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1=TheKindAndSharpSnow, 합의사항1=단서조항 / 쟁점 삭제)] ## 토론 합의 틀은 틀 압박으로 인해 ##문법으로 가림 (https://board.namu.wiki/b/qna/2760994?target=nickname&keyword=q1&p=2 참고) [include(틀:역대 초 군주)] ---- [include(틀:18제후왕)]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6600 0%, #080 20%, #080 80%, #006600)" '''{{{#ece5b6 서초 초대 패왕[br]{{{+1 항적 | 項籍}}}}}}'''}}}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초패왕 초상.jpg|width=100%]]}}}|| ||<|2> '''{{{#ECE5B6 출생}}}''' ||[[기원전 232년|BC 232년]] || ||[[초(춘추전국시대)|초]](楚) [[팽성]](彭城) 하상(下相)[br](現 [[장쑤성|강소성]] 숙천현(宿遷縣) 서남) || ||<|2> '''{{{#ECE5B6 사망}}}''' ||[[기원전 202년|BC 202년]] [[12월]] (향년 30세) || ||[[서초(초한쟁패기)|서초]](後楚) 오강(烏江)[br](現 [[안후이성]] 쑤저우 시) || || '''[[능묘|{{{#ECE5B6 능묘}}}]]''' ||서초패왕묘(西楚霸王墓) || ||<|2> '''{{{#ECE5B6 재위}}}''' ||'''{{{#ece5b6 서초의 패왕}}}''' || ||[[기원전 206년|BC 206년]] [[2월]] ~ [[기원전 202년|BC 202년]] [[12월]][br](4년 10개월) || ||<^|1><-2> {{{#!wiki style="margin:0 -10px -5px;" {{{#ece5b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ECE5B6 성}}}''' ||항(項) || || '''[[휘|{{{#ECE5B6 휘}}}]]''' ||적(籍) || || '''[[자(이름)|{{{#ECE5B6 자}}}]]''' ||우(羽) || || '''{{{#ECE5B6 신장}}}''' ||184cm[* 약 8척(약 184)라는 기록이 있다.] || || '''[[묘호|{{{#ECE5B6 묘호}}}]]''' ||없음 || || '''[[시호|{{{#ECE5B6 시호}}}]]''' ||없음 || || '''[[제호|{{{#ECE5B6 왕호}}}]]''' ||서초패왕(西楚霸王) || || '''[[국적|{{{#ECE5B6 국적}}}]]''' ||초(楚) → 진(秦) → 후초(後楚) || || '''{{{#ECE5B6 가족}}}''' ||조부 [[항연]], 숙부 [[항량]], [[항백]] || || '''{{{#ECE5B6 연인}}}''' ||[[우미인|우희]] ||}}}}}}}}}}}} || [목차] [clearfix] == 개요 == >'''글이라는 것은 본래 자기 성과 이름을 쓸 줄 알면 족할 뿐입니다. 검술 역시 한 사람과 싸워 지지 않을 정도면 충분합니다. 둘 다 배우기는 충분치 못하니, [[만인지적|만인(萬人)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학문을 배우겠습니다.''' >---- >'''《[[사기(역사책)|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는다.''' >---- >'''[[역발산기개세|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고대]] [[중국]] [[진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초한전쟁]] 당시 [[서초(초한쟁패기)|서초]](西楚)의 [[패왕]]이었다. 성은 항(項), 이름은 적(籍)으로 우(羽)는 자(字)다. 다만 본명보다는 자로 더 널리 알려져 있어 '''항우(項羽)'''로 주로 불린다. [[초나라]] 부흥 운동의 선봉장으로서 임하는 모든 전투에서 [[백전백승]]의 위업을 달성했으며, [[서초(초한쟁패기)|초(楚)나라]]의 [[패왕]]을 자칭하며 [[전한|한]](漢)의 [[고제(전한)|유방]](劉邦)과 [[초한전쟁|천하의 패권을 두고 자웅을 다투었다.]] == [[항우/생애|생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항우/생애)] == [[항우/평가|평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항우/평가)] == 여담 == * [[패자#s-1]]라고는 해도 '''짧고 굵게 살다 간다는 [[남자의 로망]]을 체현한 인물'''이라 그런지 후세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높다. 역사의 박한 평가와는 다르게도 그의 일대기는 너무나도 드라마틱하며, 또한 개인적인 면모에서 비롯되는 일화도 많이 남겼기에 중국 본토에서는 역사적 평론과 관계 없이 크게 흠모받는 인물이다. [[중국인]]들이 한을 고대 '''[[중화(중국)|중화]]'''의 집대성으로 보면서도 한과 대립한 항우를 한 축으로 삼은 [[초한지]]라는 [[소설]]까지 나왔다는 걸 생각해 보자. [[성즉군왕 패즉역적|"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든 사례로도 꼽힌다. * 다만 항우와 같이 [[패자#s-1]](敗者)가 오히려 대중으로 널리 사랑을 받으며 주인공 대접을 받는 일이 그리 드문 것은 아니다. 애초에 "[[성즉군왕 패즉역적]]"이라거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들 자체가 '''"공식적인 역사 기록은 승자의 입장과 관점에서, 그를 정통으로 보고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이지 '''"패자의 이야기는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잊혀진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오히려 저러한 말들이 자주 나오는 상황이야말로 '''패자를 위한 변명'''이 필요한 상황, 말하자면 "역사란 결국 승자가 남긴 기록인데, 승자는 더 올바르고 뛰어난 인물이었고 패자는 더 못되고 어리석은 인물이었다는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기만 할 수 있느냐?"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려는 상황들인 것이다. 게다가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원하는 대중이 오히려 결국 패배한 약자 측에 이입하여 그를 응원하는 현상 역시 대단히 대중적인 것으로써, 영어로는 <[[언더독 효과]]>, 중국에서는 <어남부대(鱼腩部队)>, 일본에서는 <판관비희(判官贔屓)>라 하여 이런 현상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표현이 따로 만들어져 있을 정도. 즉, 드라마틱한 최후를 맞이한 패자가 진지한 역사 연구에서 박한 평을 받는 것과는 달리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서사에서 널리 사랑받는 현상은 세계적으로도 흔한 것이다. 다만 항우의 사례에서 특이점을 찾아본다면 그 자신이 남긴 행적과 그 행적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문학적으로 정리되는 과정을 통해 '''짧고 굵지만 화려한 행적을 남긴 나쁜 남자형 주인공'''이 '''최후에는 비극적으로 패배하는 이야기'''라는 하나의 서사 유형에서 거의 모범이 할 만큼 완벽한 전형으로 완성되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 [[사마천]]의《[[사기(역사책)|사기]]》에서는 [[고제(전한)|한 고조]] 유방에게 패배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제후를 다루는 세가나 신하와 반역자를 다루는 열전 대신 '''천자의 기록을 수록하는 본기에 항우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사기는 천자와 제후를 나누는 데 명분보다 실제 세력과 영향력을 중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기에서 유방 다음에 나오는 것도 명분상 천자가 아니라 태후로서 실제로 천하를 호령한 [[고황후 여씨|여후]]다. * 그의 이름은 항적이지만 자인 '''항우'''로 훨씬 널리 알려져 있다. '''조자룡''', '''제갈공명'''과 비슷한 케이스지만, 이름이 [[조운]], [[제갈량]]이란 건 대부분 알고 있는 것에 반해, 이쪽은 대부분이 항우가 이름이 아니란 걸 모르는 경우가 많다. * [[당나라]]의 시인 [[두목]](杜牧)은 항우가 죽은 오강에 와서 그를 기리는 시를 짓기도 했다.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권토중래]]. >'''{{{+2 [ruby(勝敗兵家不可期, ruby=승 패 병 가 불 가 기)]}}}''' 병가의 승패는 기약할 수 없으니 >'''{{{+2 [ruby(包羞忍恥是男兒, ruby=포 수 인 치 시 남 아)]}}}''' 부끄러움을 참는 것도 사내의 일이다. >'''{{{+2 [ruby(江東子弟多才俊, ruby=강 동 자 제 다 재 준)]}}}''' 강동의 자제 중에는 뛰어난 인재가 많았으니 >'''{{{+2 [ruby(捲土重來未可知, ruby=권 토 중 래 미 가 지)]}}}''' [[권토중래|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돌아왔다면]] 결과는 알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여기에 [[송나라]]의 정치가 [[왕안석]]은 백성들을 아끼는 민중사관의 입장에서 반박하는 답시를 남겼다. 강동의 민중을 전쟁에 끌어가 희생시킨 항우, 그리고 그런 학살자와 그가 일으킨 전쟁에 로망을 느끼는 시인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민생을 위한 [[개혁]]안을 평생 추구한 왕안석다운 관점이 느껴지는 시. >'''{{{+2 [ruby(百戰疲勞壯士哀, ruby=백 전 피 로 장 사 애)]}}}''' 수없이 싸워 피로함에 장사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2 [ruby(中原一敗勢難回, ruby=중 원 일 패 세 난 회)]}}}''' 중원에서 크게 패하니 대세를 이미 돌이키기 어렵게 되었네 >'''{{{+2 [ruby(江東子弟今雖在, ruby=강 동 자 제 금 수 재)]}}}''' 강동의 자제들이 지금 남아있다 하더라도 >'''{{{+2 [ruby(肯與君王捲土來, ruby=긍 여 군 왕 권 토 래)]}}}''' 과연 군왕과 더불어 [[권토중래|흙먼지를 일으키며 올]] 성 싶은가? * [[패왕]]이라는 칭호는 항우가 호칭이 필요하다고 부르자 [[장량(전한)|장량]]이 '''"[[삼황오제]], [[춘추오패]], 전국 9왕 같은 호칭들이 많으니 택일하십시오."'''라고 답하여 패와 왕을 섞어서 스스로 패왕이라 붙였다고 전한다. 이 때 범증은 춘추오패의 결말이 모두 좋지 못했다는 점과 왕 칭호의 격이 너무 낮다는 점을 들어 항우에게 다른 명칭을 권했으나 묵살당했다.[* 장량 역시 이를 잘 알기에 교묘히 항우가 패왕이라는 칭호를 선택하도록 유도했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범증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 패왕이라는 호칭 때문에 '패'라는 글자의 의미도 어느 정도 변질이 되어서 무력적이고 강압적인 의미를 많이 띠게 되었다.[* 원래 '패'는 천자인 주나라 왕을 잘 섬긴 제후에게 주었던 칭호였다.] * [[삼국지]]의 [[조조]]에게 [[데꿀멍]]하는 민담도 있다. 어느 날 조조가 항우에게 바위를 기어다니는 [[이(곤충)|이]]를 가리키며 "공께서는 힘이 산을 뽑을 정도로 강한데 이 이를 죽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항우는 코웃음을 치며 다른 바위를 들어 이가 기어다니는 바위를 내리찍었는데 큼지막한 바위들 사이의 틈이 컸는지 이는 죽지 않고 여전히 바위 위를 기어다녔다. 이를 본 조조는 항우를 비웃으며 "천하 장사가 이만한 이도 못 잡는단 말인가!"라고 말한 후 손가락으로 이를 톡 터뜨려 죽여 버렸다. 이것을 본 항우가 기겁을 하여 조조에게 굽신댔다는 훈훈한 민담 한 토막. 실제 항우가 저 정도로 무식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항우가 능력을 가지고도 그 힘을 엉뚱한 데다가 쓰기도 했던 역사적 행적을 생각하면, 이 민담은 항우와 조조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민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역적이라 지탄받은 항우는 나라를 세우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여 군담소설의 [[권선징악]]을 이루었는데 조조는 망하지 않고 나라를 세우고 천수를 누렸으니 [[권악징선]]이라 할 만하다. 또한 이러한 항우와 조조의 성격 차이가 똑같이 학살을 일삼고 충의보다는 패도의 길을 걸었음에도 현대 이전까지 항우와 조조의 평가를 극과 극으로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 종종 [[삼국지]]의 최강 무장이라 꼽히는 [[여포]]와 비교를 하는 경우도 보인다. 당장 네이버에 검색에도 "항우하고 여포하고 누가 더 쎔?"이라는 초딩같은 질문이 굉장히 많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최강 논쟁]]은 언제나 그렇듯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중국에서의 무력 비교는 거의 대부분 항우가 기준이다.''' 이 때문에 삼국지에서는 그 어린 나이에 인간 병기급 활약을 보인 [[손책]]을 '''항우의 재래'''[* 소패왕, 즉 작은 패왕]라며 그의 용맹을 있는 대로 추켜세우는 묘사도 존재한다. 애초에 여포가 삼국지 최강자라는 인식은 연의가 띄워준 것이 크다. 또한 당대에 [[곽가]]도 여포의 위력이 항우에 못 미친다고 평가하였다.[* 출처: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2289]]] 중국의 용맹한 장수에 대한 묘사를 보면 거의 언제나 ''''그 모습과 무용이 능히 항우와 견줄 만했다''''는 뜻을 가지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설'의 여포보다 '실제 역사 기록'의 항우가 훨씬 강하게 묘사된다.''' [[팽성대전]]과 [[거록대전]]만 살펴보더라도 이게 인간인가 싶을 정도의 무용을 자랑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무력으로 한때나마 중국 전역을 제패한 패왕과 용맹하긴 했지만 일개 군벌 내지 제후를 벗어나지 못한 여포의 비교인데 성립할 여지가 없다. 물론 여포 역시 당대에 비할 인물이 없다는 평가를 받긴 하는데 얜 애초에 기마병 겸 활잡이가 본업이다. 항우 마냥 판타지의 영역인 장수가 아니라 살상력이 높은 기술에 능한 현실적인 장수에 가깝다. 현대에 과거 [[맹장]]에 대한 우위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중국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상상할 수 있는 최강의 장수'''자리에는 항우가 자리잡고 있다고 봐도 될 듯하다. 말 그대로 [[남자의 로망]]이 형상화되었다 볼 수 있는 것이 항우기 때문. 사실 [[삼국지]]내에서 [[항우]]랑 비교를 할꺼라면 [[신]]으로 추존된 [[관우]]하고 비교를 하는게 더 말이된다. 당장에 [[관우]]는 삼국시대 이후로 오랜세월 중국에서 제후에서 왕으로 왕에서 황제로 추존되다가 마침내 신으로 격상됐는데 많은 중국인들이 [[무력]]과[[최강]]이라는 단어앞에서는 [[관우]]가 아니라 [[항우]]의 손을 들어줄 정도다. * '''항우 장사'''는 바로 이 항우에게서 비롯된 단어다. * 시각에 따라서 항우가 아니라 [[흉노]]의 [[묵돌]]을 최대의 적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어느정도 맞는 말이기도 하다. 무력이나 카리스마는 항우가 월등히 뛰어났지만 유방, 항우, 묵돌의 직업은 군주이지 장수가 아니다. 항우가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전투에서 승승장구했음에도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은 위에서 이미 강조된 바이다. 묵돌은 항우에 비해 문맹이었지만 지혜로움은 항우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반면에, 항우는 용맹했지만 감정적으로 행동하여 쓸데없는 살육을 많이 저지르고 자멸하였다. 묵돌과 항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여기서 작용한 것. 하지만, 묵돌이 상기한 것처럼 승승장구하며 중국을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중국 자체가 항우와 유방으로 나뉘어서 [[건곤일척]]의 혈전을 벌였던 것에 크게 기인한다. 만약 [[초한전쟁]]으로 인한 어마어마한 국력 소모가 없었더라면 결코 [[묵돌]]이 그렇게 활약했을 수가 없다. 당장 [[초한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시황제|진시황]]이 통치하던 시절, 진시황이 [[몽염]]을 보내어 흉노를 완전히 쓸어버렸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흉노가 시황제에게 쳐발리던 시점에서 묵돌은 아직 즉위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동호에게 삥이나 뜯기던 약체였으며 그런 약체 정권을 강대국으로 부상시켰다는 점에서 오히려 묵돌의 대단함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 초한지를 쓴 [[이문열]]은 항우의 자살에 대해 "그가 태어나서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개인 일생이 후대 사람들까지 기억할 정도로 흥미로운 점과 별개로, 항우의 정치적 능력을 생각하면 나름 납득이 되는 평가. * 생전의 업보 때문인지 죽어서도 말년이 곱지 못했는데 [[문화대혁명]] 때 항우의 묘와 우희의 묘가 파헤쳐지고 석사자만 남게 되었다. 다만, 실제로 항우와 우희의 유골이 묻혀져 있는 묘는 아니다. * [[구정]]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중원을 상징하는 9개의 솥 구정은 하나하나가 5천근이 되기에 구정을 옯기려면 수백명의 장사가 동원되어야 했다. 이를 무시한 진나라 무왕은 신하들과 힘 자랑하다가 구정 1개에 깔려서 죽은 것에 비해 초패왕 항우는 당시 진나라에 있던 구정 8개를 양어깨로 들고 수만리 떨어진 팽성까지 들고 갔다고 한다. * '''[[만인지적]](萬人之敵)'''[* 중국사 정사에서 공식 인증된 만인지적은 '''[[항우]], [[관우]], [[장비]], [[한세충]]''' 4명 뿐이다. 특히 [[관우]]의경우 중국사 최고의 인기인물이자 중국내에서 수천년에 걸쳐 제왕 혹은 신으로 추존되어올 정도로 만인의 우러럼을 받아온 인물인데 이정도로 [[관우]]빠인 중국인들조차 최강 혹은 무력을 논하면 항우의 손을 들어줄 정도로 항우가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패왕]](霸王)''',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가 모두 항우로부터 유래되었으며, 어마어마한 용력과[* 진무왕도 들지 못한 8개의 청동솥 구정을 한손으로 들었다고 한다. 기록에는 9개의 솥 하나하나의 무게 무려 5천근이니 항우는 한손으로 4만근이나 되는 솥을 한손으로 들정도로 힘이 셌다.] 전술지휘력은 고대사에서 적수가 없을 만큼 뛰어났다. * 특히나 몇천 명의 병사로 '''수십만 대군을 패주시키거나''', 단신으로 [[기병]] 수백여 명을 썰어버리는 등 기록만 보면 현실의 기록이 아니라 [[무협지]]의 묘사인 걸로 착각할 지경이다. 이 기록은 그의 초기의 대표적 전투인 [[거록대전]], 그리고 화룡점정은 바로 [[팽성대전]]인데, 고작 3만의 군사로 60만 대군과 정면으로 맞붙어 초토화시키고 별다른 피해조차 없이 적군 30만 명을 일방적으로 살육한 경우는 세계 전쟁사를 통틀어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게 이 팽성의 전투는 오늘날까지 전설로 전해지는 항우의 괴력과 군사적 능력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전투가 된다. 이러한 기록들은 [[고대]]의 사료라는 시대적 한계가 있으나 춘추 필법[[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8933&cid=40942&categoryId=32972|#]]이라는 고대에 보기 드문 사실만을 쓰겠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신뢰성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실제로 사실만을 쓰겠다는 사상이 주류가 된 나라는 고대에 매우 드물었다. 물론 [[호왈백만]]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온 동네이니만큼 병력의 수 등이 뻥튀기되어 있을 확률은 염두에 둬야 하지만.] * 천부적인 군사적 능력을 바탕으로 항우는 '''거병 후, 고작 2년만에 중국을 제패하고 [[패왕]]으로 군림한다.''' 이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찾아볼 수 없는 대기록으로, [[사마천]]은 황제의 일을 기록하는 본기(本紀)에 항우의 행적을 적었으며, 다른 모든 제후를 무릎 꿇리고 [[홍문연]]에서 라이벌인 한고조를 그냥 죽일 수 있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천부적인 군사적 능력을 가지고 있던 것의 반대급부로 군주로서의 능력은 바닥이었다. 그 결과, 온갖 실책을 반복한 끝에 [[고제(전한)|한고조]]에게 판세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고 압도적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항우는 일생을 통틀어 [[해하 전투]]를 제외하면 지휘관으로서 전장에서 패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그 해하에서도 자신의 3배가 훨씬 넘는 규모의 적을 상대로 초반에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결국 패하고 최후를 맞이했다. * 몰락한 귀공자 출신으로 자신의 무용과 [[카리스마]]로 순식간에 천하를 석권하고, 정점에 올랐으나 자신의 과오로 몰락하는 그 드라마틱한 생애, [[우미인]]과의 짧은 로맨스와 역사를 통틀어 비교 대상이 없는 용맹, 귀족적인 인자한 모습과 광포한 학살자의 면모가 아무렇지도 않게 공존하는 인격 등. 정치인이나 군인으로서의 시시비비나 도덕적 선악을 따지기 이전에, 그 생애와 성격 자체가 '''중국사 전체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강렬한 개성과 포스'''를 갖추고 있어 후대에 [[초한지]](서한연의), [[패왕별희]] 등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생산하고 무수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 어떻게 보면 역사로부터 났으나 역사로부터 탈각되어 ''''이미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상징이 된 인물'''로, 중국사에서 포폄의 절대 기준이었던 유교 이데올로기마저 거슬러서 불후의 이채(異彩)를 발하는 중국 영웅열전 최대의 이단아이다. [[충신]], [[명군]], [[협객|의협]], [[군자]]도 아님에도 단지 무(武)와 [[카리스마]]만으로 그들과 나란히 중국을 대표하는 영웅호걸의 명단 최상단에 자리하고 있는 실로 이질적인 인물. 유교적으로는 충군도 애민도 갖다 버린 난신적자였고 정치적으로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폭군이었음에도 민중 문화에서 엄청난 사랑을 받은 것은 물론 현대의 중국 지식인 중에서도 항우에게 긍정적인 인물이 상당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과 포스를 현재까지도 발휘하고 있다. 항우의 이런 인기는 정말 지극히 이례적인데 이는 걸출한 문장으로 항우의 삶을 재구성하고 응축해낸 [[사마천]]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천재성에 힘입은 바도 크다. 《[[사기(역사책)|사기]]》는 각 편과 인물 하나하나의 묘사가 핍진성이 있고 그 개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으로 고평가받지만 《항우본기》는 사기 전편 안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이다. 《항우본기》 자체가 중국판 영웅 서사시라 해도 무방할 만큼, 어지간한 연의소설이나 무협소설을 능가하는 생동감을 자랑한다. 특히 [[해하 전투]]에서 해하가를 부르고 한군의 포위를 돌파하다 자결하기까지의 대목은 항우본기의 압권으로 사마천이라는 대문호의 필력이 폭발하는 지점이다. 사마천은 항우의 포악을 비판하고 그의 파멸을 그 자신의 탓이라 말하면서도 역사의 패배자인 그를 '''정통한 천하 종주의 계보인 본기(本紀)''' 안에 포함시켰고, 극단적인 암과 명을 겸비한 그 생애를 역사에 다시 그려넣어 그에게 불멸을 부여했다. 그렇게 불후의 저작을 통해 다시 태어난 항우는 중국을 넘어 동아시아 세계의 한 문화적 원형으로 오늘날까지도 남아 수많은 영웅호걸들의 바탕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라이벌인 [[고제(전한)|유방]] 역시 《[[삼국지연의]]》의 [[유비]], 《[[수호전]]》의 [[송강]] 등 인화(人和)형 영웅 캐릭터의 원형으로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대중매체에서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항우/기타 창작물)] == 관련 문서 == * [[중국사 관련 정보]] *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 [[초한전쟁]] * [[초한지]] * [[초(춘추전국시대)]] * [[서초(초한쟁패기)]] * [[거록대전]] * [[팽성대전]] * [[해하 전투]] * [[패왕별희]] == 둘러보기(계보) == [include(틀:사기)] ---- [include(틀:한서)] [각주] [[분류:항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