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나라의 황제]][[분류:132년 출생]][[분류:168년 사망]][[분류:바오딩시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한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10E0E 0%, #A11 20%, #A11 80%, #810E0E); color: #ece5b6" '''한 제26대 황제[br]{{{+1 효환황제 | 孝桓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a3.att.hudong.com/01300000358882124200822584064_s.jpg|width=100%]]}}} || ||<|2> '''출생''' ||[[132년]] || ||[[후한]] [[병주]] [[바오딩시|여오국]][br](現 [[허베이성]] [[바오딩시]] 보예현) || ||<|2> '''즉위''' ||[[146년]] [[8월 1일]] || ||[[후한]] [[허난성|하남군]] [[뤄양시|낙양]] 남궁[br](現 [[허난성]] [[뤄양시]]) || ||<|2> '''사망''' ||[[168년]] [[1월 25일]] (향년 36세) || ||[[후한]] [[허난성|하남군]] [[뤄양시|낙양]] 황궁 덕양전전[br](現 [[허난성]] [[뤄양시]]) || || '''능묘''' ||[[선릉]](宣陵) || ||<|2> '''재위기간''' ||'''{{{#ece5b6 후한의 황제}}}''' || ||[[146년]] [[8월 1일]] ~ [[168년]] [[1월 25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유(성씨)|유(劉)]] || || '''휘''' ||지(志) || || '''부모''' ||부황 효숭황[br]모후 [[효숭황후 언씨|효숭황후]] || || '''형제자매''' ||3남 2녀 중 장남 || || '''배우자''' ||[[의헌황후 양씨|의헌황후]][* 순열황후 양씨의 여동생으로, 순열황후가 충제와 질제 사후 방계인 환제를 옹립하면서 황후로 짝지었다. 순열황후 사후 총애를 잃었으나 오빠인 대장군 양기가 건재했으므로 자리를 지키다가 황후로서 사망하였다. 이후 양기가 실각하여 주살된 뒤에 귀인으로 추폐되었다. 후한의 폐위된 황후 중에 시호가 있는 유일한 경우이다.], [[효환황후 등씨|효환황후]], [[환사황후 두씨|환사황후]] || || '''자녀''' ||3녀 || || '''묘호''' ||--[[위종]](威宗)--[* 190년 좌중랑장 [[채옹]]의 건의로 취소되었다.] || || '''시호''' ||'''효환황제(孝桓皇帝)''' || || '''연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건화(建和, [[147년]] ~ [[149년]])[br]화평(和平, [[150년]])[br]원가(元嘉, [[151년]] ~ [[152년]])[br]영흥(永興, [[153년]] ~ [[154년]])[br]영수(永壽, [[155년]] ~ [[158년]])[br]연희(延熹, [[158년]] ~ [[167년]])[br]영강(永康, [[167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나라의 제26대 황제이자, [[후한]]의 제11대 황제. 휘는 지(志). [[장제(후한)|장제]]의 증손자로 하간효왕(河間孝王) [[유개#s-2|유개]](劉開)의 손자이며, 여오후(蠡吾侯) 유익(劉翼)의 아들이었다. 유개는 손자 덕분에 효목황(孝穆皇)으로 추존되었고, 그의 아내이자 유익의 모친 조씨도 [[효목황후 조씨|효목황후]](孝穆皇后)로 추존되었다. 유익도 마찬가지로 효숭황(孝崇皇)으로 추존되었다. == 생애 == 본래 황제로 즉위할 수 없었는데[* 전대 황제인 질제의 재종숙(再從叔, 아버지의 육촌 형제)이라, 항렬을 거스르는 즉위가 된다. 정확하게 조선 [[헌종(조선)|헌종]]과 [[철종(조선)|철종]] 간의 친척 관계와 같다.] [[조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즉위했다. 당시 조정은 [[간신]]이자 [[권신]]인 [[양기(후한)|양기]](梁冀)가 떡 주무르듯 하고 있었는데, 당장 전임 황제인 [[질제(후한)|질제]]마저 양기가 한 방에 독살시킨 것이라 그 힘이 막강하였다. 환제의 즉위 자체도 양기와 양기의 여동생인 [[순열황후 양씨|순열태후 양납]]의 뜻으로 이뤄진 것이라 환제는 그걸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없었고, 양기는 권세를 마음껏 자랑할 수 있었다. 양기의 부인인 [[손수(후한)|손수]]의 외삼촌 중에 양기(梁紀)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의 부인인 선(宣)씨에게는 이전의 남편과의 사이에서 만든 딸인 등맹(鄧猛)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얼굴을 보고 괜찮다고 생각한 손수는 등맹의 성씨를 양(梁)씨로 바꾸고 환제의 후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입막음을 위해 남편 양기를 시켜서 선씨를 죽이게 했는데, 어찌된 것인지 선씨는 살아서 궁궐로 달려갔다. 사정을 다 들은 환제는 '''황제를 능멸했겠다? 짜증나는데 잘 됐다!''' 싶어 환관인 선초(單超) 등과 손을 잡고 한 번에 들이닥쳐 다 박살을 냈다. 양기의 집은 포위되었고, 양기와 손수는 절망해서 자결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횡을 일삼았던 양씨와 손씨 일족은 멸족되었다. 이렇게 양기를 처리하는 데 성공하자 백성들이 기뻐했지만, [[환관]]들의 도움을 받은 것 때문에 이번에는 환관들의 세력이 막강해져버렸다. 그들은 막강한 권세를 바탕으로 전횡을 일삼았고, 내정에 간섭하여 자기들의 일족을 지방으로 파견해 대규모 토지겸병(土地兼倂)을 벌였다. 이에 청류당이 나서서 탁류당인 환관들을 비난하였다. 위기를 느낀 환관들은 환제에게 거짓말을 해서 청류당의 이응(李膺)을 비롯한 200여 명을 잡아들였다. 헌데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청류당은 저마다 입을 모아 환관의 죄상을 폭로하는 법정 진술을 택해서 환관들을 물먹였다. 그대로 놓아두면 진짜로 큰일이 나겠다 싶었던 환관들은 외척 [[두무]](竇武) 등이 상주하여 간한 것을 기회로 청류당에게 금고형을 내렸다. 이것이 [[당고의 금#s-3.1|제1차 당고의 금]]이었다. 이렇게 환제는 환관이 비정상적인 권력을 가지게 만들어 [[후한]]의 쇠락을 초래하였다. 다음 황제가 유능하여 이걸 수습했으면 좋았겠지만 [[영제(후한)|그 황제가…]] 결국 [[당고의 금#s-3.2|제2차 당고의 금]]이 터지고 정권은 [[십상시]]가 잡게 되었으며, 이제 시대는 '''[[삼국지|개판 난세]]'''로 바뀌게 되었다. 환제는 재위 20년 만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오촌|5촌]] [[조카]]인 [[영제(후한)|유굉]]이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했다. 문제는 [[영제(후한)|영제 유굉]]이 [[암군|환제를 능가할 만큼 문제가 있는 인물]]이라서 환제와 같이 '''환령(桓靈)'''으로 싸잡혀[* 참고로 정사에서 쓰는 호칭이다.] [[동아시아]] 몇 천 년 역사 내내 [[암군]]의 대명사가 되어 자자손손 대차게 까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환령지말(桓靈之末)'''은 환제와 영제가 재위했던 이 혼란했던 시대의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환령지말(桓靈之末)은 [[한국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는데, 정사 《삼국지》 <한조>에서는 이 시기 살기 힘들어진 중국의 백성들이 [[한반도]]로 많이 유입됐다고 쓰고 있고, 실제 [[고고학]]적으로도 이 시기 한반도 남부까지 기존과 다른 외부 문물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훗날 [[서진]]의 [[무제(서진)|사마염]] 시절 사례 교위로 있던 유의라는 사람이 >'''"폐하는 후한의 환제와 [[영제(후한)|영제]]와 같사옵니다."''' 라고 폭풍디스를 했다. 이에 사마염이 >'''"아니, 환제와 영제는 매관매직으로 부를 축적한 황제들이 아니오? 짐이 그들과 동급이란 말인가?!"''' 말하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이에 유의는 >'''"환제와 영제는 매관매직을 해서 (일부라도) 국고를 충당하는데 썼는데 폐하께서는 매관매직을 하여 폐하의 살림만 채우시니 환제와 영제보다도 못하옵니다!"''' 라며 대놓고 그에 대한 비판을 했다.이에 사마염은 대노했지만 모가지를 날려버리는 대신 >'''"환제와 영제는 이런 말을 듣지 못했는데 짐에게는 직언하는 신하가 있으니 내가 그들보다 낫다."''' 라고 웃어 넘겼다고 한다. 여담으로 환제는 딸만 세 명 있었는데 그중 장녀였던 양안장공주는 불기후 [[복완]]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복완의 딸이자, [[헌제]]의 황후였던 [[복황후]]는 그의 소생이 아니라 복완의 다른 아내인 영(盈)[* 성씨는 기록이 실전되어 알려져 있지 않다.]의 소생으로 추정된다. == 후비와 자녀 == * [[의헌황후 양씨]] * [[효환황후 등씨]] * [[환사황후 두씨]] * 귀인 곽씨 * [[환제귀인 풍씨|귀인 풍씨]] * 채녀 전성 > [[환제귀인 전씨|귀인]][* 영강 원년에 환제가 병이 위중해지자 다른 8명의 여관과 함께 귀인으로 임명되었지만, 환제 사망 직후 그의 관 앞에서 두태후에게 끔살당했다.] * 생모 미상 * 양안장공주 유화: [[복완]]에게 하가. * 영음장공주 유견 * 양적장공주 유수 == 미디어 믹스에서 == [[영제(후한)|조카]]와 함께 [[삼국연의(1994)]]에 단역으로나마[[https://mblogthumb-phinf.pstatic.net/MjAxNzA3MjZfMTQy/MDAxNTAxMDI1MTcxNzEx.QdUcH5X_mfta6llPNfe68Xd92BcVZ74TqRCFyJ_XVg8g.UwGzRMq09_5ari_bVsAPlTWjfDx_Wph9pmnkejghVwgg.JPEG.kwac1981/한환제_._한영제.png?type=w420| 잠시]] [[https://mblogthumb-phinf.pstatic.net/MjAxNzA3MjZfOTIg/MDAxNTAxMDI1MTcxOTQx.eqfQJvRAW1v2zZC5sqkwO-xCOfd0XNSGzIkKWOFYcPUg.ycwUjhpXAFewbIP4IHqjlxV9N-yvBUcwqxMKC99IEqog.JPEG.kwac1981/황제.png?type=w420|비춰졌다.]] == 둘러보기 == [include(틀:후한서)] [include(틀:후한기)]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환제,versio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