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청나라의 정치인]][[분류:개국공신]][[분류:1601년 출생]][[분류:1667년 사망]] {{{+3 ᡥᡝᠰᡝᡵᡳ ᠰᠣᠨᡳᠨ, [ruby(赫舍里 索尼, ruby=Hè shě lǐ suǒ ní)](혁사리 색니), [[1601년]]~[[1667년]]}}} [목차] == 개요 == [[청나라]]의 [[개국공신]]으로, [[강희제]]가 재위할 때 보정대신으로써 [[구왈기야 오보이]](瓜爾佳 鰲拜, 과이가 오배), 나라 숙사하(納喇 蘇克薩哈, 납란 소극살합), 니오후루 어빌룬(鈕祜祿 遏必隆, 뉴호록 알필륭)과 함께 국정을 운영한 [[인물]]이며, 또한 그의 셋째 [[아들]] [[허서리 송고투]](赫舍里 索額圖)는 강희제를 충실히 보필했으나 죄를 지어 [[사형]]당한 [[권신]]이고, 그의 장손녀이자 송고투의 [[조카]]는 [[강희제/가족관계|강희제의 황후]]인 효성인황후 허서리씨(孝誠仁皇后 赫舍里氏)이다. == 상세 == [[팔기군]] 중 정황기(正黄旗)에 속한 인물로써,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재위할 때부터 [[부친]] 허서리 쇼세(赫舍里 碩色)와 [[친척]]들로부터 [[만주어]], [[몽골어]], [[중국어]]를 배웠고, 이를 바탕으로 [[숭덕제]] 치하에서 많은 공을 세운다. [[1643년]] 숭덕제 사후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 [[만주족]]의 [[관습]]이던 [[형제]] 계승을 내세워 청태종의 장남인 아이신기오로 후거(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ᡥᠣᠣᡤᡝ, 愛新覺羅 豪格)와 제위를 다투었지만, 둘의 세력이 비슷해 소닌을 불러 조언을 구했다. 소닌은 숭덕제의 여덟째 아들이자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의 아들인 풀린을 [[황제]]로 세우도록 하니, 그가 [[순치제]]였다. 순치제의 [[나이]]는 당시 겨우 6살이였기 때문에, 처음에 도르곤은 [[사촌]]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ᠵᡳᡵᡤᠠᠯᠠ, 愛新覺羅 濟爾哈朗)과 함께 좌우섭정왕이 되어 순치제를 보필하는 역할을 맡았고, 순치제가 정식으로 즉위하자 지르갈랑을 몰아내고 단독섭정왕이 되어 죽을 때까지 [[비선실세]]로 군림한다. [[1650년]] 도르곤 사후 순치제가 [[권력]]을 잡게 되자 그를 적극적으로 보필하였고, 효장문황후와도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그의 신임을 얻고 청나라 [[조정]]을 관장하는 [[내무부#s-2|내무부]]총관(內務部總官), 영시위내대신, 감국대신 등을 역임하며 청나라 조정에서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순치제가 애첩 [[효헌단경황후 동고씨]] 사후 [[정치]]에 뜻을 잃자 오보이, 숙사하, 어빌룬과 함께 국무를 대신 처리하고, 순치제 사후 그의 셋째 아들인 현엽을 제위에 올리니 그가 [[강희제]]이다. 강희제 재위 초기부터 보정대신으로서 그와 효장문황후를 많이 도왔으며,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자만에 빠진 오보이를 견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이가 많아 병치레가 잦았기 때문에 오보이를 잘 막아내지 못하고, [[1667년]]에 67세의 나이로 자연사한다. 그의 사후 오보이를 견제하고 강희제를 보좌하는 일은 셋째 아들인 [[허서리 송고투]]가 맡게 된다. == 대중매체에서 == 2001년 드라마 강희왕조에 등장한다. 보정대신이지만 오늘내일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아서 오배를 견제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