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인물별/생애]] [목차] == 개요 == [[홍무제]]의 생애를 다룬 문서. == 명나라 건국 이전 == === 불행한 어린시절 === 홍무제 주원장은 1328년 9월 18일 [[원나라]] 호주 종리현(현재의 [[안후이성]] [[추저우시]]) 에서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 [[주세진]]과 어머니 진씨 사이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으며[* 주세진은 이후 아들이 황제가 된 뒤 [[인조]]의 묘호를 받아 황제로 [[추존]]된다. 주원장의 알려진 형제들 중에서는 넷째 아들.] 아명은 '''중팔(重八)'''이었다. 그러나 그의 탄생을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배고픔과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뜬 자식들을 보며 눈물을 지었고, 입이 하나 늘었다는 부담감에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더구나 주원장은 아버지 주세진이 46세, 어머니가 42세일 때에 태어난 늦둥이였다. 주원장의 아명이 중팔인 까닭도 아버지의 나이와 어머니의 나이를 합치면 88, 즉 '''중'''복으로 '''8'''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었다.[* 사실 예전에는 뭔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름을 붙이는 단순한 작명이 허다했다. 성씨의 경우 보통 시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지리적 특성(예: 강이 있다, 산이 있다, 돌이 많다, 바람이 심하다 등)에서 따오는 경우가 많았고, 이름의 경우도 단순하게 첫째, 둘째, 셋째 같은 식으로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일본에서 -로(郎) 라는 글자로 끝나는 이름인 [[이치로]](일남), [[지로]](이남), [[사부로]](삼남), [[시로]](사남), [[고로]](오남) 등은 그냥 태어난 순서대로 붙인 이름이다. 이런 이름이 있으면 이름만 보고도 '이 사람의 집안은 몇 남 몇 녀구나' 하는걸 바로 알 수 있을 정도. 서양도 다르지 않아서 붉은 흙으로 이루어진 절벽이 존재하는 지역 출신이면 '레드클리프', 신발을 만들던 수공업자 출신이면 '슈마허(영어로는 슈메이커)' 라고 하는 식.] 태어난 시기가 [[원나라]] 말기로 국가 사회 자체는 [[막장]]일로를 걷고 있고[* 그가 태어난 해인 1328년 한 해에만 [[진종(원)]], [[천순제(원)]], [[문종(원)]]의 세 황제가 연달아 재위했을 정도로 원나라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심한 기근에 각지에서 도적들이 들끓으면서 어릴 때 꽤나 고생하였다. 중팔은 배고픔과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였지만, 그것과 별개로 사춘기의 아이들에게 배고픔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소년 시절 [[지주]]의 [[소]]를 치기도 했었는데, 너무 배고픈 나머지 친구들과 작당하여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먹고 꼬리만 남겨서 바위틈에 끼워 놓고는, 지주에게 송아지가 아무리 당겨도 나오지 않는다며 얼렁뚱땅 둘러댔다. 그러나 지주도 얼간이는 아닌지라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소년들, 특히 사건의 주동자였던 중팔을 엄청나게 때렸다고 한다. 물론 이 일로 인해 중팔은 목장 주인에게 매를 맞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의 친구들의 허기를 채워주기 위해서 과감하게 송아지를 잡고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진 일은 친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훗날 명나라의 [[개국공신]]이 되는 [[서달]], [[탕화]], 주덕흥 등이 당시 주원장과 함께 목동 노릇을 한 친구들이었다. === 열일곱의 나이에 부모를 여의다 === 그러다가 17살이 되던 해에 심한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에 전염병까지 돌아 마을은 줄줄이 초상집이 되었는데, 중팔도 이때 '''부모와 큰 형을 잃었다'''.[* 중세시대에는 16살 이상이면 성인으로 보기 때문에 16~17세에 부모를 잃은 중팔은 고아라기보다는 갓 성인이 되자마자 일가족을 잃은 큰 비극을 당한 어른에 가깝다.] 일단 죽은 가족들의 장례라도 치르려 했지만 성대한 장례는 어림도 없었고, 가족들을 묻을 땅조차도 구하지 못해 시체 썩는 냄새가 온 마을에 진동했다. 결국 그 광경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마을 사람 유계조(劉繼祖)가 땅을 내놓아 간신히 매장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훗날 황제에 등극한 뒤 자신들을 위해 묏자리를 내준 유계조에게 의혜후(義惠侯)라는 작위로 보은하였고,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짐이 옛날에 가랑이가 찢어지게 가난했을 때, 우리 가족 가운데 목숨을 부지한 자는 먹을 것과 입을 옷이 없어서 고통을 당했고 역병에 걸려서 죽은 자는 그 시체를 급히 매장할 땅조차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지. 아,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던가. === 절에 의탁하다 === 이후 그는 황각사(皇覺寺)에 들어갔으나 난세에 절도 형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기에 몸을 의탁한지 50여일 만에 그는 할 수 없이 [[탁발|탁발승]][* 사원의 비용을 유지하기 위한 기금을 동냥하는 승려를 말한다.]을 했다. 탁발이 동냥이란 뜻으로, 중팔은 부잣집 대문 앞에서 목탁을 치며 염불을 외는 자신을 무척 초라하고 비굴하게 느꼈다. 그리고 이 때 당한 굴욕감은 황제가 되고 나서도 [[역린|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중팔은 나중에 황각사의 사정이 나아지자 다시 돌아와서 24살이 될 때까지 몸을 의탁했으며, 이 곳에서 [[한문|글]]을 배웠다. 그렇게 탁발승의 인생을 살다가 어렸을 적에 그와 함께 목동 노릇을 했던 죽마고우 [[탕화]]가 비밀리에 서찰을 보냈다. [[곽자흥]]이 이끄는 [[홍건적|홍건군]]에 종군하라는 내용이었다. 상기한 대로 어렸을 적의 행동력이 친구의 머리 속에 인상깊게 남아있었던 덕이었다. === 인생의 변환점 === 지정 12년(1352) 정월에 호주 정원현의 토호 [[곽자흥]]이 손덕애(孫德崖) 등과 연합하여 호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수만 명의 농민들이 호응했다. 곽자흥 등은 자신들이 [[백련교|백련회]]의 수령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호주성을 점령했다.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곽자흥 등은 모두 원수를 자칭하고 호주 일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이 황각사를 불태워 갈 곳도 없어진 중팔은 고민 끝에 곽자흥 휘하의 홍건적에 가담[* 이때 '''생긴 게 첩자 같이 생겼다고''' 가담은 커녕 처음부터 체포되었다. 하지만 곽자흥이 그의 담력과 성품을 알아본 덕택에 무사히 합류했다.]하였다. 이때 나이 25세였다. 처음에는 홍건적 내에서 일개 병졸에 지나지 않았지만, 공훈을 세우면서 승승장구하여 오로지 본인의 실력만으로 곽자흥 군단의 2인자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곽자흥의 양녀 마씨와 결혼을 하여 사위가 되었는데, 그녀는 곽자흥의 절친한 친구 마공의 딸이었다. 마공 사후에 친구의 어린 딸을 양녀로 삼아 예뻐하며 키웠는데 그런 귀한 딸을 내어준 것이다. 중팔에게 상서로운 기운이 있어서 그 기운에 편승하기 위해 사위로 삼았다는 설과, 반대로 중팔의 능력에 위협을 느껴 측근으로 묶어놓기 위해 사위로 삼았다는 설이 있는데, 여하튼 이때 중팔은 곽자흥 부대에서 주 공자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이름도 원장으로 고쳤다.''' 당시 호주성의 홍건군은 처음부터 곽자흥과 손덕애를 비롯하여 다섯 개나 되는 파벌로 시작했기 때문에 서로 사사건건 대립했다. 가을 원나라 승상 [[토크토아|탈탈]]이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홍건군의 주장 이이가 지키고 있던 [[쉬저우|서주성]]을 함락했다. 서주성의 백성들이 모조리 도륙을 당하고 이이도 포로로 잡혀 참살을 당했다. 이때 팽대와 조균용이 지휘하는 홍건군이 서주성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여 호주성으로 들어왔다. 곽자흥은 지모가 뛰어난 팽대를 우대한 반면 산적 출신 조균용을 무시했다. 손덕애는 조균용을 부추겨서 곽자흥을 제거하려고 했다. 얼마 후 조균용은 곽자흥을 포박해 손덕애 군의 영창에 가뒀다. 그 때 주원장은 화북 지역에 있었는데 황급히 호주로 달려와 두 처남들을 대동하고 팽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팽대는 주원장과 함께 부하들을 끌고가 파옥하고 곽자흥을 구했다. 파벌 싸움이 심해 호주의 홍건적들은 밖으로 세력을 넓힐 수 없었다. === [[죽마고우]]들과 합치다 === 이러한 모습을 본 주원장은 사병을 거느리지 못하면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칠 수 있다고 생각해 곽자흥에게 장인을 위해 병사를 증원하겠다고 의심을 피하는 말을 하여 간청한 끝에 고향 종리로 돌아오게 된다. 지정 13년(1353) 주원장은 고향에서 병사를 모집했는데, 그가 홍건군의 두목이 되어 돌아왔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퍼졌고 목동 노릇을 하면서 어울렸던 서달, 주덕흥, 곽영 등의 죽마고우들이 그의 수하로 들어왔다.[* 위에서 언급한 시간대를 보면 알겠지만 주원장이 곽자흥 세력으로 들어간 시기는 불과 1년 전인 1352년이었다. 동네 탁발승으로 끼니를 연명하던 젊은 청년이 불과 1년 만에 나름 독립군벌 내에서 성공하여 직위도 얻고 결혼도 했으니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다.] 이렇게 고향에서 그의 뜻에 감복하여 생사고락을 맹세한 병사들이 700여 명이나 되었다. 주원장은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호주성으로 돌아와 곽자흥을 복종했다. 사위의 변함없는 충성심에 감탄한 곽자흥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진무로 승진시켰다. 한편 곽자흥의 고향 정원은 호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정원의 장가보에는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민병 3,0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홍건군에 귀부하지 않은 세력이었고 이에 주원장이 군영으로 다가가 3일 안에 귀순을 권유했으나 수령이 거절하자 300여 명을 거느리고 계책을 세워 수령을 사로잡고 민병 3,000여 명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때 활비산에 주둔하고 있던 민병 800여 명도 주원장의 부대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병력 증강에 성공한 주원장은 밤을 틈타 정원 횡윤산에 주둔하고 있는 원나라 군영을 공격했고 원나라 장수 무대형이 투항하여 마침내 정원성이 주원장의 수중에 들어왔다. 주원장은 항복한 병사들 가운데 한족 출신 병사 20,000여 명을 뽑아 자신의 부대에 편입시켰다. 정원이 함락되자 그곳의 토호 풍국용과 풍국승 형제가 농민군을 거느리고 투항하러 왔다. 주원장은 풍씨형제가 사대부임을 알고 그들에게 천하를 취할 계책을 물었는데 이들은 금릉을 취해 근거지로 삼은 연후에 사방으로 나가 정벌하고 인의를 제창하며 민심을 수습하고 금은보화와 여색을 멀리한다면 천하는 어렵지 않게 평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원장은 크게 기뻐하며 풍씨 형제를 군영에 머물게 하고 참예기무로 삼았다. 그가 정원을 평정하고 안휘성 저주로 진군하는 도중에 [[1354년]]{{{-2 (지정 14년)}}} 정원 사람 [[이선장]]을 만났다. 나이가 14세나 아래인 주원장이라는 호걸이 호주에서 일어나 정원을 평정했다는 얘기를 들은 이선장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 무척 궁금해서 직접 찾아가서 면담을 요청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의기가 통했다. 주원장이 예를 갖추고 천하가 전란에 휩싸였는데 언제 안정을 찾을 수 있냐고 묻자 이선장은 한고조 유방을 언급하며 그는 도량이 넓고 사람을 잘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썼으며 함부로 죽이지 않았던 까닭에 군사를 일으킨 지 5년 만에 제왕의 대업을 이루었다고 답하고는 원나라는 기강이 무너지고 사분오열로 분열되었는데 주원장의 고향 호주가 유방의 고향 [[패현]]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니 당신이 고향 선배의 장점을 배운다면 천하는 평정될 것이라고 답했다. 그와 면담한 주원장은 이선장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깨닫고 크게 기뻐하며 군영에 머물게 하고 각종 문서와 서적을 관장하는 서기의 직책을 맡겼고 이선장의 책략에 힘입어 저주성을 점령했다. === 주군에 대한 충성심 === 한편 호주성에서는 홍건군 수령들간의 반목이 여전히 끊이질 않았다. 겨울 팽대는 노회왕을 조균용은 영의왕을 참칭하고 세력싸움을 벌었다. 얼마 후 팽대가 병으로 사망한 후에는 조균용의 위세가 곽자흥을 능가했다. 조균용은 곽자흥을 협박하여 우이와 사천을 공격하게 하고 기회를 보아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장인이 곤경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들은 주원장은 사자를 보내 조균용에게 경고했다. 주원장의 수하에 적지 않은 군사들이 충원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조균용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원장은 또 조균용의 측근들에게 뇌물을 보내 장인을 돕게했다. 마침내 곽자흥은 병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호주성을 떠나 사위가 있는 저주성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곽자흥 군의 합류는 그만큼 주원장의 세력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곽자흥의 실력은 주원장에게 미치지 못했다. 주원장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곽자흥을 제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전에 곽자흥 수하에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닌 보졸이 아니라 이제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망을 가진 장수였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쥔 자의 일반적인 속성과는 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곽자흥이 입성하자마자 그에게 3만 대군의 병권을 즉시 넘겨 주었다. 자기는 영원히 곽자흥의 충실한 부하임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곽자흥은 이런 사위가 얼마나 고맙고 사랑스러웠겠는가? 더구나 병사들의 군기가 엄정하고 사기충천의 모습을 보니 기쁨에 겨워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은 심정이었을것이다. 겨울 탈탈이 거느린 대군이 고우에서 장사성의 군대를 격퇴하고 저주성에서 멀지않은 육합성을 포위했다. 북방에서 질풍노도처럼 밀려온 원군에 주원장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합성이 함락되면 저주성도 재앙을 면치 못할것이라 두려워했다. 그는 심복 경재성과 함께 와양루(강서성 육합현 서쪽에 있는 고와양성)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육합성을 도왔다. 그가 육합성의 노약자들을 호위하고 저주성으로 돌아오자 탈탈은 즉시 추격해와 저주성을 공격했다. 주원장은 병사들을 매복시키고 유인 작전으로 탈탈의 군사를 격퇴했다. 하지만 맹호처럼 날랜 원나라 기병의 재침을 우려하여 포로로 잡은 병사들과 노획한 말들을 탈탈의 군영으로 돌려 보내주고 아울러 지역의 원로를 사자로 보내 슬과 고기로 원나라 장수들을 위로하게 했다. 그러면서 나는 다른 도적떼로부터 저주성을 지킬 뿐인데 왜 더 큰 도적을 쫒지않고 선량한 백성만 살육하냐고 읍소했다. 탈탈은 원나라 지배층 중에서 보기 드물게 한학에 정통한 정치가이자 군사 전략가였다. 중서성 우승상 직책을 맡았을 때 과거제를 부활시켜 한족 출신 사대부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할 정도로 국정을 다스리는 안목이 있었다. 주원장은 탈탈에게 철군을 요구했다. 과연 탈탈은 그의 뜻대로 철군했다. [[1355년]]{{{-2 (지정 15년)}}} 주원장이 일거에 화주를 함락시켰다. 곽자흥은 그를 총병관에 임명하고 화주를 지키게 했다. 이 시기에 떠돌이 중에 불과했던 주원장의 비범한 능력을 알아보고 군웅의 한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준 곽자흥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곽자흥이 병사하자 홍건군의 우두머리인 소명왕 [[한산동|한림아]]는 곽자흥의 아들 곽천서를 도원수로, 장천우(張天祐)를 우부원수로, 주원장을 좌부원수로 임명했다. 한림아에게 관직을 받은 주원장은 푸념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한림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림아의 송나라가 위세를 떨쳤기 때문에 그도 겉으로는 한림아의 신하로서 군대를 통솔했다. 강남의 중심 집경로(集慶路, 지금의 남경)를 공격할 때 곽천서와 장천우가 전사했다. 이때 주원장은 대원수로 승진하고 곽자흥의 군대를 전부 거느리게 되었다. 화주에 주둔한 지 얼마 안 되어 군량미 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장강 남안의 태평과 무호를 공략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주원장에게는 수군과 선박이 없었는데 때마침 안휘지방 소호에 주둔하고 있던 홍건군의 수군이 주원장에게 귀부의사를 밝히고 원군의 봉쇄를 뚫고 화주에 도착했다. 주원장은 병사와 군마를 배에 태우고 장강을 건너 우저산에 진을 치고 휘하장수 [[상우춘]]을 선봉에 세웠다. 그의 저돌적인 공격은 우저산을 주원장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장강 하류의 태평(지금의 안휘성 안산시 당도현)으로 진격해 역시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 성에 입성하자마자 노략질을 엄금하고 백성의 재물을 보호했으며 민폐를 끼치는 병사가 있으면 즉시 참수형으로 다스렸다. 그는 그곳에 태평흥국익원수부를 설치하고 난 뒤 스스로 원수의 지위에 오르고 이선장을 수부도사로 임명했다. 태평을 근거지로 세력확장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이다. === 중국의 1인자 === 주원장은 곽자흥과 그 아들이 죽자 명실상부한 반란군의 지도자로 추대되었으며 [[1356년]]{{{-2 (지정 14년)}}} [[금릉]]을 점령한 뒤 오국공(吳國公)이 되고 새로 설치된 강남행중서성(江南行中書省)의 총성사(總省事)을 겸하면서 [[군벌]]의 한 세력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여러 지역을 공격하면서 만난 지식인과 사대부들과 교류를 하면서 그들의 조언에 따라 세력을 운영하는 한편 이들을 기용하여 효과적인 행정 정책을 수립하며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상류층의 예법과[* 주원장의 출신상 상류층에서 쓰는 교양 있는 단어와 말투 등을 따로 배울 필요가 있었다. 요새로 치면 스피치 테라피.] 역사, 각종 지식, 유교 경전을 배우면서 사실 상의 제왕 수업을 받았다. 이 시기까지 주원장은 상당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홍건적의 우두머리이자 [[송나라#s-5]]의 후계자를 자칭하고 있던 한림아의 신하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원장은 원나라와는 많이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주원장은 다른 한족 군벌들과 세력을 다퉜을 뿐, 원나라와의 다툼은 다른 한족 군벌들이 상대하도록 내버려뒀는데 이게 오히려 득이 되었다. 원나라를 뒤엎을 정도로 강력한 세를 가졌던 홍건군의 [[유복통]]이 [[차칸 테무르]]에게 박살난 뒤에 주원장의 세력이 원나라의 사정거리 안에 들게 되었지만 운 좋게도 차칸 테무르가 원나라 내부의 내분에 휘말려 남하를 못하게 된 덕에 주원장은 안심하고 [[진우량]]과의 결전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파양호 대전]]에서 승리한 후 [[1364년]]{{{-2 (지정 24년)}}} 최대의 적이었던 [[진우량]]의 세력을 격파하고 그 영역을 흡수한 후에는 오왕(吳王)이 되어 중서성(中書省)을 설치하였고, [[1367년]]{{{-2 (지정 27년)}}} 몽골족의 위협에서 한림아를 보호하기 위해 [[난징]]으로 모시고 오던 중에 주원장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침몰 사고로 한림아가 익사하고 또 다른 적수였던 [[장사성]]이 투항하면서 사실상 남부 지방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서달]]과 [[상우춘]]에게 25만 대군을 주어 [[북벌#s-2.1]]을 단행하는 한편, [[1368년]]{{{-2 (홍무 원년)}}} 초 신하들의 권유를 받아 [[명나라]]의 황제가 되었다. == 명나라 건국 이후 == === 통치 === || [[파일:external/jiuyingzhi.com/suotouwugui-3.jpg|width=100%]] || || '''치륭당송(治隆唐宋)''', [[강희제]] 어필, [[난징]] 효릉[BR](명나라의 치적이 당나라와 송나라보다 더 융성했다) || 계속 북벌을 단행하면서 원나라 군대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끝에 1368년 여름에 원나라의 수도 대도(현재의 [[베이징]])를 점령하고, 원나라를 만리장성 북쪽으로 몰아내면서 중국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계속해서 중국 각지에 남아 있는 [[몽골]]의 잔여 세력과 끊임없이 전쟁을 해온 까닭에 실질적으로 중국 전 지역을 완전히 통일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중국 내 마지막 원나라 세력이던 윈난의 양왕을 제압한 1382년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수도도 지금의 북경이 아니라 [[난징시|남경]]에 있었는데, 명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강남에서 일어나 전국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왕조였다.[* 왕조가 아닌 국가까지 포함하자면 540여 년 뒤 [[장제스]]가 이끄는 [[중화민국]]에 의한 [[장제스의 북벌|국민당의 통일]]이 있었다.] 중국 대부분을 장악한 것은 훨씬 전이지만, 1382년을 기점으로 잡는 이유는 이때부터 확장을 멈추고 수성으로 돌아섰기 때문.[* 일단 그 곳을 점령하면 안정과 정비를 위해 군사와 관리들을 보내야 하는데, 가만히 내버려두면 그들이 나중에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고, 바깥 지역은 교역할 것도 없고(어떻게 보면 중화 사상), 지금 있는 땅으로도 농사 지어먹기 충분하니까 그랬다고 한다.] === 기강을 바로잡다 === 하여튼 명나라 초기에는 몽골족과 싸우면서, 착실하게 원나라 말기 막장이 되었던 사회 기강을 바로잡고, 행정 체제를 정비하면서 명나라의 기틀을 닦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원나라 시기에 있었던 [[과거 제도]]를 철저하게 시행 및 감독하여, 유능한 인재들을 관료로 등용하려 하였다.[* 제일 많이 신경을 쓴 것들 중 하나가 지역별 과거 합격자 안배였다. 이 문제는 북송 때부터 주된 정치 현안이었다. 남송 멸망 후에도 반쯤 자치를 누리며 학맥을 이어온 강남인들이 몽골의 지배하에 신음하던 화북인들을 제치고 합격을 독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방법이 상당히 과격해서 부정이라며 급제한 강남 출신 유생들을 죄다 죽여 버리는 것도 불사했다.] === 일세일원제 === 이전의 중국 왕조들은 황제 한 사람의 치세에 [[연호]]를 두세번 이상 교체하기 일쑤였다. 주원장은 즉위하자 연호를 홍무로 정하고 한평생 사용하며 이후의 황제들도 한 황제에 하나의 연호를 사용하는 일세일원제를 정착시켰다. 일세일원제는 [[청나라]] 때에도 유지되었다. 훗날 [[일본]]에서도 [[메이지 덴노]] 때부터 일세일원제를 사용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치륭당송 === 특히 어렸을 적 고생의 영향으로 탐관오리의 부정 부패를 끔찍히도 싫어했기에 관료들의 기강을 철저하게 단속하였다. 그리고 오랜 혼란으로 황폐화된 토지 개간을 장려하여 농업 생산력을 끌어올리며 사회를 안정시켰다. 훗날 [[청나라]] [[강희제]]가 강남을 순행하면서 홍무제가 안장된 효릉에 참배한 후 홍무제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치세가 중국 역사에서 번영의 상징으로 꼽히는 [[당나라]], [[송나라]] 시절 보다 낫다는 의미의 '치륭당송(治隆唐宋)'이라는 네 글자를 친필로 써 비석을 세웠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명 태조 주원장은 [[왕후장상 영유종호|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황제다. 서민 신분의 사람이 통일 왕조의 황제가 된 것은 [[전한]]의 [[고제(전한)|유방]]에 이어서 두 번째였다.[* 통일 왕조와 상관 없이 단순히 서민 출신 '황제'만을 따지자면 너무 많아진다. [[촉한]]의 [[유비]], [[후량]]의 [[주전충]], [[후조]]의 [[석륵]] 등.] 그는 가장 밑바닥 계층 출신으로 시작하여 천하의 대권을 잡은 황제로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다.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민중의 영웅이 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출신 성분과 이후의 치적으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명군이란 평가를 받았지만 신하들 사이에서는 폭군이란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는 개국공신들을 쥐 잡듯이 족쳤기 때문이다. 개국 3대 공신 중 [[유기(명나라)|유기]], [[이선장]] 등도 비참한 말로를 겪었으며 살아남은 공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족쳤다.[* 그나마 3대 공신 중 다른 한 명인 [[서달]]은 일찍 죽은 덕분에 숙청의 화를 면했으며 그의 가문은 명 왕조 내내 명문가문으로 잘 살았다.] 게다가 신하들의 사소한 잘못에도 노발대발하면서 두들겨 패는 일이 잦아서[* 이러한 태형을 정장(廷杖)이라고 부른다. 이전 왕조에도 있었지만 홍무제 대에 이르러 유례 없이 자주, 혹독하게 시행되었다.] 더더욱 심했다. 백성들에겐 성군인데 신하들에겐 폭군이라고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아무래도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신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도자의 권력 한계상 백성과 신하 둘 중 하나만을 챙길 수밖에 없는데, 신하들은 자기들이 잘 살아야 태평성대라고 봤기 때문이다.[* [[고려]]의 [[최승로]]가 [[성종(고려)|성종]]에게 [[시무 28조]]를 바치면서 선왕들을 두고 '''자기 중심적인''' 평가를 내린 것을 보자. 실제로 서양 역사를 봐도 귀족층을 때려잡은 [[루이 14세]] 시대에 상공업과 중산층이 발전했고 반대로 귀족들의 힘이 강했던 러시아 제국에서 서민들의 삶은 시궁창이었다.] 특히 황권의 전제화를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걸핏하면 공신들이 숙청의 칼날에 희생되었다. 숙청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 명나라 건국 이후 죽어나간 공신과 그 가족들의 수는 수만 명에 이를 정도. 주로 초창기에는 공신들 중에서도 무장들이 많이 숙청되었으며, 말기로 가면서 행정 체제가 점점 안정 궤도에 접어들자 권신들까지 싸그리 제거해버렸다. 또한 엄청난 '''[[일 중독|일 중독자]]'''로 유명했다. 명군이나 명재상으로 이름난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부지런했다는 것. 1380년 승상 [[호유용]]을 숙청하고 승상제도를 폐지했는데 이것은 황제가 승상의 일을 대신했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승상제를 폐지한 다음부터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엄청난 양의 업무를 일일이 소화하는 강행군을 이어나갔다. 그 아들이나 손자부터는 그 업무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보조하는 신하를 두기 시작했고 이것이 사실상의 승상제도처럼 변해버렸다. 그런데도 주원장은 죽을 때까지 승상을 두지 않고 본인이 직접 정무를 돌보았다.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얼마나 업무를 처리하는지 계산을 해봤는데 8일 동안 문서 3,391건을 처리했다고 한다. 대략 하루에 처리한 것이 400건이 넘는 것이다. 어떤 일화에서는 어떤 상소문이 자신에게 올라왔는데 문제는 사건을 건의하고 해결책에 대해 청원하는 부분은 500여 글자 밖에 안되는 것 비해 자기를 찬양하는 구절만 1만 글자가 넘어간 상소문이었다. 그래서 안그래도 바빠죽겠는데 상소문을 읽던 신하가 자신을 찬양한 글을 6천 글자 쯤까지 읽자, 결국 찬양 구절을 읽느라고 시간 잡아먹는다는 이유로 빡쳐서 그 신하를 조정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두들겨 팼다고 한다(...). === [[숙청]] === 주원장의 커리어 중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유명한 행적이라면 숙청을 단연 빼놓을 수 없다. 주원장의 숙청은 그 규모와 잔혹성에 있어서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는데 그나마 주원장의 숙청에 그나마 비견될 수 있는 사례로는 '10족을 멸'한 것으로 유명한 자신의 아들 [[영락제]]의 대숙청이다. 주원장은 자신을 도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공신들과 그 일족을 모조리 죽였는데, 숙청이 대상이 된 사람들과 학연 등 인맥이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 죽였기 때문에 주원장의 숙청으로 죽임을 당한 이들은 9만 또는 10만 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숙청이 비록 구세력을 구축하며 들어선 신생 국가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변론하는 이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주원장의 숙청은 필요 이상으로 너무나 대규모였던 데다가 너무나 잔혹했다. 참고로 [[송나라]]의 경우만 봐도 비교적 온건한 숙청이 이루어졌다. 주원장의 숙청은 그 규모도 어마어마하지만 그 방법 또한 너무나 잔인했다. 주원장은 어지러워진 치안과 사법 체계를 다시 세우기 위해 굉장히 잔인한 고대의 형벌로 범죄를 다스렸다. 특히 반역죄로 처형했을 때에는 허리를 자르는 [[요참형]],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 사람의 살을 포 뜨듯 떠내서 죽이는 [[능지형]]은 물론이고,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에게는 특별히 [[박피#s-5|박피형]]을 내렸다.[* 이거 완전 [[캄비세스 2세]] ] 여기서 박피형이란 말 그대로 그대로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형벌이다.[* 다만 살가죽을 벗기는 박피형이 명나라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명나라]]와 같은 시기 [[오스만 제국]]에서도 반역자 같은 중죄인들한테는 살가죽을 벗기는 박피형을 내렸다.[[https://blog.daum.net/dhs80116/1064|#]]] 주원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벗긴 가죽을 허수아비 위에 둘러씌워 관청 문 앞에 세워놓게 했다'''.[* 다만 이렇게 했음에도 정작 부정부패를 막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옛날의 형벌 제도 대부분이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데 반해, 범죄율 감소에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특히 관리는 봉급만으로 먹고 살기에는 벅찼기에 관료들의 부패는 반쯤 [[생계형 비리]]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직접 형벌을 고안해내기도 했는데, [[돼지]] 털을 벗기는 것에서 착안하여 소세([[梳]][[洗]])[* 이 단어는 원래 머리를 빗고 얼굴을 씻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형벌을 만들었다, 빗으로 씻긴다는 뜻인데, 그 방법이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했다. '''벌거벗은 죄수의 몸에 펄펄 끓는 물을 여러 번 뿌린 뒤, 철로 만든 빗으로 쓸어서 피부를 벗겨내는 형벌이다. 이는 피부만 벗기는 것이 아니라 뼈가 드러날 때까지 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무릎 연골을 빼내는 '''알슬개'''(揠膝蓋), 내장을 꺼내서 죽이는 '''추장'''(抽腸)을 비롯하여, [[전갈]]과 [[뱀]]을 풀어서 물려 죽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형벌이 바로 [[장형]](杖刑)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그러나 그는 이러한 끔찍한 형벌들을 즐겼는지, 아니면 죄인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는지, 이러한 형벌들을 집행하는데 '''직접 나와서 자신이 이러한 형벌들을 주도했다.''' 특히 형벌을 가할 때에도 천천히 매우 고통스럽게 죽이게 했다. 능지처참을 할 때에도 '''칼로 살살 피부를 그어가다가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고 죽게 하였으며, 박피형을 행할 때에도 살을 천천히 벗겨서 죽기 직전까지만 살을 벗긴 다음에 잔혹하게 죽였다.''' 그리고 만약 중간에 형벌을 당하는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형을 집행했던 [[망나니]]가 박피로 처형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망나니 또한 죽지 않기 위해서 더욱 더 고통스럽게 죽였다고 한다. 문제는 범죄를 다스리기 위한 엄벌주의와 별개로 순수하게 정치적인 숙청에까지 이런 [[혹형주의|혹형]]들을 폭넓게 활용해서 셀 수 없이 많은 공신들과 신하들이 끔찍한 고통 속에 죽어가게끔 하였다는 것이다. 마 황후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그런대로 이성적인 브레이크를 걸어가면서 숙청을 진행했던 거 같지만, 마 황후가 세상을 뜨자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공포와 폭압,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같다. 이러한 온갖 잔혹한 형벌들은 조정을 공포 분위기에 휩싸이게 했고 신하들은 모두 황제를 무서워했다. 아침에 신하들이 등청하여 주원장을 배알할 때, 만약 옥대(玉帶)가 배꼽 위에 있으면 오늘은 사람을 죽이지 않거나 적게 죽이겠다는 뜻이어서 신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만약 그가 옥대를 배꼽 아래로 누르고 있으면 그날은 사람을 대량으로 참혹하게 죽이겠다는 신호였으므로, 문무백관들이 모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공포에 떨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대인들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두려우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樂鄕)하거나 은거(隱居)하면 되지 않나 하겠지만, 주원장은 '''그것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주원장이 신하들에게 내린 명령들 중 '모든 백성들과 신하들은 오직 황제를 위하여 행동하여야 한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이 명령을 어긴 신하, 한마디로 일을 고의로 대충 하거나 일을 그만두는 관리가 나오게 되면, 그 사람뿐 아니라 그 집안까지도 말 그대로 쑥대밭을 만들었기 때문에, 관리들은 관직을 함부로 그만둘 수도 없었다. 특히, [[호유용]] 옥사의 잔재를 핑계삼아 일어난 남옥의 옥사 때 남옥을 포함한 호서파가 '''1만 5천'''명이 넘게 죽어나가서, 황태손 주윤문(후대의 [[건문제]])이 제발 사람 좀 죽이지 말아달라고 직접 간청했다고 한다. 그러자 주원장은 "'''황위는 [[가시나무]] 몽둥이 같은 것이니, 자기 생전에 가시들을 다 제거해주려고 이런 짓을 한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다른 버전으로 황태손에게 가시 막대기를 들어보라고 했는데 들지 못하자, "내가 그 가시들을 전부 없애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두 가지가 모두 실려 있다. 그리고는 '(악업은 다 이 할아비가 짊어질 테니) 너는 이 다음에 착한 정치를 하거라.'라며 황태손을 격려한다.][*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심온]]을 살려줄것을 눈물로 호소하는 [[세종]]에게 [[태종]]이 이 가시나무 얘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 명산장이라는 사료에서는 주표가 이에 대하여 "위에 요순같은 임금이 있으면 아래에 요순의 백성이 있는 법"이라고 반박하자 주원장은 화가 나서 주표에게 [[체어샷|의자를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아서 주표를 쫓아가며 때리려고 할 때 마침 주표가 그림 한 장을 떨구었는데 그 그림의 내용이 옛날에 마황후가 전장에서 홍무제를 업고 도망치는 장면이라 마황후 생각이 나서 멈췄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 좌승상 [[호유용]]을 비롯한 권신과 그 일가족 3만여 명이 처형당한 사건인데, 이를 계기로 재상 제도를 폐지하고 중서성을 황제의 직속으로 두는 황제 친정 체제를 구축하였다. 주원장은 관료들을 황제의 통치를 위한 것, 철저히 황권에 필요한 소모품 정도로 봤다. 말 안 듣는 물건은 부셔버리고 새 거 사서 쓰면 되니, 아끼고 소중히 한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 그래서 사대부나 권신들이 크게 반발하였지만, 반발했던 권신들은 죄다 찍어 눌렀고,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는 권신들도 죄다 죽어나갔기 때문에, 나머지는 그냥 황제의 지시대로 열심히 일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원장이 중요 관료가 아닌 실무자는 가급적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 그래야 일을 하니까. 숙청의 목적은 언제까지나 황권 확보였기에, 황권을 침범할 가능성이 없거나 그럴 야망이나 능력 자체가 없는 자들은 가급적 손을 대지 않아서, 최소한의 신뢰성은 확보할 수 있었다.[* 숙청한답시고 인재풀을 싸그리 날려버리면 그건 그거대로 엄청난 부작용이 발생한다. 인재가 없으면 나라를 굴릴 수가 없다.] 홍무제의 황실 공식 [[어진]]은 위에 나온 것처럼 상당히 선하고 어진 임금의 인상이다. 사대부 쪽에서 그린 어진은 아래에 나오는 것처럼 흉악한 폭군이나 다름없지만 명 초기에 부정 부패나 계급 고착화가 사라진 데에는 주원장의 역할이 상당했다. 그의 숙청으로 수많은 [[개국공신]]들이 죽었는데, 숙청 이전에 전사하거나 병사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목영, [[탕화]][* 탕화는 주원장의 성격을 어렸을 적부터 잘 알던 사이였고, 또한 일찍이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하였기 때문에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주원장은 숙청 대상자들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었기에 미리 알아서 물러나거나 해서 위협이 되지 않으면 해치지 않았다.], [[경병문]], 곽영, 장룡, 고성만이 숙청을 피했다.[* [[서달]]의 경우에는 숙청의 대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갑론을박이 많다. 서달의 경우에는 주원장과는 친하고, 근면성실한 태도와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겸손, 그리고 검소한 생활을 했기에 주원장의 눈에는 그저 친한 신하 내지 친우에 가까웠다. 게다가 등창에 걸려 중증을 앓고 있단 당시에 주원장이 서달에게 많은 약을 보내줬는데, 우연찮게도 그 것이 등창의 증세를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바람에 숙청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주원장이 작정하고 서달이 숙청의 대상이었으면 적어도 3족은 멸했을 터인데 그의 인척, 후손들은 남명때까지 가문이 유지되었다. 그래서 대개 서달은 주원장에게 있어서 다소 긴장하면서 주시하였지 숙청 대상까지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중에 경병문, 곽영, 고성은 [[정난의 변]]에도 관련된 인물[* 이들 중에 경병문은 정난의 변으로 처형되고, 곽영은 쫓겨나서 귀향했으며, 고성은 도중 붙잡힌 이후에 영락제를 도왔기 때문에 즉위 후에도 쫓겨나지 않았다.]이다. 여기에 너무 만연하게 늘어지던 문장을 일소하고 실용적이며 간소한 문장을 지향한다면서 관리들을 후려쳤는데, 이 과정에서 관리들을 처벌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자의 옥]]마냥 여러 꼬투리를 잡아 죽이거나 탄압하고 연관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희생시킨 점은 비난받는다. 문자의 옥만이 아니라 유학 경전을 탄압해서 절대 왕권에 방해가 될 만한 요소들을 모두 제거했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진심편 등을 대거 덜어낸 [[맹자절문]]. 지나친 숙청으로 명대부터 강대한 황제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신권(臣權)의 위력이 송대에 비해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이는 암군과 환관들의 발호 등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환관이 날뛰는 것은 아들 영락제의 중용 때문이었고, 홍무제는 환관들을 확실히 찍어누르며 관직 임용에 제한을 가했다. 후대에는 자신과 같은 가혹한 형벌을 관리들에게 가하지 않게끔 조치하기도 하였다. 명 초기의 고문과 형벌은 전대의 왕조들보다 잔혹하기로 악명이 높았지만, 홍무제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왕조 초기에는 법이 엄해야 한다는 원칙과 더불어 기존 공신 집단 숙청 등에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그럴 필요성이 없어졌기에 국가 반역자나 연쇄 살인범과 같은 중범죄자가 아닌 이상 혹형을 집행하지 않았으며 초기를 제외하면 명대의 형벌이 지나치게 잔혹했다는 근거는 없다. 명 왕조에서 공식적으로 규정된 [[형벌]]은 [[태장도유사]]의 5형이었지만, 홍무제는 자주 임의적인 형벌을 가하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능지처사(陵遲處死)가 있다. 이러한 정식 형벌(5형)과 임의처벌(능지처사)이 공존하는 형태는 명대의 특징적인 모습으로 한 - 당 - 송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5형과 요 - 금 - 원으로 이어지는 이민족 왕조의 유산이 결합된 결과다. ==== 숙청의 이유 ==== 위의 내용만 보면 그냥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인 미치광이 살인마로 보이나, 당시 시대적 상황상 숙청은 다음의 이유로 인해 [[필요악]]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 [[명나라]]는 중국 역사상 한족 왕조나 한화족 왕조를 전조로 두지 않은 유일한 통일 왕조였다. 이는 다른 신생 왕조들과 달리 오랑캐의 침탈과 방만한 통치로 인해 흩어진 '''한족 중앙 정부와 황실의 권위를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할 필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가뜩이나 [[송나라]]가 오랑캐 [[몽골]]에게 망해서 한족 중앙 정부와 황실의 권위가 바닥을 쳤던 데다 몽골인들의 행정력이 워낙 엉망이었던 탓에 명나라 건국 직전의 남중국에서는 신사-향리층이라 불리는 토착 세력가들이 중앙이고 뭐고 상관없이 알아서 멋대로 놀고 있었다. 중앙을 우습게 여기는 풍토를 없애려면 어느 정도의 숙청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숙청을 통해 공신을 비롯한 신하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막았고(ex. 남옥의 옥사 등), 외척 세력이나 [[환관]]들이 정치에 얼씬도 못하게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으며, 각종 부정부패를 근절하는데에도 기여할 수 있었다(ex. 부마 구양륜 사사와 딸 안경공주의 처형 등) * 명 태조의 출신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는 기아에 시달리던 최하층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원나라 말기의 혼란한 상황에서 도적떼에 가담하여 출세한 사람이었다. 이런 한미한 출신 배경으로 인해 설사 그가 탁월한 능력으로 난세를 평정하고 통일 왕조를 개창하여 강력한 정치권력을 틀어쥐었다 하더라도 기존 지배계층이 진정으로 새 왕조를 존중하고 이에 충성한다고 보기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명 태조는 이들을 숙청함으로써 견제하고 취약할 수 있는 새 왕조의 권위와 권력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위와 관련해서 명 태조는 과거 불우했던 시절에 대한 개인적인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기도 했으며, 이것이 숙청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명 태조의 숙청을 옹호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숙청의 배경 중 하나로서 본 문단에 기술한다.] 예를 들어, 탁발승 시절과 도적 시절은 주원장의 대표적인 [[역린]]이어서 주원장은 그 시절을 수치로 여겨 그 앞에서 일체 옛날 일을 꺼내지 못하게 했고, 승려 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빛날 광(光)'[* 지금도 중국어에서 대머리를 뜻하는 단어가 바로 '''광터우(光头)'''다.], '대머리 독(禿)' 자를 쓰거나 '승려 승(僧)' 자와 그것과 발음이 같은 '생(生)' 자를 쓰는 행위, 도적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 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했다. 명 태조가 [[문자의 옥]]을 일으킨 배경의 하나로서 이러한 자격지심을 꼽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항주의 유생 서일기가 올린 하표에 '''"광(光)천지하 천생(生)성인 위세작칙(則)"'''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것은 '빛나는 하늘 아래 하늘이 성인을 낳아 세상을 다스리는 법칙으로 삼았다'라는 뜻으로 주원장을 성인으로 추켜세운 극찬의 글이었다. 그러나 정작 주원장은 이 문구를 읽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생(生) 자는 승(僧) 자와 발음이 비슷하니 그가 중 노릇을 했다고 비난했고''' >'''광(光) 자는 독(禿) 자와 의미가 통하므로 그가 대머리라고 비난했고''', >'''칙(則) 자는 적(賊) 자와 발음이 비슷하니 그가 도적 노릇을 했다고 비난한 것'''. 이라 주장하며 참수하라고 명했다. 물론 억지였지만, 황제의 명령이고 반발을 잘못했다가는 공신 숙청 대상자 명단에 같이 올라갈 판이니 그대로 집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뛰어날 수(殊)'''자를 쓴 사람도 죽였다. 이유가 뭐냐면 저 글자를 파자(破字)해보면, 살바른 뼈 알(歹)자와 주원장의 성씨 주(朱)로 나뉘니, 이것은 '''주씨 일족의 살을 발라 죽이겠다는 뜻'''이라고 [[마프리카|해석한 것이다.]] 다만 주원장이 아무 이유 없이 죽인 건 아니고, 과거 유생들이 이런 파자와 비유로 사람을 놀리는 것은 현대의 세로드립처럼 고의적인 경우가 꽤 많았고, 주원장은 말 그대로 진짜 흙수저 출신이었기 때문에 유생들은 황제라고 겉으로는 충성하는 척했으나 실제로는 경멸하고 있었고 저렇게 대놓고 해서 처형당하는 것조차 수두룩하게 나올 정도면 뒷담으로 까는 건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서일기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야 본인만 알겠지만 주원장이 바보가 아닌 이상 사대부 사회 분위기를 몰랐을 리 없고, 황제의 처지에서는 설령 동기가 순수해도 그냥 넘어가면 무식한 티를 낸다는 말을 듣게 된다. 현대라면 우연히 세로 드립이 욕이 되었는데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망신이지만, 저 시대에는 더 심각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어찌됐든, 초기의 숙청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숙청은 잦아지고 그 정도 역시 가혹해져 갔고 무고한 사람들까지 숙청당했다. 이는 분명한 비판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신하를 잔혹하게 다루는 풍조는 영락제도 마찬가지, 아니 더 심했다. 그나마 이후에는 정치적 필요성이 있다고쳐도 연좌는 자제하고 적당한 범위 내에서 숙청을 하는 식으로 좀 완화되긴 했으나 그래도 [[숭정제]]가 [[원숭환]]의 무고 건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능지처사하는 등 다른 건 몰라도 정치적 숙청과 관련해서는 [[경태제]], [[태창제]]처럼 뭔가를 할 시간이 전혀 없었거나 [[천계제]]처럼 정말 어딘가 심각하게 부족해서 황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사람이 아니면 명 황제들이 명군과 암군, 성군과 폭군 할 것 없이 자유로운 사람들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 사후 후계 === 주원장은 1398년 사망하였는데 죽기 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동안 모든 것을 혼자서 담당해왔으나, 돌이켜 보면 이는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다. [[나는 바담풍해도 너는 바람풍해라|다음 대를 잇는 이는 신하를 믿고 일해야 한다.]] 1398년 주원장이 숨을 거두면서 손자 주윤문이 건문제에 올랐지만, 1402년 [[정난의 변]]으로 연왕 주체가 조카를 쫓아내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영락제]]로, 정화의 해외 원정과 몽골 원정, 북경 천도 등을 단행한 황제다. 원래 장남인 [[주표]]가 [[황태자]]로 책봉되어 후계자로 공인되어 있었으나, 주원장은 넷째 아들인 주체에 대한 호감을 은근히 비추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주원장은 ''''[[공신]]들은 닥치고 [[숙청]]!''''로 일관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반발 심리였는지 태자는 공신들을 옹호하는 입장이었으며, 상당히 유약한 성격이었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래도 후계자를 갈아버리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장자 계승 원칙을 지키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태자가 일찍 사망한 뒤에도 주체가 아닌 적장손인 주윤문([[건문제]])을 황태손으로 봉하여서 계승 원칙을 계속 지키려 노력했다. 명나라를 건국한 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에서 왕실의 정통성 문제는 매우 중요하므로, 적장자 계승 원칙을 지키려 한 홍무제의 의도 자체는 옳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정말로 장자 계승을 확립하려는 사람 치고는 다시 없는 뻘짓을 했는데, 바로 황자들을 번왕으로 책봉하여 각 지역에 보낸 것이었다. 번왕들은 백성을 직접적으로 통치하진 않고 국경 수비만 맡았지만 그래도 군사력은 보유하고 있었다. 장수들을 보내면 자기들끼리 군사를 키워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여 장수들 대신 아들들에게 맡긴 것인데, 국경 수비 지휘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인망 있고 유능한 황실 적자가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면 과연 [[반란|무슨 짓]]을 할까? 역사적으로 번왕 제도는 사후에 제위 계승권을 놓고 다툼이 벌어지게 했다면서 일부 신하들이 이를 거두어주도록 요청하였지만, 주원장은 주청한 신하들을 족치고 그대로 강행하였다. 결국 [[영락제]]에 의해 이 문제가 현실화되면서, 나중에는 가까운 황족들에게는 봉토를 적게 주거나 아예 주지 않는 [[친왕]] 제도로 바뀐다. 물론 주원장은 아들들을 모아놓고 ''''늬들을 임명하는 것은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하들의 이야기 역시 사실이니까, 마음 깊이 잘 새겨두고 나중에 형의 핏줄이 계승한 중앙 정부와 협력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라.''''면서 은근한 협박 기술을 시전하였다. 그리고 딴에 대비를 안 한 건 아니라서 나이도 많고 비교적 황위에 가장 가까운 둘째 진왕(秦王) 주상, 셋째 진왕(晉王) 주강, 넷째 연왕(燕王) 주체까지의 봉지는 [[시안]] - [[타이위안]] - [[베이징]] 순으로 붙어 있게 하여 한쪽이 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다른 둘이 견제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주상과 주강이 먼저 죽어버렸다. 이러니 당장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건문제는 군사력을 가진 숙부들에게서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그중 연왕 주체(후일 영락제)는 가장 큰 경계의 대상이었다. 결국 번왕 숙청 프로젝트가 가동되자, 연왕 주체에게는 '''가만히 있다가 죽기 vs 어차피 죽을 거 반란 한번 일으켜보기''' 외의 선택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영락제 입장에서 무고한 조카의 제위를 찬탈했다는 말이 억울한 것이다.[* 여기에 건문제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번왕 숙청의 최종타깃은 연왕 주체였다. 문제는 그럴 거면 처음부터 주체를 잡아죽일 것이지 다른 번왕들부터 치는 바람에 주체에게 명분을 주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의 명분은 억지스러운 면이 있긴 했지만 정난의 변을 일으킨 영락제의 경우엔 나름의 사유가 있긴 했다.[* 오히려 명분 면에서는 태종 이방원 쪽도 만만찮았는데 태조는 신덕왕후 소생을 세자로 밀고 있었지만 세간에서는 나이도 능력도 충분한 신의왕후의 아들들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여겼다. 오히려 어린데다 검증도 안된 이방석을 억지로 세자로 올린 게 태조쪽이었다. 그렇다보니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는데도 이방원에 대한 역풍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애초에 장자 계승을 확립하고 싶었으면 번왕제를 쓰지 말든지, 죽기 전에 자기 손으로 아들들을 숙청하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영락제에게 제위를 물려주든지 했어야 했다. 이 점에서 주원장은 공사를 구분하는 정치적 소양이 부족했다 할 수 있다. 태종 [[이방원]]도 그렇게까지 아들 바보였지만 자기 손으로 [[양녕대군]]을 폐세자해서 내치고, 마지막엔 불가피하다면 죽이라고 세종대왕에게 지시까지 내려놓았다. 결국 의문 태자는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는데, 아버지의 막나가는 숙청으로 인해 마음 고생이 심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에 따라 4남 주체가 태자로 책봉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대두되었지만, 장자 계승 원칙을 지켜 적장손인 [[주윤문]]을 [[황태손]]으로 지명하였다. 이로 인해 연왕으로 책봉되어 베이징에 머무르고 있던 주체가 상당히 격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모습은 주원장의 시골 출신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는 훈훈한 인정미가 넘치는, 이른바 시골인심을 보여주지만 외부인들에 대하여는 어떠한 짓을 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시골 사회의 특성이 황족 우대/공신 박대라는 주원장의 모습에 상당히 맞물린다는 것이다. 다만 이 후계 구도 관리 문제를 굳이 옹호하자면 [[황자]]들(즉 차기 황제나 차차기 황제의 형제, 숙부나 백부들)에게 어느 정도의 세력을 허용해야 하는지는 원래 답이 없는 문제라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제위 계승의 안정성과 정통성을 생각하면 황자들에게 세력(특히 군사력)을 가질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좋지만 대신 이 경우 황족의 세력이 미약해져서 그만큼 황가가 취약해지는 것. 세력을 가진 황족들은 황가 내부적으로는 황제에 대한 위협이 되지만 반대로 황가 외부에 대해서는 황제의 권위를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진]]의 경우 [[황족]]인 [[사마]]씨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여 세력을 구축하게 한 탓에 황족 사이의 권력 분쟁인 [[팔왕의 난]]으로 멸망하였지만 반면 그 전 왕조인 [[위(삼국시대)]]의 경우 조비 이후 황족인 조씨가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고 성장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억제한 탓에 [[조방]]의 즉위 이후 사마씨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제위를 빼앗기고 만 것. 만약 [[조조]]의 후손들이 군사력과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사마의가 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시도했다 하더라도 제압 가능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즉, 황가의 세력이 미약해질 경우 권신의 발호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생기는 것이다. 애초에 서진 자체가 이를 거울삼아 황가의 세력을 의도적으로 키워주다가 그 부작용으로 망한 것이기는 하지만. 요컨데, 중요한 것은 한쪽 노선에 치우치지 말고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외의 사례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경우 [[메흐메트 2세]] 이후 황권에 도전할 수 있는 술탄의 형제들을 모두 죽이다가 [[아흐메트 1세]]의 법 개정 이후 죽이지는 않지만 하렘 내의 밀실에 감금하도록 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 황가가 단절의 위험에 쉽게 노출되고, 후자의 경우에도 수년에서 수십 년간 갇혀있느라 세상 물정 모르는 인물이 술탄으로 즉위하여 국가를 막장화시킨다는 문제가 있는 것.] 따라서 차기 황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황자들이 세력을 가지는 것은 곧 자신의 황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의 요소가 되지만 왕조 전체, 또는 왕조 창시자의 입장에서 보면 의외로 나쁜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황족들끼리 권력분쟁을 벌여 황제가 갈린다고 하더라도 어쨌건 새 황제 역시 황족, 즉 왕조 창시자의 후손이기는 마찬가지니까. 물론 주원장의 입장에서도 자기 자식이나 후손들이 서로 싸우고 죽여대는 것이 달가운 일일 리는 없고,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될수록 국력의 약화나 정통성의 실추와 같은 심각한 부작용도 발생하겠지만. 어쨌건 왕조 자체의 존속이 목적이라면 황자들이 세력을 구축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얻는 효과가 분명히 있다는 것. 어쨌거나 [[정난의 변]] 이후 등극한 영락제 역시 주원장의 아들이므로 왕조 자체는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아직 왕조의 권위가 불안정한 개국 직후, 게다가 빈민 출신으로 가문의 세력과 명망 역시 변변찮은 상황이었던 주원장의 입장에서는 일단 자식들에게 군권을 맡김으로써 주씨 왕조의 기반 자체를 튼튼히 다져야 한다고 판단했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물론 여러 문제로 인하여 주원장의 최초 복안이었던 장자상속 전통의 확립이 실패한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왕조 자체의 유지'는 '장자상속 전통의 확립' 보다 더 상위의 목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원장이 장자상속 전통의 확립을 위해 정말 황자들을 숙청하거나 정치적으로 무력화했다면 정작 [[건문제]]가 즉위한 이후 숙부가 아닌 다른 권신들에 의해 황위를 위협받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왕조 창시자의 입장(즉 자기 왕조가 혈통적 정통성이 아니라 힘과 실력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자기 스스로 잘 알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던 주원장의 입장이라면 전자보다 후자에 더 큰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홍무제, version=10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