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필라레토스 브라카미오스[br](영어: Philaretos Brachamios, 그리스어: Φιλάρετος Βραχάμιος)|| || '''이명''' ||바흐람 바라즈누니[br](영어: Vahram Varajnuni, 아르메니아어: Փիլարտոս Վարաժնունի)|| || '''출생''' ||미상|| || '''사망''' ||미상|| || '''직위''' ||수석호위관, 카파도키아의 타그마타, 카파도키아의 마기스테르 및 군사총독, 안티오키아 공작|| || '''반란 대상''' ||[[미하일 7세]]|| [목차] [clearfix] == 개요 == [[동로마 제국]]의 반란자. [[로마노스 4세]]와 함께 [[셀주크 투르크]]와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했고, 1071년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로마노스 4세가 투르크군에게 사로잡힌 뒤 내란이 벌어지자 자립하여 황제를 칭했다. 이후 [[니키포로스 3세]]에게 귀순하여 투르크군과 맞섰으나 결국 안티오키아를 빼앗겼다. == 생애 == 아르메니아계 동로마 장군으로, 1069년 메소포타미아 국경을 지키는 향군을 지휘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후 [[로마노스 4세]]의 동방 원정에 참여하여 아크라트 공성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카파도키아와 리카오니아로 침입한 투르크군에게 패퇴하여 타우로스 산기슭으로 도주했고, 투르크군은 이코니온 일대를 황폐화시킨 뒤 동로마군의 추격을 피해 알레포로 퇴각했다. 하지만 이 일로 별다른 추궁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1071년 수석호위관으로서 [[만치케르트 전투]]에 참전해 선두에서 투르크군과 맞섰다. 그는 이 전투에서 최선을 다했으나,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군대가 제멋대로 이탈해버리는 바람에 참패하고 말았고, 로마노스 황제는 투르크군에게 붙잡혔다. 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로마노폴리스 요새로 이동하였고, 1072년 투르크군에게 풀려난 로마노스가 두카스의 군대에게 붙잡혀 실명형에 처해진 뒤 [[미하일 7세]]가 즉위하자 이에 불복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킬리키아에서 에데사까지 이어지는 게르마니카에 근방에 자신의 나라를 세웠으며, 휘하에 8,000명의 [[노르만]] 용병대를 확보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소아시아 일대 대부분을 투르크군에게 빼앗기고 있던 상황이라서, 반란을 진압하러 토벌대를 보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1078년 [[니키포로스 3세]]가 즉위하자, 그는 제국에 귀순하는 대가로 안티오키아 공작에 부임했다. 그러나 1084년 12월 투르크군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안티오키아를 빼앗겼고, 1087년 에데사마저 잃자 게르마니케아 요새로 도주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분류:동로마 제국의 총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