사를 공부하는 사람 가운데는 "무능한 주제에 죽을 때는 혼자서 죽을 것이지 귀중한 책들은 왜 태우느냐?"며 그를 비판하는 사람이 적지 않고 일각에선 '''소량 최악의 황제'''로 칭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다만 [[위진남북조시대]]의 주요 기록과 도서들은 당말 [[황소의 난]] 당시 [[황소(당나라)|황소]]가 [[880년]] 장안에 입성하고 당 황실의 도서관이 파괴되어서 상당히 사라졌다고 [[신당서]] 예문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문헌파괴를 소역의 탓으로만 돌릴순 없다. 서화, 문장에 뛰어나 저작을 남겼으며 조서도 붓만 들면 바로 완성했다. 현재 남아있는 <양직공도>가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단, 소역이 그린 원본은 남아 있지 않고 <[[역대제왕도권]]>으로 유명한 [[당(통일왕조)|당]]나라 화가 염립본의 모사본도 남아있지 않다. 현재 것은 [[북송]] 시대의 모사본이다.[* [[비단]]에 그린 것으로 원래는 25개국 사신을 그렸다고 되어 있지만 현재 확인되는 것은 12개국이다.] 하지만 나약하고 원대한 계획이 없었으며 의심이 많고 과단성이 없었다. [[황로]] 사상을 숭상해서 강릉이 서위군에게 포위됐을 때도 태평스럽게 <[[노자]]>를 강의하여 백관들은 갑옷을 입고 그의 강의를 들어야 했다. 또 [[여색]]은 즐기지 않았지만 [[미신]]을 깊이 믿어 금기하는 것이 많았다. 벽이 무너지거나 집이 기울어져도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리를 미뤘다. 억지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시기심이 많았으며 잔인했다. 강릉이 포위당했을 때 감옥에는 수천 여명의 [[사형수]]들이 갇혀 있었는데 관원은 그들을 풀어 군사로 충당시키고, 무기를 주어 싸우게 하자고 건의했으나 오히려 그들을 모두 몽둥이로 때려 죽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원제 소역이 곧 죽는 바람에 이것은 집행되지 않았다. == 후예와 여담 == 소역의 아들들은 소역과 함께 대부분 서위군 또는 후경에게 피살되었거나 아니면 요절했다. 원제 소역의 남자 자손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소역의 장남 [[소방등]]의 외아들이었던 손자 [[영가왕|소장]]이다. 소장의 아들이자 소역의 증손자가 훗날 [[당태종]] 시절 감찰어사를 지냈던 소익이다. 당 태종은 [[왕희지]] 글씨 [[매니아]]였는데 그 중 1품이라는 난정서를 얻고 싶어했다. 사실 난정서는 왕희지 사후 대대로 후손에게 전해져 오다가 7대손이었던 지영에게 귀속되었다. 지영은 영흔사 승려였기 때문에 그가 100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난정서는 그의 제자 변재가 가지게 되었다. 변재는 나름 스승의 가보이자 유품을 지키기 위해 상자에 넣고 영흔사 대들보에 몰래 구덩이를 파서 숨겨두었다. 마침 월주 영흔사 변재 선사가 이를 가지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그래서 그를 불러 캐물었으나, 그는 자신의 스승 지영이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른다고 시치미뗐다. 당 태종은 그의 의도를 깨달았지만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일단 돌려보내고 신하들과 의논했다. 이에 방현령은 소익을 추천했다. 소익은 영흔사로 가서 변재를 만나 [[바둑]], [[거문고]], [[투호]] 등 잡기로 그와 금방 친해졌다. 소익은 자주 영흔사에 방문하면서 친분이 어느 정도 쌓이자 자신의 증조 할아버지 소역이 그린 양직공도를 꺼내 서화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소익은 난정서 이야기로 화제를 옮겼고 [[낚시|소익은 계속된 전란으로 난정서가 사라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변재는 [[도발]]에 걸려서 스스로 꺼내서 보여주고 말았다. 이에 변재가 잠시 절을 비운 사이에 칙명을 빌미로 난정서를 받아내고, 이것을 [[장안]]으로 급히 보냈다. 이 공으로 소익을 추천한 방현령은 금채 1,000단을 받았고 소익은 원외랑으로 승진하며 많은 상품과 장원, 저택을 받았다. 변재는 황제를 속인 죄가 있었으나, 80이 넘은 고령이었고, 난정서를 얻은 기쁨에 겨워있던 당 태종은 용서하고 오히려 비단 3,000단과 쌀 3,000석을 값으로 쳐주었다. 하지만 변재는 그것을 3층 보탑 건립비로 사용하고, 스승의 유품을 잃은 자신을 책망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머지않아 숨을 거두었다. 그 후 난정서는 당 태종의 소릉에 배장되었으나, 훗날 당나라 멸망 후 [[군벌]] 온도가 도굴하면서 유실되고 말았다. == 가족 == 원제에게는 [[왕비|정비]] 서씨[* 이름은 소패(昭佩), 즉 서소패.]와 귀빈(貴嬪) 왕씨(王氏), [[귀인]](貴人) 원씨(袁氏), [[귀비]](貴妃) 하씨(夏氏), 양인(良人) 왕씨 등의 후궁이 있었는데, 서씨의 경우 얼굴이 박색이라는 이유로 3년에 한 번 정도밖에 찾지 않을 정도로 멀리했다. 이에 서씨는 원제가 행차한다는 말을 듣고 얼굴 화장의 반을 지우고 원제를 맞았고, 원제가 왜 얼굴 반쪽만 화장했느냐고 물었더니 '''"[[사망 플래그|당신은 어차피 눈도 하나밖에 없어서 내 얼굴 다 못 볼 텐데 얼굴 다 화장해서 뭐하나요.]]"'''라고 울분에 찬 대답을 해 원제의 분노를 샀다. 또 서씨는 술을 좋아해서 원제의 옷에 구토를 한 적도 있고 원제가 멀리하는 [[후궁]]과는 자주 술을 마시며 가깝게 지냈지만 [[나이스 보트|원제의 총애를 받아 그의 아이를 낳은 후궁은 자신이 칼을 들고 찾아가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후궁들만 찾는 원제에게 항의라도 하듯 형주(荊州)의 요광사(瑤光寺)라는 절에 있는 지원(智遠)이라는 승려와 [[불륜|사통]]하기도 했고, 남편의 측근으로 미남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기계강(曁季江)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했으며, 하휘(賀徽)라는 자의 용모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그를 보현니사(普賢尼寺)라는 절로 불러다 [[간통]]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후궁 귀빈 왕씨가 죽자 원제는 서씨 때문에 왕씨가 죽었다고 책임을 돌렸고, 서씨 소생의 아들인 소방등(蕭方等)까지도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 소방등은 549년 후경의 토벌에 반대하던 상주자사 소예와 싸우다 패하고 죽었고, 이때 원제는 아들의 죽음에 별로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아들이 죽은 것에 충격을 받아 병을 얻은 서씨는 아들이 죽은 해 5월에 원제로부터 자결을 명령받고 우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 매체 == 인지도는 낮지만 [[김용(1924)|김용]]의 [[무협소설]] [[연성결]]에 등장한다.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다만 그가 모았다는 보물을 찾기 위해 여러 인간쓰레기들이 싸우는 꼴이 나오는데 [[함정|뒤끝 쩌는 그가 보물에 발라 놓은 독약으로 모두 죽고]] 보물에 손대지 않은 주인공 [[적운]]만 살아남는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소연의 아들들)] [include(틀:양서)] [include(틀:남사)] [include(틀:양기)] [각주] [[분류:양(남조)/황제]][[분류:508년 출생]][[분류:555년 사망]][[분류:난릉 소씨]][[분류:난징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