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사)] [목차] == 개요 == 皇甫兪義 (? ~ 1042) 고려 전기의 문신. == 생애 == 황보유의는 공신의 후손으로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고려에 훈공을 세웠다. 《[[고려사]]》에서 세계(世系)가 기록되어있지 않아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공을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황보씨]]가 예나 지금이나 흔한 성씨는 아니므로 일반적으로 [[후삼국시대]]에 [[태조(고려)|태조 왕건]]을 따라 [[고려]] 건국에 참여하고, 딸을 시집보낸 패서의 호족 [[황보제공]]의 일족으로 추정된다.[* 또는 황보능장으로 비롯된 영천 황보씨일 수도 있다. 영천 황보씨 역시 고려 건국/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워 세계(世系)가 시작되었다.] 제7대 [[목종(고려)|목종]]때 관직이 선휘판관에 이르렀고 목종 12년([[1009년]]) 1월 [[채충순]]과 [[최항(972)|최항]]의 추천으로 훗날 제8대 [[현종(고려)|현종]]이 될 대량원군을 삼각산 신혈사에서 모셔왔다. 선휘판관은 고려 초기 국왕의 측근인 남반(南班)의 관원이었다. 일족인 [[천추태후]][* [[황보제공]] - [[신정왕태후]] - [[대종(고려)|대종]] - [[천추태후]]. 대종 왕욱의 딸이라 왕씨였지만 관습에 따라 친할머니의 성씨를 사용했다.]는 자기 아들인 목종을 몰아내려고 [[김치양]]과 모의하고 있었다. 목종은 대량원군에게 후사를 잇게 하려고 했으나 천추태후는 누이였던 [[헌정왕후]]의 아들 대량원군의 머리를 깎은 후 출가시킬 정도로 꺼린 데다가 절에 사람을 보내 그를 죽이려고 할 정도로 대량원군의 왕위 계승을 막으려고 했다. 황보유의는 측근으로서 목종의 편에 있었다. 채충순과 최충은 황보유의가 종묘 사직을 보존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志存宗社) 마땅히 가업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마음과 힘을 다할 것(當不墜家業以盡心力)이라 생각하여 그를 대량원군을 맞이할 인원으로 천거했다. 황보유의와 낭장 문연은 별장 10명만 대동한 채 삼각산으로 향했는데, 이는 사람이 너무 많아 행군이 오래 걸리면 천추태후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 먼저 도착해 손을 써버릴 것을 우려한 채충순의 건의 때문이었다. 일행이 삼각산에 이르렀을때 신혈사의 승려는 천추태후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오해하여 대량원군을 숨겼다. 이에 황보유의 등은 대량원군을 맞이해 왕으로 세우려는 것이라고 해명한 끝에 받들어 모시고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009년 2월 황보유의 등이 개경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강조(고려)|강조]]의 일당이 목종과 천추태후를 법왕사로 쫒아낸 뒤였다. 목종은 폐위되었고 현종이 옹립되었으며 목종은 곧 강조가 보낸 사람들에 의해 시해당했다. 현종 원년([[1010년]]) 11월 판관(判官)으로서 [[통주 전투]]에 참가했지만, 패배하여 강조가 거란군에 의해 처단되었다. 현종 2년([[1011년]]) 전중시어사를 거쳐 이부낭중에 임명되었고, 이후 내사사인, 중추원 일직원으로 관직이 바뀌었다. 황보유의가 중추원 일직으로 있었을 때 [[제2차 여요전쟁]]이 발발했다. 전시에 돌입해 군비가 증액되었고 관리들은 녹봉을 제때에 받지 못했다. 황보유의는 중추원사 장연우와 함께 경군(京軍)의 영업전에서 백관의 녹봉을 충당할 것을 현종에게 제안했고,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그러나 영업전을 빼앗긴 무관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으니, [[김훈(고려)|김훈]]과 [[최질]] 등은 현종 5년([[1014년]]) 11월 군사를 동원해 반란('''[[김훈·최질의 난]]''')을 일으키고는 궁궐에 난입했다. 결박된 채 채찍으로 맞아 초주검이 된 황보유의는 장연우와 마찬가지로 제명되었고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고려 말의 대학자인 [[이제현]]이 찬술한 바에 따르면 황보유의는 여요전쟁에 앞서 '''계호식민'''[* 繼好息民, 요나라와 우호관계를 이어나가고, 백성을 쉬게 함]을 논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버렸으니 녹봉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전쟁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녹봉을 덜 받게 된 사람들의 원망은 자신을 향하게 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였다고 볼 수 있다. 2년 뒤인 현종 7년([[1016년]]) 급사중으로 복귀했다. 현종 17년([[1026년]]) 어사대부에 임명되었고, 현종 20년([[1029년]]) 참지정사 [[왕가도]], 상서좌복야 이응보, 상서좌승 [[황주량]] 등과 함께 수도 [[개경]]에 나성을 쌓았다. 제9대 [[덕종(고려)|덕종]] 원년([[1032년]]) [[참지정사]]에 임명되었고 이부상서를 겸했다. 제10대 [[정종(고려 10대)|정종]] 원년([[1034년]])과 2년([[1035년]]) [[평장사|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정종 3년([[1036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역임하고, 관직에서 은퇴한 황보유의는 정종 8년([[1042년]])에 죽었다. == 대중매체 == * [[2009년]] [[KBS 대하드라마]] 《[[천추태후(드라마)|천추태후]]》에서 [[김주영(1952)|김주영]]이 맡았고 천추태후의 일족이라고 중반부터 등장한다. * [[2023년]]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 등장하며 배우 [[장인섭]]이 맡았다. 자세한 내용은 [[고려 거란 전쟁/등장인물#황보유의|해당 항목]] 참조. [[분류:1042년 사망]][[분류:황주 황보씨]][[분류:고려의 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