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21f20 학교법인 휘경학원 초대 이사장}}}''' [br] {{{#221f20 {{{+1 '''황온순'''}}}[br]{{{#221f20 '''黃溫順 | Hwang Onsoon'''}}}}}} || ||<-2> {{{#!wiki style="margin:-6px -10px" [[파일:팔타원 황온순.jpg|width=100%]]}}} || ||<|2> {{{#221f20 '''출생'''}}} ||[[1900년]][* [[1903년]] [[7월]]생이라 알려져있으나, 실제로는 [[1900년]]생이다. 아무래도 옛날 [[호적]]은 신고자 진술이나 누락된 경우가 많아 혼선이 있었다.] ||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모정리 || || {{{#221f20 '''사망'''}}} ||[[2004년]] [[6월 29일]] (향년 104세) || || {{{#221f20 '''법호'''}}} ||팔타원(八陀圓) || || {{{#221f20 '''법명'''}}} ||정신행(淨信行)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창원 황씨 ||}}}}}}}}} || [목차] [clearfix] == 개요 == [include(틀:영상 정렬,url=xyS_S1kKflw)]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제자이자 학교법인 휘경학원 초대 이사장. [[6.25 전쟁]] 당시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한국[[보육원]]'을 만들어 '전쟁고아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 생애 == 1900년,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모정리에서 기독교 집안의 아버지 황원준과 어머니 송씨 사이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딸이어도 교육을 시켜야한다는 아버지의 믿음으로 당시에는 보기 드문 신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으로, [[이화학당]] 중등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부터 [[유치원 교사]]로 일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28년에 [[황해도]] [[재령군]] 출신 강익하와 결혼, 슬하 1남 2녀를 뒀다. 원기 20년(1935년) 여름, 당시 5살이던 아들 강필국과 [[금강산]]을 여행하다 개성에 살고 있는 [[불법연구회]] 회원 이천륜을 만난다. 여행 중에 만난 두 사람은 가정생활과 고민을 서로 이야기하게 되고, 이천륜은 “세상 일은 [[전생]]의 인연이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라”며 [[서울]]에 있는 불법연구회에 가서 정신수양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으라고 추천해준다. 이 인연으로 원기 21년(1936년), [[원불교]]에 입교한다. 원기 22년(1937년) 4월,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와 처음 만나게 된다. 소태산 대종사는 "부처가 되는 법을 가르쳐 줄테니 이완철 선생[* 당시 경성지부 돈암동회관 교무]에게 배우라"는 말과 함께 '정신행(淨信行)'이라는 법명을 내려준다. 법명을 받고 난 후에도 3일 간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가 자신이 살아오며 가진 의문에 대해 문답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후 회고하길, 당시 대종사를 어떻게 부를지 몰라 ‘시골 선생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소태산 대종사를 만난 후, 경성지부 법회에 참석하며 하루에 1시간씩 이완철 교무에게 금강경을 배웠다. 금강경 공부를 하면서도 그 이후로도 소태산 대종사를 여러 번 만나 인과보응과 불생불멸의 진리에 대해 믿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경성지부(현 서울교구)의 빈약한 운영을 보고, 자신의 집 살림도구와 쌀을 가져와 경성지부 살림을 이끈다. 이 인연으로 원기 23년(1938년), [[원불교 중앙총부]]에 내려가 훈련을 받고 대종사 법문을 받들며 익산에 고아원을 새로 만든다. 또한 [[일제강점기]] 치하의 어려운 총부 사정을 직접 목격하고 나서 초기 교단의 경제난을 극복하는 데 정신적, 물질적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같은 해 10월에 경영난에 허덕이는 [[이대동대문병원|동대문부인병원]]을 인수해 병원 건물 옆에 있는 2층짜리 사택에 이사했고,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하면 병원 사택으로 초대하여 공양을 자주 올렸다. 이후 [[8.15 광복|해방]]이 되자 서울시 [[한남동]]에 보화원(普和園)[* 보화원 부지에는 일제강점기에 [[약초사]]라는 절이 있었다.]이라는 고아원을 만들어 일제강점기 당시 고아들을 수용해 보살폈다. 또한 광복으로 해외에서 돌아오는 동포들을 위해 구호소를 마련하고 구호물품을 전달했다. 1950년 초, [[UN]]에서 선정한 장학생에 선발돼 [[런던]]에서 사회사업 관련 유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에 [[6.25 전쟁]]이 터지자 긴급히 귀국했다. 6.25 전쟁 당시, 고아 1,000여 명을 구한 [[러셀 블레이즈델]] [[미합중국 공군]] [[군종 목사]]에게 고아들을 인계받아 [[제주도]]에 '한국보육원'을 설립해 원장으로 취임한 뒤 고아들을 보살폈다. 1970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에 [[휘경여자중학교]]ㆍ[[휘경여자고등학교]]를 세워 이사장에 취임하고 여성교육에도 힘을 썼다. 원기 89년(2004년) 6월 29일, 서울 위생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 여담 == * 옛날 호적의 이름과 나이는 신고자 진술대로 기록하는 경우가 많아 생년월일이 차이가 있다. 1903년생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1900년생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본인도 생전에 "나는 호적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1899년]]생인 [[김활란]]과 [[1902년]]생 [[유관순]] 열사와 함께 셋은 [[이화학당]] 재학 시절 모두 친구 사이로 지냈다. [[분류:1900년 출생]][[분류:2004년 사망]][[분류:연백군 출신 인물]][[분류:창원 황씨]][[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원불교 교도]][[분류:이화여자고등학교 출신]][[분류:이화여자대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