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궁재]][[분류:카롤루스 가문]][[분류:645년 출생]][[분류:714년 사망]] || '''이름''' ||에르스탈의 피핀 2세[br]영: Pepin of Herstal[br]불: Pépin II de Herstal 또는 Pépin le Jeune || || '''출생''' ||[[645년]] || || '''사망''' ||[[714년]] 12월 16일, 리에주||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조|카롤루스 가문]] 출신 [[궁재]]이자 [[카롤루스 마르텔]]의 아버지이며 [[피핀 3세]]의 조부다. == 생애 ==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명문가 귀족인 메츠의 아르눌프의 아들 안세기셀과 선대 궁재 피핀 1세의 딸 성 베가(Sainte Begga)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메로빙거 왕 중 마지막으로 실권을 쥐고 있었던 왕 [[다고베르 1세]]의 죽음 이후, 피핀 2세는 680년에 프랑크 왕국의 분국[*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분국] 중 하나인 아우스트라시아 궁재로써 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피핀 2세가 궁재로써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은 아니다. 메로빙거 왕은 상징, 정통성, 그리고 이전만은 못하지만 아직 건재한 권력을 아직 쥐고 있었다. 권력의 중심이 완전히 [[피핀]] 가(家)로 넘어가기까지는 [[카롤루스 마르텔]]의 집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어 687년에 [[테르트리 전투]]에서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 연합군을 격파하며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 분국을 손에 넣고, 세 분국의 궁재가 되어 프랑크 왕국 전체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당시 왕 [[테우데리크 3세]]를 폐위하지 않았으나, 그의 사후에는 후계자를 직접 선택해 꼭두각시를 세웠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역량의 소유자로, 680년대 중반부터 프랑크 왕국의 북동쪽 국경을 위협하던 [[프리지아(유럽)|프리지아]] 부족들을 공략, 원정하여 689년에 물리치고, 조공관계를 형성하였다. 또한 [[알레만니]]족과 [[프랑코니아]]를 프랑크 왕국에 복속시켰고, 영향력을 공고히했다. 알레만니아와 바이에른에 기독교 선교사 파견과 수행을 도와 기독교 선교를 지원, 장려했다. 690년에서 692년 사이에 피핀은 [[위트레흐트]] 일대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은 [[라인 강]]에서 [[북해]]로 가는 중요한 무역로를 통제할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