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행정구역]][[분류:황해도]][[분류:황주군]] [Include(틀:조선의 행정구역)] ||<-4> '''[[파일:조선 어기.svg|height=15]] [[조선|{{{#000000,#dddddd 조선}}}]]의 [[목(행정구역)|{{{#000000,#dddddd 목}}}]]'''[br]{{{#!wiki style="margin: -5px -10px; display: inline-table" || {{{#!wiki style="margin: -5px 0" '''{{{+1 황주목}}}'''[br]黃州牧[br]{{{-1 Hwangju-mok}}}}}} ||}}} || ||<-4> [[파일:대동여지도 황주목.jpg|width=100%]] || ||<-4> [[파일:1872년 지방지도- 황주지도.png|width=100%]] || ||<-2> '''관아 소재지''' ||<-2> 황해도 황주목 황주읍 || ||<-2> '''하위 행정구역''' ||<-2> 1읍 11제진 || ||<-2> '''인구''' ||<-2> 5만 4061명[* 1789년 『호구총수(戶口摠數)』의 기록을 기준으로 함.] || ||<-2> '''황주목사[* 황주군으로 개칭 이후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황주군수]''' ||<-2> 이승우[* [[1909년]] [[2월 4일]]에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한 마지막 황주군수.] || [목차] [clearfix] == 개요 == >'''"咸吉道, 旣有節制使, 不必別遣他將。 黃州, 要衝之地, 愼簡牧使, 須兼節制使。 平安守令無武才者, 亦當改之。"''' > >"함길도엔 이미 절제사가 있사오니 반드시 다른 장군을 별도로 보낼 것이 없으며, '''황주는 요충지이니 목사(牧使)를 신중히 가려 절제사를 겸하게 하고, 평안도 수령 중에 무재가 없는 자도 역시 마땅히 교체시켜야 합니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 31년 8월 2일 기유 1번째기사 중에서 황해도 서북쪽에 위치한 황주지역을 다스렸던 [[목(행정구역)|목]]. 황해도 지역의 최고 요충지이자 황해병영이 설치되었던 고을이다. 황해도 북쪽지역의 계수관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누런 흙으로 된 넓은 평야라는 뜻을 가진 풍요로운 지역이기도 하다. == 문화 및 역사 == >'''今以臣爲黃州築城使, 臣嘗爲韓明澮、韓繼美從事官, 備諳其地。 自黃州以南, 山勢險峻, 西迤爲平地, 五里許抵海, 乃古棘城也。 自棘城至岊嶺, 自岊嶺至防垣, 自有山險; 其他類皆肉地, 脫有不虞之變, 皆是賊路。 必欲城棘城, 則此地皆可城也。''' >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극균(李克均)이 와서 아뢰기를, "이제 신을 황주 축성사로 삼으셨는데, 신이 일찍이 한명회·한계미의 종사관이 되어 자세히 그 지역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황주 이남으로부터는 산세가 험준하여 서쪽으로 뻗어서 평지가 되었고 5리 정도에 바다가 있으니, 바로 옛날 극성입니다. 극성으로부터 절령까지와 절령으로부터 방원까지는 자연히 산이 험하고 그 다른 부류는 모두 내지이니 갑자기 뜻하지 않은 변이 있으면 이것이 모두 적의 침입로가 됩니다. 그러니 반드시 극성에 성을 쌓으려고 하면 이 땅은 모두 성자리가 될 만합니다. "''' >---- >조선왕조실록, 성종 16년 10월 16일 계사 1번째기사 중에서 예로부터 고조선의 문화 영향권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고조선 멸망 이후로는 한나라의 한사군이 설치되어 통치되었다. 한사군이 고구려에 의해 완전히 멸망되며 복속된 이후로 우동어홀(于冬於忽)과 동홀(冬忽), 동울(冬鬱)이라 는 명칭을 사용하여 불렸다. 그러다 통일신라시대에 취성군(取城郡)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으며, 후고구려의 건국이후로 누런 흙이 펼쳐진 땅이라는 뜻의 황주(黃州)라는 지명으로 정해져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이후 고려 성종 즉위 2년에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였을 때, 최초로 황주목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993년에 고려정부에 의해 절도사주로 개편 되어지면서 천덕군(天德郡)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하였다. 그러다 현종때인 1012년에 다시 절도사 대신 안무사가 파견되며 개편이 일어나면서 이후 다시 목으로 바뀌게 된다. 1269년에 원나라 동녕부에 강제로 예속되어지며 고려의 영향권에서 멀어져 갔다가, 고려의 노력으로 9년 뒤에 수복되었다. 공민왕때에 이르러 황주목이라는 명칭으로 곧바로 환원되었고, 고려 멸망 이후로도 쭉 황주목이라는 명칭을 유지하게 된다. == 여담 == * 대표적인 전래동화 [[심청전]]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