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아우구스타)] || '''이름''' ||호엔슈타우펜의 안나[br](Anna of Hohenstaufen)|| || '''출생''' ||[[1230년]]|| || '''사망''' ||[[1307년]] [[4월]]|| ||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 || '''어머니''' ||비앙카 란치아|| || '''형제자매''' ||[[만프레디]], 비올란테|| || '''남편''' ||[[요안니스 3세]]|| [목차] [clearfix] == 개요 == [[동로마 제국]] [[라스카리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니케아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3세]]의 황후. == 생애 == [[1230년]]경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정부 비앙카 란치아 사이의 [[사생아]]로 출생했다. 초명은 콘스탄스(Constance)였다. 오빠 [[만프레디]], 언니 비올란테가 있었는데, 그중 만프레디는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 되었다. [[1244년]], [[니케아 제국]]과 연합하여 [[교황]]에게 대항하고자 하는 부친의 뜻에 따라 가정교사 마르체사 델라 프리카와 함께 니케아로 가서 [[요안니스 3세]]의 새 [[황후]]가 되었고, [[안나]](Anna)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14세에 불과했던 그녀는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요안니스 3세는 [[가정교사]]로서 함께 온 마르체사를 정부로 삼았다. 마르체사는 이로 인해 '대립 황후'로 인식되었고, 마르체사 가문은 궁중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몇년 후 마르체사는 요안니스 3세의 총애를 잃고 궁정에서 쫓겨났다. 요안니스 3세는 안나 황후에게서 자식을 보지 못하고 1254년 11월 3일 사망했고, 전 황후인 [[이리니 라스카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테오도로스 2세]]가 황위를 계승했다. 그녀는 황태후로서 니케아 궁정에 머물렀고, 테오도로스 2세의 아들 [[요안니스 4세]] 치세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요안니스 4세는 [[미성년자]]였기에, 안나 [[황태후]]와 [[미하일 8세]]가 공동으로 [[섭정]]했다. 일설에 따르면, [[조조|미하일 8세는 아직 젊은 안나 황태후를 사랑하여 결혼하려 했지만]], 안나 황태후가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1261년]] 7월 25일, 미하일 8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그 후 그는 황위를 [[찬탈]]하고 요안니스 4세를 실명형에 처하고 [[비티니아]]의 다키바제 요새에 감금했다. 이리하여 입지를 완전히 상실한 안나 황태후는 [[1263년]] [[니케아]]를 떠나 오빠 만프레디가 다스리고 있는 시칠리아 왕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만프레디는 [[1266년]] 2월 25일 베네벤토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만프레디를 죽인 [[카를루 1세|앙주의 샤를]]이 시칠리아를 점거했다. 안나는 가족과 함께 시칠리아에서 도망쳐 [[사라고사]]로 피신했고, [[수녀원]]에 들어가 [[수녀]]로 지내다 [[1307년]] 4월 [[발렌시아]]에서 사망했다. [[분류:동로마 황후]][[분류:라스카리스 가문]][[분류:아우구스타(동로마)]][[분류:호엔슈타우펜 가문]][[분류:1230년 출생]][[분류:1307년 사망]][[분류:독일계 그리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