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250px-Hayashi_Tadataka.jpg]] 林忠崇 1848-1941 [목차] == 개요 == 하야시 타다타카는 [[에도 시대]] 말기의 조자이번의 [[다이묘]]이다. 전무후무한 다이묘의 탈번 등으로 특이한 행보를 보인 인물이다. == 생애 == 조자이번주 하야시 타다아키라의 오남으로 태어났다. 형들의 요절로 삼촌 하야시 타다카타가 다이묘가 되었고 삼촌 사후 다이묘가 되었다. 문무를 모두 겸비해 고위직에 오를 만한 인재로 [[에도 막부]]의 기대를 받고 있었다. [[대정봉환]] 이후 조자이군을 근대화하며 유사시에 대비하였고, 결국 1868년 [[보신 전쟁]]이 터졌으나 막부파에 선 조자이번은 항전파와 공순파로 나뉘어 논쟁이 있었다. 이때 구 막부군이 조자이번에 지원 요청을 보냈고, 5월 24일 타다타카는 놀라운 결단을 내린다. 바로 '''번사 70여명과 함께 [[다이묘]]가 탈번'''해 유격대에 합류한 것이다. 타다타카는 조자이번 근처를 돌며 지원병을 모아 3백여 명으로 세력을 불렸으나 신정부군이 5월 27일 조자이번 인근으로 진입하였다. 이에 타다타카는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함선을 타고 탈출해 에도의 4천 창의대와 합류하고자 오다와라로 향했다. 그러나 창의대는 신정부군에 의해 와해되었고, [[도호쿠]]로 향해 도호쿠에서 싸웠다. 그러나 [[도쿠가와]] 가문의 존속이 확실해지고 센다이번의 항복하며 도호쿠 번들이 항복함에 따라 타다타카도 센다이에서 항복했다. 번에 속해 있는 [[사무라이]]가 탈번(자신의 번을 버리고 떠남)하면 사형에 처해지지만 이 경우는 다이묘가 탈번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인 데다가 막부 말 혼란기라서 영지를 몰수하는 [[가이에키]]로 끝났다. 가이에키 처분은 막부가 내린 게 아니라 메이지 신정부가 내렸다. 그는 일본 역사상 마지막으로 가이에키 처분을 받은 다이묘이다. 그 후 옛 가신들의 탄원으로 [[다이묘]]였음에도 [[화족]]이 되지 못하고 사무라이 계급인 사족이 되었고, [[도쿄부]] 하급 공무원, 상점 대리인, 비서 등의 일을 하며 살았다. 1893년 [[세이난 전쟁]]을 일으켜 역적 취급을 받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복권되는 등 상황이 좋아져 타다타카도 [[화족]]이 되고 종5위에 서임되었다. 그 후 [[궁내성]]에서 일을 했고, [[닛코 동조궁]]에서 신관으로 일하는 등 일을 하다가 은퇴 후 차녀 미츠의 아파트에서 살면서 최후의 다이묘로써 인터뷰도 하고 평온한 노후를 보냈다. 향년 92세의 나이로 1941년 1월에 사망했다. == 여담 == * 막부의 기대를 보면 거대 다이묘로 보이지만 의외로 조자이 번은 [[고쿠다카]]가 딱 1만석이었다. 하야시 가문이 원래 [[하타모토]] 출신이었는데 영지를 더 하사받으면서 19세기 초반에 다이묘가 된 가문이기 때문. * [[보신 전쟁]]때 역대급 행적을 남겨서 그런지 [[토탈 워 사가: 사무라이의 몰락]]에서도 등장한다. * 타다타카 본인은 '''탈번'''을 해서[* 탈번을 하면 가문을 떠나야 하므로 [[당주]]자격도 같이 잃는다.] 메이지 정부에 반역을 했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작위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조카가 양자가 되어 가문을 상속받는 방식으로 [[남작]] 작위를 받아 화족이 되었다. * 주변에서 마지막 다이묘의 [[사세구]]를 듣고 싶어서 타다타카가 죽기전에 사세구를 요청했는데, [[보신 전쟁]]때 이미 했었기 때문에 지금 할 말은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 [[보신 전쟁]]시기 다이묘 중 [[보신 전쟁]]부터 [[제 2차 세계대전]]까지 겪은[* 당연히 참전은 하지 않았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다이묘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가이에키, version=33)] [[분류:에도 시대/인물]][[분류:1848년 출생]][[분류:1941년 사망]][[분류:다이묘]][[분류:가이에키된 인물]][[분류:화족]][[분류:보신 전쟁/군인]][[분류:종5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