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국의 전통 건축]][[분류:미술사]] [include(틀:대한민국 관련 문서)] [[파일:external/www.todayus.com/BN-AM566_1121SK_G_20131121041407.jpg]][* 각기 다른 시기의 세 건축이 만나고 있는 곳으로 높이 평가받는 [[공간]] 사옥.] [[대한민국]]의 [[건축]], 혹은 [[한국인]]의 [[건축]] [목차] == 개요 == 한국 고유의 건축과 건축의 역사를 주제로하는 문서이다. == 역사 == 주거의 경우 고대부터 근대 이전까지 동양문화권은 유달리 주거에서 단층 건축을 선호했다. 따라서 고대에는 2층이 흔했을거라는 상상은 적어도 종교나 권위적 건축으로 한정한다면 맞는 말이지만, 그 외에는 조선 후기처럼 단층이 절대다수였다. 물론 지역마다 일부 예외도 있지만 대체로 먹고 자는 집은 2층 이상을 싫어했고, 복층 건물은 상업적, 종교적, 권위적이라는 한정적인 목적으로 지었다. 따라서 한국 건축에서 복층을 보기 힘든 이유 첫번째는 이것이다. 2층이상의 한옥 건축이 흔했던 시기는 고대도, 중세도 아니고 한옥에 서양 건축기법이 도입된 근대부터다. 다만 조선 전기 양식의 양반가옥, 누각, 제사건축, 종교나 궁궐 건축에는 ‘다락’이라는 복층이 상당수 보인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덕수궁의 [[덕수궁 석어당|석어당]], 일제강점기에 불타 없어진 창덕궁의 징광루는 대놓고 실내에 계단이 있는 2층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 목재난에도 불구하고 주거 건축의 면적은 더 커졌는데, 집을 이루는 목재의 두께는 갈수록 얇아졌고 휘어진 목재 따위를 그대로 쓰는 등 목재난의 영향을 아예 비껴가지는 못했다. 그 외 건축의 경우 확실히 이전시대보다 규모가 작아졌다. 가장 큰 이유는 목재난이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앞다투어 대규모 건축을 계속 지으려고 했기 때문에[* 17~18세기: 금산사 미륵전, 법주사, 화엄사 각황전. 19세기: 경복궁] 소박하고 절제를 미덕으로 하는 유교의 영향이라기보단 목재난이 더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 전통 건축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한옥)] [[목재]]를 주로 사용한 건축으로, 부재를 결합할 때 되도록이면 짜맞춤에 의존하며 못을 거의 쓰지 않는다. 공학적으로는 중국식 건축의 구조인 대량식을 가져왔으나 공간 활용과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마루와 같은 개방형 공간과 안방과 같은 폐쇄형 건축이 조합된 독특한 구조를 자랑하며, 이는 온돌, 매다는 문짝(들문)과 더불어 추운 겨울와 더운 여름을 모두 소화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물에 닿으면 썩기 시작하는 목재를 주로 활용했기에 한 가지 큰 단점을 꼽는다면, 무너진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기단은 남는다.] 기와가 떨어지고 집이 기울어 비에 노출되기 시작한 목조건물은 불과 수십 년만 지나도 순식간에 녹듯이 썩어 사라진다. 전란 등으로 인해 불에 타서 사라지기 쉬운 것도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고대나 중세 건축물의 연구에 어려움이 크다. [[소나무]]가 한국 전통건축의 대표 목재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건축물에 사용하는 목재는 2007년에 발표된 '우리나라 건축물에 사용된 목재 수종의 변천' 논문에 의하면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거의 [[참나무]]속 나무를 사용했고 고려시대부터 소나무를 많이 이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직 소나무만이 한국 전통건축의 대표 목재라는 것은 다소 조선 후기 한옥의 이미지에 매몰된 것.[* 지금 한반도의 강산에 소나무가 아주 많은 것은 [[녹화사업]] 때 소나무 중심으로 심었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고대부터 원래 자연적으로 소나무 비율이 지금처럼 높은 환경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에 들면 소나무의 점유율이 88%에 육박하게 된다. === 원시 시대 건축 === 여기서의 원시 시대 건축은 [[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초기 [[철기시대]]를 의미한다.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집은 구석기시대의 막집과 신석기시대 [[움집]]이다. 막집은 말 그대로 막 지은 집이란 뜻으로, 가장 단순한 형태의 주거시설이다. 움집은 지열을 이용하기 위해 땅을 파서 움을 만든 뒤 그 위에 지은 집으로, 시대가 발전할수록 점차 움이 얕아지는 모습이 보인다. [[파일:external/leekcp.new21.org/01.jpg|width=500px]] 구석기시대 막집. [[파일:external/study.zumst.com/%EC%8B%A0%EC%84%9D%EA%B8%B0%EC%8B%9C%EB%8C%80-%EC%9B%80%EC%A7%91.png|width=500px]] 신석기시대 토막식 움집의 모습. 초기의 움집으로, 땅을 이후 시대 움집보다 깊게 파고 그 위에 지붕을 덮은 것이다. 시간이 지나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둥과 주초가 나타나고, 나중에는 방과 초기형 [[온돌]]도 나타난다. [[파일:external/leekcp.new21.org/88.jpg|width=500px]] 석기시대에 비해 많이 발달한 청동기시대 움집. 이런 형태로 벽이 외부에 노출되기 시작한 움집을 초옥토실식이라 한다. 이 초옥토실식 움집에서 한국 전통 건축물의 기본 형태가 나타나기에, 보통 한국 전통건축의 시원은 이 초옥토실식 움집으로 잡는다. 이 외에 누목식(귀틀집)과 고상식 집, 토실도 나타난다. 귀틀집은 통나무를 井자 형태로 쌓아올리고 통나무 틈은 흙으로 메워 만든 집을 말하며, 고상식 집은 윈두막처럼 지면보다 높게 지은 집을 말한다. [[파일:external/img.khan.co.kr/8f2822a.jpg|width=500]] 마한의 토실(土室)의 구조.[[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6271709405&code=900305|#]]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초옥토실(草屋土室)이라고 나온다. 단, 초옥토실은 지붕을 초가로 하고 흙으로 벽을 만든 집이라는 해석도 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260219|#]] [[파일:external/blog.joins.com/%EA%B7%80%ED%8B%80%EC%A7%911.jpg|width=500]] [[너와집|너와]]를 얹은 귀틀집.[[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jho93700&folder=29&list_id=8346760|#]]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127728_STD.jpg|width=500px]] [[가야]]의 고상식 주거의 복원. 비와 습기에 강한 고상식은 한반도 남쪽에서 올라온 주거 양식으로 추측된다. 일본 [[도다이지]]의 정창원 건물은 아직도 이러한 고상식 모습을 하고 있다. 참고로 가야는 철기 도입은 빨랐지만, 기와의 도입은 상당히 느린 지역이었다. 또한 철기시대로 넘어가면서 한반도에 기와가 도입된다. 기와는 이전에 지붕재료로 쓰이던 풀이나 너와와 달리 반영구적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제작 단가가 높고 무거워 근세 후기 부농/상공업자의 성장 이전에는 기와를 마련하고 좋은 원자재로 튼튼하게 집을 짓는 게 가능한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 삼국 시대 건축 === [[파일:attachment/uploadfile/hwangryongsaji02.jpg|width=500px]] 삼국 시대의 건축 가운데 제일 유명한 [[황룡사]]. 그리고 그 복원모형. 아쉽게도,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삼국시대의 목조 건물은 하나도 없다. 말 그대로 남아있는 고대 목조건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같은 목조건축문화인 중국이나 일본의 상황도 거의 비슷하다. 왜냐하면 돌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 썩고 또 불에 약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세부적인 면은 쉽게 알 수가 없으며, 남아있는 터의 기단과 주춧돌로 건물의 배치와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삼국 시대 건물지 등을 발굴하여 상당한 양의 건축 부재를 발굴하기도 한다. 무덤이나 조각, 금속으로 만든 모형 등의 유물로 간접적이나마 그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일본]]에는 [[호류지]], [[시텐노지]] 등 직ㆍ간접적으로 백제 등의 영향을 받았다는 고대 건축물이 존재한다. 중국 역시 [[당나라]] 시대 건축이 몇 개 보존되어 연구에 도움을 준다. 이렇듯 장기간 연구 자료가 축적되어 삼국 시대 건축에 대한 고증 역량도 강해지고 있다. 입식과 좌식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삼국시대에서 건축으로 가장 덜 유명한 것은 (자료가 적은 [[가야]]는 논외로 치고.) [[백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안학궁]]이나 [[황룡사]] 등 규모가 큰 고구려나 신라의 건축물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크기로 유명한 건축물이 부족해서이며,([[미륵사]]가 있지만.)[* 면적에서는 안학궁보다는 작고 개별 건물의 크기는 황룡사보다 작다.] 사실 백제가 삼국시대에 가장 수준 높은 목건축술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황룡사]]의 9층 목탑에도 추측이지만 백제의 기술자가 건축했을 가능성이 있다. 자세한건 [[아비지]] 문서 참조, 일본의 고건축과 관련된 기록에도 거의 다 백제의 장인이 등장한다. 출토되는 유물이나 터로 봤을 때는 근대를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가장 건축물이 거대한 시기이기도 하다. 터도 크지만, 발굴되는 기와나 치미의 크기 등이 장난이 아니어서 기와의 무게가 조선시대 기와의 5배 정도 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건축물의 크기 차이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예가 된다. 유명한 [[황룡사]] 9층 목탑만 하더라도 당대 지어진 세계 건축물 중에서도 높이에 있어서 손에 꼽을 정도다.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치미]]는 높이가 무려 180cm가 넘으며, 만덕사지 치미도 이에 맞먹는 규모다. 지붕 장식의 규모가 이 정도니 건물의 규모가 얼마나 거대한지 가늠할 수 있다. 삼국을 대표하는 사찰로는 [[고구려]]의 [[정릉사]], 백제의 [[미륵사]], [[신라]]의 [[황룡사]]가 있다. 궁궐로는 한국 역사상 가장 크고 아름다웠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안학궁]], 신라의 [[경주 월성]] 등이 있다. 고구려의 경우는 [[고구려/건축]]도 참고. === 남북국시대 건축 === 신라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삼국시대 신라의 연장선이며, 이 시대 역시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남은 것은 거의 없지만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어 비교적 그 모습을 추측하기가 쉽다. 특히 안압지 물 속에서는 상당한 양의 건축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서까래 등에 사용하는 금속 장식이나 섬세한 기와들, 늪에 빠져 보존된 난간으로 쓰였던 석재와 목재 등 매우 다양하고 희귀한 것들이 많이 나왔다. 이 시기의 건축물은 상당히 호화로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금으로 된 집도 존재했다고 한다. [[금입택]]이라고도 하는데 그것도 무려 35채가 신라 수도 서라벌에 존재했다고!!][[http://egloos.zum.com/luckcrow/v/2472757|#]] 당연히 이런 화려함은 귀족 이상의 계층에게만 적용된 것이다. 그러나 [[발해]]의 건축에 대해서는 고분이나 궁궐터, 기와나 건축 부자재 일부 외에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다. 단일 건물로써는 한국 건축물 중 크기가 가장 큰 건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상경용천부]] 정전도 기단으로만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석조물의 양식으로 보아 아마도 고구려와 [[당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것은 사료부족으로 인해 연구중이다.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건물의 규모가 거대했는데, 상경용천부 제9절터에서 출토된 치미의 높이는 92cm다. 남북국시대 신라 건축의 방향은 형식상의 완성과 균형미적인 면을 중시하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특히 화강암을 적극적으로 다뤄서 만든 석굴암의 조각들과 불국사 석조물은 대단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의미부여를 통해 특이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또한 안압지 터를 통해 신라가 인공적인 조경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불교)|사찰]]에 있어서는 1개 금당에 1개의 탑이 있던 일탑식 형식(가람 배치)에서 2개의 탑이 있는 이탑식으로 변한다. 특히 통일 후 백제에게서 뭔가 배웠는지 [[석탑]]이 마구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전 시기의 신라가 지은 석탑이라고는 [[분황사]] 모전 [[석탑]]만 남아있다. [[불국사]], [[감은사]] 등이 이탑식으로 석탑들을 세웠다. 기본적으로 이 시기는 [[당나라]]가 중심이 된 중국적 천하가 완성되어 존재하던 시기라 신라와 발해, 그리고 일본 등 많은 주변국 모두 건축뿐만 아니라 복식, 제례문화 등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당나라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다만 둘 중 아예 새로 건국한 발해와 달리 고대 왕조의 연장선인 신라의 경우 당나라식 건축 양식의 영향보다는 자국의 재래문화가 더 강하게 남았다. 대표적으로 도성을 비교해 보면 발해와 일본은 당의 좌우대칭식 도성 구조를 그대로 도입한 데 비해 신라는 기존의 도성 치제를 그대로 유지했다. === 고려 시대 건축 === [[파일:attachment/Karch02.jpg|width=500px]] [[파일:16665639516B84DD2E5F1A.jpg|width=500px]] [[파일:emiruk.jpg|width=500px]] [[파일:attachment/koreaarch.jpg|width=500px]] [[고려]]의 관경서분변상도. 정토삼부경경 가운데 [[관무량수경]] 속 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일상화라기 보다는 불화이고, 굉장히 과장된 묘사지만, 건축이나 복식 면에서는 당시의 고려 양식으로 [[로컬라이징]] 되어 있어 다른 그림들과도 유사하게 일관성을 보이기에 고증 자료로 참고할 가치는 충분하다. [[http://luckcrow.egloos.com/2655835|고려변상도는 그저 종교화일까? 다른나라의 변상도에 나오는 건축과 문화]] [[http://luckcrow.egloos.com/2628682|고려회화, 아집도 대련 중 하앙으로 보이는 구조물 발견]] 사치스러움을 억제하고 검소함을 지향했던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는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귀족적인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현대의 시각으로 보아도 매우 화려한 모습을 자랑한다. [[송나라]] 사신이 기록한 [[고려도경]]에서는 '관리들과 국상 부자들이 늘어나면서 점점 사치스러워졌다'는 내용과 '선의문 안으로 들어서면 수십집 가운데 하나씩 누각이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https://vpb192kh.tistory.com/entry/%EC%A7%80%EC%8B%9D-%EA%B3%A0%EB%A0%A4%EC%8B%9C%EB%8C%80-%EA%B1%B4%EC%B6%95-%EC%96%91%EC%8B%9D%EC%9D%84-%EC%95%8C%EC%88%98%EC%9E%88%EB%8A%94-%EA%B3%A0%EB%A0%A4-%EA%B8%88%EB%8F%99%EC%82%BC%EC%A1%B4%EB%B6%88%EA%B0%90|어느 역덕이 재현한 고려시대 건축]][[https://vpb192kh.tistory.com/entry/%EC%82%B0%EC%84%B1-%EC%84%B1%EB%B2%BD-%EA%B1%B4%EC%B6%95%EB%AC%BC-%EC%84%B1%EB%9E%91-%EA%B7%B8%EB%A6%AC%EA%B3%A0-%ED%9D%91%EC%9C%A0%EC%99%80-%EC%9A%B0%EC%A7%84%EA%B0%81%EC%A7%80%EB%B6%95-%EA%B3%A0%EB%A0%A4%EC%8B%9C%EB%8C%80-%EA%B1%B4%EB%AC%BC|성문이 무려 25m!? 고려시대 산성 성벽 건축물 성랑, 그리고 흑유와 우진각지붕 고려시대 건물]][[https://vpb192kh.tistory.com/entry/%EA%B3%A0%EB%A0%A4-%EC%82%AC%EC%84%9C%EA%B8%B0%EB%A1%9D%EA%B3%BC-%EA%B3%A0%EC%84%9C%ED%99%94%EA%B0%80-%EA%B5%90%EC%B0%A8%EA%B2%80%EC%A6%9D-%EB%90%9C%EB%8B%A4-%EC%82%AC%EC%84%9C%EA%B8%B0%EB%A1%9D-%EA%B8%B0%EB%91%A5%EA%B8%B8%EC%9D%B4%EB%A5%BC-%EC%9E%AC%ED%98%84%ED%95%9C-%EA%B3%A0%EB%A0%A4%EC%8B%9C%EB%8C%80-2%EC%B8%B5-%EA%B1%B4%EB%AC%BC%EB%93%A4-Feat-%EC%84%B8%EC%A2%85%EB%8C%80%EC%99%95-%EB%86%92%EC%9D%B4-22m%EA%B1%B4%EB%AC%BC|사서기록과 고서화가 교차검증 된다!? - 사서기록 기둥길이를 재현한 고려시대 2층 건물들]] 그림이나 기록 등 남아있는 자료들로 보아 붉은색의 주칠(朱漆)과 검은색의 흑칠(黑漆) 등 [[옻칠]]을 이용한 [[단청]]을 궁궐, 사찰, 귀족들의 주택 등에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도경에서는 '궁궐 건물에 난간은 붉은 옻칠을 하고 동화(銅花)를 장식하였으며 단청이 장엄하고 화려하다', '청자로 된 기와와 흙담벽에 중국 직수입 비단을 둘러 장식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이 외에도 전각에 옻을 칠해서 호화롭게 만들었다는 기록 등이 있다. 기본적인 색상 자체는 삼국시대부터 보이는 전통적인 단청 양식인 주칠 양식을 바탕으로 하되 [[원나라]]와 접한 이후부터는 우리가 익히 아는 붉은색(갈색)+푸른색(녹색) 상록하단 양식이 등장한다.[* 갈색으로 칠하는 양식 자체는 [[고구려]] 건축에서도 사용하긴 했다.] 이렇게 옻칠과 금속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양식은 [[당나라]], [[송나라]]를 필두로 동아시아 전반에서 유행한 양식이었으며 당시 사용한 금속 부품, 특수한 재료로 만든 기와, 실내용 타일 등이 지금도 출토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일본에만 남아 있는 양식이 되었으므로 당시의 건축 양식을 재현한다면 지금의 일본 건물과 유사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파일:external/study.zumst.com/%EB%AC%B8%EB%B2%8C%20%EA%B7%80%EC%A1%B1%20-%20%EC%95%84%EC%A7%91%EB%8F%84%20%EB%8C%80%EB%A0%A8.png|width=500px]] 고려 귀족들의 생활상을 그린 아집도대련 중 일부. 바닥에 타일을 깐 외실과 문을 걸어닫은 내실이 구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귀족층은 입식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수도 있으나 고려도경 기록에서는 '고려의 왕은 날마다 편좌(便座)에 앉아 정사를 보는데 평상에는 인욕(왕골, 부들로 짠 돗자리)을 깔고 앉아 정사를 본다'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입식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파일:external/dvdprime.donga.com/4245136_20090830132737406.jpg|width=500px]] 공민왕이 그렸다는 기위도. 3시 방향에 당파풍(唐破風)으로 추정되는 둥근 지붕이 보인다. 이 외에도 고려시대의 눈에 띄는 큰 건물로는 개경의 도심 사찰이었던 [[보제사]]의 5층 목탑이 있으며, 조선시대 전기까지 존재했다고 하는데 높이가 약 60미터 정도였다고 한다. 보제사의 이름은 조선시대가 되어 연복사로 바뀐다. >십천교를 지나 곧바로 가서 연복사에 이르렀다. >한 중앙에 우뚝 솟은 5층 누각이 온 성중을 압도하고 서 있는데, >창문과 기왓장에 저녁놀이 비친다. >참으로 웅장한 건물이다. > >유호인 명산답사기 중 <송도기행> 나무위키에 등재된 주요 건물: [[만월대]] - 고려시대 본궁터다. [[https://terms.naver.com/list.naver?cid=49267&categoryId=49267&so=st4.asc/|문화컨텐츠닷컴 백과]]에서 3D로 복원한 영상이 있으니 참고. 한옥이라 하면 좌식 온돌방만을 떠올리는 선입견과 많이 다르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96478&categoryId=49267&cid=49267|고려시대 부유한 평민가옥]]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96479&categoryId=49267&cid=49267|고려시대 귀족저택]]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96480&categoryId=49267&cid=49267|고려시대 별궁]]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96481&categoryId=49267&cid=49267|고려시대 가옥구조]] 반대로 서민들의 주거는 수혈 주거, 즉 '''움막'''과 비슷한 열악한 환경을 가졌다. ==== 남아있는 고려시대 건축 ==== 대부분 고려 후기의 건물이 남아있다. 아마 [[여몽전쟁]]과 고려말기 혼란 때문에 [[임진왜란]] 급의 거대한 리셋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영주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부석사 무량수전]] 언제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왜구 침입으로 손상을 입어 1376년에 중창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제일 오래된 기록이다. 왜구 침입 때 불타버려 1376년에 세웠다는 의견도 있지만, 14세기 건물치고는 양식이 지나치게 오래됐다. * [[영주시]] [[부석사#조사당|부석사 조사당]] 1377년에 세웠다. 다만 1201년, 또는 1192년에 단청을 개수했다는 묵서도 있기 때문에 조사당의 건립 시기는 1377년보다 훨씬 이르며, 1377년의 기록은 중창이나 해체보수한 기록이라는 견해도 있다.[* 최영호. (2019). 고려시대 浮石寺의 역사․문화적 성격. 석당논총, 73, 5-27.] * [[안동시]] [[봉정사#안동 봉정사 극락전|봉정사 극락전]]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다. 남아있는 제일 오래된 기록은 1363년에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이다. 수리는 건물이 세워진지 100~150년 뒤에 하니 건립 연대는 1200년대 초로 추정된다. 그러나 실제 건립 연대는 모른다. 양식이 굉장히 오래된 것으로 보면 그보다 훨씬 이전일 수도 있다. * [[예산군]] [[예산 수덕사 대웅전|수덕사 대웅전]] 1308년 세움. 세운 연도가 알려진 건물 가운데 제일 오래되었다. * [[영천시]] [[영천 거조사 영산전|거조사 영산전]] 1375년 세움. * [[금강산]] 석왕사 응진전 [[6.25 전쟁]] 때 소실. * [[황주군]] 성불사 극락전 북한에 있다. [[6.25 전쟁]] 때 파괴. 1955년 북한에서 복원했다. * [[황주군]] 성불사 응진전 1327년 세움. * [[황주군]] 심원사 보광전 1374년에 세웠다. * [[평양시]] 숭인전 북한에 있다. 1325년에 세웠다. * [[안성시]] 객사 * [[강릉시]] [[강릉 임영관 삼문|객사(임영관) 삼문]] * [[청양군]] 장곡사 상대웅전 * [[곡성]] [[관음사(곡성)|관음사]] 원통전 [[공민왕]] 시기인 [[1374년]]에 중창되었다. 굉장히 연대가 오래된 건축일 가능성이 있었으나 [[6.25전쟁]] 때 전소. * [[춘천]] [[청평사]] 극락전 [[6.25 전쟁]] 직전에 화재로 전소 === 조선 시대 건축 === ==== 유교의 확산 ====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사회 전반에 자리잡았다. 유교 건축은 사치를 지양하므로 굉장히 '''엄숙한''' 양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건축은 사치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재력이 되면야 사치스러운 양식을 했지만 유교 건축에서 만큼은 극도록 절제된 위엄을 중시했다. 유교 건축의 대표적인 예시는 [[종묘]]와 [[서원]]이다. 이들 건축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 건축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점하는 종묘나 서원은 용도 자체가 유교적 건축물의 대표격으로 장식과 [[단청]]을 극도로 단순하게 만들어 의도된 엄숙함을 보인다. 이를 가칠단청이라고 하며, 단청 중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단색의 특정 안료만 칠해놓은 단청이다. 보통 가칠단청은 다른 단청을 칠하기 전 밑바탕으로 칠하는 용도로 많이 쓰는 단청이라 종묘를 비롯한 극소수 건물 외에는 찾기 힘들다.[[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YYWb&articleno=551&categoryId=3®dt=20111110181327#ajax_history_home|종묘 단청]] 궁궐은 역으로 종묘보다 화려한 모로단청을 칠했고, 여러 장식을 썼다. 궁궐이 아닌 [[불교]] 건축은 더 화려해서 [[해인사]] 대적광전 같은 [[불교]] 건축은 유교적 기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복잡한 문양과 화려한 채색을 강조하는 '금단청'을 칠했다. 조선시대에는 건물의 '''격이 높을수록''' 역으로 절제한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중국의 자금성은 당나라 시기의 대명궁에 비하면 크기는 작으나, 건물 자체를 화려하게 짓기보다는 석축과 건물의 폭[* 건물은 높이가 어느 정도 되었을 때부터는 더 높아지는 것보다 좌우 폭이 넓어질수록 위압감이 강하다. 높이는 63빌딩이 더 높지만, 건물의 위압감 자체는 피라미드가 훨씬 강한 것과 같은 맥락.]이 더 넓어지는 방향성을 취했다. 다시 말해 단순히 절제했다기보다는, 화려함보다는 위압감과 권위를 높이는 쪽으로 발달했다는 것. ==== 목재의 고갈 ==== 고려시대때 부터 줄어든 거목들이 그 이후에도 계속 고갈되고 있었고 거기다 [[소빙하기]]로 평균온도가 낮아지자 온돌을 까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온돌로 인해 산림자원의 고갈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그 이전 시대에는 거목들이 부족하지 않았다. 불교와 귀족 문화의 영향으로 [[금입택]]ㆍ[[황룡사]]ㆍ[[흥왕사]]ㆍ[[안학궁]] 등 화려하고 장대한 건축도 있었다. [[안압지]]에서는 각종 금동 건축자재들이 출토되기도 했다.] 가령 [[경복궁]]의 궁역 자체는 매우 넓었지만 그 중 가장 큰 건물인 경회루는 신라의 [[황룡사]] 금당, 고구려의 [[안학궁]] 정전에 비해 작았다. 하지만 건축물의 단일 크기는 거목 고갈로 계속 작아졌지만 그와 반대로 총 건축면적(建築面積)[* 건축물의 수평투영면적 1층의 바닥면적이 해당됨] 자체는 훨씬 더 커졌는데 [[경복궁]]의 전체 건축면적[* 훼손이전 기준 약 16만 제곱미터 (출처: 예(禮)로 지은 경복궁, 임석재)]은 [[고구려]]의 [[안학궁]]보다 더 크며 [[신라]]의 궁궐인 [[경주 월성]] 보다도 훨씬 더 넓고 [[일본]]의 [[교토고쇼]][* 총건평 8482평으로 약 2만8천 제곱미터] 보다는 약 5.7배 그리고 천황궁인 메이지 궁전(明治宮殿)[* 총건평 5800평으로 약 1만9천 제곱미터] 보다는 약 8.4배 이후 새로 만들어진 [[고쿄]][* 약 15,643 제곱미터] 보다는 약 10.2배 이상 더 큰 건축면적을 자랑한다. [[파일:attachment/forbidden_and_gyeongbok.jpg|width=500px]] 심지어 [[자금성]]과 비교해도 그렇게 큰 차이는 안 느껴질 정도이다. 단일 건축면적이 고려시대 이후로 작아졌다는 것에 대해선 삼국시대에 비해선 작아진 것이 맞고, 고려시대와 비교하면 작아졌다기엔 좀 애매하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가장 대형 건물에 속했을 만월대 회경전의 경우 면적이 근정전의 1.5배 정도로 좀 더 크지만, 경회루나 간혹 볼 수 있는 진남관 같은 대형 객사의 크기와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안학궁 중궁이나 미륵사 강당 황룡사 금당같은 건물들의 면적과 비교하면 삼국시대와는 면적 차이가 확실히 나고 고려시대와는 비슷한 범주 내에서 건물 개별마다 조금씩 차이나는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사라진 기록상의 조선의 거대 건축물들의 경우, 분명 작지는 않았겠지만 정보가 부족하거나, 일반적인 고려~조선시대 대형건물들의 단일 건축면적에서 많이 벗어났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연산군]] 시절 만들어졌던 [[서총대]] 같은 경우 무려 천 명이 앉을 수 있으며 3층이었던 조선 전기 경회루와 비슷하게 지으라는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넓이와 높이가 상당했을 것이다. 다만 실제 터가 발굴된 것은 아니라 '천여 명이 앉을 수 있었다'는 서술만으로는 그 정확한 면적을 알기는 어렵다. 사실 경회루 넓이만 되도 천 명은 앉을 수가 있어서...[[http://luckcrow.egloos.com/2586612|서총대 1]] [[http://luckcrow.egloos.com/2592554|서총대 2]] [[태조(조선)|태조 이성계]] 때 만들어진 흥천사의 5층 사리각의 경우 고려시대에 지어진 대형 불탑들과 비슷한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http://luckcrow.egloos.com/2342317|흥천사 사리각 1]][[http://luckcrow.egloos.com/2461500|흥천사 사리각 2]] 또 단일 건축면적에 있어서 보 방향(측면)의 길이가 어느정도 되느냐도 중요한데, 측면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결과적으로 지붕이 커질 필요성이 있게 되어 건축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사실 도리 방향(정면)의 길이를 늘리는 것은 같은 가구 구조를 옆으로 반복해서 나열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상대적으로 쉽다. 즉 똑같이 생긴 집을 여러 채 지어서 하나의 지붕으로 이으면 정면 길이가 긴 건물이 되는 것이고, 서로 지붕을 분리하면 별개의 작은 건물들이 되는 것이다. 한국사의 거대건물의 예시들로 등장하는 건물들로는 지긋지긋하게 끌려나오는 안학궁 중궁[* 정면 87미터 측면 27미터]부터 시작해서 상경성 2궁전[* 기단의 규모가 정면 120미터 측면 30미터이다], 견훤 후백제 궁궐 정전으로 추측되는 건물[* 정면 84미터 측면 17미터], 미륵사 강당[* 정면 65미터 측면 19미터], 황룡사 중금당[* 정면 51.7미터 측면 26.7미터], 만월대 회경전[* 정면 43미터 측면 23미터]등이 있는데, 이 건물들의 공통점은 정면 길이가 측면 길이에 비해서 길다는 것이다. 하지만 측면 길이에 있어서는 경회루[* 정면 34.4미터 측면 28.5미터]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미치지 못하기도 한다. 즉 해당 건물들의 소실 자체는 몰라도 규모에 있어서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막말로 경회루를 나란히 3채 지어서 한 지붕으로 이어놓으면 그게 안학궁 중궁이고 4채 지어서 이어놓으면 그게 상경성 2궁전이라[* 이런 방식을 각 관아에 있는 객사건물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여수 진남관은 54미터x14미터의 길쭉한 평면을 하나의 지붕으로 덮어 면적만으로는 근정전 보다 큰 단일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전주 풍패지관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길쭉한 건물로 보일만큼 붙어있는, 비슷하지만 별개의 건물 3채를 나열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 물론 높이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종묘 정전[* 정면 101미터 측면 23미터]만 해도 한국사 전체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건물이다. 나무를 절약하면서 맞배지붕의 단점[* 지붕이 보호하지 못하는 좌우 벽면에 비바람이 들이친다.]을 보완하기 위해 맞배지붕의 양 옆에 커다란 풍판을 달고 화재에 대해 저항력을 늘리기 위해 일반 벽 겉에 덧씌우는 화방벽이 출연하였고, 기둥이나 추녀같이 긴 부재를 만들 때 길이가 다소 짧은 부재를 이어 만드는 모습이 보인다.[* 기차 참조서적 : 한국 전통 목조건축의 결구법: 맞춤과 이음(정연상 저), 알기 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김왕직 저)] [[http://cpimage.kids.daum.net/sigong/data/service_img/2005/08/22/s2050822n1321470.jpg]] 풍판과 화방벽을 설치한 조선시대 건축물의 모습. 사진의 건물의 화방벽은 기둥을 덮지 않고 용지판을 대 기둥과 화방벽을 구분한 것으로, 화방벽이 기둥을 덮어 감싸는 완전밀폐형도 존재한다. 이 경우 습기로 나무로 된 기둥이 썩는 것을 막기위해 화방벽 아래쪽에 기둥의 목재 하단부 일부가 공기와 접촉하도록 작은 공기구멍을 뚫어 놓는다. 나무를 자연 그대로 기둥으로 쓰는 현상이 나타났다. 가공해 쓸만한 곧고 굵고 긴 나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또 새로운 문화가 나타났는데, 이를 노리고 희귀하고 값비싼 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써서 고급스러움을 드러내려는 건축도 나타난다.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91212.010220808320001|모과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쓴 사찰 건축]] ==== 기술의 변화 ==== 한옥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마루식 구조와 온돌식 구조가 합쳐지고, 유교적 사상이 반영된 건축이 들어섰다. 시대가 흐른만큼 이전 시대보다 건축 기술, 민간 경제가 발전되어 민간의 가옥은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막상 상업이 발전했다는 식으로 일컫는 고려나 신라보다도, [[성리학]]을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더욱 민간 경제(상업, 수공업, 무역)의 발전이 나타났었다. 조선이 뒷 시대이므로 제일 상업이 발달한 시기가 조선 후기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상인 조합(유상, 만상, 송상 등), [[어음]], [[계]]로 대표되는 원시적인 선물, 금융 거래가 태동했으며, [[놋]]그릇[* 한국은 전통적으로 ‘그릇’의 용도로 도자기가 아닌 놋그릇을 썼다. 화려한 도자기가 적은 것도 역시 이 때문.], [[자개]], [[칠기]] 등의 생활용품이 시장에 출시돼 대중화되었다.][* 교역 역시 초기에만 외부적 요인들로 인하여 크게 타격을 받았을 뿐 후기로 갈수록 이전 [[고려시대]] 때 보다 큰 폭으로 늘어나 ‘민간에 의한 무역’이 이전 시기보다 유의미하게 활발해졌다. [[인삼]]을 가공한 상품인 [[홍삼]]의 예처럼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간 주도의 무역 상품이 개발되었고 [[상평통보]] 같은 [[화폐]]가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또 대중적으로 꾸준히 쓰이던 시기 역시 유학이 확고히 자리 잡은 조선시대 때부터였다. 이전 시기였던 [[고려]]는 물물 교환, 현물 화폐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었고, 소수의 귀족들만이 주도하는 제한적인 무역만이 이뤄졌었다.]에 따라 보다 복잡한 구조의 집들이 지어진다. 특히나 조선시대의 건축 기술의 발전은 [[수원 화성]] 같은 당대 동양 기준으로도 고난이도의 거대 건축물 또한 건축 할 수 있는 수준으로 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한반도의 전근대 건축 '기술' 자체는 조선시대에 가장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지 사치를 금하는 유교적 풍조탓에 미적인 측면 즉, 화려함이 많이 줄어든 모습이 선입견을 불러 일으켰을 뿐이다. 실제 건축 기술 자체는 조선시대의 건축이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해 평면적으로 더 복잡하고, 형태가 더 다양하며, 기술적으로도 더 발전되고 정교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한 일자형 건축에서 탈피해 ㅁ, ㅂ, ㄱ 형태의 한옥이 보편화 되었던 시기 또한 조선시대였으며 당연하지만 민간의 가옥 또한 조선시대에 더 복잡한 형태와 발달한 기술 그리고 좀 더 큰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수혈 주거에서 벗어나 드디어 우리가 생각하는 초가집, 기와집에 서민들이 살게 된 것도 조선시대에 들어서였다. 물론 [[토막]](흙집) 같은 빈민굴이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 청나라의 영향 ====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상류층을 중심으로 청나라 문화가 유행했다. 건축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원에 청나라 풍의 정자를 지은 흥선대원군의 석파정, 청나라 양식의 도서관을 지은 경복궁 집옥재가 대표적인 유적이다. ==== 장식화 경향 ==== 조선 후기에 들어서 건축의 '''장식화 경향'''이 심해진다. 유교로 인해 강력했던 신분은 급속히 느슨해져 건축 부분에서 그 제한이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신분마다 건축을 차별한 통일신라 때와 마찬가지로 가사제한령 등의 법을 통해 지배층인 양반의 가옥에조차 그 장식이나 재료를 엄격하게 제한했는데, 건축을 포함한 문화 전반에서 금과 은, 옻칠 등 사치스러운 물품을 민간에서 쓰지 못하도록 제약을 두었다. 그래서 옻칠장식이나[* 건물에 붉거나 검은 옻칠을 하는 옻 단청이 조선 시대에는 잘 쓰이지 않았다. 고대 사회에서는 단청보다 옻칠을 더 격이 높다 여겼다. 이에 대해서는 [[무령왕릉]] 항목 참조. 조선 말기까지 옻칠 단청은 실낱같이 명맥을 이었지만, 한국 전쟁으로 마지막 옻칠 건축이 불타며 현존하는 전통 건축에서 옻칠 단청이 쓰인 건물은 사라지고 만다. 옻칠 단청은 현대에 만든 한옥에서 볼 수 있다.] 금속 장식을 쓰지 않은 것 등으로 조선의 건축이 수수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나, 금속 장식만 쓰지 않았을 뿐 다른 부분의 장식은 발달한다.[* 고대의 경우 장식물도 원래는 금, 동화(구리꽃), 치미, 비단, 각종 기와 장식 등 금속 장식이 많았는데, 조선시대에는 달랐다. 금속 장식은 근대까지 쓰긴 했지만 고대만큼 건물 공포에까지 폭넓게 애용하진 않았다. 그래서 조선의 건축이 수수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여러 제약으로 인해 수백년간 장식에 대한 기술이 수요를 잃어버려 맥이 없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불교 건축, 공공 건축, 왕실 건축에서 지속적으로 그 명맥을 이어나갔다. 기록 상에서는 조선시대 내내 일부 기술은 끊기고 새로운 기술은 생겨나고가 확인되기는 하나 대규모로 기술이 단절되는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장식 기술이 단절된 것은 6.25 전쟁을 거치고 현대에 와서 진행되었으며, 현재진행형으로 이뤄지고 있다.] || [[파일:숭례문 공포2.png|width=400px]] || [[파일:사정전 공포.png|width=400px]] || || 조선 전기 건축인 숭례문의 공포부 || 조선 말기 건축인 사정전의 공포부 || 조선의 장식화 경향은 건물 구조 자체를 화려하게 꾸미는 식으로 나타난다. 사치에 민감하여 비싼 재료로 건물을 장식하는 방식은 지양했다. 조선의 장식화 경향은 조각을 세밀하고 화려하게 하는 식으로 나타난다. [[단청]]이나 부재를 화려하게 조각하는 방식으로 그 양상이 변화한다. 대표적인 것이 다포양식이다. 창살이나 기단부를 세밀하게 조각해 장식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내부 장식의 경우 창살을 세밀하게 공예하거나 비단, 병풍, 벽화, 목각으로 장식했다. [[파일:external/mahan.wonkwang.ac.kr/b03.jpg|width=500px]] [[파일:external/mahan.wonkwang.ac.kr/b03.jpg|width=500px]] 조선 전기 경복궁은 궁궐내 건축물들에 대하여 청자로 만든 기와와 용무늬가 새겨진 석조 기둥들을 자주 사용했으며 조선 후기에도 강화행궁과 [[외규장각]] 전도에 묘사된 용미는 심지어 금칠까지 되어있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화려함과 사치스러운 장식들을 무조건 배격하기만 한것도 아니었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현판이나 방문(榜文)의 형태로 곳곳에 예절이나 마음 수양과 관련된 글귀를 써붙인 것도 특징이다. [[서원]]의 경우에는 아예 공간구조에까지 성리학적 세계관과 마음의 구조 등을 반영해서 지었다. 단청의 경우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민간 건축에서 단청을 허용하지 않았다. 단청은 종교나 공공 건축에 허용됐다. 조선시대에 단청은 더 복잡한 방향으로 발달해 갖은금단청 등의 양식이 등장했다. 특징은 궁궐이나 종묘 같은 국가의 핵심 건축물보다도 전국 각 지방의 유명 사찰들이 더 화려하고 정교한 금단청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비록 교세가 줄어 건축의 규모는 조선 이전에 비해 줄었지만 유교적 기조에서 비교적 벗어나 있는 종교 건축물이란 특성 덕에 오히려 왕실건축보다 더 화려한 것이 허용된 세계적으로 특이한 사례가 되었다. ==== 2층? ==== [[http://blog.naver.com/lnn0909/220736655412|현재까지 남아 있는 복층 살림집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2층 가옥이 흔했다.''' 이는 여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세종대왕]]이 침실로 쓰는 2층 이상의 집을 의미하는 침루에 올랐다는 기록도 있으며 심지어 2층에서 잠자다가 세종대왕이 감기에 걸렸다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고려시대로 가면 이러한 루가 보편적이었다는 기록이 많다. 2층 건물의 규모를 늘려 찻집이나 술집 등으로 썼다는 기록도 있다. [[http://luckcrow.egloos.com/2615456|고려말~조선전기에만 등장하는 침루(寢樓)와 누방(樓房)기록]] 그런데 [[소빙하기]]로 인하여 [[온돌]]이 대량으로 보급되고 난 이후에는 난방에 취약하고 온돌설치가 어려운 2층 가옥보다 1층 가옥이 더 선호되어 2층 이상의 가옥들은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기술적으로 2층으로 만드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아, 고궁 내 건축물들 중에는 다층건물을 상당 수 발견할 수 있으며[* 대표적으로 경복궁 팔우정과 향원정, 덕수궁 석어당, 경북의 운조루] , 일부 사찰이나[* 법주사 팔상전과 지금은 없어졌지만 황룡사와 미륵사의 9층 목탑은 아파트 10층 아파트 높이로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다.] 수원 화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