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10년 출생]][[분류:2003년 사망]][[분류:마그데부르크 출신 인물]][[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나치당원]][[분류:슈투름압타일룽/인물]][[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크노헨.gif|width=100%]]}}} || ||<#666> {{{#FFF 이름}}} ||<(>'''Helmut Knochen''' [br] 헬무트 크노헨 || ||<#666> {{{#FFF 출생}}} ||<(>[[1910년]] [[3월 14일]] [br] [[독일 제국]] 마그데부르크 || ||<#666> {{{#FFF 사망}}} ||<(>[[2003년]] [[4월 4일]] '''(향년 93세)''' [br] [[독일]] 바덴바덴 || ||<#666> {{{#FFF 복무}}} ||<(>[[슈츠슈타펠]] (1936년 ~ 1945년) || ||<#666> {{{#FFF 최종 계급}}} ||<(>[[슈츠슈타펠]] [[대령]] (연대지도자) || [목차] [clearfix] == 개요 == [[나치 독일]]의 [[슈츠슈타펠]] [[대령]] == 초기 행적 == [[마그데부르크]]에서 태어난 크노헨은 라이프치히 대학과 괴팅겐 대학에서 역사학과 영어를 공부하다가 괴팅겐에선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 [[슈츠슈타펠]] 행적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하이드리히 오베르크 크노헨.jpg|width=100%]]}}} || ||<#ddd> 왼쪽부터 [[카를 오베르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크노헨이다. || 그는 나치가 정권을 잡기 이전인 [[1932년]]에 [[나치당]]에 가입하여 [[1936년]]부터 [[슈츠슈타펠]]에 소속되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SD에 배속되어 2국 1부 2과(정치적전과) 과장으로 지냈다. 크노헨의 임무는 좌익활동의 감시였는데 [[1942년]]에 친위대 대령으로 승진했다. 프랑스 항복 후인 [[1940년]] [[5월]]에 파리의 보안경찰 및 SD사령관으로 취임하여 부관이던 파리 친위대 지도자 및 경찰고급지도자인 [[쿠르트 리슈카]], [[카를 오베르크]]와 함께 프랑스 점령지역의 지배자로 있으면서 20만명 이상의 유대인 및 불온자를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 전후 재판과 행적 == 그러나 독일의 패전 후 연합군에게 체포된 크노헨은 [[1946년]] [[6월]]에 [[영국]]의 군사재판에서 영국조종사 포로의 학살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은 집행되지 않고 [[1947년]] [[7월 1일]]에 다시 [[프랑스]]로 이송되었다. 프랑스 법원은 [[1954년]] [[10월 10일]]에 열린 파리 군사법정에서 다시 사형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1958년]] 재판에서 크노헨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수감생활을 보내다가 [[1962년]]에 석방되어 독일로 돌아왔다. 크노헨은 당초 [[바덴바덴]]에 머무를 예정이었지만 그 후 클라우슈탈첼러펠트 근처의 하넨클레에서 살았다. 그 후 결혼하여 장남을 얻은 크노헨은 보험중개업에 종사하며 살았는데 [[1963년]]에 오펜바흐 암마인으로 이사했다. [[1982년]]에 두 번째로 결혼한 크노헨은 [[2003년]]에 '''93세'''의 나이로 [[바덴바덴]]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