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송나라/인물]][[분류:1135년 사망]][[분류:상추시 출신 인물]] [include(틀:송사)] [목차] == 개요 == 許翰 (? ~ 1135년) [[송나라]]의 관원으로 자는 숭로(崧老). == 생애 == 공주(拱州) 양읍현(襄邑縣) 출신으로, 1088년 진사에 급제하고 1125년 급사중(給事中)으로 임명되었다. 허한은 당시의 재상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내용은 이렇다. >백성들이 곤궁하고 피폐해져서 그들이 도적이 되면 천하가 위태로워질 염려가 있습니다. 지금은 운중(雲中)의 군대를 물리고 변경을 보수하고 백성들과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한편 [[고려]]가 송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백성들을 징발하여 운하를 개통하자 백성들이 점점 불만을 품었다. 중서사인(中書舍人) 손부는 고려가 송나라에 큰 공이 없으니 큰 공사를 일으켜선 안 된다고 문제 삼았으나 손부는 결국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그러자 허한은 손부의 파직이 부당하다고 상주하였으나 역시 파직되어 강주(江州) 태평관제거(太平觀提擧)로 좌천되었다. 1126년, 다시 급사중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금나라가 수도 개봉부를 공격하다가 퇴각하자, 허한은 예궐하여 바로 그날 [[흠종]]을 알현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제수되었다가 이윽고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전임되었다. 허한은 상소를 올려 변방의 사안에 대해 언급하고 또한 결승책을 흠종에게 진술하였다. [[장방창]]이 태재(太宰)로 임명되자, 허한은 상소를 올려 여기에 대해 극론하기도 했다. 충사도가 중태일궁사(中太一宮使)로 강등되자 허한은 흠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충사도는 명장으로 침착하고 의연하며 모략이 있으며, 산서(山西)의 사졸들이 모두 그를 믿고 복종하니 그의 병권을 해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흠종이 충사도가 연로하여 임용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하자 허한은 다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진(영성)|진나라]]의 [[시황제]]는 [[왕전]]이 연로하다고 여겨 [[이신(전국시대)|이신]]을 임용했지만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에게 패배했으며, [[전한|한나라]]의 [[선제(전한)|선제]]는 [[조충국]]이 연로하다고 여겼지만 결국 조충국은 능히 금성(金城)의 공을 이뤘습니다. [[강상|여망]] 이래부터 노장을 임용하여 공을 거둔 이들은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옛날의 사례로 오늘을 가늠한다면 충사도는 비록 연로하지만 임용할 수 있습니다. 뒤이어 허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나라의 이번 행동은 우리의 존망에 관계되니, 만약 금나라에 큰 타격을 주고 패배시켜 도망치게 한다면 중원을 지킬 수 있고 사이가 복종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장래에 다시 군사를 일으켜도 반드시 구제할 수 없는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충사도를 기용하여 금나라를 요격해야 합니다. 하지만 흠종은 결국 허한의 상주를 듣지 않았다. 뒤에 중대부(中大夫), 동지추밀원(同知樞密院)으로 발탁되었으나 갈수록 다른 관료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결국 병으로 인해 물러나 연강전학사(延康殿學事), 지박주(知亳州)로 발탁되었다. 뒤에 언사로 인해 면직되어 남경(南京) 홍경궁제거(鴻慶宮提擧)가 되었다. 1127년, 강왕 조구가 제위에 올라 간신히 송나라의 명맥을 이어간 뒤, 허한은 이강의 천거로 다시 연강전학사로 임명되었다. 조정에 이른 뒤 허한은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임명되었고 문하시랑(門下侍郞) 대리를 겸임하였다. 이때 하북(河北)과 산동(山東) 등지에서 이성(李成)과 공언주(孔彦舟) 등이 각각 수십만 명에 달하는 무리를 모으자, 모두 근왕(勤王)을 명분으로 장소(張所)를 원수로 삼도록 청원하였다. 장소는 어사를 지낼 때 [[황잠선]]이 간사하여 임용할 수 없다고 탄핵하였으나 이로 말미암아 죄를 얻었다. 이강이 재상으로 임명된 뒤 장소를 하북등로안무사(河北等路招撫使)로 임명하여 이성 등의 군대를 거느려 황하를 건너게 하고 각지에 호소하려고 했지만 황잠선에게 저지되었다. 뒤에 종택이 고종에게 마땅히 남쪽으로 피난해선 안 되고 마땅히 수도로 돌아가야 한다고 극론하며 황잠선 등을 비난하자, 황잠선 등이 종택을 파직시키라고 주청했고 허한은 종택을 파직시킬 수 없다고 극론하였다. 이강이 재상에서 파면되자, 허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강은 충의가 매우 뛰어나서 그를 버리면 중흥을 도울 사람이 없는데, 지금 이강을 파면했으니 제가 유임해도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허한은 퇴직을 주청했으나 고종은 허한의 퇴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태학생 진동이 황잠선을 규탄하여 황잠선이 진동을 주벌하라고 고종에게 상주하자, 허한은 자신의 측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 진동은 모두 이강의 유임을 위해 힘썼지만, 진동이 동쪽 저잣거리에서 주륙되었으니 내가 묘당에 있을 수 있겠는가? 허한은 다시 자신의 사직을 주청하며 8번이나 사직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려서 자정전대학사(資政殿大學士)의 신분으로 동소궁제거(洞霄宮提舉)를 맡았다. 그리고 언사로 인해 면직되었다. 1131년 다시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 만수관제거(萬壽關提舉)로 벽소되었지만 사양하고 불응하였다. 2월에 다시 자정전학사가 되었다. 그리고 1135년 사망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되었다. == 평가 == ||||{{{#!wiki style="margin:10px" ''' "허한은 경술에 통달하였고 정직하여 굽힐 줄 몰랐으며, 삼대를 섬기고 지위가 집정에 이르렀지만 단지 왕보(王黼)·채유(蔡攸)·황잠선(黃潛善)의 무리와 선악이 달랐고 부당하게 참소를 당하여 결국 뜻을 펼치지 못했다. 이강은 비록 허한을 천거하였으나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떠났으며, 허한 역시 배척을 당해 죽었다." '''}}} ---- {{{#!wiki style="margin:4px; text-align: right" {{{-2 - 『[[송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