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쇼아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해당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 rd1=쇼아(영화))] [include(틀:나치즘)] [include(틀:나치 독일의 전쟁범죄)] [목차][clearfix] == 개요 == >최종 해결책이 수행되는 동안, 유대인들을 적절한 지침과 적당한 방식으로 동부로 이송시켜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해야 한다. 성별과 노동력에 따라 구분하여 대규모 노동대열로 조직해 도로 건설에 투입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원은 크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 >불가피하게 최후까지 남은 이들은 신체적으로 가장 강인한 자이니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수단을 동원해야만 한다. 그런 자들은 자연도태를 거친 자들이므로 만약 그들이 풀려나게 되면 새로이 유대인이 번성할 수 있는 생식 세포 역할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역사가 주는 교훈을 상기하기 바람). > >최종 해결책의 실제적 수행 과정에서 우리는 유럽을 서에서 동으로 쓸어낼 것이다. >---- >{{{#!folding [ 독일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Unter entsprechender Leitung sollen nun im Zuge der Endlösung die Juden in geeigneter Weise im Osten zum Arbeitseinsatz kommen. Im großen Arbeitskolonnen, unter Trennung der Geschlechter, werden die arbeitsfähigen Juden straßenbauend in diese Gebiete geführt, wobei zweifellos ein Großteil durch natürliche Verminderung ausfallen wird. Der allfällig endlich verbleibende Restbestand wird, da es sich bei diesem zweifellos um den widerstandsfähigsten Teil handelt, entsprechend behandelt werden müssen, da dieser, eine natürliche Auslese darstellend, bei Freilassung als Keimzelle eines neuen jüdischen Aufbaues anzusprechen ist. (Siehe die Erfahrung der Geschichte.) Im Zuge der praktischen Durchführung der Endlösung wird Europa vom Westen nach Osten durchgekämmt.}}} >---- >-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 대리 겸 국가보안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1942년 1월 20일 열린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 문제'의 처리 방안에 대해 논하며. 반제 회의 회의록 7, 8 페이지에서 발췌. [[:파일:Protokoll - page 7.jpg|7 페이지]] [[:파일:Protokoll - page 8.jpg|8 페이지]] || [[파일:66935A-1400x1005.jpg|width=100%]] || ||||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어린이 생존자들 || || [[파일:attachment/아인자츠그루펜/Kiev_Jew_Killings_in_Ivangorod_(1942).jpg|width=100%]] || |||| [[유대인]]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특수작전집단]]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uschwitz_I_death_block_11_04.jpg|width=100%]] || |||| [[아우슈비츠]] 11번 구역 가스실 || ||<#ffffff> [[파일:pink-triangle-armband.jpg|width=100%]] || |||| 수용소 수감자의 표식 [br] {{{-2 분홍색 역삼각형은 수감자가 [[동성애자]]임을 뜻하며, 해당 문양은 이후 성소수자 역사와 인권 운동의 상징이 된다.}}} ||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또는 '''쇼아(השואה)'''는 [[유대인]] 절멸을 위해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주도하고 그 협력자들이 동참하여 벌인 조직적 [[제노사이드]]로,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유대인 민간인과 포로들을 가스실, 총살, 강제 노동, 계획된 영양실조, 생체실험 등의 방법으로 학살한 사건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어 당시 유럽 내 약 900만 명의 유대인 중 3분의 2가 사망했다. [[반유대주의]]적 음모론을 기반으로 한 [[나치즘]]을 바탕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자 유대인들을 향한 탄압과 차별을 제도적으로 도입했다. 1933년에는 유대인들이 운영하는 사업에 대한 국가적 보이콧이 이뤄졌고, 1935년 도입된 [[뉘른베르크 법]]을 바탕으로 유대인을 향한 법적 차별이 가해졌다. 이러한 전국적 차별 아래 1938년 [[수정의 밤]] 등의 반유대적 폭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유대인]]과 [[롬인]]을 몰아넣은 구역인 [[게토]]가 형성되어 사회적 배척과 격리가 이뤄졌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독일이 동쪽으로 확장하며 [[특수작전집단]]이 동유럽 점령지의 유대인과 정치범들을 학살하는 역할을 맡아 총 130만여명의 민간인을 사살했다. 또한 나치 독일의 점령지와 파시스트 동맹국들의 영토에 강제수용소가 지어졌으며, 이곳에 수감된 유대인들은 열악하고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강제 노동에 투입되어 과로사, 아사, 병사하였다.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최종 해결책'으로서 모든 유대인의 절멸이 결정됨에 따라 수감자들은 가스실을 이용한 방법을 중심으로 하여 대량학살되었다. 그러한 강제 노동·절멸 수용소로는 나치 점령 폴란드에 설치된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마이다네크]], [[소비보르]], [[헤움노 절멸수용소|헤움노]] 등이 있었다. 이러한 공식적 기소와 학살은 1945년 5월 7일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대인 외에 [[나치당]]이 보기에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자들, 혹은 반(反)나치즘적이라고 여겨진 사람들 또한 함께 기소 및 학살되었다. 그러한 예로 1938년 시행된 [[장애인]] 학살인 [[T4 작전]]의 경험을 거친 인력들이 [[독소전쟁]] 발발 이후 홀로코스트에 본격적으로 투입되었다. [[폴란드인]] 등 슬라브족 또한 학살당하여 약 180~190만명의 비유대계 폴란드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en/article/polish-victims|"Polish Victims"]]. Holocaust Encyclopedia.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소위 [[집시]]라고 불리는 롬인들도 주요 학살 대상 중 하나였으며, 최대 50만여명이 학살되어 유럽 롬인의 절반 가량이 사망하였다.[*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en/article/genocide-of-european-roma-gypsies-1939-1945|"Holocaust Encyclopedia – Genocide of European Roma (Gypsies), 1939–1945"]]] 연합군이나 레지스탕스의 [[포로]], 특히나 유대인, 슬라브인, 유색인 포로의 경우 현장에서 처형되거나 강제 노동·절멸 수용소로 보내졌다. 나치당을 정치적 이유로 거부한 [[공산주의자]] 등의 정치범들도 함께 학살되었다. [[게이|남성 동성애자]]를 위시한 [[성소수자]]들 또한 학살 및 수감되었고, 생존한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동성애]]를 불법화한 동서독 정부에 의해 나치의 기록을 바탕으로 '''다시 수감되었다.''' 이러한 나치의 기소에 의해 사망한 총 희생자의 수는 홀로코스트로 사망한 유대인 600만여 명을 포함하여 약 1,100만명이다. 좀 더 넓게 정의할 경우 [[독소전쟁|동부전선]]에서 군사작전 중에 죽은 민간인을 제외한 나치 점령지에서 조직적으로 학살당한 소련인까지 포함해 약 1,700만명까지 추정하기도 한다.[* A figure of 26.3 million is given in Service d'Information des Crimes de Guerre: Crimes contre la Personne Humain, Camps de Concentration. Paris, 1946, pp. 197–198. Christopher Hodapp, Freemasons for Dummies, 2005; Raul Hilberg,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 2003; Martin Gilbert, Atlas of the Holocaust, 1993; Israel Gutman, Encyclopedia of the Holocaust, 1995.] 이를 기획하고 주도적으로 학살한 주체는 [[히틀러]]를 주축으로 한 [[나치 독일]] 정부와 그 군대임이 분명하지만, 그 외의 [[추축국]]들이나 추축국의 괴뢰국, 점령지의 자생적인 파시스트들로 이루어진 나치 독일의 괴뢰 정권과 '풀뿌리 부역자들' 또한 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직접적으로 살인에 관여되지 않은 독일의 단체나 민간인들 또한 반유대주의에 깊게 경도되어 유대인을 향한 차별, 탄압, 추출 등 학살에 참여했다. 유대계 미국인 사학자 마이클 베렌바움은 "독일 교회와 내무부는 유대인들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대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유대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라고 기록했다.[* Berenbaum, Michael (2005). 《The World Must Know: The History of the Holocaust as Told in the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ISBN 978-0801883583.] 또한 대학교는 유대인 교수 해고, 철도 회사는 수용소행 열차 운영, 화장(火葬) 회사는 수용소의 대규모 화장터 지원, 제약 회사는 수감자를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 참가 등 학살에 대한 대규모 동조가 이뤄졌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구조적 악이 나치의 전체주의를 기능하게 했다는 [[악의 평범성]]을 주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강제 노동·절멸 수용소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며 그 실상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근대의 첨단이었던 서구 기계 문명의 기술력과 행정력이 철두철미하게 특정 부류의 인간을 말살한다는 발상에 쓰였다는 사실은 전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반면교사로 남게 되었다. 이에 1945년 종전 이후 [[유엔]]의 [[세계 인권 선언]]이 1948년 발표되는 등 인권 수호와 차별 반대라는 국제적 합의가 맺어졌다. 현재의 독일연방공화국은 학살의 주범인 나치가 민주적인 절차로 정권을 장악했다는 점을 들어 [[방어적 민주주의]] 운영에 적극적이며 [[홀로코스트 부정론]]이 위법이다.[* 오향미 (2011). “독일 기본법의 "방어적 민주주의" 원리 : 그 헌법이론적 논거의 배경”. 《의정연구》 (한국의회발전연구회).] 또한 일부 사학자들과 철학자들은 [[모더니즘|인간의 이성과 기술력의 발달을 통한 낙관적인 미래]]라는 관점을 철저하게 부정시켰다는 점에 있어 [[제2차 세계대전]]을 [[근대|모던]]과 [[포스트모던]]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삼으며, 철학자·사회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야만이다"라고 말한 바 있듯 [[실존주의]], [[비판 이론]],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현대 인문학 사조에 큰 영향을 준 계기가 되었다. == 명칭과 어원 == *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로 '번제(燔祭)'를 뜻하는 '홀로카우스토스(ὁλόκαυστος)'로, 제물을 불에 태워 그 연기로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영어에서 홀로코스트를 유대인 대학살이란 의미로 쓸 때에는, 원칙적으로는 앞에 정관사 The를 붙여 표기해야 한다. * '''쇼아(שואה, Shoah)'''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로도 불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인종청소를 행했던 [[중동전쟁]]은 아랍에서 재앙이라는 뜻인 알 나크바라고 부른다.] * '''최종 해결책(Endlösung, Final Solution)''' 학살의 주체였던 [[나치 독일]]에서의 공식 [[독일어]] 명칭은 '최종 해결책'이라는 뜻의 '엔틀뢰중(Endlösung)', 정확히 말하자면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이라는 뜻의 '엔틀뢰중 데어 유덴프라게(Endlösung der Judenfrage)'로, 은유를 통해 대량 살해를 목적으로 함을 감추고 있다. 현재도 독일에서 최종 해결책이라는 용어는 홀로코스트를 칭하는 또다른 고유명사로 인식되며,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다른 유럽권 언어에서도 비슷하여, [[영어]]로 '파이널 솔루션(Final Solution)'은 홀로코스트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인식되어 터부시된다. == 배경 ==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독일을 포함한 전 유럽 대륙에서 반유대 감정은 흔한 것이었다. 먼 옛날 기독교가 유럽 대륙으로 퍼지며 예수와 사도들을 죽인 유대인을 '사탄'으로 규정했다. 거기에다가 자신의 나라 없이 전 유럽 대륙에 퍼져 있으면서도 그 나라에 융화되지 않았고, '유대인은 특별한 민족이다'라는 선민사상과 함께 이질적인 유대인만의 문화를 죽어라 지켜가며 자신들의 영역(마을 혹은 공동체)을 만들며 살아갔기 때문에 만만하게 생각하거나 고깝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시대부터 당시까지 유대인은 박해와 학살을 당하거나 왕따 당하는 존재였다. 흑사병 시기의 유대인 학살이 대표적인 예이며, 홀로코스트에 앞서 러시아에서도 [[포그롬]]이 일어난 바 있으며 이보다는 약하지만 [[폴란드 제2공화국]]처럼 반유대주의 색체가 강한 국가들도 많이 있었다. 다만 이렇게 넓게 퍼져있다보니 별 감정없는 일반인들도 있었으며, 중세시대 이후 국가관이 종교에서 왕국 혹은 국가에 충성하는 분위기로 접어들며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냉담(즉 이름만 유대인이지 사실상 무종교)이나 타종교로 개종하기 시작하고, 국가적으로도 종교적 색체가 옅어지면서 자연스래 유대인들은 일반인들 사이로 스며들고[* 쉽게 말하면 중세에는 독일 국민이기전에 유대인 이였다면, 근현대에는 유대인이기 전 독일인이다 라는 관념이 생긴 것이다. 이는 1차세계대전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와도 연관된다.], 반유대주의 또한 옅어지기도 했다. 아돌프 히틀러 본인 역시 반유대주의 사상을 접하고도 상당 기간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히틀러 평전 참고. 1차 세계 대전 중, 히틀러와 군 생활을 같이했던 동료들의 증언을 빌리면 반유대감정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고. 심지어 히틀러에게 철십자 훈장을 추천했던 후고 구트만 대위도 유대인이었다.] 그러던 도중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궁지에 몰린 [[독일 제국]]은 항복을 선언했다. 1919년 선포된 [[베르사유 조약]]과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패전국들은 모든 [[식민지]]를 잃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는 막대한 보상금으로 파멸에 이르렀다. 전후 독일에 세워진 바이마르 정부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초인플레이션]] 등 혼란과 혼란을 거듭했다. 이러는 도중 독일에 패전 책임이 있는 극우, 군국주의자들은 [[배후중상설]]을 떠들며 제1차 세계 대전 패배의 원인이 [[유대인]]이라는 주장을 피기 시작했다. [[배후중상설]] 참고.[* 사실 책임은 온전히 저 극우 군국주의자들에게 있었다. [[백일 전투]] 이후 사실상 독일군은 재기불가능 수준이였지만 철저한 언론통제로 인해 협상국이 독일 국경으로 몰아닥치게 생겼을때야 자신들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걸 의회가 알 수준이였다.] 거기에 이렇게 힘든 독일에게 더 큰 시련이 오니, 1929년 전 세계를 강타한 [[세계 대공황]]은 더욱더 피폐해진 독일을 사실상 죽음으로 몰고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은 자본가•은행가 이미지가 있었기에 반유대주의는 폭발적으로, 그리고 계층을 따지지 않고 넓게 퍼지기 시작한다.[* 다만 유대인들 중 자본가가 많았던 이유는 토지소유 금지 등 유대인이 박해받았기 때문이다. 토지소유가 금지되니 당연히 농촌보다 도시 근방에 모여들어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이나 은행업, 상업등에 종사하면서 유대인 = 자본가, 상인, 고리대금업자의 이미지가 생긴것이다. 실제로 16세기에 쓰여진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이 고리대금업자로 나오는 것에서 보듯이 유대인의 이러한 이미지는 역사가 오래되었다. 현대에도 유럽권 사람들은 유대인하면 은행가, 고리대금업자 등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러시아]]가 공산화 되자 그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유대-볼셰비즘설(Judeo-Bolshevism)이 널리 퍼졌으며, 유대인이 세계 지배 음모를 꾸민다는 [[시온 의정서]]가 신봉되었고, 극단적 반유대 언론을 소유한 미국인 [[헨리 포드]]의 반유대주의도 나치에게 영향을 미쳤다.[* 헨리 포드는 나치에게 막대한 돈을 주기도 했다.] 또한 온갖 반유대주의적 주장이 사회에 퍼졌는데, 예를 유대인이 어린아이를 해한다는 blood libel([[피의 중상]])[* 이 때문에 당시 상황을 표현한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라는 만화에서는 아이들에게 [[망태기 할아버지|"유대인들은 너희들을 보따리에 싸다가 잡아먹는다!"]]라고 겁을 주는 장면도 나온다.], 매음굴 포주들이 유대인이라는 설, 유대인이 동성애 영화 등의 풍기문란의 주범이라는 설, 1차 대전에서 유대인이 징병을 거부했다는 설, 유대인이 담배를 도래시켰고 담배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는 설 등이 있었다.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문서 참조. 이러한 상황에서 빈틈을 파고든 이가 바로 히틀러다. 1차대전의 퇴역 군인이던 히틀러는 나치당 입당 후 연설 능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데, 이러한 그의 연설도 반유대주의가 설파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당]]의 지지 상승을 위해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이용했다.[* 퇴역군인이던 히틀러에겐 안정적인 정치자금이 필요했기에 반유대주의자들의 자본지원 + 유대 자본 흡수를 위해서라도 반유대감정은 필요했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실제로 [[헨리 포드]]와 같은 반유대주의자들은 히틀러에게 거액의 후원을 해주었다.] 네로 작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틀러는 광기에 충실한 정치가였다. 비인간적인 광기와 문명의 거대한 힘이 결합하면서, 유대인 학살의 토대는 마련되고 있었다. == 특징 == |||| [[파일:WannseeList.jpg|width=100%]] || || 지역 || 수 || ||||A. || ||알트라이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0px-Weimar_Republic_1930.svg.png]] 1938년 이전의 나치 독일 영토. [[바이마르 공화국]]의 영토와 같다.] [br]오스트마르크[* [[오스트리아 병합|합병된 오스트리아]] + [[류블랴나 주|운터슈타이어마르크와 고렌스카]]] [br]오스트게비테[* [[독일 제국]] 시절의 구 동방영토 중 1차 대전 패전으로 상실한 지역으로 [[서프로이센]], 포젠 등.] [br]폴란드 총독부 [br]비아위스토크 [br]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br]에스토니아 [br]라트비아 [br]리투아니아 [br]벨기에 [br]덴마크 [br]프랑스 독일군 점령 지역 [br]프랑스 비점령 지역[* 비시 프랑스.] [br]그리스 [br]네덜란드 [br]노르웨이 || 131,800[br]43,700[br]420,000[br]2,284,000[br]400,000[br]74,200[br]-유대인 비포함-[* 원문에는 Judenfrei(유덴프라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유대인을 뜻하는 Juden과 영단어 free에 해당하는 Frei가 합쳐진 단어다. 여기서 사용된 free의 의미와 완벽히 대응하는 마땅한 한국어 표현이 없어 '유대인 비포함'이라 번역했지만, 사실 이보다는 유대인들이 '청소된' 또는 '제거된', 'XX 성분이 없는'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하다. '무지방'을 뜻하는 영어 표현 'fat free'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이 단어는 유대인이라는 한 인종집단의 혈통을 '''무슨 제거해야 할 성분처럼 취급하는 끔찍한 의미가 내포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한 해석은 유대인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br]3,500[br]34,000[br]43,000[br]5,600[br]165,000[br]700,000[br]69,600[br]160,800[br]1,300|| ||||B. || ||불가리아 [br]영국 [br]핀란드 [br]아일랜드 [br]이탈리아 [br]이탈리아 점령 하의 알바니아 [br]크로아티아 [br]포르투갈 [br]루마니아[* [[베사라비아]] 포함] [br]스웨덴 [br]스위스 [br]세르비아 [br]슬로바키아 [br]스페인 [br]튀르키예(유럽 지역) [br]헝가리 [br]소련 [br]소비에트 우크라이나 [br]소비에트 벨라루스(비아위스토크 제외[* [[비아위스토크]]는 당시 [[오스트프로이센]]에 병합되었다.]) || 48,000[br]330,000[br]2,300[br]4,000[br]58,000[br]200[br]40,000[br]3,000[br]342,000[br]8,000[br]18,000[br]10,000[br]88,000[br]6,000[br]55,500[br]742,800[br]5,000,000[br]2,994,684[br]446,484|| || 도합: || '''1,100만 이상''' || ↑1942년 1월 20일 열린 [[반제 회의]]의 회의록 문서 중 6페이지. 이는 회의 참가자이자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 친위대 중령의 이름을 따 '아이히만 리스트'라 불리는 문서로, 유럽 전역의 유대인 수('''학살 대상자''')를 정리해 놓았다. 유형 A는 회의가 열렸던 42년 초 시점에 독일이 점령하여 직할하던 지역의 유대인들이며, 유형 B는 그 외의 지역들[* 적국, 동맹국, 동맹국의 점령지, 중립국 등이 있다.]의 유대인들이다. 홀로코스트는 여타 학살과 구분되는 몇 가지 특이점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특징은, 전쟁터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지는 포로 학살이 아닌, 자국(점령지) 내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매우 체계적인 정책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 사실 홀로코스트라는 건 [[아돌프 히틀러]] 혼자만의 작품은 아니다. 제3 제국의 인종 정책의 의미는 땅을 점령해서 독일인에게 배분하겠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결국 "그 영토에 사는 사람들은 독일인이어야 했다"는 논리적 문제가 생기는 거다. 즉, 슬라브인들을 그 땅에서 추방하거나 잡아 죽이고 그 땅을 독일인에게 준다는 개념을 생각해 낸 것이 특징 아닌 특징이다. 게다가 어찌 보면 이 학살의 과정은 그냥 자기가 국민으로 삼은 데는 후하고, 아닌 놈들에겐 더없이 가혹했을 배타주의적 상징으로 시작된 거라고 보면 되지만, 유대인 학살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그 유대인들이 소유한 경제권과 상권, 자금을 독일인들에게 돌려준다는 개념으로 시작된 것으로 실제로 살던 집을 빼앗아서 독일인에게 줘 버리는 등의 행동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헌데 문제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되면 눈치를 챈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날라 버리거나 재산 챙겨서 3국으로 도주하는 등의 사태가 생기면 골치 아파지므로 아예 그냥 규모가 매우 거대한 강도질을 해 버린 거라고 보면 된다. 즉, 히틀러의 문제는 아리아계 독일인만 국민으로 생각하고 나머지는 폐품 취급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애초에 나치당 성격상 극좌와 극우가 섞여 있어서 생긴 상승 작용도 한몫한 것도 있다. 또한 히틀러는 어찌 보면 "뭉뚱그린 개념"을 구상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실행자 측에서 과당 경쟁이 붙어서 효과적인 학살 방식과 학살정책을 내놓은 셈이다. 즉, 실제로 대부분 문제는 [[하인리히 힘러]]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아돌프 아이히만]] 등의 작품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는 총통의 망상을 구체화한 셈이 되고, 이건 전쟁에 의한 과열 양상도 한몫한다. 요는 폴란드 등을 침공한 다음에 그 국가에 사는 독일계 주민을 선동해서 폴란드인들을 학대하게 하고 그로 인해서 물자 징발을 통해 전쟁 수행 능력을 보충하는 식으로 조성된 일종의 체계화된 약탈체제를 구상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장애인, 집시, 동성애자를 학살한 부분은 대략 이런 구도다. 먼저 장애인의 경우 [[나치당]]은 이들에 대한 복지정책 등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즉 장애인들에 대한 복지 등으로 낭비되는 재원 등을 고려하면 이것은 인종적 오염과 사회적 병폐와 나약함을 키운다고 생각했던 거다. 즉, 나치당은 장애인이 도태되면 그들의 공동체가 건강해 진다는 발상을 가졌던 거다. 이는 인권의 개념이 없던 고대에서는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거나 후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게 된 구성원을 추방하거나 죽이는 경우가 있었고 사람을 인권이나 생명보다는 노동력이나 자산의 개념으로 보던 고대의 이야기며 종교가 나타나는 기원전부터 인권과 생명의 가치는 추구되기 시작했다. 근데 홀로코스트는 그런 논리가 정당화될 고대가 아니다. 집시의 경우 유대인과 비슷하지만, 집시에 대한 관점은 좀 더 전통적인 개념에서 기인한다. 즉, 유대인들의 경우는 극좌화된 성격을 가졌던 이들의 일종의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증오의 성격이 있었다면, 집시에 대한 개념은 거의 극우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면 된다. 동성애자들은 대략 "전통윤리적" 개념을 가지고 이뤄진 학살이라고 보면 된다. 위의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나치당의 개념은 우생학적으로 우월한 아리안 인종을 번식하는 개념으로 정리되는데, 이 관점에서 동성애자들은 당연히도 "번식" 자체의 행위를 피하는 부도덕한 존재들이었다. 즉, 사실은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의 학살이 개념 구분되는 이유는 자본가에 대한 증오를 매개로 한 반면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각한 아이러니는 외려 나치당원이라는 사람들 중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즉, 극좌적 발상으로 유대 자본가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는 개념을 수반하긴 했지만, 반대로 실상을 보면 이건 부르주아 계층이 같은 부르주아 계층을 좌파 논리로 깎아내렸던 개념과 연관성이 생긴다. 이러한 모호하고 모순적인 증오에 대해 '좌파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 자본가에 대한 증오 때문에 유대인을 증오하고, 우파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 혁명가에 대한 증오로 유대인을 증오한다'는 표현이 유명하다. 이에 대해서 명확히 이해하려면 근대의 유럽에서 도시 시민(부르주아) 계층은 자본가의 산실인 동시에 지식인 혁명가의 모태이기도 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급속한 공업화로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고 도시로 인구와 사회적 영향력이 집중되었고, 도시 시민들이 새로운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기존의 농업 지주를 대신하여 도시의 공업, 금융자본가들이 경제적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도시화한 시민사회 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영향력을 넓히게 된 것. 그런데, 유대인들의 경우 토지 소유에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고 배타적인 농촌 공동체에 편입하기는 어려웠기에 이전 시대부터 도시에 자리 잡고 사는 이들이 많았고, 따라서 도시 시민이 사회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면서 유대인들의 사회적 영향력 역시 성장했다. 즉,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 자체는 중세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고, 이러한 혐오가 부르주아(원문 그대로의 의미로써 부르주아, 즉 도시 거주 시민) 계급이 성장하여 사회적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유대인들이 사회를 장악하고 사악한 음모를 꾸민다'는 망상의 형태로 다듬어진 것이다. 즉, 유대인과 집시/장애인/동성애자들과의 개념적인 구분은 약간 다르다. 이에 대해 라울 힐베르그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라는 책을 증거로 "홀로코스트가 본격화 되기 이전인 30년대 말 [[괴벨스]]의 선동으로 벌어진 유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행위조차도 독일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고 했으며. 즉 홀로코스트는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더 덜 조직적이고 심지어는 온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유대인에 대한 폭력조차도 독일 경제에는 이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한 "토지를 차지하기 위한 학살과도 그 궤를 달리하며, 경제 활동의 기반이 되는 "토지"를 가장 적은 비용으로 차지하기 위해 그 토지의 기존 거주자들을 학살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학살이 하나의 수단임을 의미하는데,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확실히 학살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였다"고 반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대해선 햇갈리지 말아야할 부분이 있다. 나치의 경제 계획은 국유화를 통하여 통제 경제적인 방향을 조장하여 전시 대비에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결론적으로 실패한 경제 정책인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반론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은 "결과"지만 당시 나치정권 자체는 그 "결과"에 대해서 몰랐다. 즉, 유대인들이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는 일종의 환상 때문에 그걸 다시 "독일인에게 빼앗아 주면"된다고 생각한 문제인 거다. 또한 후자의 경우 토지에 대한 명분을 가진 인종주의적 학살이라고 보면 된다. 즉, 홀로코스트가 학살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보이는 이유는 그 수단을 종합적으로 써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뒤집어 말하면 그 안에도 영토 획득을 하면서 벌어진 인종주의적 관점의 학살행위와, 인종 그 자체를 학살하던 행위라는 점으로 나눠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겠다. 게다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나치는 애초에 "우월한 아리아인종"의 씨를 받겠다고 [[레벤스보른|일종의 짝짓기]]를 시켜먹은 전례도 있을 정도였다. 또한 프로파간다의 성격상 나치당의 정책 자체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도 없었을 뿐더러 당내의 좌파적 성격을 지닌 SA출신 집단 등의 계보를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만 뭔가 증오의 타겟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유대인이 특별했던 거다. 물론 후대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독일이 유대인들을 탄압한 것 자체가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므로 경제적 이유로 유대인 학살의 이유는 없었다"는 결과론적 관점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애초에 실패한 경제 정책의 경우 그것이 실패할 줄 알고 저지르는 예는 거의 없다. == 원인 ==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간단히 홀로코스트를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과대망상]]에 가까운 혐오와 증오 탓'으로 치부하고, 또한 그렇게 치부하기를 원하나, 이는 히틀러 집권 이전부터 [[포그롬]] 등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 걸핏하면 일어났던 기독교 사회의 책임을 히틀러에게만 전가하여 단순화하는 것이며, 홀로코스트의 정확한 원인과 이유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거리일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저서를 통해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학살이 가능했던 역사와 실체를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실제 96년에 발생한 골드하겐 논쟁처럼 자발적으로 나치의 계획에 찬동하고, 개입했다는 의견도 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아들이었던 골드하겐이 쓴 논문에서 경찰조직에 포함되어 있던 나치당원과 일반 독일인의 비율을 근거로 홀로코스트에서 절대로 독일 일반인이 괴리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다만 이 논쟁의 경우 골드하겐의 논문의 논리적 약점이 상당히 많기도 해서 문제가 되었으며 '파멸적인 독일인들의 반 유대주의'라는 매우 공격적인 단어를 사용했다. 덕분에 당시 독일의 좌우 언론지에서 대동단결하여 골드하겐에게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판과 비난을 했다. 다행(?)인 점은 당시 독일에서 신 보수주의자들이 나치와 독일을 괴리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시기였는데 이 논문으로 나치와 독일인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환기 되었다는 점이다.] 홀로코스트의 원인에 대한 주장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의도주의적 해석은 홀로코스트가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상층부의 의도에 따라 계획적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보고, 기능주의적 해석은 기존의 반유대주의가 나치의 부추김을 받아 독일국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라고 본다. 쉽게 말해 [[계획대로]] vs. 어쩌다보니. 물론 아래에 나오듯이 현실은 저 두 가지 요인의 합작이었고 학자들 역시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어느쪽이 더 크냐의 논쟁일뿐이다. 우선, 홀로코스트는 나치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제2차 대전 당시 나치군 점령지에서 유대인들을 솎아내는 과정에서 나치군 점령지의 사람들은 대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일부는 직접 나서서 유대인들을 고발하기도 했다.[* 직접통치지역이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 [[폴란드]], [[체코]] 같은 데에서는 그야말로 철저히 이루어졌지만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던 국가에서 유대인 색출에 대한 협력은 각국마다 달랐다. [[덴마크]]나 [[불가리아]]처럼 노골적으로 거부의사를 드러낸 곳도 있었으며(심지어 이들 두 나라는 제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적극 보호했다. 다만 불가리아의 경우에는 초기 반유대주의가 성행하여 점령지의 유대인들을 절멸수용소로 보내기도 했다.) [[벨기에]]나 [[이탈리아]]처럼 사보타주를 벌인 곳이나 아예 유대인 단체까지 색출에 협력한 [[네덜란드]], 나치와는 별개로 현지 정부가 직접 나서서 유대인들을 학살, 탄압한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같은 곳도 있었다.] 유대인, 집시, 장애인들을 향한 유럽인들의 혐오와 불신은 뿌리깊은 것이었고 비단 [[나치 독일]]만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편적인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이 독재하에서 잔인한 방식으로 표출된 것뿐으로, 유대인을 향한 혐오 자체는 유럽 내의 어느 국가든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잘 알려진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탐욕스러운 상인 [[샤일록]]을 생각해보라. 당시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거주구역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나눠주는 것에 아주 찬성하였으며, 유대인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도 그저 방관했다. 대학살은 절대 비밀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자랑스럽게 광고해대지만 않았을 뿐이지 시골에서 소식도 안 듣고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구든지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그저 유대인이 싫어서, 또는 포상금이나 유대인들이 가진 재산이 탐나서 유대인들을 고발했던 것이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중세까지는 [[그리스도교]]의 영향[* [[그리스도교]]에서 신으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가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논점. 여기서 유대인이란, 혈통보다는 신앙 측면에서 "예수를 못박은 세력의 가르침을 아직도 따르는" 유대교 신자를 의미했다. 즉 중세때는 유대인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면 그냥 기독교인으로 간주했다. 이렇게 타고난 인종이나 민족보다 유대교를 믿느냐 아니냐로 판별하는 기준은 현대에도 유효하다.]이 있었고, 근대에는 만민평등사상이 널리 선포되어서 각종 제도적 차별이 철폐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짐과 동시에 국민국가의 등장, 산업화에 의한 사회변화가 맞물려서 반유대주의가 인종주의적이고 강경한 형태로 부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이 종교와 맞물린 형태라면,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같은 경우에는 근대적인 형태, [[폴란드]], [[러시아]]의 포그롬은 양자가 복합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반유대 감정의 유구한 전통에 대한 어록이 있다. > 처음에 중세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 '너희들이 유대교 신자인 이상,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 > 그 다음에, 세속 세계 지도자들은 선언했다. > '너희들은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 > 마지막으로 나치 독일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너희들은 살 권리가 없다.' >---- >라울 힐베르크 또, 나치가 행한 잔혹행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는 많다. 위의 '경과'에 언급된 치안유지군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치안유지군은 엄청난 규모의 학살을 저질렀지만 치안유지군의 구성원들은 열성적인 나치 추총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는 평범한 소시민 출신이었다. 학살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나치라서, 혹은 대상이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학살수용소로 다시 시점을 돌려서 생각해보자.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을 명시적으로 선언한 경우는 매우 드물고 그 목표달성에 필요한 전체적인 계획도 무질서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 "만약 유럽 내외의 국제 유대인 자본이 또 다시 민족들을 세계대전으로 몰아 넣는 것에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유대인의 승리가 아니라 유럽의 유대민족의 섬멸이 될 것이다!" > (Wenn es dem internationalen Finanzjudentum in und außerhalb Europas gelingen sollte, die Volker noch einmal in einen Weltkrieg zu sturzen, dann wird das Ergebnis nicht der Sieg des Judentums sein, sondern die Vernichtung der judischen Rasse in Europa!) > -------- > - 히틀러 1939년 1월 30일 독일의회 연설 > "유대인들은 우리가 섬멸(vernichtet)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1918년 11월 9일([[1차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한 날) 자신들이 저질렀던 행위에 대한 대가를 모면할 수 없다. 이 날의 대가는 치러져야 할 것이다." > -------- > - (DGFP pp. 190-95) 히틀러가 1939년 1월 체코 외무장관 프란티셰크 흐발코프스키(František Chvalkovský)에게 보낸 편지 > "유대인의 특권을 없애는 합리적인 반유대주의가 필요하며 이것의 최종적 목표는 유대인의 완전한 제거(Entfernung)이어야 한다." > -------- > - 히틀러의 1919년 9월 16일 편지 Werner Maser, Hitler’s Letters and Notes(New York, 1974), p.214. 이상의 발언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절멸시키고자 했다는 근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서 유명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데이비드 어빙은 "이 2개의 유명한 어구에서 사용된 vernichtet라는 단어가 실지로는 '절멸'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단어는 영어에서 annihilate로 번역되며 '절멸시키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1:1로 대응되는 것은 아니고 보다 엄격하게 정의하면 폭력을 행사해서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게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destroy로도 번역될 수 있고 전간기에 사용된 용례를 보면 이 단어는 주로 군사교리의 용어에서 자주 사용되는 '섬멸하다'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섬멸하거나 몰살하거나 그렇게 심각한 의미의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독일 민족운동의 최종 목표와 임무, 또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서 보자면, 이는 기생충이나 다름없는 [[동유럽]]의 유대인들을 철제 빗자루로 모두 쓸어내는 것이다. 이 일은 완벽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 -------- > - 나치당 기관지 Völkischer Beobachter 1922. 3.10 > 법과 질서의 대명사인 우리 정부하에서 살육을 통해 다른 모든 범죄자들을 기어코 소탕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는 유대인 천민 집단을 말살시켜야 하는 중대한 필요성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독일에서 유대인이 실제로 그리고 남김없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 곧 절대적 절멸이어야 한다." > -------- > - Das Schwarz Korps > 1938.11.24 나는 치안군 제3연대가 [[리투아니아]] 유대인 문제의 해결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에는 더 이상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을 위해 살려둔 근로 유대인은 샤블리에 약 4,500명, 코브노에 약 15,000명, 빌나에 약 15,000명 정도 존재한다. 나는 이들 역시 몰살시킬 것을 원했다. 잔존해 있는 근로 유대인들은 부득이하게 필요한 사람들이고 내 추측으로 이 인력은 이번 겨울이 지나가도 계속해서 절실하게 쓰일 것이다. 유대인의 번식을 막기 위해 근로 유대인 남성들을 즉각 거세시켜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여성이 [[임신]]하게 된다면 그녀는 제거되어야 한다." > ------- > - K. Jager 1941, 12.1 이 외에도 다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당시 [[나치 독일]]에서는 '최종 해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절멸이라고 명시된 경우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절멸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설이 자주 제시된다.[*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 대학살' - 최호근 와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 로버트 위스트리치 에서 재인용.] 그러나 아래에서 읽어낼 수 있다시피 '최종 해결책' 혹은 '물리적 해결', '정치적 해결' 등의 단어[* 당시 나치 군체계의 언어로 '최종 해결책'과 '물리적 해결'이라는 단어는 유대인 학살을, '정치적 해결'이라는 단어는 국외 추방을 의미.]는 언어를 관용화해 이의 무게를 무화(無化)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되는 것이 학계 다수의 의견. [[신어]]를 떠올리면 알 수 있을 듯. 실제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과 예루살렘 재판과 같은 전범 재판 당시 피고로 심문받던 나치 수뇌부들은 관용적인 표현(Redensarten), 선전문구(Schlagworte)를 주로 사용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일반적으로는 학살, 절멸이라는 단어보다는 '유대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이라는 단어를 선호했으며, 그 해결에 필요한 방법도 독소전이 발발하기 까지는 추방과 절멸 사이를 오갔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독일 정권 내에서는 1941년까지 유럽 내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추방하여 비시 프랑스가 관리하는 [[마다가스카르]]로 이주시키는 방안이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논의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해상봉쇄라는 타파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서 유야무야된다. [[독소전쟁]]이 진행되는 중에도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 있다면 우랄산맥 너머로 추방한다는 계획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이나 호주 역사에서도 보듯이 원주민들을 환경이 척박한 지역으로 내몰아 버리는 것도 학살이 되는 경우가 많다.[* '눈물의 길'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 이 학살 공장을 돌아가게 한 것은 반유대주의 신념에 찬 나치 수뇌부 관료들만이 아니었다. 내무부, 외무부, 법무부, 경제부, 재무부, 교통부, 체신부, 동유럽부, 선전부 등 거대한 독일 관료 기구 전체가 이 절멸 정책을 구상, 준비, 실행하는 데 참여했던 것이다. 법무부는 학살당할 유대인의 범위를 정의했고, 경제부는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해 파괴의 그물에 걸려들기 쉽게 했으며, 내무부는 절멸수용소로 이송될 유대인을 포획했다. 또한 교통부 산하의 제국철도는 전 유럽의 유대인을 절멸수용소로 이송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따라서 독일의 공무원들은 정책을 입안하고, 법령을 통과시키고, 사무실에서 회의하고, 전화를 주고받고, 공문에 서명하고, 절멸수용소로 가는 철도 시간표를 짬으로써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엄청난 규모의 학살 과정에 가담한 셈이었다. 파괴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는 데에는 굳이 반유대주의 신념이 필요 없었다. > --------- > - 박윤덕 외 23인 공저, 《서양사 강좌》제 22장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이 부분의 저자는 이용우 동덕여대 국사학과 교수로,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서양사학과 석박사 학위를 갖고 있다. 전문 분야는 세계대전기 각국의 대독 협력과 저항의 역사이다.], 576 ~ 577p, 아카넷, 2016.2.20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게토와 강제수용소라는 결과물을 낳았다는 것은 중요한 원인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이후 유대인의 처우에 대해서까지 그러한 생각을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게토로 몰아넣었지만 그 이후 뒷처분에 고심한 것은 히틀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유대인을 관리해야 하는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적절한 수단"으로 대표되는 히틀러의 추상적인 명령과 유럽에 만연하던 반유대주의 그리고 잘 형성된 관료체제에서는 책임을 추궁할 대상이 애매해진다는 점 속에서[* 관료제를 통해 발생한 결과의 책임은 누구일까? 지시한 사장인가? 계획한 과장인가? 실행한 말단인가? 관료제 속에서 죄책감은 모든 관료들에게 배분되어 희미해진다. 역으로 관료제의 이런 속성이 한나 아렌트 등의 철학자들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구 결과로 까발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피상적인 명령에 대한 효율적인 대응은 점차 광기에 찬 학살행위로 바뀌어갔다.[* 비슷한 예시로 유명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이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가짜 감옥에서 '간수 역을 맡아라'라는 피상적인 명령을 받은 실험자들은 죄수 역의 실험자들에게 징계를 내렸고, 이는 차차 정도를 넘은 가혹행위로 발전하게 되었다(<[[루시퍼 이펙트]]> 참조).] 이 때문에 학살 자체의 시행과 그 지향점에 대해서도 모순된 점이 자주 발견되는데, 가령 독일에서 절대적인 노동력의 부족으로 러시아의 전쟁포로들마저 군수공장에 투입되는 상황에서조차 유대인들을 노동력으로 쓰려는 시도조차 없었으며, 그들을 향한 "효율적"(살육의 방법 면에서)이면서 "비효율적"인 살육(귀중한 노동자원의 살해)은 멈추지 않았다.[* 유대인을 전혀 노동력으로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어린이는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죽였고, 성인은 당장 죽지 않을 만큼 먹을 것을 주면서 일을 시키다가 쇠약해지면 죽였다. 샤워 한다고 속여 구두와 옷은 죽이기 전 벗겨서 재활용했다. 즉 나치가 보기엔 인간 이하 존재인 유대인들에겐 식량과 물자를 주기조차 아까워 한 것. 말기로 갈수록 물자가 부족해지며 잡아들이는 인원은 많아져 죽이는 시기가 빨라졌다.] 일례로 독소전에서 패색이 짙어지는 과정에서도 동부지역에서 유대인을 수용소로 이송하기 위한 열차들은 중요한 군수물자의 수송보다 우선 순위에 있었다. 이는 유대인 학살의 구조적인 문제 이외에도 나치 독일의 각부서간의 상호경쟁이 심화되어 서로가 우선 순위를 놓고 다투면서 생겨난 문제이기도 하다. 이후 이어진 모든 광기 학살 행위는 관료제의 결과물에 걸맞게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히틀러가 처음 굴리기 시작했던 작은 눈덩이는 반유대주의라는 눈밭에서 전시체제의 관료제라는 추진력을 통해 대학살이라는 거대한 결과를 낳은 셈이다. ==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과 유대인 탄압의 시작 == [[히틀러]]는 젊은 시절 [[반유대주의]] 분위기가 팽배했던 오스트리아의 빈에 머무는 동안 반유대주의적 정서를 흡수했다. 그러나 인종론에 바탕을 둔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의 세계관이자 이념적 목표가 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부터였다. 히틀러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한 뒤 당시 많은 독일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패전과 독일이 겪은 모든 수모의 책임을 [[유대인]]의 탓으로 돌렸다. 1919년 9월 [[나치당]]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할 무렵에 이미 히틀러는 반유대주의에 대한 전문가로 불렸다. 이로 인해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내내 나치당의 반유대주의는 자주 물리적 폭력으로 표출되었고,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한 뒤로 나치의 극렬한 반유대주의는 단발적인 폭력이 아닌 일관성 있는 정책적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치가 패전과 혁명, 정치 위기, 극심한 사회적 빈곤을 초래한 것이 유대인이라고 지목하며,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자 독일 사회 내에서 유대인에 대한 편견은 갈수록 커져 갔다. 이러한 나치의 선전과 활동으로 인해 유대인은 유난히 부자가 많고 경제를 장악하여 해악을 끼치고 문화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고정관념이 날이 갈수록 확산되었다. 그 결과 유대인은 종자가 다르며 독일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유대인이라는 생각이 벌써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도 전에 널리 퍼졌다. 히틀러가 일단 정권을 잡은 후 나치의 반유대주의 구호는 그런 부정적 여론을 등에 업고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들었고, 줄기찬 선전으로 부풀려져서 독일의 모든 곳에 퍼졌다. 이로 인해 독일이 다시 부흥하려면 민족을 순화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유대인을 독일에서 내몰아야 한다는 생각이 호응을 얻었다. 이 시기 'Juden Raus'("유대인은 꺼져라"라는 뜻)라는 보드게임이 나오기도 하였다.[[https://www.google.com/search?ie=UTF-8&client=ms-android-samsung-ss&source=android-browser&q=JUDEN+RAUS|#]] 이렇게 해서 1919년부터 히틀러가 추진해야 할 목표로 내세웠던 유대인 제거는 조금씩 실현 가능한 목표로 떠올랐다. 나치당은 히틀러 내각을 새우자마자 그 즉시 유대인 탄압을 시작했다. 그 시작은 1933년 4월 7일에 Gesetz zur Wiederherstellung des Berufsbeamtentums, shortened to Berufsbeamtengesetz[[http://www.documentarchiv.de/ns/beamtenges.html|전문(독일어)]] 법률 번역해서 직업공무원재건법을 공포하고 이 법률 3조에 따라 비아리안 공무원 즉 유대인 공무원들을 공직에서 추방한다. 법률안 통과 직전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이 법안에 반대하는 편지를 4월 4일에 히틀러 총리에게 보냈지만 히틀러는 거부하는 답신을 4월 5일에 보낸다[* Walther Hubatsch, Hindenburg und der Staat, p375~378] 그러나 힌덴부르크의 반대가 껄끄러웠는지 답신에 참전용사나 유가족은 추방하지 않겠다고 넣었고 법안도 그렇게 만들었다. 여기에 4월 22일에 발표된 이법의 시행령에 따라 유대인 의사들이 의료보험공단에서 추방당해 사실상 자격을 잃는다. 분명 공무원 법 시행령으로 민간 의사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은 분명한 월권이었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1933년 4월 22일에는 유대인 특허 공증인을 금지하는 법이, 5월 6일에는 세무사를 9월 이후에는 변호사를 금지하는 법안이 차례대로 공포되었다. 유대인 예술인의 경우 나치 집권직후 괴벨스를 중심으로 선전부가 만들어졌고 1933년 9월 22일 선전부 산하에 제국문화회의소가 설립되어 여기서 독일의 예술활동을 총괄하게 되는데 한스 힝켈 같은 나치당원들이 문화회의소 총재로 군림하면서 유대인 예술가들은 독일 예술시장에서 추방당한다. 여기에 1933년 10월 4일에는 유대인 신문 편집자를 해고하는 행정명령이 발표된다.[* 출처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5장 1편 해고.] 1938년 6월 14일에는 유대인들이 기업의 소유나 이사직을 금지하는 법안을 공포했고, 11월 12일에는 무조건 유대인 이사를 해고하는 법률을 공포한다.[* 출처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5장 1편 해고.] [[파일:Goring Authorization Letter.jpg]] >1941년 7월 31일, 베를린 > >제국원수(Der Reichmarschall des Großdeutschen Reiches) >4개년계획부 전권 장관(Beauftragter für den Vierjahresplan) >국방위원회 의장(Vorsitzender des Ministerrats für die Reichsverteidigung) > >공안경찰(Sicherheitspolizei) 및 보안대(SD) 최고책임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친위중장(Gruppenführer) 귀하 > >베를린 > >1939년 1월 24일 최적의 수단을 동원해 유대인을 이주시키고 추방하라는 귀하의 의무에 더해, 독일의 영향력이 미치는 전 유럽에서의 유대인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기 위해 발생하는 조직적이고 기술적이며 실제적인 문제에 관련된 모든 필수적 사항들을 준비할 책임을 귀하에게 부여한다. > >정부의 다른 부처가 관련될 경우 그들은 언제든 귀하에게 협조해야 한다. > >나는 귀하에게 우리가 바라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직적, 기술적, 실제적 수단들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 계획을 가까운 시일 내에 제출하도록 요구하는 바이다. > >괴링(서명) >----- >- 국가보안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제국원수 [[괴링]]이 보낸 서한. 이 명령을 받은 하이드리히는 베를린 교외 [[반제]]의 한 별장에 독일 정부의 각 부서 요인들을 초대하여 유대인 문제 해결법에 대한 회의를 비밀리에 열었다. 이 회의가 그 유명한 [[반제 회의]]다. 한편 ‘[[돌격대]]’를 비롯한 나치당 과격파들이 저지른 유대인 박해는 1933년 나치의 집권이 시작되고 나서 유대인 상점 불매운동이나 유대인들을 길거리에서 폭행하고 모욕하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1933년과 1935년, 1938년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폭력사태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수정의 밤]]’으로 불리는 1938년 11월 9일과 10일에 벌어진 유대교 회당 파괴와 유대인 살해, 유대인 상점 습격은 반유대주의 폭력의 정점이였던 사건이었다. 크리스탈나흐트 사건 이전 인종 학살을 통한 유대인 절멸이 처음부터 목표는 아니었다. 하지만 크리스탈나흐트 사건 이후 나치는 유대인에 대해 독일에서 살 권리를 박탈하는 것에서 아예 인간으로써 살 권리를 박탈하는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반유대주의 폭력이 확산되고 갈수록 과격해지고, 전쟁 발발 후 나치의 유대인 정책이 독일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유대인을 이주시키는 영토 해법에서 1942년 1월 ‘[[반제 회의]]’를 거치며 대량 학살을 통한 절멸 해법으로 바뀐 것은 모두 나치 독일의 전형적인 '누적적 급진화'의 사례였다. 사실 히틀러가 별로 나서지 않았어도 반유대 운동은 저절로 번졌으며, 독일인들이 알아서 유대인 탄압을 이끌고 주도하고 밀어붙였다. 물론 거기에는 이것이 [[나치즘]]의 위대한 사명을 완수하는 길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지도자의 뜻을 좇아 일하는 전형적 사례였다. 물론 사람들은 대개는 실리를 따져서 그렇게 했지만 유대인을 제거할 목적으로 나온 조치는 히틀러의 장기적 목표를 이루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었으므로 당연히 히틀러의 승인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유대 차별의 급진화를 밀어붙인 조직이나 기관, 개인은 저마다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고 또 노리는 것이 있었다. 이것들을 모두 묶어내고 그럴듯한 명분을 주는 것이 인종 정화의 구상이었고 유대인 없는 독일 건설의 목표였다. 그리고 그 구심점은 [[히틀러|지도자]]였다. 그래서 때로는 영향이 간접적이었을지라도 히틀러의 역할은 중요했다. 1942년 6월 초면 유대인을 서유럽에서 추방하는 사업의 틀이 갖춰졌다. 서유럽 유대인의 수송은 1942년 7월부터 이루어졌고, 대부분은 당시 가동되던 시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절멸수용소가 있던 [[아우슈비츠|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이송되었다. '최종 해법'은 실행에 옮겨졌고 조직적 대량 학살은 거칠 것이 없었다. 1942년 말까지 친위대 자체 집계에 따르면 이미 4백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 다만 히틀러는 [[반제 회의]]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 히틀러는 회의가 열리는 것은 알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사실 현재까지도 히틀러가 반제회의를 정말로 알고 있었는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사실은 관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독일이 또다시 세계대전에 휘말려 든 이상 유대인은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고 1941년 12월 명백히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때쯤이면 지역 차원에서는 위에서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유대인 살해에 앞장섰다. 그 중에서도 [[친위대]]의 핵심이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히틀러의 포괄적인 유대인 동부 추방령을 등에 업고 유대인 박해를 범유럽 차원의 학살극으로 확대했다. == 경과 == ||
[youtube(GPXPjZurupc)] || || '''"최종 해결책"의 발전'''[br]영상 출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 공식 유튜브 채널 || * 1933년. [[나치당]]이 집권. 동성애 단체들은 강제 해산당하고 동성애나 성에 관한 학술서는 모두 불태워짐. 게슈타포에 의한 동성애자 사냥이 시작됨.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체포된 동성애자만 10만 명, 그중 5만여 명이 일반 교도소로, 1만 5천여 명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동성애자 중 60%가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4월, 유대인 상점에 대한 보이콧이 시작. 6월, 유대인이 모든 공직에서 추방. 강제수용소 및 노동수용소의 설치가 시작. *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 시행. 유대인과 독일인 사이의 혼인이 금지. 유대인의 시민권이 박탈당함. * 1936년. 유대인은 전문직(변호사, 의사, 교수직)에서 제외됨. [[하인리히 힘러]], '동성애와 낙태를 방지하기 위한 제국 중앙 사무국' 설립. * 1938년. 11월 9일 [[수정의 밤|유대인 대박해]](크리스탈의 밤. Kristallnacht, 혹은 포그롬 Pogrom) 시작. [[게토]]설치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짐. 유대인의 법적 권리 상당부분 박탈. * 1939년. [[2차대전]] 발발 4월까지 유대인 재산의 강제 매각 실시. [[장애인]] 살해계획([[T4 작전]]) 시작되다. 정신적 육체적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강제적 안락사. 병원 등에서 치료를 목적으로 온 장애인들을 무작위로 안락사. 장애의 정도, 종류에 관계없이 이루어짐. 부모나 보호자에게는 어떠한 설명도 이뤄지지 않았음. 총 희생자 수 약 '''20만 명'''. 이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추정한 수치이다. T4 작전은 1941년에 중단되었는데 정확한 원인은 불분명하다. 명목상으로 보면 이 문서와 큰 관련이 없는 것 같이 보이나,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인력이 41년 이후 홀로코스트에 참여(특히, 노약자들 골라내는 것)했으며 [[인종차별]]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한다. * 1940년. [[게토]] 실시. 수용소로의 강제이주 전에 유대인들을 지정된 일정 구역으로 강제이주, 거주하게 함. [[1945년]] 종전 시까지 운영했다. [[바르샤바]] 게토의 경우 바르샤바 총인구의 30%에 해당하는 수의 유대인들이 바르샤바의 2.4%밖에 안 되는 게토 내에서 거주. 열악한 시설로 [[전염병]] 등이 창궐했다. 개전 이후 거의 모든 점령지에서 게토 성립. '''현지인들은 [[유대인]] 이주에 직/간접적 협력. 게토에 대체로 호의적'''. 당시 유럽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오를레앙 괴담]] 문서 참조. * 1941년 12월. [[아돌프 히틀러]], 유럽 유대인을 전멸시키기로 결정. [[소련]] 공격 시작. 40년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게토 설치가 41년까지 이루어짐. 대부분의 게토 설치가 41년까지 이뤄졌다. 친위특무대([[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의 학살 시작. [[소련]]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죽음수용소가 가동되기 전까지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 여기에는 별의별 이유가 다 들어갔다. 오늘의 일과는 유대인 하나를 죽이고 끝낸다.(아트 슈피겔만의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쥐]] 참조.)] 아래 유대인, 소련인, 폴란드인을 대량학살. 이틀 만에 3만 명이 살해된 경우도 존재. '''총 160만 명 살해.''' [[헤움노 절멸수용소|최초의 학살수용소]]가 12월 헤움노(Chelmno)에 세워짐. 이어서 7곳으로 확대되었다. 이곳은 산업적인 방식으로 대량학살이 시행되었다(강제수용소/노동수용소와 다른 방식). 독가스를 통한 샤워실 학살이 이루어진 곳. 일반적인 살해방식에 의한 학살도 여전히 자행된다. '''이곳을 비롯한 주요 절멸수용소들에서만 총 300만 명이 학살당했다.''' * 1942년 초. [[반제 회의|반제(Wannsee) 회의]]. '''홀로코스트 전면실시. Endlösung(최종 해결책)이 채택되다.''' 7월, 게토에서 학살수용소로의 강제이주가 이루어짐. [[베우제츠 절멸수용소]]를 필두로 학살수용소 본격적으로 가동 시작. 종전까지 가동된다. * 1944년 '''죽음의 행진''' 시작. 연합군이 급속히 진격해오자 [[독일군]]은 학살수용소를 파괴해 증거를 인멸하고 수감자 및 포로들을 이송했다. 이 과정에서 기아, 구타, 병, 추위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정확한 사망인원 추산 불가.''' * 1945년 '''패전''' 죽음의 행진에서 약 60,000명이 생존한다. 종전 이후 4주 동안 질병 등의 후유증으로 10,000명 사망.[* 일부는 연합군의 판단 착오로 사망하기도 했다. 연합군이 수용소를 해방시켰을 당시 [[의학]]에 무지한 병사들이 지나치게 기름진 음식을 줘서 신체에 충격을 받은 수감자들이 사망한 적도 있었다. 이는 몇몇 미디어에서도 묘사되는데 단순히 연합군 측에서 수용소의 사람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것을 알고 보면 왜 그러는지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다.] 동성애자들은 종전 이후 해방되기는커녕 나치가 수집한 자료에 의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서독, 동독 정부에 의해 다시 수감되었다. == 희생자 수 == 나치 독일은 유대인 절멸에 관한 명령과 보고를 서면으로 기록하는 것을 꺼렸기에 학살 명령 다수는 구두로 전달되었다. 그럼에도 생산된 수많은 문서들은 1944년경부터 조직적으로 삭제되었으며, 학살과 관련된 여러 시설들 또한 의도적으로 해체되거나 파괴되었다. 이 외에도 광범위하게 벌어진 집단 학살 사건들과 그 희생자들에 대한 기록은 매우 단편적이다. 그렇기에, 홀로코스트의 정확한 피학살자 수를 집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재의 홀로코스트 희생자 집계는 주요 집단 매장지에서 발굴된 희생자 수, 독일 제국철도의 운송량과 운송 횟수, 그리고 전후 집계된 인구를 이민자 숫자와 전쟁 전 인구수와 비교하는 연구 등을 토대로 한 추정치에 기반한다.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documenting-numbers-of-victims-of-the-holocaust-and-nazi-persecution#-1|미국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발표한 희생자 숫자]]는 다음과 같다. 해당 박물관은 전후의 인구 집계 결과를 토대로 추산하였다. ||||||<#000000> '''{{{#FFF 인종과 집단에 따른 홀로코스트 희생자 수}}}''' || ||<#000000> {{{#FFF 인종 또는 집단}}} ||<#000000> {{{#FFF 희생자 수}}} ||<#000000> {{{#FFF 비고}}} || || 유대인 || 600만 명 || || || 소련 민간인 || 약 700만 명 || 130만명의 유대계 소련인 포함 || || 소련군 포로 || 약 300만 명 || 5만명의 유대계 소련군 포함 || || 비유대 폴란드 민간인 || 약 180만명 || 5만~10만명의 폴란드 엘리트 계층 포함 || || 세르비아 민간인 || 312,300명 ||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 || || 격리시설 장애인 || 약 25만 명 || || || 로마족(집시) || 약 25만 명 || || || 여호와의 증인 신도 || 약 1900명 || || || 재범죄자 및 비사회인격장애인 || 최소 7만 명 || || || 추축국 점령 지역의 파르티잔 및 레지스탕스 || 불명 |||| || 동성애자 || 수백 및 수천 명 || 상기된 재범죄자 및 비사회인격장애인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 또한 해당 박물관에서는 유대인들의 사망 장소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통계를 제시한다. ||||||<#000000> '''{{{#FFF 장소에 따른 유대인 희생자 수}}}''' || ||<#000000> {{{#FFF 장소}}} ||<#000000> {{{#FFF 희생자 수}}} ||<#000000> {{{#FFF 비고}}} ||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 약 100만명 || || ||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 약 925,500명 || || || [[베우제츠 절멸수용소]] || 434,508명 || || ||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 최소 167,000명 || || || [[헤움노 절멸수용소]] || 156,000 ~ 172,000명 || || || 폴란드 총독부 지역의 총살 작전 || 최소 20만 명 || || || 바르테란트 관구 지역의 총살 작전 || 최소 2만 명 || || || 기타 강제수용소들 || 최소 15만 명 || || || 독일에 점령된 소련 지역에서의 총살 작전 및 가스 밴 || 최소 130만 명 || || || 소련에서의 총살 작전 || 약 55,000명 || 소련으로 추방된 독일, 오스트리아 및 체코계 유대인 || || 세르비아에서의 총살 및 가스 밴 || 최소 15,088명 || || || 크로아티아에서 우스타샤 정권의 총살 또는 고문 || 23,000 ~ 25,000명 || || || 게토에서 사망 || 최소 80만 명 || || || 기타 || 최소 50만 명 || 1) 1939년에서 1940년까지 폴란드에서 살해된 이들[br]2)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살해된 이들[br]3) 헝가리의 노동대원으로 사망한 이들[br]4) 전간기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반유대주의 운동으로 인해 사망한 이들[br]5) 1940~41년간 루마니아 철위대에 의해 살해된 이들[br]6) 전쟁 후반 6개월간 죽음의 행진에서 사망한 이들[br]7) 독일 점령지역에서 숨어 지내다 살해된 이들 || == 방식 == === 추방과 집단 수용 === ||
[youtube(Il7LB4O8O4U)] || || {{{#!wiki style="text-align: center" 바르샤바 게토에 도착한 독일 유대인들. 이들은 1942년 7월경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가스실에서 대부분 살해당했다.}}} || ||
[youtube(set3I91sZ8k,start=100)] || > 아트: "소스노비에츠에서 다들 증명서에 도장을 받아야 하던 때 얘길 하던 중이었어요." > > 말라: "스타디움 말이지? 그래... 그때 우리 어머니도 끌려갔지. 어머닌 추방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네 채의 아파트로 끌려 가셨는데 일종의 감옥이었어... 거기에다 수천 명을 집어넣었지. 너무 답답해서 일부는 질식했어. 먹을 것도 화장실도 없고... 끔찍했지. 사람들은 비참한 처지를 끝내고 싶어 창밖으로 뛰어내리기까지 했어." > -------- > - 홀로코스트 생존자 [[말라 슈피겔만]](폴란드 유대계 미국인)의 증언.[*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 한국어 역본 98p] 나치의 집권 초기인 1934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이 통과된 후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졌던 작업으로, 유대인들의 모든 권리와 재산을 몰수하고 거주지에서 강제적으로 추방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독일 국적이 박탈되었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는 나치의 유대인 처리 방침이 명확하지 않았기에 유대인들은 주로 국외추방되었다. 또는 유대인들이 박해를 견디다 못해 인근 국가들로 이주해버린 경우도 많았다. 그나마 이때 영국이나 미국으로 피난간 독일 유대인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안네 프랑크]]의 가족도 이런 이유로 인해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한 경우였는데, 훗날 네덜란드가 독일과의 전쟁에 휘말리면서 참화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진 후 해외 이주가 막히고 독일의 유대인 처리 방침이 점차 극단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독일 본토와 점령지의 유대인들은 주로 [[게토]]에 강제 수용되었다. 게토는 서유럽과 독일 영내에는 없었지만 동유럽과 남동유럽, 특히 독일령 폴란드 지역에 여러 곳이 세워졌으며, 동유럽 유대인들이 주로 수용되었다. 게토에 모인 유대인들은 끔찍하게 높은 인구 밀도와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살아야 했으며, 이를 버티지 못하고 죽는 이들도 많았다. 많은 수의 독일 사업가들이 게토의 유대인 노동력을 착취하곤 했는데 이것이 유대인들의 거의 유일한 소득원이었다. 허가받지 않고 나갈 수는 없었고, 이를 시도할 시 경계병에게 총살당했다. 또한 갑작스런 검속 등을 통해 절멸수용소로 잡아가는 등의 행위도 이루어졌다. 그나마 1942년까지는 나치의 유대인 처리 방침이 명확하지 못했기에 게토에 수용해두었다. 하지만 [[반제 회의]]에서 처리 방침이 절멸로 확정된 이후, [[폴란드 총독부]] 지역에서 친위대 주도 하에 온전히 학살을 목적으로 하는 '''절멸수용소'''들이 가동되면서 게토는 해산되었다. 말이 해산이지 독일군과 친위대가 이주를 명목으로 주민들을 조금씩 기차편으로 실어와 그대로 절멸수용소의 가스실에 남김없이 처박는 끔찍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노동가능한 극히 일부의 인력들은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으며, 강제적인 노동과 게토보다도 열악한 수용소 환경에 시달리며 죽어갔다. 전쟁 후기인 1944년에 들어서면 폴란드를 비롯한 독일 점령지들의 유대인 대다수가 이미 가스실에서 살해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이탈리아와 헝가리에도 독일군이 강제적으로 진주하면서, 그전까지는 안전했던 두 국가의 유대인들도 학살의 피해자가 되었다. 이들은 잡히는 즉시 일종의 허브라 할 수 있는 집결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일부는 독일 각지의 노동수용소들로, 대다수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 및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집결수용소들은 가스실과 같은 시설은 없었지만 허브의 특성 상 수용 인원의 밀도가 심각할 정도로 높았던데다 환경도 그에 비례해 더욱 열악해서, 많은 수의 인원들이 수인성 질병으로 죽어갔다. 대표적인 집결수용소가 바로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와 베르겐 벨젠 수용소이다. 베르겐 벨젠은 그 불결한 환경으로 악명높았으며 독일계 네덜란드 유대인이었던 [[안네 프랑크]]도 이곳에서 티푸스로 사망했다. 한편 테레지엔슈타트는 중부 유럽에 위치했기에, 서남유럽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거쳐간 곳이었다. 그들 중 다수는 결국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 블라덱의 경험을 주제로 만든 만화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1부와 [[로만 폴란스키]]가 자신의 경험과 생존자 슈필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피아니스트(로만 폴란스키 영화)|피아니스트]]》에서 대략적인 게토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오스카 쉰들러의 이야기를 다룬 《[[쉰들러 리스트]]》 또한 게토 생활을 다루고 있다. === 집단 처형과 빨치산 토벌 === [[파일:EMr61.jpg|width=500]] ▲ 1942년 [[우크라이나]] [[빈니차]]에서 찍힌 사진. 아인자츠그루펜 대원이 유대인 남성의 후두부에 권총을 사격해 살해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앞에는 먼저 살해된 사람들이 묻혀 있는 구덩이가 있다. 뒤에 모인 사람들은 히틀러 유겐트나 국방군 등 구경꾼들이다. 사진 뒷면에는 '''빈니차의 마지막 유대인'''이라 적혀 있다. > "러시아에서 봤습니다. 친위대가 여자와 아이들이 있는 어느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겨우 빨치산이 독일군 한 명을 죽였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 책임이 없었지요. 친위대는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여자와 아이들을 쏴 죽였지요." > -------- > - 독일 육군 마이어[* 성은 미상.] 보병소위의 증언.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 229p에서 발췌. 가장 일반적이며, 또한 가장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방식. 홀로코스트 피해자의 절반 가까이가 이 방식으로 살해당했다. 2차 대전 최초의 전역이었던 [[폴란드 침공]]부터 시작되었다. 주로 동부전선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벨라루스]], 그리고 [[발트 3국]] 지역에서 벌어졌지만, 사실상 독일군이 있는 모든 지역에서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해당 지역이 [[소련]] 지역이나 [[유고슬라비아]], 북부 [[이탈리아]][* 1943년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붕괴하자 북이탈리아에는 독일군이 진주했다. 그러자 반 무솔리니파 이탈리아인들 다수가 [[파르티지아노]]가 되어 독일군 및 독일의 괴뢰국인 살로 공화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에 대한 독일의 진압 방식은 매우 잔혹했다. 당장 폴란드에서 라인하르트 작전으로 절멸수용소를 운영했던 친위대 부대가 파르티잔 진압을 위해 파견되었을 정도였다.]같이 민간과 파르티잔의 저항이 강력한 곳일수록 더욱 심각해지는 양상을 띄었다. 한편 최초 시작지였던 폴란드 지역의 유대인들 또한 이 방식으로 많이들 살해당했지만, 이 지역 유대인들의 대다수는 절멸수용소 가스실의 희생자들이 절대다수이다. 주의할 사실은 이 방식의 학살의 피해자는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세르비아인]], [[폴란드인]], [[이탈리아인]], [[체코인]], [[프랑스인]], [[네덜란드인]], [[그리스인]], [[집시]] 등 다른 유럽 민족들 또한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그 비중 또한 적지 않지만, 그들을 홀로코스트의 집계에 포함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는 하술할 유대인 중심적인 홀로코스트 사관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진다. 유대인 학살이나 여타 민족에 대한 학살이나 똑같이 독일인들의 인종주의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군에게 있어 동유럽, 즉 [[폴란드 총독부]]와 [[독소전쟁]]에서의 대파르티잔 전쟁은 그 자체로 [[유대]]-[[볼셰비즘]]에 대한 전쟁으로, 홀로코스트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학살과 대파르티잔 전쟁이 분리되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선적인 이유는 나치당과 국방군의 관계를 부정하고 싶었던 독일 국방군 장성들이 전후에 주창한 [[국방군 무오설]] 때문이다. 그리고 전후 세계를 지배한 [[냉전]] 체제로 인해 동부전선에서의 대파르티잔 전쟁이 한동안 베일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 또한 한몫 했다. 냉전 때문에 나치 독일이 벌인 전쟁범죄의 주요 피해자 중 전후 서구 세계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이들은 미국과 이스라엘로 이민한 일부 [[유대인]]들뿐이었으며, [[철의 장막]] 안에 남은 폴란드인들과 소련인들, 그리고 발칸 반도 주민들의 목소리는 냉전이 끝나가는 1980년대에야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거기다 [[소련]] 정부는 유대인, 러시아인, 벨라루스인과 우크라이나인 등을 모두 묶는 [[소련인]]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우고 소련인이 학살당했다는 역사 서술 방식을 유지했기 때문에, 그 구성원으로서의 개별 민족들에 대한 연구 역시 소련이 망한 90년대 이후에야 진행된다. > "유대-볼셰비즘에 대항하는 이 전역에서 최고로 중요한 목표는 유대-볼셰비즘의 힘의 원천을 완전히 파괴하고 유럽 문명에서 아시아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동부전선에서 한 명의 장병은 전통적인 전쟁 방식에 따라 싸우는 사람뿐만이 아닌, 국가적 구상을 가혹할 정도로 대표할 만한 사람이기도 하다. 고로 우리 장병은 유대인이라는 하등 인종에게 가해져야 하는, 가혹하지만 정당한 심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 -------- > -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라이헤나우 원수의 강조 명령]] > "...도덕적으로 부패한 열등 민족인 적을 제거하는 것만이 국방군이 유럽과, 특히 독일을 유대-볼셰비즘으로 무장한 아시아의 야만행위로부터 구하는 것이다." > ------ > - 독일 육군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1941년 11월 17일 내린 '동부에서의 독일군의 행동 강령'. 호트 상급대장은 당시 남부집단군 소속의 17군 사령관으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작전 중이었다. 《히틀러의 장군들 1: 만슈타인 평전》 338p에서 재인용 > "우리는 해독한 기생충을 제거하듯 세계 유대인들을 제거한다. 우리가 그들을 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적을 격퇴하는 것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적을 무찌르는 것이다. 유대인을 제거하는 투쟁은 신이 원하는 종족의 순수함과 건강함을 위한 도덕적 투쟁이다. 그리고 새롭고 좀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투쟁이다." > ------ > 1939년의 국방군 [[정훈교육]] 교재(Schulungshefte) 제5권에 실린 C.A. 호베르크 박사의 논문, '독일사 속의 유대인'의 마지막 문단.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 122p에서 발췌. 가해 주체는 이동 학살 특임대라 할 수 있는 [[아인자츠그루펜]]이 가장 유명하나, 실제로는 국방군과 친위대, 무장친위대, 경찰, 반유대주의적 지역민들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그 중 독일 정부의 정규군인 [[독일 국방군|국방군]]은 그동안 나치와 거리를 두었다는 [[국방군 무오설|거짓 신화]]에 보호받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인종적 적대감 또는 군사적인 논리로 휘하 장병들에게 학살을 강요했다. 당장 전쟁이 시작된 1939년에 국방군 지도부, 즉 육군 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브라우히치]]와 해군 사령관 [[에리히 레더|레더]], 공군 사령관 [[괴링]]은 나치당 이념을 장병들에게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내부적으로 합의했고, 이를 가르치기 위한 정훈교육 교재를 제작해 일선 장병과 소부대 지휘관들에게 배포했다. 독일에는 이민족에 대한 우월 의식이 만연했고 나치 정부가 반복적으로 이를 강조했기에, 진압 작전을 빙자한 학살은 아주 빈번했다. 전후에도, 다수의 독일군 참전자들은 자신들이 벌였던 '파르티잔 토벌'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홀로코스트에 연관된 학살임은 극구 부정하는 아이러니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이들에게 있어 초토화 전술은 자신들이 자랑해 마지않는 기동전술과 다를 바 없었다. 독일식 [[기동전]]의 핵심은 기동을 통해 적의 주력을 포위하고, 갇힌 적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그 '적'이 정규군이 아닌 파르티잔이었던 것이다. 대파르티잔 전쟁은 그 특성 상 민간인과 군인을 엄격히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반덴베캠풍(Bandenbekämpfung)', 즉 '도적 토벌'로도 불리는 나치의 치안전쟁은 그렇지 않았다. 군사 외에는 문외한에 가깝던 독일군 수뇌부는 민간인이 파르티잔의 협조자라는 일차원적인 생각에 갇혀 그들을 적으로 분류했고, 그들을 '섬멸'해야 한다는 비인간적인 결정을 아주 자연스럽게 내렸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 부대의 관할지역의 '치안'문제에 대해서라면 아인자츠그루펜과도 협력하곤 했다. [[발터 폰 라이헤나우]], [[에리히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 [[헤르만 호트]], [[발터 모델]] 등, 유명한 독일 장군들 대다수가 이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라이헤나우의 경우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으로 알려진 인종청소 장려 공문을 국방군 전체에 배포한 인물이다. 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국방군]]과 일반/무장친위대들 중 전방 부대들은 조직적인 학살 혐의에 있어서는 비교적 크게 관련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즉흥적인 포로 학대 및 학살 사건의 큰 축을 담당했다. 전방의 병사들에게 있어 포로를 후방으로 이송하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고, 때문에 그냥 살해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가한 포로 학대 소식들이 들려오면서 독일군 병사들의 이런 학살 행위는 일종의 복수로서 정당화되었다. 가령 1941년 10월 7일 독일 제61보병사단장 지크프리트 헤니케[* 최종 계급 보병대장. 1943년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봉기 진압작전에 참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전후 소련 NKVD에 잡혀 옥중에서 사망했다.]는 휘하 병사들이 소련군에게 살해당한 독일군의 시신 세 구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수감 중이던 소련군 포로 93명을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직적인 학살은 집단군 후방사령부에 소속된 국방군 보안사단들과 아인자츠그루펜, 무장친위대 및 질서경찰 부대, 그리고 현지인 보조부대들에 의해 주로 수행되었다. 후방사령부는 국방군 보안사단 및 친위대 [[질서경찰]] 부대 등을 거느리고 지역 안정을 담당한 제대이다. 그들은 빨치산 토벌이란 명목으로 마을에 쳐들어가 보이는 대로 다 불사르고 쳐죽이는 초토화 작전을 벌이거나 아인자츠그루펜의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협력하곤 했다. 이들은 [[바비야르 학살]]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마을 주민들을 이주 행렬이라 속인 뒤 일렬로 끌고 가 기계적으로 총살한 뒤 구덩이에 그냥 파묻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학살 전담 병사들은 [[총살]]하기에 앞서 희생자들의 귀중품들을 따로 모아 [[약탈]]하거나, 집단으로 [[성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 "그러니까 구덩이마다 기관총 사수가 여섯 명씩 배치되었습니다. 구덩이는 대략 길이 24미터, 너비 3미터였지요. 구덩이 안의 사람들은 통조림의 고등어처럼 누웠어요. 머리를 가운데로 두고 말이죠. 그 위에는 기관총 사수 여섯 명이 있었고, 그 사람들 목덜미에다 총격을 가했죠. 제가 도착했을 때는 구덩이가 벌써 가득 찼어요. 그래서 아직 살아 있던 사람들을 시신 위에 눕히고 다시 총격을 가했죠. 구덩이 안의 공간을 잘 활용하려고 그 사람들을 켜켜이 잘 눕혀야 했어요. 그러나 그 전에 그들이 가진 것을 다 빼앗았죠. 여기 숲 변두리에 구덩이 세 개가 있었어요. 일요일이었죠. 사람들은 1.5킬로미터로 줄을 섰어요. 줄은 조금씩 움직였죠. 처형 대기자들이었습니다. 구덩이로 다가가면서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되었죠. 대충 이 정도 아래 지점에서 장신구와 짐 가방을 내놓아야 했지요. 그러면 사수들은 쓸모없는 물건은 그냥 무더기로 쌓아 놓고 괜찮은 물건은 짐 가방 안에 챙겼어요. 그걸로 헐벗은 우리 민중들에게 옷을 사 주겠다는 거였죠. 그 다음에 조금 더 걸어와서 이제 옷을 벗었죠. 숲 앞 500미터에 이르면 발가벗어야 했어요. 속옷이나 팬티는 입도록 했고요. 여자와 아이들뿐이었죠. 두 살 짜리도 있었습니다. 거기다 대고 그런 야비한 말을 하다니! 기관총 사수들은 그 일이 무리가 되어서 매시간 교대를 했죠. 차라리 그자들이 억지로 그런 짓을 하는 것이었다면! 아니었습니다. 그자들은 추잡한 말을 내뱉었죠. "자, 또 예쁜 유대인 계집이 온다." 아직도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네요. 새빨간 내의를 입은 예쁜 소녀 말이에요. 인종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고요? 리가에서는 그녀들과 너도 나도 동침한 뒤에 총살해 버렸다니까요. 그래야 여자들이 어디 가서 그 얘기를 못 할 테니까요." > -------- > - 발터 브룬스 독일 육군 소장의 증언. 브룬스 소장은 1941년 5월 1일부터 이듬해 5월 1일까지 독일 북부집단군 소속으로 동부전선에 참전했다.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 181~182p에서 발췌. 후방사령부 세 곳의 활동을 중앙에서 감독하던 인물은 국방군 병참감 [[에두아르트 바그너]] 대장으로, 그는 친위대 보안대 및 [[게슈타포|보안경찰]] 총수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친위대장과 협력하여 국방군과 친위대의 학살 협력의 기본 토대를 놓은 인물이다. 1941년 4월 28일 두 사람은 "육군 내 보안경찰과 보안대의 특수 임무 규정"을 설정했고 이는 총사령관 브라우히치 원수의 명의로 예하부대에 하달되었다. 이러한'토벌'의 대표적인 사례는 특히 막스 폰 솅켄도르프 대장의 중부집단군 후방 지역에서 벌어졌다. 당시 [[벨라루스]]는 울창한 숲과 늪지대로 구성되어, 파르티잔들에게 있어 아주 이상적인 활동 지역으로 기능했다. 소련군 사령부는 이 지역의 [[파르티잔]]들에게 지원을 보내면서 독일의 후방을 교란했고, 이는 히틀러와 나치 지도부의 신경을 제대로 긁어댔다. 또한 [[폴란드 국내군]] 또한 지하에서 암약하며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운동을 지속했다. 때문에 [[히틀러]]는 벨라루스 파르티잔의 위협을 그가 주장하던 유대인의 위협과 결부시키면서 독일 군대에 '가혹한 대응'을 주문했다. 또한 파르티잔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장병들을 격려했다. > "한 마을에서 고의적인 파괴 및 방해 행위가 발생했다면, 해당 마을에 사는 유대인 전체를 몰살해야 한다. 이를 통해 그 사태를 일으킨 이들, 아니 적어도 그들의 배후 세력만큼은 확실히 척결할 수 있다." > -------- > - 독일 육군 구스타프 폰 마우헨하임 게난트 베흐톨샤임 소장이 밝힌 대파르티잔 작전 방침. 베흐톨샤임 소장은 1941년에 중부집단군 후방사령부에 소속된 제707보병사단의 사단장이었다. 그는 707사단 외에도 질서경찰 부대 및 리투아니아인 보조부대까지 거느렸으며, 1943년까지 벨라루스의 대파르티잔 작전을 수행하면서 대량 학살과 파괴 행위를 자행했다.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 421p에서 발췌. 그 결과가 바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벨라루스 점령]], 그리고 [[바르샤바 봉기]] 진압작전이다. 벨라루스 점령 기간 동안 독일이 벌인 파괴로 인해 수백만의 벨라루스인들과 그들의 민족 문화는 송두리째 뽑혀나갔다. 히틀러의 명령을 들은 독일군은 더욱 열성적으로 빨치산 의심 지역을 파괴하고자 했는데, 솅켄도르프 대장은 이를 위해 1941년 9월 24일에 모길레프 회의를 열었다. 솅켄도르프 본인과 휘하 부대장들, 그리고 중부집단군 관할 구역의 고위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친위중장, 아인자츠그루펜 B의 [[아르투어 네베]] 친위중장, 그리고 무장친위대 기병여단[* 무장친위대 제8사단 "플로리안 가이어"의 전신이다.] 사령관 [[헤르만 페겔라인]] 친위중령 등이 참여한 해당 회의는 약 이틀간 진행되었으며, 대파르티잔 작전의 기본 원칙으로 "적들의 완전한 절멸"을 채택하였다. 여기서 적이라 함은 파르티잔 뿐만 아니라 의심 가는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하며, 심지어는 여성과 아이, 그리고 노인까지 전부 포함한다. 솅켄도르프는 이 원칙을 휘하 중부집단군 후방사령부 병력들 전체에 배포했고, 독일 육군 [[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 원수는 이에 대해 "대파르티잔 작전의 교본"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1942년 8월 18일 히틀러는 그 해 말까지 벨라루스 빨치산들을 전부 소탕할 것을 명령했고, 독일 군대는 그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그들에게 의심스러운 민간인은 빨치산이자 볼셰비키이며 유대인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국방군]]과 [[질서경찰]] 부대는 말 그대로 고삐가 풀린 채 의심 가는 주민과 마을을 전부 학살하고 불태웠다. [[아인자츠그루펜]] B는 가스 트럭을 몰고 돌아다녔고, 친위대는 말리 트로스테네츠 수용소를 세워 사람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산하의 백루테니아 일반인민위원회는 민스크 게토를 '해산'하며 남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바흐-첼레프스키는 1942년에 파르티잔 진압 작전의 총책으로 임명되었고, 1943년에는 학살 전담 부대인 [[디를레방어 여단]]이 무장친위대 산하에 신설되었다. 1944년 국방군과 친위대가 [[바르샤바 봉기]]를 진압한 이후 바르샤바는 완벽히 잿더미가 되었다. 중부집단군 관할 지역만 해도 이 정도였으며, 그 외 지역을 포함하면 학살의 규모는 더욱 거대해진다. 북부집단군 후방사령부의 사령관 프란츠 폰 로케 육군대장과 해당 구역 친위대의 [[한스-아돌프 프뤼츠만]] 친위대 및 질서경찰 중장은 발트 지역과 러시아 북서부 지역에서의 대량 학살에 큰 책임을 진다. 북부집단군 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는 이들의 학살 행위를 보고받고도 방임했다. 한편 남부집단군 후방사령부의 사령관 카를 폰 로케 육군대장과 [[프리드리히 예켈른]] 친위대 및 질서경찰 대장은 우크라이나 및 남러시아 지역에서의 학살에 책임을 진다. 남부집단군의 학살 행위 또한 매우 거대한 규모였는데, 상술한 것처럼 남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부터가 유대인 학살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바비야르 학살]]이 벌어진 곳도 바로 남부집단군 구역이다. > 초틀뢰터러: 프랑스 놈 하나를 뒤에서 쏴 죽였어요. 자전거를 타고 있는 놈이었죠. > 베버: 아주 가까이에서요? > 초틀뢰터러: 그렇죠. > 호이저: 그놈이 당신을 잡아가려 하던가요? > 초틀뢰터러: 뭔 헛소리예요. 그 자전거가 탐났거든요. > -------- > - 영국 정보부에 도청된 독일 병사들의 대화 내용.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 237p에서 발췌. > "우리가 여자를 흔들어 깨우자 조금씩 의식이 돌아왔고 여자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어...... 여자는 독일군이 자기와 자기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들려줬어. 놈들이 여자의 다섯 아이들을 총살시키겠다며 헛간으로 끌고 갔어. 하지만 헛간에 도착하기도 전에 가면서 아이들을 먼저 쏘아 죽였지. 놈들은 아이들을 쏘면서 재미있다는 듯 낄낄댔어...... 젖먹이 막내아들만 남았는데, 파시스트가 '아이를 위로 던져라. 그러면 내가 총으로 쏘아 맞히겠다'고 몸짓을 해 보였지.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땅바닥에 냅다 던져버렸어. 아이가 죽어버릴 만큼 세차게...... 자기 자식을...... 독일군 손에 죽게 두느니 차라리 그렇게 한 거야...... 여자는 살고 싶지 않다고 했어. 그런 일을 겪었는데 어떻게 이 세상에서 얼굴을 들고 사느냐며 자기가 갈 곳은 저세상뿐이라고......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 -------- > - 벨라루스 [[호멜|고멜]] 지역의 소련군 제225빨치산연대 정치위원 알렉산드라 니키포로브나 자하로바의 증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447p에서 발췌. 또는 위와 같이 수용시설 경비부대나 소수 병사들이 개인적 유희나 약탈을 목적으로 지나가던 민간인들에게 트집을 잡고 죽인 경우도 많았으며, 지역 주민들이 냉병기 등으로 무장한 채 자체적으로 유대인이나 상대 민족을 살해한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 과정은 매우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기에 수많은 목격자들, 더 악질적으로는 '관람객들'이 이 범죄 현장을 목격하거나 시시덕거리며 참관했다. 상부에서는 사진 촬영을 금지했지만, 학살이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빈번했기에 통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병사들이 개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소장하거나 집으로 보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경우였다. 또는 지역 주민들이 학살 현장에 구경오거나 심지어는 독일 본토에서 관광 형식으로 '놀러' 오는 경우까지 있었다. 일부 예술가들은 오로지 학살에 참여해보고 싶어서 동부전선을 찾아오기도 했다. 이렇게 통제되지 않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 때문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시각자료나 증인들 역시 많은 편이다. 이 사례는 [[독일 국방군]]의 대표적인 [[전쟁 범죄]]이며, 200만명 가량의 유대인이 총살당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전체 홀로코스트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매우 크다. 그 외 다른 민족 희생자들의 숫자까지 더하면 이는 더욱 늘어난다. 하지만 수천 명의 사람을 계속해서 총살하는 것은 학살을 수행하는 병사들로서도 스트레스 받는 일이었다. 독일군 입장에서는 이는 전쟁 와중에 소중한 탄약과 무기를 낭비하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최대한 학살을 은폐하고자 했던 독일 수뇌부로서도, 통제되지 않은 학살 현장에 대한 목격자들과 기록들이 계속해서 생산되는 꼴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치는 죽이는 이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면서도 더 효율적이고 통제가 용이한 학살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그 결론이 바로 하술할 발터 라우프 대령이 개발한 [[가스실]] 방식이다. 소련 영화 《[[컴 앤 씨]]》나 폴란드 영화 《[[증오(2016)|증오]]》, 독일 드라마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등이 당시 벌어졌던 광적인 집단 학살 행위를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영상 매체이다. 학술 서적으로는 죙케 나이첼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이 이 문제를 심도 있게 파헤쳤다. === 수탈과 기아 === === 강제 노동 === [[파일:external/blog.sme.sk/holocaust-in-1945-buchenwald-concentration-camp.jpg]] ▲ 독일 바이마르 근교에 위치한 부헨발트 노동수용소의 수감자들. 다들 극한의 기아로 뼈가 드러난 비참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사진을 찍는다니 밝은 표정이다. 1945년 해방[* 1945년 4월 초 패전을 앞둔 독일은 부헨발트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이때 수감자들 또한 죽음의 행진을 통해 같이 끌려갈 위기에 처하자 4월 8일 수감자 중 한 명이었던 폴란드인 기술자 그비돈 다마진(Gwidon Damazyn)이 몰래 숨겨 들어온 단파 송신기로 그의 러시아인 동료 수감자 콘스탄틴 이바노비치 레오노프와 함께 영어, 독어, 노어로 SOS 요청을 송신했다. 그리고 '''고작 3분 후''' [[조지 패튼]] 대장의 미 3군이 '''그곳으로 튀어가는 중이다(Rushing to your aid)'''라며 답변을 보내왔다. 이 답변을 듣고 열광한 수감자들은 바로 반란을 일으켜 무기를 탈취해 잔여 간수들을 제압했고, 3일 뒤인 4월 11일 도착한 미 3군에게 해방되었다.] 직후 찍힌 사진이다. 자세히 보면 베개가 아니라 식기로 사용한 작은 냄비를 베고 있다. 일명 Vernichtung durch Arbeit, '''노동을 통한 절멸'''. 이 방식은 다양한 권위주의 국가들과 식민제국들에서 수행해왔고, 또 지금도 벌이고 있는 강제 노동과 궤를 같이한다. 4개년 계획이 실행되고 독일 내에 완전고용이 달성되자, 노동집약적인 산업이었던 건축업 쪽으로 일손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전쟁이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독일은 물자를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강제수용소를 이용하고자 했다. 일종의 독일판 [[굴라그]]인 셈이다. 기존에도 재소자들에게 노역형을 내리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끔찍한 것으로, 현대판 [[노예]] 노동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주로 석재 등의 건축자재를 생산했다.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수용소가 대표적으로, 이들 수용소들은 [[친위대]] 소속 기업에 통제를 받으면서 재소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해 각종 물자를 생산해냈다. 이후 탄약 생산, 각종 부품 생산 등에도 점차 수용소 인력들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전쟁 말에 가서는 수용소 인원들이 전체 노동가능 인원의 3%나 차지하는 정도로 그 정도가 심각해졌다. 독일의 왠만한 도시 옆에는 각 주요 수용소들의 부속수용소들이 설치되어 민간 업자나 친위대, 또는 독일 정부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대표적인 시설이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마우트하우젠-구젠 강제수용소나 부헨발트, 다하우 등이며, 아우슈비츠 수용소도 제1수용소는 이런 노동수용소였다.[* 비르케나우로도 불린 2수용소는 절멸수용소였다.] 독일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나 로켓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 그리고 [[IG 파르벤]]과 [[크루프]]같은 산업 관련 종사자들이 전후에 기소되거나 처벌받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다만 폰 브라운의 경우 [[페이퍼클립 작전]]의 수혜를 입어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 당연히 이 과정은 강압적이었고, 수용소 재소자들의 인권은 매우 낮았다. 유대인들은 일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그 자리에서 총살당하거나 비르케나우의 가스실로 보내져 살해당하곤 했다. 그나마 각종 기술이 있거나 신체가 강해서 끝까지 버텨낸 이들은 전후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이 바로 이런 사례.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바로 이런 노동수용소 재소자들이다. [[빅토르 프랑클]]의 저서인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리고 상술한 만화 《[[쥐(만화)|쥐]]》, 또는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 등이 나치의 강제 노동 시설을 다루고 있다. === 생체 실험 === [[파일:JosefMengele2-e1607611455699.jpg|width=450]] ▲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의사 [[요제프 멩겔레]]. > 나는 1쌍의 쌍둥이를 기억하는데, 그들은 한 방울의 피도 더 이상 뽑아낼 수 없을 때까지 피를 뽑아내야 했다. 그들은 빈 비닐봉지나 맥주병처럼 땅바닥에 쓰러졌다. >---- > ㅡ 이츠하크와 체라흐 타우브,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수용소 소속 의사들이나 독일 각종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실행했다. 아우슈비츠의 의사였던 [[요제프 멩겔레]]의 사례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환자를 살려야 하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넘쳐나는 재소자들을 그저 실험쥐 정도로나 여기고 끔찍한 인체실험들을 자행했다. 심지어 쌍둥이나 모자 등 가족을 대상으로 한 실험 사례조차 만 단위를 가볍게 넘어간다. 그 엽기적인 행각들로 인해 전후 의사 재판이 따로 열렸을 정도이며, 과학계에는 [[뉘른베르크 강령]]이라는 연구윤리 강령을 새로 제정했다. === 가스 처형 === [[파일:majdanek gas chamber1.jpg]] ▲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마이다네크 노동 및 절멸수용소]]의 가스실. 푸른 얼룩은 [[치클론 B]] 독가스의 흔적이다. 총살법은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전쟁 통에 귀한 총알을 사형에 쓰느라 낭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루에 수십, 수백 명을 쏴 죽인 SS대원은 [[PTSD]] 증상을 호소했고, 지휘부는 이들의 고충을 받아들여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마침 당시 독일에는 [[T4 작전]]이라는 장애인 학살 계획이 이미 실행 중이었다. 독일 정부는 장애인들이 열등 유전자를 가졌다고 판단하였으며, 그들을 요양원과 병원에서 안락사시켰다. 해당 과정은 우생학적이고 산업적인 학살이란 측면에서 홀로코스트와 대단히 유사한데, 실제로 이때의 경험은 가스실과 수용소를 통한 유대인 학살의 청사진이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 친위대원이 끔찍한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1942년 6월 5일 베를린. >제국 기밀 업무(Geheime Reichssache) > >현재 사용중이며 생산중인 특수차량(spezialwagen)에서 개선해야 할 사항. > >1941년 12월 이래로 세 대의 특수차량을 이용해 97,000명을 '''처리'''했고 차량에 별다른 결함은 없었음. (중략) 이전의 사례들로 판단컨데, 다음의 사항들이 개선되면 좋을 것임. > >1) 과잉압력을 막고 일산화탄소가 빠르게 퍼지게 하기 위해 차량 후방 벽면의 위에다 10x1cm의 구멍을 뚫을 필요가 있음. 압력 과잉은 밖에서 이 구멍을 막는 덮개를 여닫음으로써 조절할 수 있음. > >2) 통상 적재 시 평방미터 당 9~10명임. 사우러(Saurer) 사[* 스위스의 차량 제작 회사. 사우러 사가 직접 가스 밴을 제작한 건 아니었고 사우러 사의 트럭을 독일의 Gaubschat Fahrzeugwerke사가 가스바겐으로 개조했다. 사우러 사의 제품 외에 르노, 오펠 사의 트럭이 가스바겐으로 개조되었고 이렇게 전쟁 중에 개조된 가스바겐의 수는 약 20여 대로 추정된다.]의 더 커다란 차량에도 그리 많이 적재하진 않음. 과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적재 시 비포장도로를 주행할 때 차량 안정성에 문제가 있음. 적재공간의 축소가 필요해 보임. (중략) 이를 위해 지금껏 했던 것처럼 '''화물'''의 양을 줄여선 안됨. 화물의 양이 줄면 남는 공간에도 일산화탄소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가동 시간이 늘어나게 됨. 반면 적재공간이 줄면, 공간이 완전히 화물로 가득찬 상태이므로 '가동 시간'을 줄일 수 있음. 제작자들과의 회의에서 적재공간을 줄일 경우 무게중심에 문제가 생겨 앞 차축에 과부하가 걸릴것이라는 주장이 나왔으나, 사실 적재공간의 화물들이 가동 중에 언제나 뒷문으로 몰리기 때문에 무게중심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수 있음. 따라서 앞 차축 과부하 문제는 발생하지 않음. > >4) 차량 내부 청소를 쉽게 하기 위해 바닥 중앙에 밀봉된 배수구를 설치해야 함. 배수구의 지름은 20~30cm로 하고 여기에 사이펀을 설치해 '가동 중에' 액체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해야 함. 파이프 위에는 거름망을 설치해 오물에 의해 막히는 것을 방지해야 함. 큰 오물들은 가동 후 차량을 청소할 때 배수구의 뚜껑을 열어 제거할 수 있음. 적재공간의 바닥은 중앙을 향해 약간 기울도록 해서 오물들이 중앙으로 모아져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함. > >6) 적재공간 내 램프를 더 철저하게 보호해야 됨. 램프에 철망을 씌워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 함. 램프는 필요 없다고 없애버리자는 말도 있음. 하지만 관찰 결과, 문이 닫히려 할 때 깜깜해지기 시작하면 '화물'들은 언제나 문을 밀치고 나오려 하기에 문을 닫기 어려워짐. 이는 화물들이 어둠 속에서 조금의 빛이라도 드는 곳으로 향하려 하기 때문임. 또한 어둠으로 인한 공포로 '화물'들이 소음을 일으킴. 따라서 가동 초기엔 램프를 켜 두는 것이 더 적절함. 또한 야간 운영과 차량 내부 청소에도 도움이 됨. > >상기한 사항들은 수리를 위해 입고될 경우에만 적용될 것임. 이미 주문한 10대의 사우러(Saurer) 사 차량들에는 가능한 한 개선이 이루어질 것임. 제작사는 회의 때 사소한 몇가지를 제외하고 개조가 당장 이루어지긴 어렵다고 함. 따라서, 10대 중 최소한 한대의 개조를 위해 다른 제작사를 알아본 결과 호헨마우트에 있는 회사가 적격이라고 제안함. 현 상황에서 이 차량의 개조엔 어느 정도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임. > >II D 부서장 SS 상급돌격대지도자 발터 라우프(Walter Rauff) 귀하. > --------- > - [[헤움노 절멸수용소]]에서 베를린의 가스실 총책임자 발터 라우프에게 자신들이 사용 중인 학살용 가스 트럭의 개선점을 보고한 서한. [[https://phdn.org/archives/holocaust-history.org/19420605-rauff-spezialwagen/|서신 전문]], [[http://www.gelsenzentrum.de/spezial_wagen_t4_rauff.htm|독일어 원문]] [[파일:gas van.jpg|width=570]] ▲ [[헤움노 절멸수용소]] 근방에서 불태워진 채 발견된 마기루스 도이츠(Magirus-Deutz)의 트럭. 이 사진은 헤움노의 가스바겐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가스바겐과 완벽히 비슷하게 생겼지만 실제 가스바겐은 아니고 가구 수송용 트럭이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헤움노의 '진짜' 가스바겐 사진은 없다. 어느 날, 발터 라우프(Walther Rauff)[* 이 사람은 나중에 [[칠레]]로 [[나치의 남미 도주|탈출한다]].] SS[[대령]]은 한적한 교외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는 시동 끄는 것을 깜빡 잊었고, 문득 잠에서 깨보니 배기가스에 중독되어서 사지가 굳어 있어 꼼짝 못하고 죽을 뻔 했다. 그는 정신이 아득한 상황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탈출했으며, 이 경험을 토대로 가스실 방식 살해 방법을 적극적으로 개발해 사용했다. 이후 가스실은 홀로코스트의 상징과도 같은 처형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다. 다만 라우프가 최초의 개발자는 아니었다. 또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가스형]] 자체는 홀로코스트 이전, 그리고 이후에도 생각보다 여러 곳에서 벌어졌다. 1920년대부터 [[미국]]의 일부 주와 [[리투아니아]]에서는 공식적인 [[사형]] 집행 방식으로 가스형을 실시했고, 그 중에서도 미국은 1999년까지 가스형을 집행하다 온갖 반발에 시달린 끝에 약물형이나 전기의자형으로 거의 대부분 전환했다. 다만 [[캘리포니아]] 주 등지에서는 여전히 법적으로는 남아 있다. 집행을 하지 않을 뿐이다. 형벌이 아닌 집단 학살로써의 가스 처형도 나치의 등장 이전과 이후에 여러 사례가 있다.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군은 [[아이티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10만에 가까운 아이티 흑인들을 배에 짐칸에 태운 뒤 이산화황 가스로 살해하고 시신을 바다에 유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1937년 [[대숙청]] 당시 스탈린의 소련 [[NKVD]]는 모스크바 주 주민들을 대상으로 가스 밴을 이용한 학살을 자행했다. 나폴레옹의 흑인 학살에 대해서는 학술적인 공방전이 오가고 있으며, 사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NKVD의 학살의 경우 [[모스크바]] 시 외곽의 부토보 처형장에서 외상 없는 모스크바 시민들의 시신들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다만 소련의 가스 밴은 [[대숙청]] 와중인 1938년에 주동자인 이사이 베르그가 NKVD에 의해 반동 혐의로 처형되면서 중단되었다.] 그 외 2012년 폐쇄된 [[북한]] [[함경북도]]의 22호 관리소([[회령 수용소]]) 또한 생체실험 목적의 가스실이 존재했다. 다만 이들 중 그 어떤 곳도 나치의 가스 학살과 비교될 만한 규모는 아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시 돌아와서, 독일에서는 라우프의 등장 이전인 1939년과 1940년에 폴란드와 바르테란트 제국대관구에서 폴란드인들을 대상으로 가스 학살을 벌였다. 주로 배기가스 호스를 화물칸에 연결하곤, 희생자들을 실은 채 차를 몰아 한동안 이리저리 쏘다니다 돌아오는 식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 학살은 총살로 집행되었다. 그러던 1941년 친위대 국가지도자 [[하인리히 힘러]]가 동부전선 시찰 도중 총살 장면을 목격하곤 구역질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신을 차린 힘러는 아인자츠그루펜 B의 사령관인 친위중장 [[아르투어 네베]]에게 개선된 방안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네베 중장은 1940년에 졸다우 강제수용소에서 1500명의 장애인들을 살해할 때 썼던 가스 밴을 가져와 소련인 정신질환자들을 대상으로 살인을 '실험'했으며, 결과가 만족스럽자 자신의 휘하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들에 가스 밴을 적극적으로 보급했다. 최초의 가스실은 배기가스의 [[일산화탄소]]를 이용한 방식으로, 지하실 같은 밀폐된 공간에 수감자들을 가두고 꼼꼼히 빈틈을 막은 후 자동차 배기구에 호스를 달아 지하실에 연결한 뒤 열심히 공회전을 돌려 일산화탄소를 발생시키고, 산소부족으로 질식해 죽은 사체를 처리하는 방식이 한동안 유지되었다. 또는 상술한 대로 트럭 짐칸에 배기가스가 들어가도록 개조한 뒤 희생자들을 싣고는 공회전시켜 살해하기도 했다. 이것이 'S바겐[* 특수차량(Spezialwagen)의 준말.]', 또는 '가스 밴'이라 불리는 방식으로, [[아인자츠그루펜]]에서 사용하거나 최초의 절멸수용소였던 [[헤움노 절멸수용소|헤움노]] 및 크로아티아의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에서 사용되었다. 세르비아인들과 동슬라브계 소련 주민들은 이 트럭을 영혼 살해자라는 뜻의 'Dušegupka/душегубка(두셰구프카)'라고도 불렀다. [[파일:Wirth,_Christian[1].jpg]] ▲ 친위대 [[대위]] 크리스티안 비르트.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의 소장이며, 가스실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인물. > 하켄홀트 하사[* 라인하르트 수용소들의 가스실을 설계한 친위대 하사 로렌츠 하켄홀트를 의미. 1945년 적인 이탈리아 [[파르티지아노]]들에게 몰래 무기를 팔아넘기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다고 알려졌는데, 일각에서는 죽음을 위장하고 위조 신분으로 도피했다고 여긴다.]는 엔진을 움직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비르트 대위[*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의 소장이었던 친위대 대위 크리스티안 비르트를 의미.]가 다가왔다. (''중략'') 나는 스탑워치를 보았는데 50분, 70분이 지나도 엔진은 가동되지 않았다. (''중략'') 분노한 비르트 대위가 하켄홀트 하사를 돕던 우크라이나인 경비병 얼굴에다 12, 13회 채찍질했다. 2시간 49분 후 디젤 엔진이 가동되었다. (''중략'') 28분 뒤 소수만이 살아 있었고 32분 뒤 모두 사망했다. 치의사들이 들어와 금니와 치관을 빼냈다. 그 시체들 한가운데에 비르트 대위가 서 있었다. 그는 물 만난 고기가 되어 희생자들의 금니와 귀금속으로 가득한 통을 들고서 이렇게 말했다. "이 황금의 무게를 느껴보시오! 이게 어제랑 그제 얻은 것들이오. 당신은 우리가 매일 얼마나 얻는지 모를 거요. 돈, 다이아몬드, 황금들 말이오. 직접 와서 보시오!" > --------- > - [[https://www.jewishvirtuallibrary.org/the-gerstein-report|게르슈타인 보고서]] 한편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 처리 방침이 절멸로 확정되고, 라인하르트 작전이 벌어지며 폴란드 지역의 유대인 학살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세워진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트레블링카]][* Treblinka extermination camp, 희생자 70~90만.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상당수가 이곳으로 보내졌다.], [[베우제츠]][* Bełżec extermination camp, 희생자 약 60만. 르부프 게토의 유대인 대부분이 보내졌다.],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소비보르]] 절멸수용소[* Sobibór extermination camp, 희생자 약 20만.]에서는 가스 밴 방식을 더 대량의 살인이 가능하도록 개량한 '가스실' 방식을 사용했다. 말이 수용소지 사실상 완벽히 산업화된 살인 공장의 기계나 다름없던 이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은 철도를 통해 이송된 유대인들 중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 특수임무반)이라 불린 최소한의 보조 인력을 제외한 나머지는 넘겨받는 즉시 바로 살해하여 화장해버렸다. 그러나 기존에 쓰던 가스 밴의 작은 용적으로는 이송되는 희생자들을 전부 감당할 수 없었기에, 나치는 가스 밴을 개량하여 가스실을 개발하게 된다. 이 아이디어를 최초로 내놓은 이는 베우제츠의 소장이었던 크리스티안 비르트 친위대 대위, 그리고 설계자는 로렌츠 하켄홀트 친위대 하사였다. 우선 간수들은 희생자들에게 이곳이 환승역이라 속인 뒤, 위생 검사를 핑계로 희생자들이 자발적으로 탈의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는 좁은 길을 통해 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에 희생자들을 인솔하곤 가스를 주입해 살해하였다. 다만 이들은 후술할 치클론 B 가스를 도입하지는 않았고 여전히 [[일산화탄소]]를 사용했다. 가스실 외부의 엔진실에 소련군 전차에서 떼어낸 디젤 엔진을 부착했고, 갖가지 연료(주로 석유)를 이용해 엔진을 공회전시켜 나온 가스를 배기 파이프를 통해 각 방에 흘려넣음으로써 희생자들을 질식시켰다. 이 4개 절멸수용소에서만 약 200만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라인하르트 작전이 단 몇 개월만에 폴란드 유대인들을 거의 절멸시키면서 이 가스실을 이용한 학살은 ''효율적''인 학살방법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이를 다시 한 번 '개량'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아이디어가 일산화탄소 대신 '[[치클론 B]]'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치클론 B]]는 밀폐된 공간에 터트려서 방역을 하는 살충제로, 당시 [[독일 국방군]]은 마구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만 해도 물자 수송에 있어 [[말(동물)|말]]의 비중은 매우 컸다.] 방역용으로 종합화학회사인 [[이게파르벤|I.G 파르벤]]에서 대량의 치클론 B를 납품받아서 석유보다 공급이 넉넉했다.[* 훗날 [[전범 재판]]에서 이게파르벤은 [[치클론 B]]를 학살용으로 공급한 것 아니냐는 추궁에 자신들은 [[살충제]]로 팔았을 뿐이라고 변명했지만, 이 변명은 씨알도 안 먹혀서 이게파르벤은 해체되었다. 전술했다시피 다른 참여 기업들과 Degesch(1986년 Detia Freyberg에 합병되어서 Detia-Degesch라는 사명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사는 살려두었지만 Tesch und Stabenow사는 주요 인물인 브루노 테슈의 죄질이 너무나도 흉악했으므로 아예 강제로 청산시켜 버렸다.] 어찌되었든 치클론 B는 매우 치명적인 [[독가스]]였고, 1941년 9월 3일 아우슈비츠 1번 수용소 11번 구역에서 회스 수용소장 등이 참관한 가운데 600명의 소련 포로와 250명의 민간인 수용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치클론 B의 치명성을 본 나치들은(출처:The Encyclopedia of the Holocaust 1권 p113, Jozef Buszko) 이전에 쓰던 배기가스식 가스실보다 더 싼 값에 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었다. 다만 치클론 B는 [[아우슈비츠]](희생자 110만~120만),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마이다네크]] 수용소(희생자 최소 8만)에서만 사용되었다. 특히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경우, 부속 수용소인 모노위츠에 거대한 이게파르벤 공장이 들어서서 치클론 B를 공급했다. 전쟁 중기 이후 치클론 B의 납품이 대규모로 가능했음에도 각 수용소마다 가스실의 작동방식이 달랐고 그것을 바꾸기 싫었던 수용소장들은 기존의 일산화탄소 방식을 고수했다. 루돌프 회스의 표현에 따라 ''덜 효과적인'' 일산화탄소를 이용하는 절멸수용소들은 대부분 1944년 이전에 폐쇄되었고, 남아있던 절멸수용소들, 더 ''효과적인'' 치클론 B를 쓰는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는 1944년 7월까지, 아우슈비츠에서는 1945년 1월까지 학살을 지속했다. 여담으로 독일 언론들은 수용소에 대량의 방역용 약품이 공급되는 것을 보고 나치 수용소가 정말 위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다고 기사를 쓰는 짓을 저질렀다. 어차피 당시 독일 언론은 히틀러와 괴벨스에 의해 검열 중이었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밖에 기사를 쓸 수 없었다.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끔찍한 공간이었던 이들 절멸수용소(Todeslager, Vernichtungslager)들은 나치 독일에서조차 그 존재가 공식적으로 부정되었으며, 이 안에서 벌어진 일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특히 라인하르트 작전 기간 세워졌던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베우제츠]] 등의 수용소들은 작전 종료 직후 증거 인멸을 위해 철저히 파괴되어 현재는 그 터만이 남아있다. 심지어 트레블링카 수용소장 [[프란츠 슈탕글]]의 증언에 따르면 나치 정부는 여기서 일한 간수들마저 목격자로 취급했고, 그들이 사라지길 원했다고 한다. 때문에 라인하르트 작전 종료 직후, 수용소 간수들은 주로 위험 지역이었던 발칸 반도의 대파르티잔 전선으로 보내져 소모되었다. 각종 서류 등의 증거 자료들 또한 다수가 파기되거나 암호화되어 있으며, 학살 공정을 찍은 사진은 비르케나우에서 찍힌 단 4장만이 남아있다. '존더코만도 사진'이라 명명된 이 네 장의 사진은 수감자였던 그리스 유대인이자 [[그리스군]] 장교였던 알베르토스 에레라(추정)가 카메라를 밀수해 간신히 찍은 것이었다. 집단 총살에 대한 증거 자료가 차고 넘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가스 밴들도 마찬가지로, 도합 수십 대가 넘었으나 전부 파괴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차량은 없다. 그나마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와 마이다네크는 노동수용소도 겸하여 그 크기가 굉장히 컸고, 시간이 촉박하였기에 미처 파괴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소련군이 이 지역을 접수하고 나서 전세계에 실상이 밝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에 맞먹는 희생자들을 낸 라인하르트 작전 수용소들은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울의 아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또한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쇼아(영화)|쇼아]]》에서는 바르샤바 게토와 아우슈비츠 외에도 헤움노와 트레블링카 등의 잊혀진 절멸수용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죽음의 행진 === 전쟁 말기,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물밀듯이 [[소련군]]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독일은 폴란드 지역에 있던 학살 증거를 은폐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수용소 재소자들이 독일 영내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주된 방식은 열차 한 칸에 수백명씩 화물 수송하듯 넣은 뒤 별다른 식사도 주지 않고 이송하는 것이었다. 중간중간 멈춰 설 때마다 죽은 시체를 밖으로 던질 때 외에는 열차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철로가 끊긴 곳에서는 감시병의 감시 하에 수십~수백 킬로미터를 걷게 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기력이 쇠한 상태였던 수용소 재소자들을 이렇게 다뤘으니 당연히도 수 만 명이 죽음을 맞았는데, 사망자 수에 대한 정확한 추산은 아직까지도 불명확하다.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은 자신이 탔던 화물칸의 200명 중에서 8분의 1인 25명 정도밖에 살아남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 학살을 수행한 집단 및 수용소 == === 기관 === * [[독일 국방군]] * 야전부대 전체 * 비밀 야전경찰 * 집단군 후방사령부 * [[슈츠슈타펠|나치당 친위대]] * [[아인자츠그루펜|친위특무대]] * [[무장친위대]] * [[질서경찰]] * [[게슈타포|비밀경찰]] * 보안대 === 절멸 수용소(Vernichtungslager) === [include(틀: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 죽음의 수용소(Todeslager)라고도 한다. 나치가 세운 수많은 수용소가 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는 아래의 6곳이고 그 외는 강제 노동 수용소(Arbeitslager)이다. 다른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도 부차적으로 인체실험이나 학살 등의 홀로코스트 행위가 이루어졌으나, 절멸수용소는 1차적인 목적이 노동이나 교화, 형벌이 아니라 살인(절멸)을 목적으로 운용되던 곳이라는 점에서 다른 강제 수용소와 차이가 있다.[[https://ko.wikipedia.org/wiki/%EC%A0%88%EB%A9%B8_%EC%88%98%EC%9A%A9%EC%86%8C|#]] 독일 영내 독일 점령지 수용소 * [[폴란드]] 지역 ([[폴란드 총독부]])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 '''[[헤움노 절멸수용소]]''' *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 루블린 절멸수용소로도 불린다.] * [[우크라이나]] 지역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 * '''[[베우제츠 절멸수용소]]''' === 강제 노동 수용소(Arbeitslager) === 강제 노동 수용소(Arbeitslager)는 나치가 점령한 각국에 소재하였으며, 1차적인 목적은 나치에 반하는 인물들의 형벌 및 교화, 노동이라는 점에서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와 차이가 있다. 이러한 강제 노동 수용소는 부차적으로 인체실험, 총살 등이 행해지긴 했어도 주된 운영목적은 아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형이나 기아, 질병, 피로때문에 사망률이 높은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일부 수용소의 사망인원은 절멸수용소에 비견할 정도이나, 목적과 경향성 등에서 차이가 있어 절멸 수용소와 구분된다. 독일 영내 * '''부헨발트 수용소'''[* '부헨발트의 붉은 마녀'로 악명높은 [[일제 코흐]]가 이 수용소의 간부중 하나였다.] * '''[[다하우|다하우 수용소]]''' * '''베르겐-벨젠 수용소'''[* '안네의 일기'의 저자 [[안네 프랑크]]가 여기에 수감되었다 사망하였다.] * '''플로센뷔르크 수용소''' * '''그로스-로젠 수용소''' * '''힌체르트 수용소''' *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마우트하우젠 강제 노동 수용소(KZ-Mauthausen)는 오스트리아 린츠 근처의 마우트하우젠 마을에 위치해 있으며, 오스트리아 합병 직후인 1938년에 설치되었다. 근방에 있던 40개 이상의 수용소 시스템에서 중심 역할을 했으며, 독일 나치 SS 친위대가 직접 관리하던 곳이었고, 1940년에는 수용소 중 가장 높은 등급의 카테고리3 수용소로 분류되었다. 특히 이 수용소에는 스페인 출신 공산주의자들, 폴란드인, 오스트리아인, 독일 정치범 등 다양한 국적과 신분의 사람들이 있었으며 1945년 미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약 33만 명이 수감되었으며, 그 중 12만 명 이상이 죽었다. 이와 관련하여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라는 책이 출간되었고, 이 책을 원작으로 2018년 넷플릭스에서 동명의 영화로 개봉되었다. 더 자세한 정보는 공식 박물관 사이트 참조[[https://www.mauthausen-memorial.org/en|#]]] * '''구젠 수용소'''[* 마우트하우젠의 보조 수용소 역할이었다.] * '''미텔바우-도라 수용소''' * '''나츠바일러-스트로토르프 수용소''' * '''노이엔감메 수용소''' * '''라벤스브뤽 수용소''' * '''작센하우젠-오라녠부르크 수용소''' 독일 점령지 * [[발트 3국]]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 '''카이저발트 수용소''' ([[라트비아]]) * '''예갈라 수용소''' ([[에스토니아]]) * '''바이바라 수용소''' ([[에스토니아]]) * '''카웬 수용소''' ([[리투아니아]]) *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 * '''헤르초헨부쉬 수용소''' * [[폴란드]] ([[폴란드 총독부]]) * '''[[바르샤바]] 노동 수용소'''[* 말리 트로스테네츠 수용소처럼 절멸 수용소로 분류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으나 마찬가지로 희생자 숫자나 경향 등에서 논쟁이 많다.] * '''[[크라쿠프]]-프와슈프 수용소'''[*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그 수용소다. [[아몬 괴트]]가 수용소장으로 있었고, [[오스카 쉰들러]]가 구해낸 유대인들도 대다수가 이곳에 있었다.] * '''스투토프 수용소''' * '''말리 트로스테네츠 수용소'''[* 1941년 강제 노동 수용소로 만들어졌고 추후 총살 등의 홀로코스트 행위가 행해졌으므로 절멸수용소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희생자 숫자나 경향 등에서 타 강제 노동 수용소에 비해 뚜렷히 구분되는 측면이 없어 최신 경향에서는 위의 6곳만 절멸수용소로 분류하고 있다.] * [[우크라이나]] 지역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 * '''야노프스카 수용소''' * [[크로아티아]] 지역 ([[크로아티아 독립국]]) *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 전후 반응 == [[파일:shutterstock_728283397.jpg]] ▲ [[바빈야르 학살]] 집단 매장지의 2017년도 모습. 학살 현장 위로 숲이 자라며 과거의 흔적을 가리고 있다. [[파일:belzec memorial.jpg|width=800]] ▲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의 터에 세워진 추모지. 자그마치 60만명이 학살당한 현장인 이 수용소는 1990년대까지 거의 조명받지 못했다. >이게 바로 여기 숲의 매력이에요.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이죠. > >그래도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곳이 항상 고요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는 겁니다. > >한때는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가 >총성과 사람들 비명, 개 짖는 소리로 가득했죠. >당시 이 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에는 >그 시기가 특히 더 인상 깊게 남아 있을 겁니다. > >봉기가 있고 나서 >독일군에서는 수용소를 폐쇄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1943년 초겨울에 >이곳의 흔적을 모조리 숨기기 위해 >3~4년 정도 자란 작은 소나무들을 심었죠. > >"그게 저 나무들인가요?"[*a 인터뷰어 클로드 란츠만의 질문이다.] >네 맞습니다. >"저기가 옛날에는 전부 구덩이들이 파여 있던 곳이라고요?"[*a] >네. 1944년에 이 숲을 처음 본 사람도 >그 전에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저 나무들이 이곳이 절멸 수용소였다는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 >- 얀 피본스키(Jan Piwonski), 대전 당시 [[소비보르]] 기차역 철도 보조 관제사. 《[[쇼아(영화)|쇼아]]》27~28p에서 발췌. > '''땅이여, 내 피를 숨기지 말고,''' > '''그 피가 나를 위해 계속 부르짖게 해 다오!''' > -------- > - 베우제츠 추모비에 적힌 성경 구절. ([[욥기]] 16:18) 하나도 놀랄 것 없이 종전 직후 유럽에서 홀로코스트는 서서히 잊혔다. 이만큼 거대한 사건이 그토록 쉽게 잊힐 수 있다는 것은 얼핏 충격적이고 이상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도 지난 [[6.25 전쟁]] 당시에 그토록 무수한 학살을 겪었으면서도, 막상 기억하는 [[학살]]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단순화되어 있지 않은가. 무수한 학살이 이뤄졌던 많은 장소들은 현재 평범한 아파트 단지이거나 시가지의 일부가 되어 있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장소에서 학살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전쟁은 많은 사람을 죽게 하고, 6.25 전쟁이나, 2차대전처럼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죽어나간 전쟁에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전쟁의 상처를 잊고자 한다. 전쟁의 많은 면들이 연구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러한 학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이는 비록 민간에서의 연구에 국한되며 전범재판 등을 위한 사실파악은 꾸준히 이뤄졌지만, 이렇게 얻어진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도, 알려지게 할 의지도 없었다. 서서히 음지로 묻혀가던 학살의 기록들에 대한 관심을 되살린 것은 학살수용소에서 생존한 생존자들이 직접 제작한 영화나 다큐멘터리, 그리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역사가들 덕분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동 각국의 친소련화가 심화되고 미국의 대 중동전략이 변화되면서 [[이스라엘]]의 중요성이 강화되자 홀로코스트는 새로운 조명을 받았다는 해석도 있다.[* 홀로코스트 산업 - 노먼 핑켈슈타인,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 대학살 - 최호근에서 인용.] 그리고 독일에서도 냉전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나치 독일의 행위를 독일이라는 국가 전체에서 괴리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즉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전적으로 히틀러, 나치, SS 친위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평범한 독일인들은 억압당하고 어쩔 수 없이 따랐다는 논리가 독일 신 보수주의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
[youtube(DwKPFT-RioU)] || || 제2차 세계 대전의 희생자들 [[https://youtu.be/s3flpGLUOng|한글자막]] || 한편, 유대인 학살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이 집중됨으로서 다른 학살들이 외면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비난도 존재한다. 당장 [[2차대전]] 당시에 소련인들은 약 3000~4000만, 중국인들은 약 2300만이 죽었다. 또한 서유럽에서도 엄청난 인구가 죽었다. 유대인들은 대체로 600만이 죽었다고 추산되는데 대중은 유대인 학살에만 관심을 갖지, 더 많은 수가 죽은 그 이외의 학살이나 집시, 장애인, 동성애자에 대한 홀로코스트는 유대인 홀로코스트만큼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당장에 2차대전 하면 딱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만,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이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벨라루스 초토화작전]], [[바르샤바 봉기|볼라 학살]], 네덜란드의 대기근, 노르웨이의 [[레벤스보른]] 사건을 떠올리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비단 [[제2차 세계 대전]]뿐만 아니라, 예컨대 미국 워싱턴에 홀로코스트 추모 박물관을 개관할 때 미국 원주민들은 그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정작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그들을 학살한 땅 위에 건설된 미국이 그에 대한 기억은 배제하면서 멀리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을 추모한다는 것은 위선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학살은 외면하고 오직 유대인 학살만을 강조하는 경향에는 미국 언론의 영향력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미국 언론들의 절대다수가 유대계이며 이들은 당연히 이스라엘에 호의적인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만을, 그것도 '''유대인이 죽은 사실만''' 강조했다. 유대인의 3~4배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던 소련과 중국이 미국의 주요 적국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성향을 더욱 더 부채질했으며, 결국 우리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벌인 학살이라고 하면 홀로코스트'''만'''을 떠올리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고 말았다. 한편 사상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고도로 합리적인 관료 체계,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독일에서 이러한 기술을 활용하여 산업적인 방식으로 인간을 학살하였다는 사실은 유럽 여러 학자들의 문제 의식을 자극하였고[* 군대나 경찰을 이용하거나, 폭동에 의한 학살은 자기네들도 워낙 많이 저질러봐서 크게 감흥(...)이 없었다.],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 독일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형성된 철학, 사회과학 연구자들의 그룹으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르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레오 뢰벤탈 등이 있었으며, 위르겐 하버마스, 클라우스 오페, 알프레드 슈미트 등 2세대 학자들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 대다수가 유대계라서 나치시기에 미국으로 망명하기도 했으며, 전후에는 68혁명을 비롯한 신좌파운동에 큰 영향을 줬다.]로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은 이렇게 목표의 정당성을 생각하지 않는 도구적인 합리성과 이성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하는 작업을 수행하며 유명한 저서를 다수 남겼다. [[계몽의 변증법]]이 그 중 하나이다. 이것이 사회 교과서에서 나오는 실질적 법치주의와 형식적 법치주의의 예시, 뉘른베르크 법이 어떤 방식으로 처리되었는가에 관련되어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 이외에도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 문제로 이후에 체포된 아이히만 공판을 보고 기록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기도 하였다. 또한 이는 [[모더니즘]]에 대한 회의를 낳으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일으키게 된다. 일부에서는 홀로코스트가 과대평가되었다는 비난도 있다. 그 중 한 가지 원인은 동구권의 몰락인데, 얼핏 듣기에는 상관이 없을 것 같지만 동구권의 몰락은 유대인 문제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동독]]이 대표적인 경우지만 이들은 반나치즘을 국시처럼 내세우면서 유대인 학살 문제 등을 과장하면서 자신들의 문제점을 희석시키려던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동구권 몰락 후 [[아우슈비츠]]의 희생자 수가 300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건설 개시 단계부터 장기간 소장을 지냈던 루돌프 회스(루돌프 헤스와 스펠이 다르다. 회스(Höß)다.)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유대인 희생자를 처음엔 250만 정도(실려온 사람 숫자가 유대인만 250만으로,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이 죽었다는 것이었다.)라고 진술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100만을 조금 넘는 숫자로 정정했다. 1946년 봄에 처음 진술할 때에는 상관에게 들은 수치였고, 이후 1946년에 진술을 정정할 때는 [[폴란드]] 법정에 제출할 자술서 성격의 회고록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수용소 처리능력과 자신이 기억하는 실제 처리량을 비교해 본 결과 150만 이상은 수용소에서 죽이기 어려웠을 거라고 정정한 것이다. 회스의 진술 신뢰성은 상당히 높아, 현재는 아우슈비츠에서 직접 살해된 인원을 약 150만 이하로 추산하는 것이 정설이다.] 정정되는 등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나치즘]]의 반공산주의적 측면이 부각되면서 일부에서는 재평가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착각하지 말것은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네오 나치]]가 아니다.이들 역시 [[네오 나치]]와 나치가 행한 여러 만행에 대해선 의견을 같이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정확한 수치가 알려진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 독일의 여건 등을 고려해보면 이와 같은 주장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 다른 비판으론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국가들도 [[제노사이드]]를 행했는데 나치의 유대인 학살만 들먹이냐는 내용이다. 영국과 프랑스 등 대규모 [[식민제국]] 외에도, 그 작은 [[벨기에]]조차 [[콩고]]에서 [[고무]] 등의 자원확보 과정에서 홀로코스트 희생자 보다 더 많은 1천 5백만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그 외에도 [[소련]], [[중국]], [[튀르키예]], [[폴란드]], [[이라크]], [[이란]], [[스페인]], [[포르투갈]], [[몽골]], [[북한]], [[이스라엘]] 등에서 제노사이드가 발생해왔다. 상기한 워싱턴 홀로코스트 기념관 설립식에서 미국 원주민에게 행한 만행들은 사과하지 않고 유대인의 아픔을 기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던 외침은 쉽게 묵살할 것이 못 되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에 대한 강제이주 및 학살에 대한 범죄를 갖고 있다. 실제로 어느 [[팔레스타인]] 역사학자는 "현재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만 들먹이며, 정작 나치처럼 학살한 자신들의 과거는 합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물론 전후 학자들이 홀로코스트를 돌이켜보며 충격을 받은 이유는 그 규모가 아니라 '인간을 마치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듯 너무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학살했던 그 방식' 때문에 다른 [[제노사이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로 취급한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독일에 남아있던 동성애자 처벌법(소도미법 또는 계간죄)인 형법 175조로 인해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해방되자마자 다시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것도 나치가 모았던 정보를 토대로 말이다. 독일 형법 175조는 1969년이 돼서야 사문화됐고 1994년이 돼서야 공식적으로 형법에서 삭제되었다. 2002년이나 돼서야 독일 정부는 동성애자 커뮤니티에게 사과했고, 형법 175조에 의한 피해자 구제는 2016년 현재 진행형이다.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옆에 가면 1만 9073㎡의 부지에 콘크리트 비석 2,711개가 설치된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가 있는데, 동성애자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길 건너 티어가르텐 한가한 구석에 코딱지만 하게 설치되어있다.[*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는 2005년에 건립되었고, 동성애자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성소수자 단체가 추진해 2008년에 완공되었다. 연속성을 노린 것인지 동성애자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의 콘크리트 비석 1개와 동일한 크기와 재질로 만들어졌다. 다른 점이라면 조그만 창이 하나 달려있는데, 창 안을 들여다보면 내부 모니터에서 동성커플의 키스 장면이 들어간 영상이 재생된다.] 워싱턴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 추모비에는 홀로코스트로 인한 희생자의 숫자가 1,000만 명으로 기재되어 었다. [[나치 독일]]의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모든 사람'''의 수를 합친 숫자로 유대인뿐 아니라 [[폴란드]] 등의 슬라브인 및 전쟁포로들, 집시들, [[동성애자]], 장애인, 나치에 반항한 항거자[* 나치당 입장에서는 정치범.]까지 포함하고 있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는 인종차별적인 면모를 보이는 미국 거주 유대인들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바 있고, 이 일화를 국내에 소개한 [[한양대학교]] 사학과 [[임지현(역사학자)|임지현]]교수 역시 이런 유대인들의 배타적 태도를 비판한 바 있다. 또한, 임 교수의 저서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배타적 태도가 반드시 외부 집단에 한정되었던 것도 아니고, [[시오니즘]] 운동에 참여하여 [[팔레스타인]]에 이주했던 유대인들이 전후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에서 유럽에 잔류했다가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대인들에 대하여 보인 우월의식에 대하여 비판한 바도 있으니 참고할 만 하다. 독일 의회는 매년 1월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초청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연다. == 우파 시오니스트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의 오류 == >....시오니스트에게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역사는 영웅도 정복자도 지배자도 행동하는 인간도 없는, 울며불며 자비를 구걸해온 비겁한 역사였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찾아온 홀로코스트 생존자들도 짊어지기 싫은 부담스러운 짐이었다. > >'''시오니스트가 보기에 홀로코스트 희생자, 생존자는 이미 독일인이나 프랑스인으로 동화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온주의를 부정하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를 거부한 민족의 배신자였다. 특히 생존자는 강제수용소 같은 끔찍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극도로 이기적 존재였다.''' > >시오니스트와 디아스포라의 권력 관계는 이스라엘의 민족시인이자 시오니스트인 이츠하크 사데의 시 "해변의 누이"에서 잘 드러난다. 시는 난민선을 타고 이제 막 팔레스타인 해변에 도착한 홀로코스트 생존자 소녀와 건장한 시오니스트 청년의 만남을 그린다. > >그의 눈에 비친 소녀는 "정말로 더럽고, 옷도 누더기처럼 헤져있고, 머리칼도 엉망으로 헝클어졌고, 신발도 신지 않은" 모습이다. 그리고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그녀의 살갗에는" 나치 장교를 상대하는 매춘부임을 의미하는 "장교 전용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음을." > >그와 마주선 소녀는 울면서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제가 정말 이 젊고 건강한 청년들이 목숨을 걸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저는 살아서는 안 돼요" > >시오니스트의 시 속에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이 소녀는 이렇게 자기 몸과 자기 자신을 배반하고 결국 자기 민족을 배반한 이중의 배반자로 재현된다. > >임지현, "기억전쟁" 휴머니스트, 2019, 110-111 >그러나 다른 한편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다. 적대적인 아랍인들과 투쟁하면서 동시에 황무지를 개간해야 했던 건국 초기 이스라엘 정치지도자들이 내세운 모범적 인간상은 "싸우면서 건설하는" "새로운 유대인" 이었다. '''[[노력충|그들은 홀로코스트 기간을 포함한 디아스포라 시절의 유대인들을 강자에 대한 순응을 생활의 철칙으로 삼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 과 서비스업에 종사해 삶을 유지하는 "기생인간(Luftmensch)" 으로 규정]]했던 반면, [[선민사상|자신들을 포함하여 일찍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전쟁영웅"과 "생산적 선구자"로 묘사했다.]]''' >(중략) >침묵의 세번째 이유는 건국 직후의 사회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종전 후 몇 년에 걸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온 '이방인' 이었다. '''이미 그곳에 정착해서 살았던 유대인들은 새로운 희망을 안고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해온 생존자들을 [[의지드립|구시대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이라고 냉대했다.]]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아직 수용소에서 길러진 근성을 버리지 못한 생존자들을 비사회적 인물이나 파렴치한으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 >-최호근,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기억과 역사 만들기 ([[http://pal.or.kr/xe/docu/77818|논문 링크]]) 당시 우파시오니스트들에게 홀로코스트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유대인 국가 건국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유대인들을 이주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게 최악으로 발현된 것이 어떤 것이냐면, 나치와 시오니즘 지도부가 협력관계를 구축한 사례들이다. 다만,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직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밝혀지기 이전이었으므로 유대인의 학살이 아닌 추방을 지지한 경우였다.[* 전에 있었던 서술의 반 이상은 [[네오 나치]] 및 음모론 사이트 외에서는 찾을 수 없는 내용이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가급적 출처가 확실한 자료만 기재하길 바람.] 우선 1941년 1월 11일 이츠하크 샤미르는 '''시오니즘 군사조직 아르군과 독일 나치 사이의 군사협약'''을 제안한다. 이것은 위에 쓴 대로 나치의 목적이 유대인의 학살이 아닌 추방이라고 생각한 점도 있었지만, 이스라엘 건국의 가장 큰 걸림돌이 영국이라고 생각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팔레스타인 지방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은 가장 큰 적이었고, 마침 영국과 적대적인 데다가 유대인들을 추방시키고 있다고 믿었던 나치는 자연스러운 동맹 대상이었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는 것은 유대국가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독일의 계획에 따라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것과 유대인의 진정한 민족적 열망 사이에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다. >- 이츠하크 샤미르 샤미르가 보낸 편지는 나치에게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의 이스라엘 독립 활동(게릴라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독일의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추방하고 물자를 지원해 주면 이스라엘이 나치 독일의 우방이 될 것임을 명시했다. 나치는 이 편지를 무시했지만, 샤미르는 나중에 이스라엘의 7대 총리가 된다. 또한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은 전부가 죽는 것보다는 소수(특히 건강한 젊은이와 유명 인사)라도 살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나치와 협력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도 엄청난 논란이 일어날 게 뻔한데, 이쪽은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킨 격이니 더욱 문제점이 크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일화로, 194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유대인 위원회 소속 카스트너는 나치의 [[아돌프 아이히만]]과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의 내용은 1,000여 명의 유대인을 살려주는 대가로 많은 돈을 지불한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이게 왜 문제가 되나 싶지만, 카스트너는 나치로부터 이 '''정확히 1864명의 유대인을 살리는 대가로 대부분의 나머지 80여만 유대인들의 학살을 묵인했다. 즉, 유대인들에게 수용소로 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카스트너 자신부터가 유대인이었으므로 자기를 포함해서 모든 유대인들이 죽는 것보다는 일부라도 살리는 것이 나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카스트너 자신이 말하기로도 저명한 유대인들[* 특히 문제가 되는 점은 이런 분류를 1942년에 나치가 시작했다는 것이다.]과 젊고 건강하며 일을 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43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죽도록 놔둔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치에게 이 유대인들의 목숨값으로 지불하기로 한 돈을 조달하기 위해서 카스트너는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대인들 중 150여 명의 부자들에게 경매를 통해서 학살을 피할 수 있는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권리를 팔았고, 이 돈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협약의 내용이 알려지기 전에 카스트너는 이스라엘 정계에서 홀로코스트로부터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이 사실이 폭로되자 이스라엘의 법원에서 "악마의 계약을 체결한 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뒤 1957년 유대인 극단주의자에게 피살당한다. 비록 카스트너가 죽은 후에 상위 법원에서 그를 무죄로 고치긴 했지만, 이미 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진 뒤였다. == 전후 비판 == 홀로코스트란 역사적 사건은 분명 다시는 있어선 안 될 참극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홀로코스트를 산업화 시켜서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사용한다는 비난 여론도 나온다. 미국 유대인 로비 단체들이 학살된 유대인들의 유럽은행 예금이나, 몰수된 재산과 미술품 등에 막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해 받아내 상당액수를 유용하거나 하는 문제가 지적된 바 있다. 한국에서도 출판된 <홀로코스트 산업>을 보면 지은이 노르만 핀켈슈타인[* 핀켈슈타인의 또 다른 저서인 <우리는 너무 멀리갔다>에서도 [[가자 지구]] 분쟁에 관해 서술하며 "홀로코스트를 겪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상대로 같은 짓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보가 이스라엘 정부의 눈에 거슬렸는지 유대인임에도 이스라엘 입국이 금지당했다.] 또한 부모가 홀로코스트 생존자임에도,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들먹이며 일부의 배만 채운다고 강력하게 비난하며 여러 자료를 내보이고 있다. 게다가 홀로코스트를 핑계삼아 이스라엘을 건국한 [[시오니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하는 짓도 결코 좋게 봐줄 수 없다. 더욱이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미국의 언론을 주도하는 세력이 유대인이기에 이 점을 고의적으로 우회하고 그들의 적인 아랍인의 잘못만 들춰서 비난하는 여론 조장에도 상당한 한몫을 한다. 실제로 이 홀로코스트 악용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은, 2차대전 이후의 [[반유대주의]]에겐 핑계거리가 되었다. 반유대주의자들이 홀로코스트 부인론을 주장하는 근거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팔레스타인 문제와는 또 다르다. 역사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느냐 아니냐가 문제이다.''' 유대인은 전자이고, 팔레스타인은 후자다.(이스라엘은 전자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 중에서도 '역사적인 진실을 법적인 진실로 만들 필요가 없다'라며 반홀로코스트 부정법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 [[홀로코스트 허구설]] ===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국가에서는 법률에 의해 '''[[홀로코스트 부인론]]에 대한 형사처벌이 가능'''하며, [[독일어]] [[위키백과]]에도 이러한 내용으로 독일어 경고문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 홀로코스트는 수용소를 해방시킨 연합군에 의해 상세히 조사되었다. 생존자들의 증언, 수용소 해방 당시 미군, 소련군이 촬영했던 영상 필름, 유럽 전역에서 체포된 수용소 근무자들의 진술, 수용소에 남아있던 증거물, 나치의 명령서, 나치가 직접 찍은 학살 영상기록 등 방대한 자료를 통해 입증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및 전후 독일 재판에서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에게 유죄가 선고 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반이스라엘 감정이 있는 중동지역이나 네오나치, 일부 나치 전범의 후손, 반유대주의자들이 꾸준하게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의 비극을 폄하, 축소 시키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홀로코스트 허구설|문서]] 참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사역사학]]'''에 속한다. == 황당한 유대인 분류 기준 == > '''Wer ein Jud' ist, bestimme ich!''' >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 > - [[헤르만 괴링]] 저 말을 처음 한 자는 19세기 후반의 반유대주의자이며 오스트리아 빈 시장 카를 루에거. 그 이유도 가관인 게, 빈에 오래 살던 '''부유한 유대인은 괜찮고''' 동유럽 이민자 출신(=가난한) 유대인만 박해하겠다는 뜻이었다. 괴링이 이런 말을 한 이유는, 괴링이 아끼는 부하인 [[에르하르트 밀히]]가 유대인이라는 논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링은 의외로 [[반인륜]] 범죄와의 연관성은 [[아돌프 히틀러|히틀러]], [[파울 요제프 괴벨스|괴벨스]], [[하인리히 힘러|힘러]] 같은 다른 나치당 고위 간부들보다는 덜한 편이었다. 거의 빈털터리로 만드는 수준이긴 했지만 돈을 받는 대가로 유대인들이 안전한 국가로 피신하도록 도와준 적도 여러 번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동생인 [[알베르트 괴링]]이 유대인을 구해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묵인해 줬다고 하며, 이런 점을 감안하여 사형은 면해 달라는 탄원서가 제출된 적도 있다. 여담으로, 1차 대전 시절의 전우였던 프리츠 베크하르트가 수용소로 잡혀가자 그를 풀어주고 포르투갈로 망명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 [[파일:external/cdn1.thr.com/1935_most_beautiful_aryan_baby.jpg|width=100%]] 이 사진 속의 아기는 1935년에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에서 가장 아리아인다운 아기"를 뽑는 대회에서 1등을 한 아기이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우승자를 직접 선정한 대회였다. 부모에게는 막대한 상금이 내려졌고, 아기의 사진은 게르만의 우월성을 알리는 선전 잡지와 포스터에 실리기도 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 아이는 사실 [[유대인]] 혈통이다.''' 아이의 이름은 [[https://en.wikipedia.org/wiki/Hessy_Levinsons_Taft|헤시 레빈슨]], 결혼 후 레빈슨태프트고 부모는 당시 베를린에 유학하러 왔다 서로 눈이 맞아 결혼했던 라트비아계 유대인 성악가 유학생 커플이었다.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노란색의 다윗의 별을 붙이고 다니지 않았고 철저하게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숨기고 살았다. 그리고 간 크게도 세계에서 가장 아리아인다운 아기를 뽑는 대회에까지 나갔다! 유대인인 자신들의 아이가 최고의 아리아인으로 선정될 줄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실제로는 사진을 찍은 사진 작가가 대회에 부모 몰래 사진을 보냈다고 한다. 부모는 유대인이라는 게 들킬 것이 두려워 사진 작가에게 사실을 털어 놓았으나, 사진 작가는 원래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는 나치들을 놀리기 위해서 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 소위 '완벽한 아리아인 아기'는 각종 엽서 디자인으로 발탁되기도 하여 온 독일에 얼굴이 팔려 나간 적도 있다. 1938년에 아이의 부모는 [[게슈타포]]에게 붙잡히기도 했으나, 그것은 아이를 아리아인이라고 속인 것이 들켜서가 아닌 단순한 탈세 문제였다. 심지어 감옥에 아주 잠깐 갇혔다가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고 한다! 그리고 괴벨스도 히틀러도 나치 독일이 패망하는 그날까지 저 아이와 저 아이의 가족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저 부모는 억수로 운좋게 독일 내 유대인들이 빠져나오기도 어려워질 만큼 본격적으로 홀로코스트가 심해지기 전 프랑스로 갔다가 또 나치의 프랑스 침공 이전에 쿠바로 이민을 떠났고, 거기서도 [[쿠바 혁명|공산 혁명]]을 운좋게 피해 미국으로 옮겼다. 헤시 레빈슨은 미국에서 자라 [[뉴욕]] 세인트 존스 대학에서 [[화학과]] [[교수]]로 일하다 은퇴했는데, 워싱턴 포스트에서 취재한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morning-mix/wp/2014/07/07/the-perfect-aryan-child-the-nazis-used-in-propaganda-was-actually-jewish/|인터뷰]]에선 "지금 돌아보면 웃기는 일"이라 회고했다. [youtube(yNnuZm8CNos)] 인터뷰 동영상. 팔순 노교수 치고 정정하신 분이 자기가 얼마나 이쁜 아기였는지 길가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멈춰 볼 정도였다고 회고하신다. || || 한 유대인 소년 한스가 있었다. 그의 부모는 신분을 세탁하는 데 성공하여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고, 독일인으로서 정상적으로 살게 되었으며, 한스도 "아리아인으로 인정받은" 다른 독일인 아이들과 함께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하루는 [[교사]]가 말하길, "내일은 골상학적, 그리고 유전학적 측면에서 우리 게르만족이 얼마나 우월한 인종인지 배울 거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스는 겁이 덜컥 났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유대인인 것이 들통나면 학교에서 퇴학은 물론이거니와, 당장 소문으로만 어렴풋이 들리는 강제 수용소라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 아닌가?[* 나치 독일 시절의 민간인들은 수용소에 대한 소문만 들었지 그것이 진짜 있는지는 몰랐다.] 갑자기 병을 핑계로 학교에 가지 않으면 그 또한 의심할 것이 분명했다. 그와 그의 부모는 크게 걱정하면서 살얼음판 같은 하루를 보냈고, 결국 그 다음 날 한스는 덜덜 떨면서 등교를 했다. 그리고 결국 수업이 시작되었고 한스는 줄자와 계측기로 한스의 키와 두상 형태를 측정했고, 체중계로 체중을 검사하고, 또한 [[유전자]]를 검사했다.[* 문제는 [[DNA]]의 발견은 1953년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전자에 대한 의미 있는 분석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료된 '''2003년''' 이후였고 각 개인의 민족적 기원을 추적할 수 있게 된 것은 이후로도 몇 년이 더 지나서였다. 초중등과정 학교 수업 시간에 유전자 검사를 한다는 건 현대에도 불가능한 [[유사과학]]의 영역이고 심지어 현대의 기술 수준으로 각 개인의 혈통적 근원을 역추적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순혈주의자들이 개탄스러워할 [[혼파망]] 수준의 혼혈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치가 뒷목을 잡을만한 유전자에 기록된 진실은 [[인류]]는 [[아프리카]]로부터 기원했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스는 동프로이센 지역 바이킹 계통의 아리아인이네요! 아주 우월한 혈통이구나, 한스!" 한스는 크게 안심함과 동시에 어리둥절함을 느꼈다. 속으로 계속 헛웃음만 나왔다. 훗날 그는 [[독일 국방군]]에 입대하여,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였는데, 종전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 || [[쾨니히스베르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자기 의사로 루터파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 여자와 결혼한 아버지를 둔 1/2 유대인인 [[https://en.wikipedia.org/wiki/Werner_Goldberg|베르너 골드베르크]](1919년생)는 1938년 12월 1일에 [[독일 국방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폴란드 침공]]에 참전했으며, 이때 육군 소속 사진사가 찍은 골드베르크의 사진이 '''이상적인 아리아인 병사'''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실리는가 하면 '''모병 포스터'''에까지 사용되었다. 골드베르크는 다음 해 프랑스가 항복한 뒤 1단계 혼혈 유대인을 군에서 추방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제대 처분되었고, 입대 전에 일하던 의류 회사에 복직했다. 개종하긴 했어도 순수 유대인이었던 아버지는 결국 전쟁 중에 죽었지만 베르너 골드베르크는 살아남아 자식 셋을 얻고 2004년에 사망했다. || 홀로코스트의 대상이 주로 [[유대인]]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피해자들은 그 자신의 정체성은 물론이고 일반 상식으로 보아도 유대인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럽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을 거치거나, 자신의 종교에 냉담해지면서 서구 사회에 동화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보다 국가가 중요하게 된 근대 시기에는 이런 사례가 더 많이 나타났다. 유대인이기 이전에 '우리나라의 국민'이라는 사고방식이 강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인종주의에 경도된 나치의 유대인 판정법은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조상까지 봐서 유대인 혈통이 조금 섞여 있으면 유대인'으로 보는 정신나간 기준이었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꼼꼼하게 따져서 판정해도 학살을 정당화할 수 없는 일인데 그조차도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때문에 자신의 몇 대조 조상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고 유대인으로 분류당하는 사람도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몇 대조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고 한들, 자신이나 그전 세대에서 이미 개종을 해서 [[유대교]]를 믿지도 않고 문화적으로는 유럽인과 아무런 차이가 없고, 자신도 자기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100년 전 조상이 유대인이었다고 해서 그 후손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리가 없는 것이다. 히틀러가 집권하기 한참 전부터 유대인을 욕하고 다녔는데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독일에 있다가 봉변을 당한 이유 중 하나도, 그들 자신들부터가 자신은 유대인이기 이전에 독일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 TV 미니시리즈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에서도 주인공들 중 1명인 유대인의 나이먹은 아버지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며 독일을 탈출해야 한다는 아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난 [[제1차 세계 대전|1차대전]] 때 독일을 위해 싸웠던 참전용사인데 설마 어떻게야 하겠느냐'[* 작중 나레이션에 의하면 병으로 입대해서 부사관까지 진급했다고 한다.], '진정한 독일 시민이라면 정부의 정책을 믿고 지시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도리다'라며 가만히 있다가 결국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서 사망한다.[* 실제로 유대계 독일인들 중 1차대전때 참전한 사람이 많았다. 당시 독일내 유대계는 약 5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이중 10만명이 1차대전에 참전했으며 18000명이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나치는 그들이 참전을 했든 안했든 신경을 안 쓰고 그냥 죄다 유대인으로 취급해서 강제수용소로 보냈다.[[https://en.wikipedia.org/wiki/German_Jewish_military_personnel_of_World_War_I|#]]][* 멀리갈 것도 없이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대표하는 일기를 쓴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도 [[독일 제국군]] [[장교]] 출신이었다.] 다만 이 사람은 1차대전 참전 경험 때문에 같은 참전용사 출신인 히틀러를 지지하고 [[나치 독일]]에 동조하는 인물이었다. 유대인이면서도! 자신도 유대인이라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유대인이기 이전에 독일 국민'이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정서는 19세기에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는데, 시오니즘의 아버지 [[테오도르 헤르츨]]조차 젊을 때 합스부르크에 충성하는 독일민족주의자로서 "중부유럽 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주류사회에 편입하여 선진국민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이러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실화를 베이스로 한 이야기기 때문에 적어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고는 할 수 있는 셈. 사족이지만 히틀러와 나치는 집권 초기만 해도 대단히 인기가 많았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탄압도 단계적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블라덱]][*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자 아티의 아버지.]: 어느 노인이 있었는데 우리가 점호 받을 때마다 늘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거야... >(회상) >남자1: 난 저 유대인 놈들과 폴란드 놈들 사이에 있을 수 없어요! 나도 당신들처럼 독일인이란 말이요! 난 황제에게서 받은 훈장도 있어요. 내 아들은 군인이구요! >블라덱: 하지만 때리고 비웃기만 했지. >(회상 끝) >[[아트 슈피겔만|아티]][* 아트 슈피겔만. 블라덱의 아들이자 쥐의 작가.]: 그는 정말 독일인이었나요? >블라덱: 누가 알겠니, 독일인 죄수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독일인들에겐 이 친구 역시 유대인이었지! >----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쥐]] 2부 2장 中.[* 한국판 합본 214페이지] 이 일화에 나온 수감자가 항의하는 장면에서는 처음에는 쥐(유대인)으로 나오고 두번째는 고양이(독일인)으로 나온다. 수감자는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용소 경비병들한테는 그냥 '유대인'이었다는 이야기다. 이 수감자는 이렇게 항의하다가 결국 밖으로 끌려나가서 짓밟혀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처럼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유대인' 집단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반유대주의가 철저히 금기시되기 이전까지 서구 문화권 국가 전반에서 반유대주의가 만연해 있었고, 이처럼 반유대주의가 만연했던 근세~근대 초중반까지는 오히려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으로 유대인을 억누른 다른 지역에 비해 독일 문화권이 오히려 유대인들이 터 잡고 살기에 유리한 지역이었던 것부터 생각해야 한다. 일본의 동유럽 문제 전문가이자 작가인 요네하라 마리에 따르면 루마니아 등 원래 독일계 인구 비중이 적은 지역에서는 독일식 성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대인을 구별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져있을 정도로 독일 문화권이 중-동부 유럽의 유대인 사회의 거점이었던 것. 이처럼 상대적으로 차별이나 박해가 덜 한 독일 문화권 지역에서 여러 대에 걸쳐 정착하고 대를 이어 살아온 유대인들이 그 지역 사회에 정착하고, 국가에 대한 소속감 역시 가지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상태에서 대학살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나치가 정한 유대인 기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유대인 외모를 가진 자는 유대인으로 규정한다거나 상당수 독일계 유대인은 제외되거나''' 등의 객관성, 일관성은 아예 없는 [[왜곡]]된 기준들이다. [[충공깽]]한 수준. 즉 히틀러는 그저 감정의 [[희생양]]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이 다시 세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선 전쟁이 필수였고, 전쟁은 곧 돈이다. 막대한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자국민을 갈취해댔다간 히틀러 자신이 찍혀나가니, 자국 내 필수품 사업체 여러 개를 운영하는 돈 많은 떠돌이 민족 유대인은 여러모로 히틀러의 좋은 타깃이었다. 또 당시 유대인들은 영토나 국가가 없어 차후 합법적 보복이 불가능하다 판단될 정도로 만만한 [[희생양]]들이기도 했다… 만약 유대인이나 집시들이 영토를 가진 정식 국가였다면 종전 후 구체적 피해 금액 요구가 가능해지니깐! 실제로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이스라엘이 건국된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홀로코스트라는 게 있었다 수준이었지만, 미국의 중동/아랍지역에 대한 인식 변화로 인해 이스라엘이 주목받고, 홀로코스트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 것에 비해, 집시, 공산주의자, 기타 반 나치주의자들에 대한 보상 및 사과는 매우 미흡하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거기다 나치 고관들은 자신의 친구나 지인이 유대인이거나 했으면 '''그들은 학살에서 쏙 빼주기도 했다. 당장 위에 언급된 [[헤르만 괴링|돼지]]는 물론이요 그 히틀러마저도!''' 가령 에두아르트 블로흐(Eduard Bloch)라는 유대인 의사는 히틀러의 어머니를 치료해주고 치료비를 깎아준 적이 있어서 히틀러가 그를 대단히 좋아했다. 1940년까지 히틀러의 특별 보호를 받았고 "모든 유대인이 블로흐 같았다면 유대인 문제는 있을 수가 없다"라는 발언까지 할 정도였다. 블로흐는 유대인 탄압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1940년에 미국으로 이주하긴 했지만 재산을 제대로 챙겨서 갈 수 있을 정도로 대우를 받았다. 또한 1차세계대전 때 본인이 속한 연대의 지휘관이었던 에른스트 헤스(Ernst Moritz Hess)도 특별히 봐준 적도 있으며 거기에 [[에밀 마우리스]](Emil Maurice) 또한 유대인 혈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당원 초기부터 같이 지내던 인맥으로 [[하인리히 힘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직접 명예 아리아인 칭호를 주면서 슈츠슈타펠의 장교직에 붙었다. 결국 나치 기준으로도 '''자기가 유대인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 조상님들 가운데 유대인이 있다는 걸 알지도 못했던 사람도 하루 아침에 유대인으로 찍혀서 끌려가서 살해당할 수 있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당사자들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이는 편협한 인종주의가 극단적으로 치달을 때 얼마나 위험하게 변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실 이전에도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있었지만 나치처럼 무조건적 말살을 당연시한 사례는 없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결정적으로 유대 사회는 모계 사회이다.''' 이 원칙은 기원 후 70년 이스라엘이 로마에게 완전히 멸망하고 유대인들이 전 세계[* 중국까지 진출. [[카이펑 유대인]] 항목 참조.](특히 [[유럽]])로 흩어지면서 아버지가 누군진 몰라도 엄마는 누군지 확실히 알 수 있기에 지켜져 왔던 원칙이다. 즉,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남자가 현지인 여자랑 결혼해 아이를 낳고 그 자식도 현지인들과 결혼해 후손을 낳고 또 낳아서, 유대인 사회를 떠나 현지인 사회 일원의 하나로 정착해버린 경우도 많았다. [[유대인]] 남자들이 여기저기서 [[혼외정사|사고 쳐서]] 낳은 [[사생아]]들도 많다. 70년부터 시작된 유대인 민족 대이동은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기 전까지 무려 1863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뤄졌는데 히틀러 그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자신의 어머니도 가계를 쭉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유대계 피가 한 방울이라도 안 섞였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순수 혈통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짬뽕 혈통 유럽 사회에서? 애시당초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도 순수 혈통으로만 이루어진 민족 따위는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 해도 그건 인구가 부족급 단위로 적고 교류도 없었던 곳에나 가능하지 인구는 몇백만 이상의 광역급+교류의 역사도 있었던 곳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그리고 이미 19세기부터 독일의 유대인들은 독일 사회로 적극적으로 진입하고자 했다. 19세기 초부터 독일은 유대인에 대한 제한을 풀어주기 시작했고 말에 이르러서는 [[https://en.wikipedia.org/wiki/Eduard_von_Simson|종교를 개종하면서까지 법학자가 된 사람과]] [[http://www.jewishencyclopedia.com/articles/6362-friedberg-heinrich-von|작위를 받은 판사가 배출된 정도]]였다. 물론 독일에서 인종적 관점에서 관대해진 것보다는 성장한 유대계 상인과 중산층들을 보장해주는 방식으로 거래적인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거래를 통한다고 해도 유대인들에게 독일 주류 사회로 입장하는 최종 관문이 있었는데 바로 독일의 전통적인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발적으로 개종을 할 정도로 유대인들은 독일 사회에 편입하는 것이 적극적이었고 중산층에 유대인들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독일에서 토지를 가지고 농업에 종사하던 유대인의 비율이 적었다는 것, 그리고 중산층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교육을 시키는 유대인들이 점점 늘어난 덕분이다.] 이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자각 없이 자신은 혈통은 유대인이지만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가 영문도 모르고 자신이 충성했던 독일에 의해 홀로코스트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존재했다. 거기다 상술된 제1차 세계 대전의 유대계 독일군의 케이스 및 제2차 세계 대전의 사례를 더 자세히 들어 보면 독일 국방군 뿐 아니라 아주 충격적이게도 빡빡한 혈통 검사로 유명한 [[슈츠슈타펠]] 산하 일반친위대나 [[무장친위대]] 소속 포로들을 잡아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에 조사한 결과 '''놀랍게도 위의 경우처럼 최소 수만 인의 순수 유대인 내지 유대계 독일인 장병들이 근무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병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SS 중장 등의 인물들의 주도 등에 의해 나치 인종법이 계속해서 적용되면서 꼬투리를 잡아 아군마저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이 되는 비효율적이기 그지없는 상황들만 아주 태산이었음에도 그 깐깐하기 그지없었던 친위대 오야붕 [[하인리히 힘러]]는 물론, 히틀러와 라인하르트마저도 그들의 존재를 일부 증명자들만 명예 아리아인 내지 그냥 순혈주의 관점의 순수 아리아인으로 취급하면서 '''추방할 사람들은 추방당했으나 아예 몰랐던 경우는 그냥 지나가는 나부랭이 취급하며 계속 종전시까지 군에 남겨뒀다는 것.''' 물론 유대인 출신들도 전장에선 독일인 동료들한테 물들어서 무슨 행동인지도 뻔히 다 알고도 잔악한 전쟁범죄를 반복한 탓에 은둔하며 살아온 전범들의 비율도 상당히 있겠으나, 그들 중 일부는 혈통에 관계없이 국가에 의하여 행해진 부당한 명령과 살인 제도로 인해 아무런 진실조차 모른 채 자신의 손으로 이웃과 수많은 인명들을 부조리한 환경 속에서 죽여야만 했던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이다. 진실을 안 이들은 뒤늦게 그것을 알았더라도 죄책감에 빠진 채 입을 열지 못하고 쓸쓸히 생을 마감했거나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 때의 악몽 속에서 여전히 괴로워하며 그 때의 쓰라린 기억을 잊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 참상을 담은 시각자료들 == || [youtube(G9tTofpA8Sg)] || || [[수정의 밤]] 당시 독일 [[바덴]]의 부엘 마을을 찍은 영상. 친위대원들과 돌격대원들이 보이며, 시나고그(유대교 회당)가 불타고 있다. 영상에는 안 나왔지만 유대인 상점들 또한 이미 공격받아 파괴된 상황이었다. 당시 이 마을에 살던 유대인들은 도합 70명 가량으로, 이들 중 대부분은 후에 바덴의 다른 유대인들과 같이 남프랑스에 설치된 귀르스(Gurs) 강제 수용소[* 원래 프랑스 정부가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하여 국외탈출한 스페인 공화파 인사들을 억류하기 위해 세운 수용소다. 1940년 본격적으로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독일 등의 적대국 외국인들을 수용하였다. 나치의 점령 이후에는 비시 프랑스의 관할이 되어 유대인, 동성애자 등 나치가 적으로 지정한 이들을 가두는 강제 수용소가 되었다.]로 이송되었다.[* 참고로 이 이동은 2차 대전 당시 중서유럽에서의 유대인 이송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루어진 거의 유일한 경우다. 보통 유대인들은 서쪽에서 동쪽, 또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송되어 부헨발트와 같은 독일 영내의 노동 수용소들, 또는 거의 무정부 상태여서 증거 인멸이 쉬웠던 폴란드에 세워진 절멸수용소들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1942년에 나치가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을 절멸시키기로 결정하자, 이들은 5500명에 달하는 귀르스 수용소의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모조리 [[아우슈비츠|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로 보내져 학살되었다. 위 영상은 마을의 소방수에 의해 촬영되었고, 2000년대 와서 발견되어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 [[파일:attachment/Selection_Birkenau_ramp.jpg]] 열차로 독일령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비르케나우)에 도착한 [[유대인]]들. 한가운데 초점이 맞춰진 집단은 '''아동, 임산부, 노인, 즉 바로 가스실로 갈 집단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유대인]]들도 보이는데, 얼마 안 가 자신들에게 참혹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씁쓸한 장면이다. [[파일:Auschwitz_Resistance_280.jpg]]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의 화장장[* 솔직히 말하면 화장장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유는 그냥 땅을 파서 시신들을 넣은 다음 한꺼번에 소각하는 것이기 때문. 그냥 간부들이 대충 화장장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화장장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시신을 불태워 처리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 존더코만도[* Sonderkommando. 직역하면 특수직무반(Special commamdo)이라는 뜻이다. 수감자들 중 선발되어 수용소 내의 각종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다. '쓸모있을 듯한 놈'으로 보여서 선발된 것이니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지지 않는다는 이점은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그들 또한 수감자였던 만큼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간수들의 채찍질과 같은 엄청난 학대를 견뎌야만 했다. 그러다 결국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면 그날로 처분되었다.][* 촬영자의 신원은 [[그리스]]계 유대인이라는 정보만 있었는데, 그리스 육군 장교 출신으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체포된 알베르토스 에레라(Αλβέρτος Ερρέρα)로 추정되고 있다.]가 은밀히 촬영하였다. 현재 절멸수용소의 살인 공정 운영 장면[* 존재 자체가 철저히 부정되었던 '절멸수용소(Todeslager, Vernichtungslager)'들로 한정한다. 이외 노동수용소나 친위특무대 및 국방군의 집단 학살 행위는 그들 스스로 또는 목격자들이 남긴 수많은 사진자료가 남아있다.]이 촬영된 단 4개뿐인 사진 중 하나로써 그 가치가 매우 막대하다.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gallery/introduction-to-the-holocaust-maps|홀로코스트 - 애니메이션/지도]] 이 사이트에 들어가보면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 [youtube(mroRsZ5ygUY)] || 1941년 7월 말 [[라트비아]]의 [[리에파야]] 시에서 독일군이 벌인 유대인 집단 학살을 촬영한 영상. 영상 출처는 이스라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의 공식 유튜브 채널이다. 당시 리에파야 해변 사구에서는 약 5천에서 7천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아인자츠그루펜|친위대 특무대]]와 보안대 주도 하에 오르포(질서경찰), [[독일 국방군|국방군]](그 중에서도 육군 및 해군) 및 라트비아인 부역자들이 구덩이 속에 유대인들을 한 줄로 세우고 총살한 후 흙으로 덮는 것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영상에서 확인 가능하듯 수많은 국방군, 친위대, 민병대원들과 심지어는 주민들이 이 사건을 목격하고도 막지 않았으며, 오히려 구경하며 학살을 방관하였다. 이 영상은 독일 해군 중사였던 라인하르트 비너(Reinhard Wiener)가 8mm 필름 코닥 카메라를 통해 촬영하였는데, 그가 현장에서 대놓고 기록을 남기는데도 불구하고 제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보면 당시 반유대주의가 친위대, 국방군 가리지 않고 얼마나 일반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 알 수 있다. 비너는 전후인 1981년에 인터뷰를 통해 이 사건의 상세 정황을 설명하였는데, 그 인터뷰 영상 또한 야드 바셈 박물관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https://youtu.be/npypqxdFY1c|인터뷰 영상 1]], [[https://youtu.be/-uOlNSCPs40|인터뷰 영상 2]] || [youtube(htJQOt7r3fw)] || || 전후 미 전쟁부에서 공식적으로 제작한 나치 독일 강제수용소 다큐멘터리. 이미 잘 알려진 부헨발트나 다하우의 모습뿐만이 아닌, 그 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수용소들에서 벌어진 참상이 그대로 녹화되어 있다. || || [youtube(KGE231k62Bs)] || || 독일령 폴란드에 위치했던 [[아우슈비츠|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노동 및 절멸수용소]] 영상. 해방 직후 소련군이 촬영하였다. 한데 모인 희생자들의 물품들과 시체 구덩이를 볼 수 있다. 사망자 수는 약 100 ~ 150만 명으로, 단일 시설에서 학살된 희생자 수로는 세계 최고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생존률은 절멸수용소 치고 매우 높은 20%에 달했는데, 그 이유는 아우슈비츠가 절멸 뿐만 아니라 노동수용소 역할도 같이해 노동자 수용 시설 또한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살을 위한 최소한의 시설만 가지고 운영되었던 여타 절멸수용소들은 대부분 99.9% 이상의 사망률을 보였다. 또한 그 거대한 크기 덕에 여타 절멸수용소들과는 달리 나치의 증거 인멸 시도에도 불구하고 다 파괴되지 않고 상당수가 남아 지금까지 끔찍했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 || [youtube(tilwr2IxvbY)] || || 연합군 장병들에 의해 촬영된 영상들을 바탕으로 미 육군 통신대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콜디츠의 버려진 기차에 수용된 사람들과 오드루스 수용소를 시찰하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아이젠하워 원수]] 및 연합군 조사단의 모습, [[다하우|다하우 수용소]] 및 부헨발트 수용소의 참상 등이 담겼다. || || [youtube(-tGwjwK9pIM)] || || 현재의 [[독일]] [[튀링겐]] 주 [[바이마르]]에 위치한 부헨발트 수용소 및 [[니더작센]] 주의 베르겐-벨젠 수용소 영상. 부헨발트는 노동 수용소로, 약 5만 6천명이 학살되었으며 사망률은 약 25% 였다. 베르겐 벨젠은 피해자들을 절멸 및 노동수용소로 운송하는 도중에 잠시 모아 놓던 집결수용소로, 12만명이 거쳐갔으며 그중 약 5만 명이 사망하였다. 사망률은 약 44%였다. 베르겐 벨젠은 시설이 특히 불결하여 절멸수용소가 아님에도 매우 높은 사망률을 보였는데, 다름아닌 [[안네 프랑크]]가 이곳에서 티푸스로 사망했다. 위 영상은 해방 직후 영국군과 미군이 촬영하였다. 강제 노동과 영양실조, 병으로 죽어간 수많은 희생자들의 말라 비틀어진 시체 무더기 및 화장장의 타다 남은 시신 등이 보인다. 홀로코스트의 끔찍함을 다룬 영상 매체 중 가장 대표적인 영상으로 자주 인용된다. || || [youtube(y6gSinaRrIs)] || || 베르겐-벨젠 수용소 조사 영상. 연합군 조사단이 지역 주민들과 간수들을 징발해 수용소 내에 방치되었던 수천 구의 희생자 시신들을 수습하여 일단 가매장하고, 수감자 및 간수들을 조사 및 인터뷰하는 내용이 담겼다. 해방 직후 영국군이 촬영하였다. || || [youtube(oZA7qDO0-5Q)] || || 독일령 폴란드에 위치했던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구조 및 학살 과정 설명 영상. 트레블링카는 라인하르트 작전 절멸수용소로, 제소자 수용 없이 수용소 도착 '''즉시''' 학살했다. 이곳에서 약 75만~90만명이 학살되었으며, 사망률은 자그마치 ''99.993%''에 달했다. 생존자는 트레블링카 봉기를 일으켜 탈출했던 67명의 존더코만도들뿐이었다. 이렇게 끔찍하게 많은 숫자를 학살했음에도 운영된 기간은 고작 13개월이었다. 1943년에 증거 인멸을 위해 시설 전체가 완벽히 파괴되어 남아있는 기록은 사진 몇 장 뿐으로, 그것도 학살 현장을 담은 사진은 하나도 없다. 같은 이유로, 아우슈비츠나 마이다네크와는 달리 해방 이후를 찍은 영상조차 없다. 이는 다른 절멸수용소들인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 절멸수용소|헤움노]] 및 강제 노동 수용소였던 말리-트로츠테네츠 등도 마찬가지다. || || [youtube(u7cbd6w3nLQ)] || ||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 영상. 이곳은 독일령 폴란드의 [[루블린]] 시에 위치했던 포로수용소 겸 절멸수용소로, 아우슈비츠와 함께 그나마 형태를 보존한 절멸수용소이기도 하다. 희생자 약 9만 ~ 15만. 이 영상은 전후에 공산 폴란드에서 기록영상들을 바탕으로 제작하였다. || || [youtube(xCR2zS4XUe8)] || || [[독일]] [[바이에른]]에 위치한 [[다하우|다하우 수용소]] 영상 1. 해방 직후 미군에서 촬영하였다. 다하우는 나치 독일 최초의 강제수용소로, 노동수용소에 해당한다. 19만명이 거쳐갔으며 그 중 3만 2천명이 사망하여 사망률은 약 16%였다. 다하우의 해방 직후, 그 참상에 분노한 미군의 일부 병사들에 의해 항복한 SS병사 약 50명이 역으로 학살되었다. 학살에 참여한 병사들은 형식적인 재판 후에 풀려났고, 아무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 || [youtube(R0c8DLdDzow)] || || [[다하우|다하우 수용소]] 영상 2. 해방 직후 미군에 의해 촬영되었다. 컬러 복원 영상을 바탕으로 제작됨. || || [youtube(czbUP6cl2NE)] || || [[독일]] [[바이에른]]에 위치했던 플로센베르크 수용소 영상. 노동수용소로, 희생자 약 3만이다. 사망률은 약 30%. 위 영상은 해방 직후 미군이 촬영한 영상을 재구성하였다. || || [youtube(enCAe-tWE2s)] || || 야세노바츠 강제 노동 수용소 및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홀로코스트 참여 관련 다큐멘터리. 기록영상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다. 야세노바츠는 강제 노동 수용소로, 독일의 괴뢰였던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우스타샤]]가 운영했다. 독일의 수용소들 못지않게 잔혹하게 운영되었는데, 가스 밴을 통한 살해 방법 외에도 수많은 살해 방법이 동원되었다. 산 채로 불에 태워버리거나 수확용 단도로 목을 그어대기도 했으며, 기중기를 통해 교수형시키고 그 시체를 사바 강에 던져버리는 방법의 학살 또한 자행되었다. 때문에 이곳은 발칸의 아우슈비츠로 불리며 악명을 떨쳤다. 총 희생자는 약 10만에서 70만 사이로, 희생자 중 유대인(약 5만)보다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인의 비중이 매우 높았던 것(50만)이 특징이다. 희생자 수에 대해 운영주체였던 크로아티아와 피해자인 유대인 및 여타 남슬라브인들간의 주장 차이가 극심하다.[* 이 때문에 야세노바츠를 절멸수용소로 볼 것인지에 관하여 의견이 갈린다. 일단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절멸수용소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6곳이고 야세노바츠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 문제는 결국 해결되지 않고 유고슬라비아의 내부 갈등 요소로 남아 전후 50년 뒤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벌어지는 한 원인이 된다. || || [youtube(M2u2RI1Lb-s)] || || 유대인인 솔로몬 파이거손(Solomon Feigerson)이 리예파야 학살 당시를 증언한 인터뷰 영상. 그에 따르면 그가 11살이었던 1941년, 리예파야의 유대인들은 독일군의 진주 이래로 가택 연금 상태였다가 라트비아인 부역자들의 손에 이끌려 수용소로 보내졌고, 이들은 매질을 받으며 운동장에 집결된 후 차례로 집단 처형을 받을 예정이었다. 여기서 유대인들의 운명은 둘로 나뉘었는데, 슈트롤(Schtroll) 대령이란 국방군 장교가 수용소를 찾아와 코르크 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을 뽑아갈 때 따라간 사람들은 살았으나, 그렇지 않은 이들은 위 비너가 촬영한 영상에서처럼 독일군의 손에 모조리 학살되었다. 파이거손과 그의 형제 및 어머니는 코르크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이 없었음에도 슈트롤 대령을 따라갔지만, 다행히도 슈트롤 대령이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자신을 따라온 유대인들 중 코르크 공장 노동자가 아닌 이들을 다시 선별해서 학살 현장에 돌려보내지 않고 모두가 그의 코르크 공장에서 일하게 해 주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만 파이거손의 어머니와 동생은 1942년의 학살은 피하지 못했다. 파이거손 본인은 도망쳤지만 곧 잡혀 카이저발트([[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리투아니아 소재.)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리나 골드블라트(Lina Goldblatt)란 여자와 그녀의 딸과 함께 지냈다. 1944년 8월 슈트트호프 수용소로 이감되었다가 1945년 4월 500명의 수감자들과 함께 발트 해로 나가는 배에 태워졌는데, 이는 발트 해에 이들을 수장시키기 위한 나치 독일의 계획이었다. 배는 표류하다 노이슈타트로 진입했고 이때 독일인들의 총격으로 죽을 뻔했으나 때마침 도착한 영국군에 구조되었다. 전후에 그는 라트비아로 돌아가 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이스라엘로 이주하였다.] 반면 같은 아파트에 살던 파이거손의 친척들은 수용소에 남았고, 다음날 모두 살해되었다. || || [youtube(ppLbu3hcFPI)] || || 1941년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직후 [[르비우]] 근처의 츨로키프(Zolochiv)에서 벌어진 유대인 색출. 영상 속에서 주민들과 친위대원, 국방군 병사들이 웃으면서 구경하는 가운데 이웃들이었던 우크라이나계 민병대원들에게 일방적으로 폭행당하는 유대인 남성은 영상이 촬영된 다음 날 [[아인자츠그루펜|나치당 친위특무대]]에 의해 총살되었다. 위 영상이 찍힌 당시 르비우 일대에서는 친위대, 우크라이나인, 국방군이 5일간 약 3000명의 유대인을 살해하였다. 굵직한 학살은 주로 독일군 남부집단군 사령부의 묵인 하에 국방군 병사들과 친위대원들이 수행했지만 위와 같이 우크라이나인들이 협력한 경우도 많았는데, 폴란드인에 대한 민족감정과 나치 독일의 프로파간다가 결합한 결과였다. 당시 독일은 소련 정부의 탄압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이 주로 희생되었으며,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이에 부역했다며 우크라이나인들을 선동하였다. 그 결과 분노한 일부 우크라이나인들이 자체적으로 또는 독일군에 협력하여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것이다.[* 독일군 진주 전 소련 NKVD의 집단처형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이 학살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유대인들이 이에 부역했다는 것은 거짓.] 그리고 소련과 독일 이전에 우크라이나 서부를 지배했던 폴란드에 대해서도 민족 감정이 폭발하여, 폴란드인들 또한 [[스테판 반데라]]가 이끄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무더기로 살해당했다. 이 사태는 불과 두 달 후 우크라이나에서 반데라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못마땅해한 독일이 우크라이나인들 또한 마구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훨씬 더 복잡한 양상으로 치닫는다.[* 구 소련 지역에 독일 민족의 생활권(Lebensraum. [[레벤스라움]])을 건설하고 '열등한' 슬라브인들을 제거하고자 했던 독일에게 우크라이나인은 협력자가 아닌 절멸되어야 할 잠재적인 방해요소였기 때문이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인정받은 것은 레벤스라움의 권역에서 멀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크라이나는 독일군과 소련군, 반데라주의자들이 삼파전을 벌이는 와중에 유대인을 포함한 소련 민간인들이 무의미하게 희생되는 지옥으로 변모한다.] 당시 서부 우크라이나의 끔찍한 실상은 [[폴란드 영화]] [[증오(2016)|증오(원제: 볼히니아)]]에서 아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 || [youtube(QCOtgQw_iFk)] || || 전후에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크라쿠프 게토 생존자들의 '기억의 행진.' 한때 최대 7만 명에 달했던 크라쿠프의 유대인들은 전쟁 기간 동안 추방당하거나 베우제츠와 아우슈비츠 등지에서 살해되어, 1000명 정도만이 살아남았다. 위 영상은 2019년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독일 공영방송 [[타게스샤우]]가 촬영하였다. || == 알려진 피해자들 == === 희생자 === * [[막시밀리안 콜베]] - 폴란드인 가톨릭 사제 * [[안네 프랑크]] - 독일계 네덜란드 유대인 학생 * [[에디트 슈타인]] - 독일계 유대인 수녀 === 생존자 === * [[로만 폴란스키]] - 폴란드계 유대인 영화감독 * [[마르틴 니묄러]] - 독일인 루터교회 목사, 신학자 * [[말라 슈피겔만]] - 폴란드계 유대인 주부 * [[빅토르 프랑클]] - 오스트리아인 심리학자 *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 - 폴란드계 유대인 사업가 * [[시몬 비젠탈]] - 유대인 나치 사냥꾼 * [[아냐 슈피겔만]] - 폴란드계 유대인 주부 * [[엘리 비젤]] - 루마니아계 유대인 작가 * [[오토 프랑크]] - 독일계 네덜란드 유대인 사업가 * [[프리모 레비]] - 이탈리아계 유대인 작가 * 설러미터 헤이먼 - [[WWE]]의 프로듀서 [[폴 헤이먼]]의 어머니 == 기타 == * 산업적 학살을 위해 독가스를 사용한 최초의 국가가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아니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통령[* 프랑스 제1공화국의 최고지도자는 한국어로 통령이라 번역된다. 대통령은 제2공화국의 [[나폴레옹 3세]]부터이다.]이던 당시의 [[프랑스 제1공화국]]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클로드 리브(Claude Ribbe)[* 카리브계 프랑스 작가.]이 2005년 저술한 '나폴레옹의 범죄들: 히틀러를 위한 청사진'에 따르면, 1801년 나폴레옹의 명을 받고 출동한 르클레르의 프랑스군은 [[아이티 혁명]]을 잔혹하게 진압하곤 포로들을 가스실로 개조한 함선의 선창에 처넣어 이산화황으로 질식시켜 살해했다. 그리고는 가스선을 먼 바다로 몰고 나가 시체들을 바다에 갖다 버렸다. 클로드에 따르면 이 학살이 벌어진 이유는 이러하다. 아이티는 [[프랑스 식민제국|프랑스 제1식민제국]]의 주요 수입원이었고, 그 핵심에는 아이티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있었다. 이 플랜테이션은 노예들을 통해 운영되었는데, [[프랑스 혁명]]의 자유 사상을 접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기존의 흑인들을 그대로 놔두면 노예 노동에 방해가 될 것이었다. 때문에 나폴레옹은 반란 세대를 모조리 제거하고 자유 민권 사상에 물들지 않은 새 노예들을 아프리카에서 데려오고자 했는데, 한 섬의 인구 전체를 신속하게 말살하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연구 끝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가스실 학살법이 고안되었다. 클로드는 그렇게 설치된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은 아이티 흑인들이 10만 명을 상회한다고 주장하였다. 단, 논란은 존재하며 나폴레옹의 가스실 학살의 명백한 근거 또한 부족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가스학살도 발달한 기술력 등이 있어야 가능한 건데 당시의 기술력으론 좀 힘들다.] 때문에 이 주장은 여러 반박을 받아 아직까지는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HpkV&articleno=6862413|#]] * [[유대인]]의 시체에서 지방을 짜내 [[비누]]를 만들었다는 것은 [[도시전설]]이다. 자세한 것은 "[[인체 비누]]" 문서 참고.[* 가죽을 벗겨서 책(나의 투쟁)을 만들었다거나, 나치 전범 중 1명인 한스 뮌히는 유대인 시체가 잘 타지 않자 유대인들을 시켜 시체의 지방을 짜내 시체에 부었다는 등의 루머가 있다.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 시체에 휘발유를 뿌려 불태우면서 시체에서 나오는 기름을 다시 퍼부어 더 잘 타게 했다는 말은 있다.] *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내기 위한 운송수단은 [[철도]]였는데 가축을 싣는 화물칸에 말 그대로 가축수송과 같이 운송했다. 그 와중에 나치가 정식으로 열차표를 팔아서 철도운임비를 뜯어낸건 덤. * [[아트 슈피겔만]]의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자신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과 전후 세대인 그 아들(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충격적인 실화가 나오는데 전쟁이 끝난 후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해방되었는데도 유대인 학살이 계속되었다. 그 이유는 나치는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면서 귀금속과 돈, 돈될 만한 물건들은 나치가 갖고, 가질 수 없는 토지나 집, 공장은 폴란드인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전쟁이 끝나면서 유대인들이 돌아오자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차지한 집과 토지를 돌려주기 싫었던 폴란드인들은 돌아온 유대인을 죽이거나 추방시켰다. 작중 나오는 대사가 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이런 꼴을 당하려고 그 지옥을 빠져 나온 거죠."''' 이런 일들은 전쟁이 끝난지 1년이 지나서야 [[폴란드]]가 안정을 찾자 중단되었다. 다큐멘터리 "아우슈비츠"에서는 살아돌아온 유대인이 고향에 있는 자기 집을 되찾으려고 하자 그 유대인의 집을 차지하고 있던 새 주인은 그 집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고 보물을 찾기 위해 그 집을 철거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은 폴란드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 지배당하거나 협력했던 모든 국가들에서 있었다. * 탈출, 혹은 연합군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되자 굶주려 있던 유대인들은 연합군이나 민간인들이 주는 음식을 먹다가 [[토사곽란]]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랫동안 못먹어 작아져 있던 위장이 갑자기 많은 음식을 섭취하게 되니까 놀란 것이다. 이는 당시 생존자들의 공통적인 증언이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나치의 만행에 분노한 이지 중대원들이 유대인들에게 독일 민간인들에게서 징발한 빵과 치즈를 나눠주다 군의관에게 제지받는 장면이 있다. 그나마 서방 연합군은 이 정도였지만 의료체계 및 수준이 뒤떨어지는데다 작전 환경 특성상 기름이 매우 많은 전투식량을 보급받았던 소련군은 유대인들에게 먹을 것을 지급했다가 유대인들이 그걸 먹고 죽어서 당황했다는 기록이 간간히 있다. [[대숙청]]으로 [[굴라크]] 신세를 진 소련군들도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보고 경악했다. 소련의 굴라크는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합리적인 면은 있었다. 그러나 나치는 "수용소=사형장"이라는 공식이 적용되어 소련보다 더 비인간적으로 운영되었다. * 1944년 7월 소련이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를 점령하면서 처음으로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알게되었다. 이런 학살극을 보고 소련은 놀라서 별도의 조사위원회를 꾸려서 조사했고, 모든 자료를 기록하고 영상으로 만들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소련과는 별개로 1943년에는 [[폴란드 국내군]] 요원으로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비톨트 필레츠키]]가 아우슈비츠에 대한 정보가 담긴 [[https://en.wikipedia.org/wiki/Witold%27s_Report|비톨트 보고서]]를 제출했고, 1944년엔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en/timeline-event/holocaust/1942-1945/auschwitz-report|아우슈비츠를 탈출해 스위스에 도착한 슬로바키아 유대인들]][* 같이 탈출한 유대인인 [[https://en.wikipedia.org/wiki/Rudolf_Vrba|루돌프 브르바]]와 [[https://en.wikipedia.org/wiki/Alfr%C3%A9d_Wetzler|알프레트 베츨러]]는 독일이 패망한 뒤 각각 캐나다와 체코슬로바키아에 정착해서 천수를 누렸다.]이 헝가리 유대인 기자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Mantello|죄르지 만들]][* 이탈리아식 이름은 조르조 만텔로. 2차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에 정착. 스위스를 통해 유대인들을 피신시켰다.]를 통해 아우슈비츠의 실상을 알리기도 했다. 의외로 서방 측에선 보도가 소련보다 늦었는데, 너무 어마어마한 내용이라 연합군의 지원을 더욱 요구하려는 프로파간다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서방 연합군이 실상을 알게 된 것은 해를 넘겨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해서, 오드루스 수용소와 부헨발트 수용소에 도달하게 되면서였다. 연합군도 이런 참극에 놀랐고, 사령관들이었던 아이젠하워, 패튼, 브래들리는 그걸 믿지 못해서 오드루스 수용소를 직접 보러 방문하기도 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패튼은 건물 뒤로 돌아가서 구토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괄괄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장군답게, 그 지역 근처에 사는 독일인 수천명을 모조리 불러모아서, 강제로 그러한 학살광경을 보게했다.] 그 보고가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연합군은 기자들에게도 이를 보게하고,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 [[대체역사물|대체역사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면서 홀로코스트가 멈추지 않고 지속되어 유대인 '''1,100만''' 명이 살해되고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유대인이 아예 전멸했다. 독일인들에게 유대인은 '''옛날에 분명히 있었는데 이제는 사라진''' 존재 정도로 거의 잊혀졌고, 홀로코스트의 존재는 극소수의 나치 간부들만 알고 있다. *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물|대체역사소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남북전쟁]]에서 [[아메리카 연합국]]이 승리한 것을 시작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 북부와 독일이 승리한 뒤 남부에서 파시즘이 대두되고, 유대인 대신 [[흑인]]을 대상으로 홀로코스트가 시행된다.[* 그런데 실제 미국인이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제일 증오하는 인종은 흑인이 아닌 유대인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노예제 폐지가 북부에 사는 유대인의 음모라고 생각하기 때문.] * 유대인 중 상당수가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향했다. 이와 관련된 [[음모론]]도 많다. * 홀로코스트의 최고령 생존자인 앨리스 헤르츠좀머 씨가 2014년 2월 24일에 11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http://www.bbc.co.uk/news/world-europe-26318383|#]] * 앞서 언급된 것처럼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다. 동성애자, 집시, 공산주의자, 여호와의 증인, 장애인들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특히 [[집시]]들은 '포라이모스(Porajmos)'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 유명한데, 적어도 80만 이상이 죽거나 이로 인해 유럽내 집시 인구가 소수민족 중에서도 존재감이 미미한 수준으로 줄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많다. 다만 집시들은 유대인과 다르게 홀로코스트가 아니라 국방군 등에 의한 무자비 학살의 대상으로 희생당한 사람도 많고, 정확한 기록이 부족하여 사망자수가 유대인보다 훨씬 부정확하다. 그래도 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고 1944년 8월 2일 하루에만 4,000여 명의 집시들이 학살됐다. 지금도 살아남은 집시들은 '집시들의 날'을 제정해서 이들의 희생을 추모한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희생에 대한 동정여론은 모두 유대인들에게 돌아갔고, [[독일]]과 [[스위스]]의 배상금은 유대인 희생자도 아닌 [[시오니즘]] 단체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건국비용으로 소모되었다. * 동성애자들도 마찬가지로, 희생자들은 5,000명에서 15,000명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주로 [[게이]]들이 많이 학살되었다.[* 이건 당시 서양에서 여성은 2등국민으로 취급되어 동성애를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후 배상도 가장 차별받은 케이스였는데, 당시 동성애자들에 대한 유럽, 아니 세계의 사회적 시선은 그야말로 벌레 보듯한 시선이었기 때문이다(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한 영국의 [[앨런 튜링]]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화학적 거세를 받았을 정도다.). 1960년대 후반에야 동, 서독에서 관련법이 제정되었다. 나치는 이들에게 분홍색 역삼각형 문양을 붙였는데, 이것을 뒤집은 분홍색 삼각형은 '''핑크 트라이앵글(Pink Triangle)'''이라고 하면서 게이 인권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 대량 학살이야 인류 역사상 흔히 일어난 일이었지만, 수백만 명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는 사실은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제국주의 시절 때의 학살도 이야기가 많지만, 그래도 멸절을 목표로 학살을 저지른 경우는 매우 드물다. 수탈이 기근으로 이어지거나, 전염병이 돌거나 하는 간접적인 희생자가 가장 많고, 직접적인 학살도 잔혹해봐야 반항하는 지역 하나를 본보기로 말소하는 정도지 그 인종 자체를 없애버리겠다고 저지른 경우는 없다. 스페인의 아즈텍 정복 당시에는 심지어 동맹을 맺은 원주민들에게 그 대가로 자치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틀락스칼텍]]이 대표적인 예.] 영화와 미디어 사업을 꽉 쥐고 있는 게 유대인들이었던 만큼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소재로 나왔다. 하지만 중동에서는 요새국가화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해지는 데다가 해외의 유대계들도 이에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짓을 터뜨려서, "지금의 이스라엘이 과거 나치랑 다를 바가 뭐냐."라는 비난의 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덕분에 홀로코스트는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불쌍한 유대인"이라는 이미지는 날아가버려서 홀로코스트 관련 영화가 나오면 호불호가 갈리는 등 예전만한 평가를 못 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디파이언스(영화)|디파이언스]]와 1943년 유대인 게토 봉기를 다룬 영화 업라이징.[* 하지만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의 경우 같은 홀로코스트를 주요 내용으로 삼았지만 일방적으로 유대인 옹호와 나치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열한 유대인', '좋은 독일인' 등 보다 작품을 입체적이고 중립적으로 만들어 놓아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 사실 홀로코스트에 앞서 벌어진 멸절 학살의 시초로 보는 게 있으니 바로 [[아르메니아 대학살]]이다. 1915~1918년 사이에 오스만 제국에서 아르메니아 및 아시리아인, 아랍 무슬림들을 절멸하려는 계획을 잡아 150만 가량 아르메니아인들이나 60만 이상 아시리아인들과 아랍인들이 마구잡이로 학살당했다. 하지만, 철저하게 잊혀졌고 1933년 히틀러는 연설에서 지금 아르메니아 학살을 기억이나 하냐고 홀로코스트도 얼마든지 넘어잘 수 있다고 주장할 정도. 결국 이 학살은 1965년에서야 [[우루과이]]가 인정했고 세월이 지나 1990년대에 오면서 [[아르메니아]]가 독립하면서 비로소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얄궂게도 아르메니아와 사이가 안 좋은 이스라엘이 이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 게다가, 아르메니아인 학살로만 인식되어 아랍권 무슬림 학살은 넘어가냐고 분노하고 2020년 아제르바이잔과 전쟁을 벌이던 아르메니아에 대하여 아랍권과 이스라엘의 외면 및 이스라엘의 아제르바이잔 강력지원 등이 곁들어 아르메니아가 패하고 말았다. * '정말 600만이 죽었나'라는 책에선 실제론 이 수치가 매우 부풀려졌다고 주장했다. 최대로 추산해봐야 40만이 넘지 않는다고 하는데…문제는 이거 저자가 영국민족전선(British National Front)의 부의장과 당 기관지 편집장을 지냈던 사람이라는 것. 이 영국민족전선은 쉽게 말해서 영국의 [[네오나치]]들이다. 정당은 백인만 가입할 수 있고, 정책도 백인을 제외한 사람들의 이민을 금지한다는 등 극우 파시스트에 [[인종차별]] 성향을 보인다. 당연히 이 책에도 객관적인 시각따윈 없고, 그 어떤 역사학자도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 다만 학살자 수가 부풀려져 있다는 주장이 위에 네오 나치 같은 또라이가 아닌 이들도 제기한 사항이다. 이를테면 1950년대 이스라엘에서도 200~400만 정도로 추정했다는 것. 그런데 학살자 수를 더 늘려서 배상금을 더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바로 유대인이자 조부모가 아유수비츠에서 학살당한 노르만 핀켈슈타인이다. 당연히 나치에 대해서는 이를 갈고 있으며 학살극의 존재를 분명히 인정한다. 다만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돈벌기 사업으로 쓰며 피해자 상당수에게 돈을 안 주며 엉뚱한 사람이 가로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핀켈스타인은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책자로 피해 보상금을 일부 시오니즘 극단주의자들 배를 채우게 했다고 비난하며 나아가 팔레스타인에서 나치가 하는 짓을 유대인이 벌인다고 비난하고 있다. [[놈 촘스키]] 또한 유대인이지만 그도 1950년대 200~400만이 갑자기 수가 늘었다면서 돈 더 달라고 하곤 그걸로 이스라엘 건국과 일부만 배를 채운 더러운 보상금이 되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실제로 2010년대에 이스라엘은 학살 피해자가 더 있다고 주장하며 돈 더달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독일이 그동안 준 돈은 뭐냐며 이번에는 안 준다고 맞서고 있고 노엄 촘스키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산업이라고 비난했다. * 2015년 10월 21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http://www.huffingtonpost.kr/2015/10/22/story_n_8354022.html|홀로코스트는 팔레스타인이 히틀러에게 사주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발언하여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당시 팔레스타인 인사인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가 친나치 활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네타냐후는 아예 대놓고 팔레스타인 때문에 유대인 학살이 발생했다고 주장해 버린 것.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냥 묻혀졌다. 미국에서도 이렇더라 보도하고 그랬냐? 넘어갔으며 극단적인 일부 유대인들만 옹호했다. 놈 촘스키는 "아랍 모두가 나치를 지지했다고 늘려서 엉터리 주장해라"고 비난했다. * 홀로코스트 여파는 폴란드의 민족 구성을 완전히 바꿔 놓을 정도였다. 폴란드는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직전만 하더라도 유대인이 약 3백만 명 가량 거주하여 유대인 비율이 상당히 높은 나라였다. 그러나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일찍 나치 점령지가 되었고, 대규모 수용소를 건립하는 등 가장 혹독하게 학살이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수용소의 죽거나 외국으로 도피했기 때문에 종전 직후에는 이전의 1%인 3만 명조차 남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현재 폴란드는 인구의 대부분이 폴란드계이며 유대인은 극소수인종이 되었다.[* 더 결정적으로, 독일계 주민들이 독일 영내로 추방당하고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2차 대전 전까지 이 두 민족은 폴란드의 주된 소수 민족이었다.) 거주 지역이 소련에 넘어가면서 폴란드인이 97%를 차지하는 거의 단일 민족 국가가 되어 버렸다.] * 이러한 유대인 학살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명백한 범죄행위이지만, 그것이 과장됨과 함께 잘 알려지지 않은 찜찜한 진실 또한 존재한다. 우선, 독일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애도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 방면,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제2제국이 식민지에서 저지른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이나 마지마지 운동 당시의 초토화 작전에 관해서는 2010년대까지 '미안하기는 한데 배상이나 공식적 사과 같은 건 좀 그런데...' 식의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현재 [[이스라엘]]과 [[유대인]]이 상대적으로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크다는 점(반대로 오늘날의 [[나미비아]]와 [[탄자니아]]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덜하고 저개발국인 점)과, 유대인 또한 백인인 반면 중남아프리카에는 흑인이 많은 점을 고려하면, 이 또한 일종의 국가적/인종적 차별이 아닌가, 또한 오늘날 이스라엘이 저개발국이거나 유대인의 영향력이 오늘날처럼 막강하지 않았으면 독일이 진정한 사과를 했을까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는 시선도 있지만 독일이 자신들이 거의 전멸시킨 집시들의 보호에 유럽 국가중 제일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점이나 체코 침공날이나 2차대전 발발일인 9월1일과 종전기념일날 폴란드와 체코 그리고 벨기에 러시아 등이 추모를 하는 것을 보아 앞선 시선에 대한 반론이 강한 편이다. 물론 이런 독일의 모습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가면이라고 비난하는 시선이 가장 큰 피해를 본 동유럽에서 강하게 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 연합군의 전쟁 중 벌인 범죄나 다른 독재자들의 학살을 빌미로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물타기 하려는 자들도 있다. 아니, 꽤나 많다. 하지만 여타 독재정권에 의한 희생자는 그들이 직접적으로 지시한 학살 또한 정치적인 의미의 학살로, 자신의 체제에 반하는 자나 또는정적이라는 '계층'또는 '정치집단'을 타깃으로 했다. 따라서 이는 사실 역사적으로 계층 간의 반목이나 정치적인 대립이 발생했을 시에 우발적으로, 또는 계획적으로 숱하게 일어났던 학살들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이러한 학살은 보통 대립 상황이 수그러질 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나치의 경우 어느 한 '''인종 자체를''' 유전적으로 열등하다는 이유만으로 '''태생적인 '존재 가치' 자체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전무후무하다. 그리고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타국을 침공하면서 이루어졌지만, 결정적으로 본국에 살던, '''자신이 스스로 독일인'''이라고 여기던 유대인들까지 학살한 것이다. * 네오 나치들이나 [[영국]]과 [[윈스턴 처칠]]에 대한 반감을 가진 좌익들에[* 다만 영미권을 증오하는 한국 [[넷우익]]들도 똑같이 벵골 대기근을 들먹이며 처칠이 히틀러보다 더 잔인한 학살자라고 깐다.] 의해 [[벵골 대기근]]이 자주 거론되며 물타기가 이루어지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완전히 왜곡된 것이다. 보통 '독일로부터 영국을 구한 윈스턴 처칠은 세계대전 당시, 미얀마를 점령한 일본의 인도 침략을 우려해 벵골 지역의 쌀을 모조리 뺏어가고, 수백만의 [[벵골]] 지역의 주민을 굶겨 죽임으로써 학살한 적이 있다. 심지어 인도가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처칠은 이를 묵살하고, 미국과 호주가 벵골 지역에 대해 도움의 손길을 뻗었으나 처칠은 상륙 불허로 대답해 무려 700만의 인구를 굶겨 죽인 적이 있다.'라는 말들이 나도는데,[* '''물리학자''' 마두스리 무케르지의 서적에서 인용된 내용이다.] 이것은 악의적인 왜곡이다. 당시 대기근이 일어난 1943년은 일본 해군이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해역에서 전력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안전한 수송루트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였고 일본군의 버마 공세로 인해 육지 수송로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Bengal_famine_of_1943#Debate_over_primary_cause(s)|해당항목을 보면 42년 1월부터 43년 5월까지 추축군이 인도양에서 약 87만톤의 영국과 연합군의 상선을 격침시켰다고 나온다.]] 현 항목은 수정되어 2018년 1월 10일 이전의 내용에 기재되어 있으며 현재 항목에는 [[https://en.wikipedia.org/wiki/Bengal_famine_of_1943#1942%E2%80%9344:_Refusal_of_imports|당시 일본군의 인도양 진출때문에 수송의 어려움에 관한 내용]]으로 서술되어 있다. 연합군도 43년 1월이 되어서야 전쟁물자 투입과 연합군 장병들의 투입 비율을 조율하는 카사블랑카 회담을 열었다. 즉 43년 기준이면 연합군이 반격을 막 시작할 때였다. 일본 해군이 완전히 몰락한 것은 44년이었다.] 심지어 [[https://en.wikipedia.org/wiki/Bengal_famine_of_1943#October_1942:_Natural_disasters|42년에는 작물 병충해와 태풍이 같이 발생]]한 최악의 자연재해까지 겹쳤다. 영국 정부도 식민지 인도를 상실할 수 없었기 때문에 43년 9월부터 기아를 막으려고 했으나 탁상행정이었고 이렇게 지원을 온 식량들도 지방 지주와 상인들의 매점매석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전통적으로 지방분권적이던 인도의 지방관들이나 인도 제국의 제후국들 사이에 소속감 따위는 없었기에[* 이는 인도인들이 열등하다거나 특별히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다. 인도는 인도 제국 이전까지 하나의 확고한 정치체제를 길게 유지하며 동질성을 구축했던 적이 없기 때문에 동족 의식이 없었던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아대륙 내의 수많은 다양한 언어 사용자들과 민족들 그리고 서로 다른 종교의 신도들은 각자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수많은 집단들을 외형적으로나마 한데 묶은 것이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제국이며, 인도인이라는 개념은 이 거대한 틀 내에서 수많은 민족들이 간디와 네루를 중심으로 뭉쳐서 영국에 저항한 결과 만들어진 것이다. 즉 지리적 의미의 인도 개념과 달리 민족적 의미의 인도는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원조 물자를 공평하게 분배하기보다는 제 하나 살기 위해 식량을 마구 빼돌린 것. 심지어 위에서 식량 수송을 거부했다는 말과 다르게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보낸 서신에서 호주를 통한 물자지원을 요청했고 전선에 투입되는 물자를 줄여서 기아 대책을 추진했지만 부족해서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출처 Churchill and Roosevelt, Volume 3: The Complete Correspondence, Warren F. Kimball, 117p] 홀로코스트처럼 특정 인종의 말살을 위해서 국가적인 역량을 총동원하여 '''의도적으로''' 대기근을 발생시켰다고 볼 여지는 전혀 없다. 게다가 공식적인 기록에 나타나는 300만 내외의 희생자를 유대인 학살 피해자 수보다 많은 700만으로 부풀리는 것에서도 악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 유명한 프로레슬링 매니저 [[폴 헤이먼]]의 모친이 생존자들 중 한명이다. * 2020년에 네덜란드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1357990|#]] * 의외라면 의외지만 홀로코스트가 벌어지던 당시 이런 유대인 절멸정책에 대해 대놓고 반대는 못해도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던 독일인들이 꽤 있었다.[*내용출처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나치의 병사들》, 민음사.] 그런데 사실 그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는 유대인이 불쌍하다거나 인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당장 출처인 책에 나오는 내용 중에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갇힌 독일군들의 대화들이 적혀있는데, 그 중 하나에서 독일군 포로들은 히틀러의 무능함을 비판하면서 '''그가 잘한 일은 유대인 정책밖에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다름아닌 '''유대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연합군의 보복을 두려워한 것인데, 당시 나치 독일의 군인과 민간인들 다수가 영국과 미국은 유대인 자본가들에게, 소련은 유대인 공산당원에게 지배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홀로코스트의 강도에 대해서도 견해 차이가 있었는데 한 독일군 포로는 전쟁 당시 아버지와의 대화를 회상하면서 자신은 독일 내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동의하지만,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죽일 줄은[* 수용소를 얘기하는게 아니라, 동유럽 점령지에서 [[무장친위대]]가 벌인 유대인 민간인 학살을 두고 얘기한 것이다.][* 단 독일의 일반인들은 홀로코스트가 어떻게 이뤄지는가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말살수용소 현장을 직접 보라고 미군이 독일인들을 끌고 왔을 때 자기들은 몰랐다고 변명한 사람들이 많았던 건 유대인을 거기 끌고 가서 강제노역시키다 필요없어지거나 저항하면 죽인다는 걸 몰랐다는 의미가 아니라, 처음부터 '''분류기준에 따라 노약자와 아이들을 가스실로 보내고 나머지도 처음부터 죽이는 걸 목적으로 노동력만 잠시 쥐어짜는 수준이었다는''' 걸 몰랐다는 의미이다. 나치는 유대인 수용소에 대해 겉으로는 강제노동수용소라고 선전했고, 학살도 SS가 주도하고 국방군은 외곽경비만 맡아서 자세한 실상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나중에 많은 나치 전범들이 유대인 학살수용소에서 근무했음에도 자기는 자세한 건 모른다고 말한 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 몰랐다고 말했다. 이에 아버지는 이런 짓을 계속 벌이면 언젠가는 [[시몬 비젠탈|보복]]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받을 수]]밖에 없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 관련 어록 == === [[나치 독일|가해자]] === > 유대인들은 하나의 인종인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은 아니다. >---- > [[아돌프 히틀러]] > 인종적 오염을 거부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 Und wenn die jüdischen Zeitungen heute noch glauben, durch versteckte Drohungen die nationalsozialiste Bewegung einschüchtern zu können, wenn sie heute glauben, unsere Notverordnungen umgehen zu dürfen, sie sollen sich hüten! Einmal wird unsere Geduld zu Ende sein, und dann wird den Juden das freche Lügenmaul gestopft werden. >... 그리고 아직도 유대 언론들이 국가사회주의 운동을 위협할 수 있고 우리의 방어 조치를 회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의 인내심도 바닥날 것이고, 유대인들의 거짓되고 건방진 주둥이를 닥치게 할 것입니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1933년 2월 10일 포츠담 스포츠궁전 나치당 집회 개회사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1천만 명의 유대인, 아니 세상의, 지구상의 모든 유대인을 죽여야만 나와 동료들은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랬어야만 나와 내 동료들이 적을 절멸했다고 말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난 단순하게 명령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난 그저 멍청한 놈에 불과했을 겁니다.''' 나는 나치 당원들과 똑같이 생각했으며, 함께 지구상에서 유대인을 지워버리고 싶었던 이상주의자였습니다. >---- >[[아돌프 아이히만]] > 강제수용소가 우리에게 안 좋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확실하다. > It is certain that concentration camps had a bad reputation with us. > ---- > [[알베르트 슈페어]]. [[https://www.brainyquote.com/quotes/albert_speer_180012#|#]] > 오늘날 아돌프 히틀러 최고사령부 독일군이 벌이고 있는 전쟁은 엄청난 개혁의 전쟁이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 사상의 세계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견제 없이 발전할 수 있었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의 유대인과 그들의 악당들의 인종 감염 세균을 모두 직접적으로 근절하는 것이다. 2000년 동안 유럽 국가들이 해결하지 못한 유대인 문제는 이제 독일과 전유럽을 위한 국가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해결될 것이다. > ----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1941년 3월 28일 라디오 연설)[[https://en.m.wikiquote.org/wiki/Alfred_Rosenberg|#]] > 전 제가 한 행동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전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해치려고 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저는 그곳에 있었지요. > ---- >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소장, [[프란츠 슈탕글]] === 피해자 === >'''여자들과 노인들이 거리에서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우리에겐 아무 힘이 없고, 길거리에서 우리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만큼 우리는 고독하다. 우리는 너무나 약하다.''' >---- >폴란드 유대인의 회상 >'''“캠프에서의 첫날 밤은 절대로 잊지 못한다. 나의 인생을 긴 밤으로 물들여버린 그날, 일곱 번 저주하고 일곱 번 회개했다...나의 신을 죽이고, 나의 영혼을 짓밟고, 내 꿈을 먼지로 만들어버린 그날 밤을 잊지 못한다. 절대로 이것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설령 내가 신만큼 오래 산다고 해도.”''' >---- > 엘리 비젤, [[노벨평화상]] 수상자[* 생몰년: 1928 ~ 2016. 실제로 아우슈비츠 수용소 비극을 통해서 양친과 여동생과 사별하였던 아픔이 있으며 그 비극담을 통해서 '흑야(원제 : NIGHT)'와 '새벽(원제 : DAWN)'을 펴냈다. 국내에서는 가톨릭출판사에서 한국어 번역본으로 출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시오니즘을 주장하며 팔레스타인인을 죽여야 한다느니 발언으로 결국 나치랑 비슷해졌다는 비난을 받았고 1987년 로널드 레이건이 서독을 방문하여 2차대전 참전군인 추모 묘지를 참배한 것을 나치에 대한 숭배라고 비난하다가 미국에서도 나치가 아니라 강제 징병당해 나가 싸워야하던 이들을 추모하는 묘지를 참배한 것을 나치라고 하다니? 아예 독일인 모두를 나치라고 다 죽이자고 할 거냐는 비난을 듣었다. 이러다보니 노벨평화상 수상이 잘못되었다고 비난도 많이 듣었다. 그런 가운데 2000년에는 [[버나드 메이도프]]의 사기로 수백억이 넘는 재산을 다 잃는 등 늘그막에 심각하게 고생하다가 2016년 7월 2일 병사했다.] > 난 내 눈을 의심했다. 20세기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마치 중세를 보는 듯 했다. (중략) 우리 젊은 유대인들은 비와 추위에 떨며 나라를 지켰다. 이러한 일을 역겨워할 전우들은 없는가? 우린 길가를 걸으며 과거에 함께 좋은 일들을 많이 했던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이제 만족스런 미소를 숨김없이 얼굴에 드러냈다. (중략) 이런 변화는 불과 몇 시간 안에 일어났다. 지금까지 내가 사랑하고 아껴 온 이 나라와 사람들이 갑자기 적으로 돌변했다. 난 더 이상 독일인이 아니었다. 아니, 최소한 독일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몇 시간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내가 갑자기 깨달은 것일 뿐이다. 한때나마 이들(독일인)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적의를 감춰왔던 이들을 신뢰한 것이 부끄러웠다. 순간 이 거리, 아니 전 도시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 때 기분은 형언하기가 어렵다. >---- > 에드빈 린다우[* 출처 : Germans No More: Accounts of Jewish Everyday Life, 1933-1938][* 서프로이센(West Prussia) 지역에서 가게를 운영했던 유대인이다. 훈장이 있었다는 것을 볼 때 1차 대전 당시 공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당시 독일에 대한 배신감이 어떠했는가 짐작할 수 있다.] >구덩이가 커서 마치 여기 파인즈 호텔[* 홀로코스트로 인하여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버린 1980년대의 [[블라덱 슈피겔만]]이 [[손놈]] 행각을 부리는 호텔을 의미한다.]의 수영장 같았지. 그리곤 헝가리 유대인들을[* [[살러시 페렌츠]]의 집권 이후 30만에 달하는 헝가리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한 것을 의미한다. 고로 이때의 증언은 홀로코스트의 말기였던 1944년 8월 이후에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은 열차가 계속 도착했단다. 그래도 이 구덩이에 쳐 넣어지기 전에 가스실에서 끝을 본 사람은 운이 좋은 편이었어. '''다른 사람들은 살아서 무덤 속으로 뛰어들었어야 했으니까.''' 거기서 일하던 죄수들은 산 사람, 죽은 사람 가릴 것 없이 휘발유를 퍼부었지. '''그리고 불타는 시체에서 나온 기름을 다시 퍼부어 가지고 더 잘 타게 했단다.''' >----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 >이미 일어난 사건은 바꿀 수 없다. 단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역사]]를 통해 배우고 '''무고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 >[[오토 프랑크]] === 제3자 === >미친 생각이라는건 알지만 때때로 난 내가 [[블라덱 슈피겔만|부모님]]과 함께 아우슈비츠에 같이 가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실제로 알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분들보다 편안한 삶을 살았다는 일종의 죄책감 같은 거겠지. 내 칠흑같은 꿈보다 더 비참했던 현실을 재구성하려는게 얼토당케 여겨지는 때가 많아.'''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그것도 만화로 말이야!]] 내가 소화해낼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어쩐지 다 잊어버려야할 것 같아. 내가 결코 이해할 수도, 형상화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 같아. 내 말은, '''현실이 만화로 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는 거야...''' 너무 많은게 누락되고 왜곡되는거지. >---- >[[아트 슈피겔만]],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 > '''라인강을 건너 독일에 들어서자 갑자기 중세시대에 온 것 같았다. 나는 20세기 [[대명천지]]에 그 잔혹한 범죄들이 어떻게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 >어느 미군 병사의 증언[* 알기쉬운 세계 제 2차세계대전사 중.][* 실제로 대부분의 학살 수용소는 독일 영토에 세워졌고, 그 외에 일부가 폴란드에 세워졌기에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설마 홀로코스트 같은 조직적 말살이 이뤄질 거라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직적인 말살 시설이 있다는 것이 비밀이었을 뿐이고, 유대인을 끌고 가서 죽인다는 건 유럽인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근처에 수용소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죠. 하지만, 너무나도 잘 위장해놔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도 저기 바로 밑에 마을에 살고 있었지만 하나도 몰랐거든요. >---- > 신원미상의 [[독일인]][* 직접적인 수용소 관리는 친위대 병력들이 맡았지만 외곽 경비나 수송 작업에는 친위대 뿐만 아니라 국방군도 관여되어 있었다. 자세한 건 몰라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대략 짐작은 가능했을 것이다. 관련 서적들을 보면 "소각 연기가 마을 쪽에 나오지 않게 해 달라" 등의 민원 기록들이 남아 있으므로 쉬쉬하지만 다들 알 건 아는 상황임을 충분히 방증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유대인이라면 모조리 학살하는 것은 몰랐을 수 있다. 독가스용 재료인 [[치클론 B]]가 대량으로 수용소에 들어가는 걸 보고 소독약품을 반입하는 줄 알고 '수용소가 매우 위생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라고 나치는 지속적으로 선전하였으니 말이다. 당대 사람들도 '노동수용소 = 죽음' 이란 건 알고 있었다. 나치가 집권한 이후 게슈타포가 체포한 반체제 인사들이 수용소에서 반신불구가 되거나 아예 영영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당대 독일인들은 수용소에 들어가면 사실상 살아나오기 힘들다는 것까지는 매우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조직적으로 죽이는 건 몰랐을 수 있다.] >우리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무덤을 파게 했다. '''그 [[독일인]]들도 모두 거기에 묻어버리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도 자기들은 [[시치미|정말 모르는 일이라고 빡빡 우기길래]] '''나는 당신들도 똑같은 살인마라고 소리쳐줬다.''' >---- > [[미 육군]], 레슬리 브라운 병장[* 학살을 방조 내지는 동조했던 민간인들을 제3자인 미군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대목.] == 홀로코스트를 다룬 매체 == 홀로코스트는 한 집단 전체의 말살을 위한 공장식 학살이라는 충격적인 배경 때문에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루는 영상물 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의 본성을 다루는 거의 모든 매체에 영향을 미쳤다. 실존 유무만이 간신히 일부 집단을 한정으로 논란이 될 뿐이지, 학살 자체가 악랄하였다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민감한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영화의 소재로 자주 사용될 수 있었고, 또한 피해자들 중 상당수가 당시 구미권에서 경제적으로 큰 파이를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이었다는 점 때문에 매체로 활용되기도 쉬웠다. [[로만 폴란스키]]와 같은 일부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은 전후 예술가로 활동하며 홀로코스트를 다루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홀로코스트는 근 70년동안 가장 인기있는 역사극의 소재였으며, 피해자 중심, 가해자 중심, 제3자 중심 등 여러가지 시각으로 사건이 재구성되었다. [[IMDb Top 250]]에서도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가 한편도 아니고 세편이나 최상위권에 올라가있다.[* [[쉰들러 리스트]] 6위, [[인생은 아름다워]] 23위, [[피아니스트(로만 폴란스키 영화)|피아니스트]] 34위.] 하지만 역사극으로 많이 다뤄진만큼 홀로코스트가 지나치게 상업화되어있다며 '''홀로코스트 포르노'''나 다름이 없다는 비판도 있다. 비슷한 맥락으로 홀로코스트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그려낸[* 과장되게 평가한 것이 아니라 적당히 상업 영화의 소재로 쓰기 좋도록 '''덜 끔찍하게''' 영상화한다는 비판이 있다. [[인생은 아름다워]],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등.] 매체가 얼마 없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제작자가 홀로코스트의 당사자였던 [[피아니스트(로만 폴란스키 영화)|피아니스트]], 피해자들의 방대한 증언을 토대로 제작한 [[쇼아]]와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편이다.] === 문학 === * [[안네의 일기]]: 역사인물 [[안네 프랑크]]가 쓴 '실제 일기.' 다만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까지만 기록되어 있다. 수용소로 끌려간 이후 안네는 1년간 버티다 얼마 못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유일한 생존자인 저자의 아버지가 이를 편찬한다. * [[당신들의 조국]] *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 - 작가의 아버지가 겪었던 유대인 탄압과 아우슈비츠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만화]]. * [[이것이 인간인가]] - 홀로코스트 생존자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후 그때를 회상하며 쓴 기록 * [[소피의 선택]] *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874907|해바라기]] - [[시몬 비젠탈]]이 쓴 책. * [[높은 성의 사나이]] - 원작 소설에선 일본이 유대인을 잡아다 나치에게 넘기지만, 드라마판에선 가스실을 설치하여 직접 학살한다. 게다가 학살에 사용되는 가스는 치클론 B를 업그레이드시킨 치클론 D.[* 드라마 설정에 따르면, 냄새도 없고 고통 없이 죽일 수 있다고 한다.] * 별을 헤아리며 * 밤 - 트란실바니아 출신의 유대인 앨리 위젤이 쓴 자전적 소설. 최신 판본에서는 나이트로 영어 제목을 직역해서 들여왔다. * 운명 - 케르테스 임레의 자전적 소설. *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7931|사자와 맞선 소녀]] : 나치에 저항한 여호와의 증인 시몬 아놀드 립스터의 회고록 * 클라라의 전쟁 -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부모를 둔 작가 캐시 케이서가 쓴 이야기. * 죽음의 수용소에서 -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정신분석학 교수인 빅터 프랭클이 수용소 안의 인간 심리와 삶의 의미에 대해 저술한 책. === 영화, 드라마 === * [[쉰들러 리스트]] * [[사울의 아들]] *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 유대인 수용소소장의 아들과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 소년의 우정을 다루었다. * [[인생은 아름다워]] - 이탈리아계 유대인 가족의 애환을 다룬 [[명작]]. * [[9번째 날]] * [[피아니스트(로만 폴란스키 영화)]] - 바르샤바 게토에 살던 유대인 피아니스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 홀로코스트의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 [[디파이언스(영화)|디파이언스]] - 홀로코스트에 대항하여 총을 들고 싸우는 유대인을 다룬다. * [[트라이엄프#s-4|트라이엄프]] -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그리스인 권투 선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 [[밴드 오브 브라더스]]: 후반부에 유대인 수용소를 해방시키는 내용이 있다. * [[조조 래빗]]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7671|어둠 속의 빛]] - [[폴란드]] [[르부프]]를 배경으로 430일 동안 하수구 밑에 11명을 유대인을 숨겨주었던 '레오폴드 소하'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 [[쇼아(영화)|쇼아]] - 프랑스의 클로드 란츠만 감독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수용소 간부들을 인터뷰하여 제작한 9시간짜리 대작 다큐멘터리.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2617|밤과 안개]] - 홀로코스트를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 작품.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322|소피의 선택]]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22478|카포]] - 수용소 탈출을 시도하는 유대인 소녀를 다룬 영화. * [[https://pedia.watcha.com/ko-KR/contents/mW96zeO|홀로코스트]] - 홀로코스트 당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유대인 가족을 다룬 영화.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25781|생명의 기차]]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4817|죽음의 연주]] - 나치를 위해 연주를 하며 살아남아야 했던 유대계 여성 음악가의 실화를 다룬 영화.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5779|그레이 존]]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26792|제이콥의 거짓말]]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4330|아멘]]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4745|전장의 로망스]]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50447|컨스피러시]] - 소위 '최종 해결책'이라 불리는 유대인 절멸 정책이 결정된 회의를 다룬 영화.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61828|안네 프랑크]] - 안네 프랑크의 삶을 다룬 전기영화.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4335|업라이징]] - 나치의 유대인 차별과 [[홀로코스트]]에 저항한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다룬 영화.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26178|소비버 탈출]] - [[소비보르 절멸수용소]]를 탈출하려는 유대인을 다룬 영화.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20314|갓 온 트라이얼]]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50652|우리 중에 살인자가 있다]]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3161|벤트]]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67494|버드가의 섬]]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8508|선샤인]]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3773|중심가의 상점]]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2421|전당포]]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24676|이레나 센들러의 용기]]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1834|나치의 그늘]]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3133|뉘른베르크 재판]]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9391|로젠스트라시]]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8678|맥스와 헬렌]]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3534|엣지 오브 더 로드]]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9732|아리아 커플]]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3371|휴전]]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61853|악마의 계산]]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24219|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213|뮤직 박스]]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44984|나는 부정한다]] * [[https://www.netflix.com/kr/title/80191608|마우트하우젠의 사진사]] - 마우트하우젠의 참상을 담은 사진을 보존하고 세상으로 반출하기 위해 분투한 한 사진가에 관한 영화 * [[유로파 유로파]] * [[ CSI : NY]] : 5기 22화가 홀로코스트와 나치 전범과 관련된 사건을 다룬다. 살인사건의 용의자인 유대인이 알고보니 홀로코스트에 가담한 독일인였고, 이후 신분을 유대인으로 위장하고 미국으로 이민왔던 것. 그리고 주인공인 [[맥 테일러]]의 할아버지는 2차대전에 미군으로 참전해서 유대인 수용소를 해방시킨 적이 있다. === 비문학 === *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5333003|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 홀로코스트 연구의 권위자 라울 힐베르크가 쓴 저서로 홀로코스트에 대한 과정과 실태가 상세하게 적혀 있다. 엄청난 분량과 권위를 자랑하지만, 국내에서는 절판되어 현재는 중고장터에서도 구하기 힘든 물건으로 읽고 싶은 사람은 소장 도서관을 찾아서 가봐야 한다. *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576064|나쁜 의사들]] - 홀로코스트 당시 강제수용소의 나치 의사들을 다루고 있다. * [[악의 평범성]] - 한나 아렌트 저. 홀로코스트의 책임자 중 한 명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평범한 일반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는 아이히만의 악행을 옹호한다기보다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악이 자라날 수 있음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다. 저자의 철학적 통찰이 두드러지는 명저. === 음악 === * [[https://www.youtube.com/watch?v=LBNz76YFmEQ|바르샤바의 생존자]] - [[아르놀트 쇤베르크]] * The Final Solution - [[Sabaton]] === 게임 === * [[My Memory of Us]] == 관련 문서 == * [[여호와의 증인/역사#s-3.1/나치의 여호와의 증인 탄압]] * [[T4 작전]][* 홀로코스트를 맞먹을 정도로 장애인을 대상으로 잔인하게 죽인다.] * [[광기]] * [[나치]] - [[히틀러]] * [[니콜라스 윈턴]] * [[독일의 전쟁범죄]] * [[드레퓌스 사건]] * [[명령을 따랐을 뿐]] * [[반제 회의]] * [[수정의 밤]] * [[시오니즘]] * [[집시]] * [[아시안 홀로코스트]] * [[우생학]] * [[우스타샤]][* 사실 이쪽도 나치에 빌붙었던 세력이니 간접적인 나치즘 홀로코스트라고 볼 수 있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요제프 멩겔레]] * [[의미치료]][* 홀로코스트를 체험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이 고안한 심리치료 기법이다.] * [[이스라엘]] * [[이르마 그레제]] * [[일제 코흐]] * [[파시즘]] - [[군국주의]] * [[툴레 협회]] * [[학살]] - [[양민학살]] * [[하인리히 힘러]] * [[홀로코스트 부인론]]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아돌프 아이히만]] * [[슈츠슈타펠]] * [[아인자츠그루펜]] * [[국방군 무오설]] * [[게토]] * [[유대인 경찰]] * [[카포]] * [[엘리 비젤]][*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이에 관련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후에 노벨평화상도 받았다.] * [[오스카 쉰들러]] * [[허펑산]] * [[스기하라 지우네]] * [[731 부대]] * [[무단 통치]] * [[데라우치 마사타케]] == 둘러보기 == [include(틀:아돌프 히틀러)] [[분류:홀로코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