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하의철(河誼喆) || || 생몰 ||[[1907년]] [[11월 15일]] ~ ? || || [[출생지]] ||[[전라남도]] [[영암군]] 미암면 채지리 || || 사망지 ||미상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하의철은 1907년 11월 15일 전라남도 영암군 미암면 채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사범학교에 재학하던 1927년 4월에 이동선(李東宣), [[박무길]](朴武吉) 등과 함께 성진회(醒進會)에 가입하여 조선인 학생들을 괄시하던 일본인 교유(敎諭) 에다(江田)를 타교로 쫓아내는 데 앞장섰다. 이후 1928년 3월에 있을 졸업을 앞두고 2학년생 최상호(崔相鎬), [[김기주(1908)|김기주]], [[강달모]](姜達模)를 후계자로 선정하고 교내조직의 확대에 주력했다. 1928년 2월, 하의철은 [[최규창]], [[문승수]] 등 각 학교 학생지도자 12인과 함께 광주군 서방면 두암리에 사는 지용수(池龍洙)의 집에 모여 졸업 후 항일운동의 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앞으로 교직 등 사회에 나아가서도 성진회의 사업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그해 3월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하의철은 영암의 서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광주사범학교 독서회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다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경찰은 사건의 배후에 성진회가 있다고 판단하고 성진회를 이끌었던 그를 체포했다. 하의철은 체포 후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하의철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영암군 출신 인물]][[분류:1907년 출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