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평원군 출신 인물]][[분류:1882년 출생]][[분류:1921년 사망]][[분류:전쟁 사망자]][[분류:총기에 죽은 인물]][[분류:건국훈장 애국장]] ||||<:>[[파일:허영진.jpg|width=300px]] || || 성명 ||허영진(許永鎭) || || 생몰 ||[[1882년]] ~ [[1921년]] [[9월 15일]] || || [[출생지]] ||[[평안남도]] [[평원군(평안남도)|평원군]] 평원읍 대부리 || || 사망지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 동창리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생애 == 허영진은 1882년생이며 평안남도 평원군 평원읍 대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동지인 [[오능조]], 주석환(朱錫煥) 등과 함께 독립단(獨立團)을 조직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령을 국내에 있는 독립결사(獨立結社)에 전달하고, 국내의 정세를 상해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27일에 일제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국내에서 항일활동을 계속하던 중 미국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를 이용해 임시정부와 만주의 무장독립단체들이 국내에서 무력행동을 실천하려는 계획에 참여하였다. 즉 1920년 9월부터 주석환·이수영(李洙泳)·[[문창선]]·[[서달선]]·이근배(李根培) 등과 함께 성천군 대곡면의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이듬해인 1921년 2월에는 성천군 삼흥면의 묘산의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1921년 9월 15일 일본 경찰과 대동군 율리면 동창리에서 조우하여 치열한 총격전 끝에 동지인 [[왕기서]]·김국민(金國民)은 일경에 붙잡혔고, 그는 경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정부에서는 1982년 허영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