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옹주]][[분류:1717년 출생]][[분류:1718년 사망]] [include(틀:조선의 왕녀/중종 ~ 철종)]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영조의 왕녀[br]{{{+1 화억옹주 | 和憶翁主}}}'''}}}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화억옹주묘.jpg|width=100%]]}}} || ||<-2> {{{#ffd400 {{{-2 화억옹주묘 전경}}}}}} || || '''출생''' ||[[1717년]]^^([[숙종(조선)|숙종]] 43년)^^ [[6월 1일]]^^([[음력]] 4월 22일)^^ || || '''사망''' ||[[1718년]]^^([[숙종(조선)|숙종]] 44년)^^ [[5월 7일]]^^([[음력]] 4월 8일)^^[br](향년 1세) || ||<|2> '''능묘''' ||증화억옹주묘(贈和憶翁主墓)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고양)|원당동]] [[서삼릉#s-4.4|서삼릉]][*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진관외리에 묻혔다가 1939년 현재 위치로 이장하였다.]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전주 이씨]] || || '''휘''' ||향염(香艶) || || '''부왕''' ||[[영조]] || || '''생모''' ||[[정빈 이씨|온희정빈 이씨]] || || '''형제자매''' ||{{{#!folding 2남 9녀 중 장녀 [ 펼치기 · 접기 ] 동복 남동생 - '''[[효장세자|진종 소황제]]''' 동복 여동생 - [[화순옹주]] 이복 여동생 - [[화평옹주]] 이복 여동생 - [[화덕옹주]] 이복 여동생 - [[화협옹주]] 이복 남동생 - '''[[사도세자|장조 의황제]]''' 이복 여동생 - [[화완옹주]] 이복 여동생 - [[화유옹주]] 이복 여동생 - [[화령옹주]] 이복 여동생 - [[화길옹주]]}}} || || '''시호''' ||'''화억옹주(和憶翁主)'''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영조]]의 서장녀. [[효장세자]]의 누나가 된다. == 생애 == 1717년(숙종 43) 영조가 연잉군이었을 때, 그의 첫사랑 [[정빈 이씨]]가 낳은 첫째 딸이다. 이름은 향염(香艶)이다.[* 향기롭고 고운 꽃이라는 뜻이다. ] 당시 영조는 24세의 나이로 조선시대 기준으로 본다면 자식을 늦게 본 셈이다. 그렇기에 더욱 더 애틋하고 귀한 딸이었을 것이다. 1718년(숙종 44) 3월 9일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가 [[창의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바로 한 달 뒤인 4월 8일에는 겨우 한 돌이 막 지난 향염마저 떠났다. 영조는 참으로 비통한 심정으로 어린 딸의 시신을 수습하게 된다. 바로 다음날 외할아버지의 산소 옆에 서둘러 매장하였다가 8월에 가서야 어머니의 묘 옆에 겨우 자리를 잡아 옮겼다. 지금은 의료 수준이 높아졌지만, 옛날에는 열악한 의료 수준으로 인해 [[유아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아주 어려서 죽은 자식은 성인처럼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기준이 있었으니 상상(殤喪)은 8세부터 19세 사이에 죽은 경우를 말하며, 장상(長殤)은 19세부터 16세까지를, 중상(中殤)은 15세부터 12세까지를, 하상(下殤)은 11세부터 8세까지를 말한다. 이 셋을 통틀어 삼상이라고 한다.]특히 나이가 8세가 되지 못한 경우에는 갖추어야 하는 의례가 없었다. 이는 왕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태종(조선)|태종]]도 두 살짜리 왕자가 죽자 따로 장례를 치르지 않은 바 있다.[* 태종실록 2권, 태종 1년 7월 1일 무자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107001_001|#]] ] 그러므로 당시 영조가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었던 일은 꽃과 새 문양의 고운 비단첩에 글을 남겨서 기리는 일 뿐이었다. ||[[파일:유녀향염광지.jpg|width=100%]] 내가 뒤늦게 이 딸을 얻으니 매우 기쁘고 사랑하였다. 뜻하지 않게 무술년(1718) 4월 초 8일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겨우 한 돌이 지났다. ---- 《유녀향염광지(幼女香艶壙誌)》 ||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 >"어제 축문(祝文)을 보고 숙신공주(肅愼公主)가 추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첫째 옹주는 곧 효장세자의 누나'''인데, '''화억옹주(和憶翁主)로 추증'''하니 교지를 써서 들여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영조 49년(1773년 청 건륭(乾隆) 38년) 10월 7일 1773년(영조 49) 10월 7일 향염을 화억옹주로 추증하고 무덤의 비문을 직접 써서 세웠다. 그야말로 [[딸부잣집]]인 영조는 모두 12명의 옹주를 두었는데, 그중 7명만이 관례를 치르고 혼인할 수 있었다.[* 요절하지 않고 혼인까지 치른 딸들은 다음과 같다. [[화순옹주]],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화유옹주]], [[화령옹주]], [[화길옹주]] ] 나머지 5명은 모두 요절했다. 그런데 요절한 딸 중에서도 향염만을 추증했으니 첫째 딸을 향한 [[부성애]]를 느낄 수 있다. ||
[[파일:화억옹주추증교지.jpg|width=100%]] || || 《화억옹주추증교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