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 니콜라이 1세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rd1=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1798))] [include(틀:역대 전러시아의 황후)] ---- ||<-3>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의 황후[br]{{{+1 헤센의 알릭스 공녀}}}[br]Prinzessin Alix von Hessen und bei Rhein''' || ||<-3>{{{#!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sarina Alexandra Feodorovna.jpg|width=100%]]}}}|| ||<|2> '''이름''' || 독일어 ||알릭스 빅토리아 헬레네 루이제 베아트릭스[br](Alix Viktoria Helene Luise Beatrix) || || 러시아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br](Александра Фёдоровна) || || '''출생''' ||<-2>[[1872년]] [[6월 6일]][br][[독일 제국|독일국]] [[헤센 대공국]] [[다름슈타트]] 신궁전 || || '''사망''' ||<-2>[[1918년]] [[7월 17일]] (향년 46세)[br][[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예카테린부르크]] 이파티에프 하우스 || || '''장례식''' ||<-2>[[1998년]] [[7월 17일]][br][[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 || '''배우자''' ||<-2>[[니콜라이 2세]] ,,(1894년 결혼),, || || '''자녀''' ||<-2>[[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올가]],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타티야나]],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마리야]],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아나스타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알렉세이]] || || '''아버지''' ||<-2>[[루트비히 4세(헤센)|헤센 대공국의 대공 루트비히 4세]] || || '''어머니''' ||<-2>[[영국의 앨리스|영국의 앨리스 공주]] || || '''형제''' ||<-2>[[헤센의 빅토리아|빅토리아]], [[헤센의 엘리자베트|엘리자베트]], [[헤센의 이레네|이레네]], [[에른스트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마리 || || '''종교''' ||<-2>[[루터교회]] → [[러시아 정교회]] || || '''서명''' ||<-2>[[파일:헤센의 알릭스 서명.svg|width=150&bgcolor=#fff]] || ||<-3>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373a3c,#ddd {{{#!folding [ 시성 정보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시성''' ||<-2>[[1981년]]: [[해외 러시아 정교회]][br][[2000년]]: [[러시아 정교회]] || || '''축일''' ||<-2>[[그레고리력]]: [[7월 17일]][br][[율리우스력]]: [[7월 4일]] || || '''호칭''' ||<-2>[[해외 러시아 정교회]]: 황실 순교자[* Royal Martyrs][br][[러시아 정교회]]: 황실 수난자[* Royal Passion-Bearers] || || '''성인 추대 종파''' ||<-2>[[러시아 정교회]][br][[해외 러시아 정교회]][br][[그리스 교회]][br][[세르비아 정교회]][br][[안티오키아 총대주교(정교회)|안티오키아 정교회]][br][[루마니아 정교회]][br][[불가리아 정교회]][br][[러시아 그리스 가톨릭]] ||}}}}}}}}}}}} || [목차] [clearfix] == 개요 == [[헤센 대공국]]의 대공녀이자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차르(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황후]]. 러시아 역사상 마지막 황후이기도 하다. == 작위 == * 헤센의 알릭스 대공녀 전하 Her Grand Ducal Highness Princess Alix of Hesse and by Rhine ([[1872년]] [[6월 6일]] ~ [[1894년]] [[11월 26일]]) * 전 러시아의 황후 폐하 Her Imperial Majesty The Empress of All Russia ([[1894년]] [[11월 26일]] ~ [[1917년]] [[3월 15일]]) *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로마노바 Alexandra Feodorovna Romanova ([[1917년]] [[3월 15일]] ~ [[1918년]] [[7월 17일]]) == 출생 == [[헤센 대공국]]의 [[루트비히 4세(헤센)|루트비히 4세]]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영국의 앨리스|앨리스 공주]] 사이에서 2남 5녀 중 4녀(여섯째)로 태어났으며, 태어난 지 1달 만에 [[루터교회]] [[세례]]를 받았다. 풀 네임은 '알릭스 빅토리아 헬레네 루이제 베아트릭스 폰 헤센 바이라인'이며 ‘알릭스’는 어머니의 이름을, 미들네임은 전부 이모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원래라면 알릭스가 아닌 '알리체'로 불려야 했지만 알릭스의 어머니 [[영국의 앨리스|앨리스 공주]]는 평소 이 발음이 촌스럽다고 생각하여 싫어했기 때문에[* 생전 [[독일인]]들이 자신의 이름인 앨리스를 알리체라고 부른다고 불만을 표했었다.], 딸에게는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서 '알릭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다만 어린 시절에는 외숙모이자 시이모였던 [[영국]] 왕비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시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의 친언니이자 외삼촌 [[에드워드 7세]]의 부인이 알렉산드라 왕비다.]가 알릭스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알릭키(Alicky)'라고 불렸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1664291567266.jpg|width=100%]]}}}||{{{#!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519495-1424805328.jpg|width=100%]]}}}|| ||<-2> 어린 시절의 알릭스 || 어머니 [[영국의 앨리스|앨리스 공주]]는 자신이 [[영국]]의 [[공주]]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앨리스 대공비는 [[헤센 대공국]]에 시집 와서도 거처를 영국식으로 꾸몄고, 7남매의 [[육아]] 및 교육 방식에 있어서도 [[영국/문화|영국 문화]]를 많이 따랐다. 이런 어머니의 교육 방침은 이후 알릭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알릭스는 언니들과 여동생 마리, 오빠와 함께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다 ==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1666067813570.jpg|width=100%]]}}}||{{{#!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1666067902673.jpg|width=100%]]}}}||{{{#!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1666067982851.jpg|width=100%]]}}}|| ||<-3> 1878년 당시의 알릭스[* 맨오른쪽에 있는 사진은 막내 여동생 마리와 찍은 사진이다.] || 그러나 알릭스가 6살이던 1878년, [[디프테리아]]라는 [[전염병]]이 유행하면서 행복했던 유년 시절도 끝나게 된다. 당시 친할머니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곁에 있었던 둘째 언니 엘리자베트를 제외하고 알릭스의 가족들도 병을 피해 갈 수 없었으며 이때 알릭스의 막내 여동생 마리도 디프테리아에 걸려 죽고 만다.[* 이미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인 1873년에 알릭스의 바로 위의 오빠인 프리드리히도 3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프리드리히는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물려받은 [[혈우병]] 때문에 부상으로 인한 [[과다출혈|출혈이 멈추지 않아서]] 죽고 말았다.] 특히 어머니 [[영국의 앨리스|앨리스 공주]]는 병에 걸린 자녀들을 직접 돌보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했고, 결국 앨리스 대공비마저 디프테리아에 전염되어 병사하고 말았다. 본래 알릭스는 '써니'라는 애칭을 받을 정도로 밝고 활달한 아이였으나, 고작 6살에 어머니를 잃은 충격과 슬픔으로 침울하고 조용한 소녀가 되어버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녀 [[헤센의 빅토리아|빅토리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인 [[필립 마운트배튼]] 공의 외할머니이다.([[헤센의 빅토리아|빅토리아]]의 장녀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의 막내아들)]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맏이로서 남은 동생들([[헤센의 엘리자베트|엘리자베트]], [[헤센의 이레네|이레네]], 에른스트, 알릭스)을 돌보고 [[헤센 대공국]]에서 가장 높은 여성으로서 아버지를 보필하여 궁정을 이끌어야 했다. 당시 [[헤센의 빅토리아|빅토리아]]는 외할머니인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많이 의지했으며 빅토리아 여왕 또한 손녀 빅토리아와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여러 조언을 해주고 시간이 나면 직접 독일로 와서 손자녀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는 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다 보니 알릭스를 포함한 외손녀들은 문화, 정서적으로 [[독일인]]이라기보다는 [[영국인]]에 더 가까웠다. 다만 불행하게도 알릭스는 어머니,외할머니로부터 [[혈우병]] 유전자도 물려 받는 바람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귀한 아들]]에게 혈우병 유전자를 물려주었고 이 [[혈우병]]은 알릭스의 가정 뿐 아니라, [[러시아 제국]] 전체를 뒤흔들게 된다. == 연애결혼 == 이후 성인이 된 알릭스는 둘째 언니 엘리자베트 못지 않은 미인이 되었고, 헤센 대공국의 공녀였던 그녀에게도 많은 혼담이 들어왔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은 알릭스가 사촌 [[앨버트 빅터|앨버트 빅터 왕세손]]과 결혼해서, 영국의 차기 왕비가 되길 내심 기대했지만 알릭스가 앨버트의 청혼을 거절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사실 알릭스는 이미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니콜라이 황태자]]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은 혈연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는데, 니콜라이 황태자의 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는 알릭스의 대모였고 외숙모인 영국의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알렉산드라 왕세자비]]의 여동생이었다. 또한 니콜라이 2세의 할머니 [[헤센의 마리]]는 알릭스의 할아버지 카를 공자의 여동생이니 6촌간이기도 하다.[* 한편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기준으로 하면 9촌이기도 하다. 니콜라이 2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장남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딸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1798)|샤를로테]]의 증손자, 알릭스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4남 빌헬름 왕자의 딸 엘리자베트의 손녀다.] 두 사람의 만남은 1884년, 20살이 된 둘째 언니 [[헤센의 엘리자베트]]와 [[러시아 제국]]의 [[https://en.wikipedia.org/wiki/Grand_Duke_Sergei_Alexandrovich_of_Russia|세르게이 대공]]의 결혼식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12살인 알릭스는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이자 형부 세르게이 대공의 조카인 [[니콜라이 2세|니콜라이 황태자]]와 처음으로 만났고 어린 소녀,소년은 서로 사랑에 빠졌다. 그후 10년이 지난 1894년 4월, 알릭스의 오빠인 에른스트 루트비히 대공이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자 [[니콜라이 2세|니콜라이 황태자]]의 사촌인 [[빅토리아 멜리타]]와 결혼식을 올리자, 온 [[유럽]] 왕족들이 [[독일]]의 코부르크에 모였다. 이 때 니콜라이 황태자 또한 코부르크로 향했고 이때 첫사랑인 알릭스와 재회하게 되어 두 사람의 사랑은 더 커지게 되었다. 당시 종교적 이유와 독일을 싫어했던 알렉산드르 3세의 반대 등으로 이 둘의 결혼은 어려울 듯 보였으나 하지만 먼저 러시아 황실에 시집간 언니 [[헤센의 엘리자베트|옐리자베타 대공비]]의 지속적인 설득과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의 허락까지 받고 온 니콜라이의 끊임없는 구애와 자신의 집안 사정[* 언니들은 모두 결혼을 해 헤센 공국을 떠난 지 오래였고, 전술했듯이 오빠 에른스트의 결혼으로 새 올케인 [[빅토리아 멜리타|빅토리아]]가 헤센 대공국의 새 안주인이 되었기에 알릭스로서는 있을 곳이 거의 사라졌다.]으로 결국 알릭스는 청혼을 받아들인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ngagement_official_picture_of_Alexandra_and_Nicholas.jpg|width=100%]]}}}|| || 알릭스와 [[니콜라이 2세|니콜라이 황태자]]의 공식 약혼사진 || 당시 [[러시아 제국]]으로 시집가기 위하여 알릭스는 [[러시아어]]를 공부했고, [[종교]]도 [[루터회]]에서 [[정교회]]로 [[개종]]하고 결혼하면서 이름도 [[러시아]]식으로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알릭스는 '[[예카테리나]]'를 선택하려고 했지만 니콜라이의 제안으로 '[[알렉산드라]]'로 결정했다고 한다.]로 바꾸는 등 사랑을 위해 많은 것을 감내하고 이모저모로 노력했다. 다만 모두가 축복하는 이 결혼식에서 유일하게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만이 알릭스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러시아 제국]]으로 시집가는 것을 걱정해서 반대했다고 한다. 여왕은 알릭스의 친정인 [[헤센 가문#s-2.4|헤센 대공가]]의 공녀들 중 러시아로 시집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세가 망했다는 것을 강조하며 반대했는데 [[러시아 혁명|외할머니의 이런 불안한 예상은 끝내 들어맞았다]]. == 러시아의 황후 == 결혼식을 올리기 전인 1894년 11월 1일, [[니콜라이 2세|니콜라이 황태자]]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했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차기 러시아의 차르로 지목되었고 11월 26일[* 공교롭게도 이때는 니콜라이 황태자의 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의 생일이기도 했다.]에 예정되었던 결혼식을 그대로 진행하면서 알렉산드라는 바로 황후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한 지 채 1달도 되지 않아 결혼식을 치른 탓에, 군중들은 "새 황후가 불운을 가져오는 게 아니냐"며 수군댔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Wedding_of_Nicholas_II_and_Alexandra_Feodorovna_by_Laurits_Tuxen_(1895,_Hermitage).jpg|width=100%]]}}}|| || 1894년 11월 26일,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의 결혼식 || === [[고부갈등]]과 고립된 황후 === 한편 결혼을 허락시켜준 알렉산드르 3세와 달리 시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만은 맏며느리를 좋게 보지 않았고 알렉산드라 황후 또한 그런 시어머니의 의중을 잘 알고있어서 둘의 사이는 늘 냉랭했다. 본래 마리아 황태후가 원했던 며느릿감[* [[루이필리프 1세]]의 증손녀 [[엘렌 도를레앙]].]이 따로 있었고 특히 자기 친정, 즉 알렉산드라 황후의 시외가인 [[덴마크]] 왕실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으로 알렉산드라의 친정인 [[독일]]을 경멸하고 있었다. 게다가 니콜라이 2세를 포함해 여러 아들들을 둔 마리아와 달리 알렉산드라는 줄줄이 공주 4명을 낳았고 겨우 어렵게 낳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는 모계로부터 [[혈우병]] 인자를 물려받아 병약하기까지 했다. 설상가상으로 성격적인 면에서도 두 사람은 극과 극이었다. 본래부터 밝고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이러한 성향을 잘 살려 러시아에 갓 시집왔을 때부터 러시아 사교계를 주도적으로 이끈 시어머니 마리아 황태후와 달리 알렉산드라 황후는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에 사교계를 이끌기보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끼리 조용히 지내고 종교나 점술에 심취하는 [[신비주의]] 성향이었다. 더구나 황태후로서 책임을 다하려한 마리아와 달리 알렉산드라는 황후로서 내우외환으로 무너지는 러시아 제국의 현실을 바로보고 개선하려는 노력은 커녕 타락한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에 심취하여 국정 개입과 추문 등을 만들어 러시아 황실의 평판까지 바닥을 치게 했다. 이러한 여러가지 요인들은 마리아 황태후를 몹시 실망시켰다. 한편 알렉산드라 황후도 밝고 문란한 러시아 사교계에 적응을 하지 못했고 한동안 아들을 못 낳아 눈총을 받았으며, 이후 혈우병에 걸린 아들 알렉세이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공식 행사를 제외하면 가족들과 일부 친한 사람들하고만 지내는 고립된 삶을 보냈다. 더구나 니콜라이 2세도 이런 아내를 따라 사교를 멀리하게 되었고 결국 차르 부부가 너무 귀족 사회와 사교계를 등한시하고, 가정에서 자기들끼리만 뭉쳐지낸 탓에 황자와 황녀들은 자기들의 공식 칭호를 낯설어 할 정도로 세상 물정을 모르게 되니 자연스럽게 러시아 귀족들과 황족들은 황후에게 실망했다.[* 결국 이를 보다못한 친할머니 [[덴마크의 다우마|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와 고모할머니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가 사교계에 데뷔할 나이가 된 올가와 타티야나를 사교계에 적응시키려고 가장 무도회에 끌고 간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교계와 먼 생활을 해왔던 자매는 '''아는 사람도 소개해줄 사람도 없어서''' 또래 귀족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이를 보고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이 충격을 받아 이건 황후가 딸들을 너무 싸고 돌아 키운 탓이라고 대판 까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좋은 면모도 있었지만 황후부터가 이렇다보니 음침하고 고지식하며 고집스러운 부분만이 더 드러나 황후는 러시아 황실에서 외톨이 신세였으며 그나마 위로해주는 사람은 남편 [[니콜라이 2세]]와 언니 엘리자베트 대공비, 막내 시누이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뿐이었다.[* 알렉산드라 황후의 시누이인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은 남매들 중 가장 차르 부부와 친밀하게 지냈던 형제이다. 대외관계가 막장이였던 차르 부부와는 몇 안 되게 사이가 좋았던 형제&시누이며, 조카들인 공주들도 잘 돌보아 주었다.] ===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어렵게 낳은 아들]]의 [[혈우병]] === 당시 문란한 러시아 황실과 달리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 내외는 서로에게 충실하며 결혼 6년 동안 딸 4명을 낳을 정도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금슬이 좋았다. 또한 당시 황족으로서는 드물게 알렉산드라 황후는 아이들에게 직접 [[모유 수유]]를 할 정도로 모정이 각별했다. 그러나 이런 금슬과 별개로 러시아 황실에서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문제였는데, [[러시아 제국]]에서는 [[살리카 법|남성만이 황위를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러시아 제국]]에서는 여성의 황위 계승이 가능했으나, 마지막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 [[파벨 1세]]가 법을 개정하여 [[살리카법|여성이 황위를 잇는 것을 금지했다.]](정확하게는 정식 결혼을 한 남성 계승자가 한 명도 없을 때에만 여성의 황위 승계가 가능했다.)] 다른 러시아 황족들과는 달리,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부부는 첫 딸인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이 태어났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들이 태어나지 않은 것에 크게 실망하지 않았지만, 이후 줄줄이 딸들만 태어나는 바람에 아들 생산에 대한 큰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았었다고 한다.[* 둘째인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을 출산한 직후 클로로포름 마취에서 깨어난 알렉산드라 황후가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황태자가 태어나지 않은 것에 상심하여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라 황후는 이후 두 명의 아이를 더 낳을 때까지 이런 불안감이 넘치는 얼굴들을 계속 마주해야 했었다고 한다.] 결국 계속된 시도 끝에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마침내 다섯 번째 아이를 낳게 되었고, 이 아이가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부부의 외아들이자 러시아의 황위를 이을 수 있는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였다. 차르 부부는 물론 전 러시아의 황족들 및 고위급 인사들까지 알렉세이의 탄생을 매우 반겼었다고 한다.[* 이전까지 해당 나무위키 항목에는 알렉산드라 황후가 외가인 영국 왕실에 영향을 받아, 아들이 없으면 첫째인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이 황위를 이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후 사람들이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말해주어서 크게 당황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낭설이다. 해외의 어떤 포럼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은 데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살리카법]]이 강하게 적용되었던 독일계 공국 출신이었기에 해당 계승법을 전혀 몰랐을 리가 없다. 또한 알렉산드라 황후의 시녀였던 안나 비루보바의 회고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라 황후는 정치에 관심이 없고 신문을 전혀 읽지 않았던 언니들을 이해하지 못 했을 정도로 신문을 자주 읽었기에 세상 일에 그 정도로 무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토록 어렵게 태어난 알렉세이 황태자는 외외증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에게서 물려받은 보인자로 인해 [[혈우병]] 환자로 태어났고, 알렉산드라 황후는 [[러시아 제국]]의 용하다는 모든 [[의사]]들을 불러 아들을 치료해 달라고 애원했으나 당시의 [[의학]]으로서는(그리고 현대 의학으로도)[* 응고 인자를 투여해 증상을 완화할 수는 있지만 완치는 불가능하다.] 혈우병은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었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귀한 아들의 불치병과 아들에게 병을 물려줬다는 죄책감으로 신경쇠약까지 앓을 정도였고 마음이 병들어 버렸다. 결국 이는 의학으로 해결이 안 되는 아들의 병을 종교나 주술의 힘을 빌려 치유하려는 선택까지 하게 되었으며 이는 그녀와 러시아 황실과 제국에 커다란 비극을 가져왔다. --그나마 니콜라이 2세는 [[알폰소 13세|누구]]처럼 황실에 혈우병을 퍼뜨렸다며 비난을 퍼붓지는 않았다.-- ==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등장 == 그러던 중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친구인 안나 타네예바 비루보바의 소개로 [[시베리아]]의 떠돌이 [[수도자]]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만나게 된다. 라스푸틴은 황태자의 병을 고치겠다며 접근하여 황궁을 들락거렸다. 자신 때문에 아들이 [[혈우병|몹쓸 병]]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자책 때문이었는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는지 알렉산드라 황후는 그를 믿기 시작했다. 더구나 신기하게도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라스푸친이 오면서 알렉세이의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하자, 알렉산드라 황후는 라스푸틴을 광적으로 신뢰하며 그를 가까이에 두었고 요승 라스푸틴은 그 배경에 힘입어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그러나 라스푸틴의 전횡으로 안그래도 위태로운 러시아 제국은 본격 붕괴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알렉산드라 황후가 라스푸틴을 지나치게 싸고 돌다보니 황후가 라스푸틴과 [[불륜]]이거나 [[성관계]]를 맺었다는 소문[* 정작 기록에 따르면 황후는 라스푸틴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없었다. 게다가 서로 마음에도 없는 [[정략결혼]]을 했다면 모를까 니콜라이 2세 부부는 정략결혼을 했던 다른 황족들과는 달리 당시에는 몇 안 되는 연애 결혼을 했고 금슬도 좋았기 때문에 불륜 같은 간 큰 짓을 실행했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까지 도는 등, 황실의 이미지며 평판도 같이 추락하기 시작한다. 보다 못한 러시아 제국 내 귀족들은 물론 시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 시누이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장녀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공주가 라스푸틴을 멀리하라고 조언했다는 루머가 있으나 오히려 라스푸틴은 공주들과 친분이 있어서 공주들이 잠옷 바람으로 있는 방에 드나들 정도에 공주들도 그를 '남동생의 병을 고쳐준 착한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해서 싫어하지 않았다.(Massie, Robert K. (1967). Nicholas and Alexandra. New York: Dell Publishing Co. ISBN 0-440-16358-7 pp. 199–200.)][* 아마 알렉세이 황태자에게 그랬듯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의 딸들에게도 일종의 상담을 통한 멘탈 케어를 해 준 듯하다. 4명의 황녀들이 혈우병 환자들이라는 기록은 없지만 막내딸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은 발가락 염증과 기관지염을 앓고 있었다. 거기다 니콜라이 2세 부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연애 결혼 끝에 5남매를 낳아서 차별없이 화목한 가정을 꾸렸지만, 시누이인 올가 여대공과 옐리자베타 대공비를 제외하면 차르 내외 대외적 관계는 파탄 지경이었다. 게다가 자신 때문에 고명아들에게 혈우병을 물려줬다며 죄책감을 느낀 알렉산드라 황후는 [[우울증]] 증상까지 보였고, 이로 인해 황태자뿐만 아니라 황녀들도 불안한 마음이 들긴 했었을 것이다.], 황후의 둘째 언니 [[헤센의 엘리자베트|옐리자베타 대공비]]까지 나서서 "라스푸틴을 멀리하라."며 충고했지만 알렉산드라 황후는 이런 인척들의 말도 귀담아 듣지 않아 비정상적으로 고집스러운 이미지가 되었다. == [[러시아 혁명]],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 == 당시 러시아 제국은 오랫동안 전제정치와 농노제로 인한 병폐,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처참해진 민중들의 삶과 경제 파탄 등 여러 문제로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다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라스푸틴으로 붕괴는 더더욱 가속화 되고 말았다. 게다가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는 이런 백성들의 빈곤한 삶과 현실을 바로 보긴 커녕 호화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피의 일요일 사건(러시아)|항의하는 농민들에게는 총탄]]을 퍼붓고 [[러일전쟁]]과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해 백성들을 전쟁터에 몰아넣는 폭정을 저질렀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러시아 제국의 백성들은 차츰 [[독일]]([[헤센 대공국]]) 출신의 황후 더 나아가 러시아 황실에 점점 불만을 품게 된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펠릭스 유수포프|펠릭스 유스포프]][*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의 딸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이리나]]의 남편이다.]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들(황족&귀족)은 원흉인 라스푸틴을 암살하는 초강수를 쓴다. 그러나 여전히 정신을 못차린 알렉산드라 황후는 언니 [[헤센의 엘리자베트|옐리자베타 대공비]]가 이 암살[* 옐리자베타 대공비의 양아들인 [[https://en.wikipedia.org/wiki/Grand_Duke_Dmitri_Pavlovich_of_Russia|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 역시 유스포프와 함께 라스푸틴 살해에 앞장섰기 때문이었다.]에 참여했다 믿고 남편을 부추겨 언니의 양아들 드미트리 대공을 추방[* 이후 드미트리 대공은 러시아 혁명으로 프랑스로 망명하며 이때 코코 샤넬과 친분 관계를 맺게 된다. 샤넬의 향수 대표작인 No.5를 제작한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를 소개해준 것도 드미트리 대공 이었다.]시키는 사고를 치며 자매 사이만 더 나빠진 데다 귀족들의 불만을 부채질하는 자폭을 거듭했다. 그러나 라스푸틴의 죽음으로 무너진 러시아 제국을 돌리기엔 이미 늦었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가 [[차르]]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이로서 304년 역사의 [[로마노프 왕조]]와 [[제정 러시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 유배 생활과 비참한 죽음 == 공화국 선포 후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은 조그만 시골 마을로 이주하게 되었으나 그래도 [[러시아 공화국|케렌스키 정부]]가 나름대로 배려를 해주었기에 불편함 없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이런 조그만 평화도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련]]이 세워지면서 완전 끝나게 된다. 니콜라이 2세 일가는 [[볼셰비키]]들의 감시 하에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황후와 공주들은 [[음담패설]] 및 [[색드립|성적인 욕설]]을 듣는 등 온갖 굴욕적인 대우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1918년 7월 16일 밤 감시자들은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머물고 있던 차르 일가 7명을 모두 깨워 지하실로 데려갔다. [[니콜라이 2세]]는 애써 별 일 아닐 거라며 아내와 아이들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그곳에서 차르 일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총살]]이었다. 결국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총으로 난사당하며 처참한 죽음을 맞았고, 이들의 시신마저 제대로 된 장례도 못 치르고 매장되지 못한 채 불태워져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다. 사망 당시 알렉산드라는 향년 46세였다. === 둘째 언니 [[헤센의 엘리자베트|옐리자베타 대공비]]의 죽음 === 한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가 살해된 후 [[러시아 제국]]에 시집와 살고 있던 둘째 언니 옐리자베타 대공비도 다음 날인 7월 18일에 향년 53세의 나이로 살해되었다. 여동생처럼 사랑으로 결혼했지만 정작 옐리자베타 대공비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남편 세르게이 대공과의 사이도 그닥 그랬고 (아마도 세르게이 때문에) 자녀도 가질 수 없어서 세르게이 대공의 조카들인 [[https://en.wikipedia.org/wiki/Grand_Duchess_Maria_Pavlovna_of_Russia_%281890%E2%80%931958%29?wprov=sfla1|마리야 파블로브나]]와 [[https://en.wikipedia.org/wiki/Grand_Duke_Dmitri_Pavlovich_of_Russia|드미트리 파블로비치]]를 양자로 데려와 길렀다. 옐리자베타 대공비는 아이들을 사랑하긴 했지만 조카 마리야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남편 세르게이 대공은 시류를 무시한 정치 꼴통 행각에 앞장서다가 폭탄 맞고 산산조각 나는 테러로 살해 당하는 비극까지 겪었다. 이후 아이들이 모두 독립하자 옐리자베타 대공비는 자신의 집을 [[수녀원]]으로 개조하여 수녀원장이 되었고 자선과 봉사에 전념하는 수도 생활을 하며 살았다. 러시아 혁명으로 귀족들이 피난을 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자기 의무에 충실했으나 그저 황족이라는 이유로 여동생 일가와 마찬가지로 잔혹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 죽음 이후 == 이때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막내딸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이 죽지 않고 몰래 빠져나가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왔다. 살아남은 아나스타샤 공주에 관한 이야기가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도 많이 만들어졌고, 심지어 자신이 아나스타시야 공주라고 주장한 여성도 있었다. 또한 외동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 역시 살아남았다는 가설이 제기되었고, 마찬가지로 자신이 알렉세이 황태자라고 주장한 남성도 있었다. 그러나 [[1991년]]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시신이 모두 발굴되고 유전자 검사를 통해[* 이때 시신의 신원 확인을 위한 DNA 검사 샘플로 유전자를 제출한 사람이 바로 [[필립 마운트배튼]]이다. 모계 유전으로 전달되는 [[미토콘드리아]] 특성상 당시 살아있는 알렉산드라 황후의 여계 친척 중 혈통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알렉산드라의 언니 [[헤센의 빅토리아|밀포든 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의 외손자 필립이었기 때문.], 그 시신들이 전부 니콜라이 2세과 그 가족들이 맞다는 게 밝혀지면서 생존설 및 사칭은 모두 거짓임이 밝혀졌다. 이후 [[2001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남편 [[니콜라이 2세]] 및 5남매와 함께 [[정교회]]의 [[성인(기독교)|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여담 == * 3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마리야]]가 알렉산드라 황후를 상당히 많이 닮았다. * 큰언니 [[헤센의 빅토리아|빅토리아]]가 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앨리스]]의 결혼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편지를 보내자[* 앨리스는 그리스 왕국 [[요르요스 1세]]의 4남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안드레아스 왕자]]와 혼인하기를 원했는데 앨리스의 신분은 [[귀천상혼]]한 가문의 방계 공녀로 결코 낮은 신분은 아니지만 통치 가문인 왕실에 시집가기는 어려운 신분이다. 과거 유럽 왕족은 신분이 같은 왕족이나 공족끼리만 혼인했다.][* 참고로 알렉산드라의 사촌이자 앨리스와 같은 가문 출신인 [[빅토리아 유지니|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지니]]도 [[알폰소 13세]]와 결혼할 때, 시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똑같이 귀천상혼으로 생긴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언니에게 “'''아마 그 애도 우리처럼 행복할 거예요. 그럼 더 바랄 것이 없잖아요.'''”라는 답장을 보내며 조카의 결혼을 응원해 주었다. 하지만 앨리스가 시집간 [[글뤽스부르크 왕조|그리스 왕실]]은 자신이 시집간 로마노프 황실처럼 몰락하고, 앨리스는 가족들과도 뿔뿔이 흩어져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불행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물론 그리스의 [[글뤽스부르크 왕조]]는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처럼 왕족들이 학살당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앨리스도 신경 쇠약을 앓긴 했어도 2차 세계 대전 때 그리스에 남아 유대인들을 돕고 구호물자를 지원하는 등, 왕족으로서 책임을 다했으며 이후 외아들 [[필립 마운트배튼|필립]]이 영국 여왕의 부군이 된 덕에 편안한 말년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했다.] 훗날 앨리스의 막내 아들이 유골로 발견된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 2세, 그 자녀들의 신원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데, 이 아들이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이자 [[찰스 3세]]의 아버지인 [[필립 마운트배튼|필립 공]]이다. === 품성 논란 === 비슷하게 자기 나라의 백성들에게 살해당했지만 현대에서 여러모로 재평가를 받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달리, 알릭스는 주변 인물들을 통해 매우 고집스러웠으며 도덕적인 면에서도 유연하지 못한 성격이었다는 게 일관된 평가다. 황후로서나 개인적으로서나 알릭스에 대한 평가는 당시에도 지금도 좋지 못하다. 알릭스는 어린 나이에 [[영국의 앨리스|어머니]]와 형제들을 잃은 것을 제외하면, 빼어난 미모와 [[헤센 대공국|대공국]]의 [[공녀]]라는 신분으로 나름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정략결혼]]이 아닌 연애결혼을 해서 남편인 [[니콜라이 2세]]와의 금슬도 매우 좋았고, 유럽 왕실들 중 제일 부유한 [[로마노프 왕조]][* [[헤센의 빅토리아|빅토리아]]를 제외한 알릭스의 언니들은 본인들도 일국의 왕족과 결혼했지만 알릭스가 물려받을 러시아 황실의 사치스러운 [[보석]] 컬렉션을 부러워했다. 또한 [[러시아 혁명]] 이후 황제 일가가 떠난 텅 빈 [[겨울궁전]]을 점령한 혁명군도 그 자리에서 궁전의 사치스러움과 화려함을 보고 얼이 빠졌을 정도였다고 한다.]의 황후가 되어 자식들까지 낳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다. 한마디로 동시대를 살아간 여성들과 비교하면 평탄하고 안온한 인생을 보냈던 것.[* 다른 황족이나 귀족 가문의 딸들도 부유한 환경에서 편하게 자랐을지는 몰라도, 결혼만큼은 본인의 뜻대로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특히나 20세기 초반까지 존재했던 [[귀천상혼]]의 영향으로 [[정략결혼]]이 일상화된 일국의 [[공주]]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너무나 잘 풀리는 인생을 살아서인지 부유해 고생을 안 해선지는 몰라도 굉장히 이기적이었고 현실을 바로 내다보는 눈과 책임감과 개념과 상식이 너무나도 없었다. 전술한 행적이야 말할 것 없고 가정에서도 자신과 남편이 연애 결혼을 했기 때문에 자식들도 연애 결혼을 하기를 원했던 건지 [[20세기|그 살 떨리던 불안정한 시기]]에 혼기가 찬 딸들을 하루라도 빨리 시집보낼 생각은 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유유자적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혼기가 찬 알릭스와 니콜라이 2세의 딸들이 좀처럼 시집가지 않고 있었던 이유도,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이 있는 모국을 정략 결혼으로 떠날 이유가 없어서였다. 심지어 장녀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올가]]에게 들어왔던 혼담 중 하나는 당시 [[영국]]의 왕세자였던 [[에드워드 8세]]와의 혼담으로,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본인의 외가이기도 한 영국의 왕세자비 자리였다.] 결정적으로 병약한 아들을 위한답시고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중용하는 바람에, 남편이 다스리던 [[러시아 제국]]은 물론 남편과 자녀들을 파멸로 몰고 갔다. 다른 사람도 아닌 평민 출신의 [[사이비종교]]인이 황후의 뒷배만 믿고 지나치게 국정에 간섭하고 이로 인해 나라 꼴이 엉망이 되자 러시아 귀족들은 물론 시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마리아 표도로브나]], 친언니 [[헤센의 엘리자베트|옐리자베타 대공비]]와 시누이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올가]], 그외 기타 일가 전부가 입을 모아 "라스푸틴을 멀리하라"고 조언했지만 알릭스는 친인척들의 조언조차 일절 듣지 않았다. 특유의 고집과 이상한 데서 굳은 의지로 라스푸틴을 편들고 남편을 부추기는 이런 행동은 결국 러시아 제국을 아예 멸망시켜 버리는 기폭제 중 하나가 되고 만다.[* 다만 알릭스가 기폭제가 될 병크를 어마무시하게 터뜨린 것 뿐이지, 러시아 제국은 강력한 전제정과 반동 정치, 그리고 계속된 자유주의적 개혁의 실패로 이미 곪을대로 곪아있었다.] 더구나 자신과 가족들이 살수 있던 마지막 희망인 [[영국]]으로의 망명마저 알릭스의 혈통이 독일계인 탓에 반독 감정로 가득한 영국 내부의 사정으로 완전 무산되고 말았다.[* 만일 첫째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올가 공주]]를 진즉 영국으로 시집보내 놓았더라면, 그나마 망명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정리하자면 알릭스는 황후답지 못한 처신으로 백성들의 미움을 샀고 결국 [[러시아인]]들이 우려하던 대로 적절치 못한 처신으로 러시아 제국을 멸망으로 몰고 갔다. 이후 알릭스는 러시아 제국을 멸망으로 몰고 간 대가로 [[인과응보|가족들과 함께 비참하게 총살당하는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장점도 많았다. 내성적이고 곱게 자란 공주님이라 고생도 안 해보고 현실을 몰라 처세가 부족했지만 성격 자체는 선량하고 자선에 열중했다. 하지만 자유롭던 친정이나 제약이 덜한 외가 영국에서 자란 탓인지 엄한 예법과 믿기 힘든 사치에 옷차림부터 나 문란하다고 외치는 것 같은 러시아 궁정에 시집온 그녀는 러시아식 대륙의 기상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런 러시아 귀족들 앞에서 긴장하면 서툴게 대응하고 말수도 적어 사람들은 그녀가 거만하고 싫은 곳에 억지로 끌려나와 자신들을 싫어한다는 인상만 받았다. 귀족들과는 어울리지 않아서 인심을 잃었고 라스푸틴 때문에 국민들에겐 이미지가 있는대로 추락했지만 실제로는 누구에게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혁명 후 굴욕의 연속일 때 자신들을 괴롭히는 경비병들에게도 그랬다. 이는 남편 니콜라이도 똑같아서 황제 구출 움직임의 본격화 전까지는 그들도 니콜라이 2세는 호구로 봤지만(...) 일가에 박하지 않았고 어느 정도 친해지기도 했다. 아들을 애지중지 아꼈지만 그렇다고 딸들을 차별하지도 않았고 5남매 모두 우애가 좋았다. 도덕과 자선에 힘쓰게 잘 가르쳤다. 신비주의에 심취해 넷째를 가졌을 때부터 수상한 주술사 등에 의지하다 또 딸을 봤을 때도 황후는 그 신비주의 덕을 봤는지 상심하지 않고 해탈한 상태였다고. 거의 파탄난 나라를 물려받고 삽질만 하다 혁명기에 골로 간 [[루이 16세]]를 선배(?)로 모시게 된 남편처럼 그녀도 [[마리 앙투아네트]]와 일생에서 겹치는 부분이 많은 후배 격이다. 실제로 알릭스의 거처에 제일 눈에 띄게 걸어놓은 초상화는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였다고 한다. 나름 가족사적 인연도 있는 것이, 알릭스의 고조모였던 헤센 대공비 루이제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혼을 위해 프랑스로 갈 때 수행단의 일원이었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죽기 직전까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았을 만큼 평생 가깝게 지냈던 사이였다. == 가족관계 == === 조상 ===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13> [[헤센 대공국]]의 알릭스 대공녀[br]{{{-2 (Princess Alix of Hesse and by Rhine)}}} ||<|6> [[루트비히 4세(헤센)|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br]{{{-2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3> [[헤센 대공국]]의 카를 공자[br]{{{-2 (Prince Charles of Hesse and by Rhine)}}} || || [[루트비히 2세(헤센)|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2세]][br]{{{-2 (Louis II,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 || [[바덴의 빌헬미네|바덴의 빌헬미네 공녀]][br]{{{-2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 ||<|3>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공주]][br]{{{-2 (Princess Elisabeth of Prussia)}}} || ||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4남이다.][br]{{{-2 (Prince Wilhelm of Prussia)}}} || || 헤센홈부르크의 마리아 안나 여방백[br]{{{-2 (Landgravine Maria Anna of Hesse-Homburg)}}} || ||<|7> [[영국의 앨리스|영국의 앨리스 공주]][br]{{{-2 (Princess Alice[br]of the United Kingdom)}}} || ||<|3> [[앨버트 공|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br]{{{-2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 || [[에른스트 1세|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br]{{{-2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 ||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br]{{{-2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 ||<|3> [[빅토리아 여왕]][br]{{{-2 (Victoria)}}} || || [[에드워드 어거스터스|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조지 3세]]의 4남이다.][br]{{{-2 (Prince Edward,[br]Duke of Kent and Strathearn)}}} || ||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br]{{{-2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Saalfeld)}}} || === 자녀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 '''1녀''' ||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br]{{{-2 (Grand Duchess Olga Nikolaevna)}}} || [[1895년]] [[11월 15일]] || [[1918년]] [[7월 17일]] || || '''2녀''' ||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br]{{{-2 (Grand Duchess Tatiana Nikolaevna)}}} || [[1897년]] [[6월 10일]] || [[1918년]] [[7월 17일]] || || '''3녀''' ||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br]{{{-2 (Grand Duchess Maria Nikolaevna)}}} || [[1899년]] [[6월 26일]] || [[1918년]] [[7월 17일]] || || '''4녀''' ||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br]{{{-2 (Grand Duchess Anastasia Nikolaevna)}}} || [[1901년]] [[6월 18일]] || [[1918년]] [[7월 17일]] || || '''1남''' ||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br]{{{-2 (Tsarevich Alexei Nikolaevich)}}} || [[1904년]] [[8월 12일]] || [[1918년]] [[7월 17일]] || == 관련 문서 == * [[그리고리 라스푸틴]] [[분류:1872년 출생]][[분류:1918년 사망]][[분류:총살형된 인물]][[분류: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안장자]][[분류:전러시아의 황후]][[분류:헤센다름슈타트 가문]][[분류: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가문]][[분류:정교회 성인]][[분류:독일계 러시아인]][[분류:영국계 러시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