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D7CBA 0%, #0755A1 30%, #0755A1 70%, #3D7CBA)" {{{#ffffff '''피에트로 라바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folding ▼ ||<-5> '''{{{#febd17 유벤투스 FC 역대 주장}}}''' || || [[마리오 바를리엔]] [br](1938~1942) || {{{+1 →}}} || '''{{{#000000,#e5e5e5 피에트로 라바[* 1946~47 시즌에 라바는 [[US 알레산드리아 칼초 1912|알레산드리아]]로 이적했지만 유벤투스는 공식적으로 주장 임명을 하지 않았다.] }}}'''[br]'''{{{#000000,#e5e5e5 (1942~1950)}}}''' || {{{+1 →}}} || [[카를로 파롤라]][br](1950~1954) ||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D7CBA 0%, #0755A1 30%, #0755A1 70%, #3D7CBA)" {{{#ffffff '''피에트로 라바의 수상 이력'''}}}}}} || || {{{#!folding ▼ ||<-2>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9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D7CBA 0%, #0755A1 30%, #0755A1 70%, #3D7CBA)"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fff 1938}}}]]''' }}} || ---- [include(틀:유벤투스 명예의 거리 50인)] }}}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rgba(50%, 50%, 50%, 30%) 0%, transparent)" {{{+1 {{{#000000,#e5e5e5 ''' 이탈리아의 前 축구감독 '''}}}}}}}}}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ietro_rava.jpg|width=100%]]}}} || ||<-2> {{{#000000,#e5e5e5 ''' 이름 ''' }}} || {{{+1 '''피에트로 라바 '''}}}[br]'''Pietro Rava''' || ||<-2> {{{#000000,#e5e5e5 ''' 출생 ''' }}} ||[[1916년]] [[1월 21일]][br]{{{-2 [[이탈리아 왕국]] [[알레산드리아]]}}} || ||<-2> {{{#000000,#e5e5e5 ''' 사망 ''' }}} ||[[2006년]] [[11월 5일]][br]{{{-2 [[이탈리아]] [[토리노]]}}} || ||<-2> {{{#000000,#e5e5e5 ''' 국적 ''' }}} ||[[이탈리아]] [[이탈리아|[[파일:이탈리아 국기.svg|width=28]]]] || ||<-2> {{{#000000,#e5e5e5 ''' 신체 ''' }}} ||[[키(신체)|키]] 175cm | [[체중]] 73kg || ||<-2> {{{#000000,#e5e5e5 ''' 직업 ''' }}} ||[[축구선수]] ([[풀백(축구)|레프트 풀백]] / ^^은퇴^^)[br][[축구감독]] ^^은퇴^^ || ||<|2> {{{#000000,#e5e5e5 ''' 소속 ''' }}} || {{{#000000,#e5e5e5 ''' 선수 ''' }}} ||'''[[유벤투스 FC]] (1935~1946)'''[br][[US 알레산드리아 칼초 1912|알레산드리아 칼초]] (1946~1947)[br]'''[[유벤투스 FC]] (1947~1950)'''[br][[노바라 칼초]] (1950~1952) || || {{{#000000,#e5e5e5 ''' 감독 ''' }}} ||[[노바라 칼초]] (1951~1952)[br][[칼초 파도바]] (1952)[br]카라레세 칼초 1908 (1953)[br][[칼초 파도바]] (1953~1954)[br]AC 쿠네오 1905 (1954~1955)[br][[AC 몬차|시멘탈몬차]] (1955~1956)[br][[UC 삼프도리아]] (1956~1957)[br][[팔레르모 FC]] (1957)[br][[AC 몬차|시멘탈몬차]] (1958~1959)[br][[US 알레산드리아 칼초 1912|알레산드리아 칼초]] (1961~1963)[br]비엘레세 1902 (1963~1964) || ||<-2> {{{#000000,#e5e5e5 ''' 국가대표 ''' }}} ||30경기 0골^^([[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 /1935~1946)^^ || [목차] [clearfix] == 개요 == [[이탈리아]]의 전 축구선수 출신의 축구 감독. == 생애[*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 === 어린 시절 === 원래 그의 가족들은 [[알레산드리아]] 출신이 아니었지만 철도 공무원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잠시 알레산드리아에 있을 때 태어났다. 이후 [[토리노]]에서 성장한 라바는 측량을 배웠고 축구에 재능을 보여 [[유벤투스 FC]]의 유소년 팀에 입단했다. 유소년 시절에도 라바의 재능은 파릇파릇해서 그의 상대팀은 선수 한 명을 더 둬야된다는 말도 나왔다. === 선수 생활 === ==== 클럽 ==== 라바가 처음 [[유벤투스 FC]]에 입단하던 1935년 무렵, 그의 포지션은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었다.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하프백 등을 돌던 라바의 포지션을 정해준 사람이 바로 당시 유벤투스의 [[선수 겸 감독]]이자 대선배 풀백이었던 [[비르지니오 로세타]]였다. 로세타는 라바가 갖고 있던 레프트 풀백으로서의 잠재력을 간파해 라바를 레프트 풀백으로 정착시켰고 라바는 11월 3일, [[ACF 피오렌티나]]를 상대로 [[세리에 A]] 데뷔전을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라바가 데뷔할 때의 유벤투스는 더 이상 세리에의 맹주가 아니었다. 회장 에도아르도 아녤리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유벤투스는 긴축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고 [[잔피에로 콤비]],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비르지니오 로세타, [[루이스 몬티]], [[라이문도 오르시]] 등 쟁쟁했던 선배들의 노쇠화와 은퇴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 그래도 라바가 [[알프레도 포니]]와 함께 구축했던 풀백진은 당대 최고로 평가받았지만 그것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1938~39 시즌에 유벤투스의 보드진이 급여 인상을 거부하자 라바는 은근히 태업성 플레이를 펼치기도 했다. [* 태업의 표면적인 이유는 [[약혼]]이었다.] 이 여파로 유벤투스는 8위라는 어울리지 않는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 전 어렸을 때부터 내 유일한 사랑인 유벤투스를 위해 뛰었지만 그들(보드진)은 왜 저를 기쁘게 해주지 못했을까요? 그래서 저는 모데나에서부터 파업을 결심하고 팔짱을 꼈습니다. 저는 부끄럽지 않았어요. 그때는 어려운 시기였고 우리 축구 선수들에게는 부가 아닌 영광이 있을 수 있었을 테니까요. >---- > 피에트로 라바. 태업 당시를 회상하며. 이 상황은 [[이탈리아 축구 연맹]]에서 클럽의 경제적 어려움과 라바의 클럽에 대한 헌신을 확인하며 연맹의 중재로 해결되었다. 결국 라바는 1939년 12월 31일의 [[베네치아 FC]]전에서 복귀했고 1941~42년의 커리어 두 번째 [[코파 이탈리아]] 우승에 힘을 보탰다. 1946년, 유벤투스는 라바의 자리를 오스카 비치치(Oscar Vicich)로 대체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라바와 유벤투스의 관계는 심하게 악화되었다. 라바가 유벤투스를 떠나게 되자 많은 클럽들이 영입전에 뛰어들었고 승자는 [[US 알레산드리아 칼초 1912|알레산드리아 칼초]]였다. 하지만 비치치는 유벤투스에서 단 한 시즌만 뛰고 [[UC 삼프도리아]]로 이적했고 라바도 다시 유벤투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유벤투스에서 라바는 1949년부터 새로운 감독 [[제시 카버]]와 마찰이 일어나면서 전력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벤투스가 16년 만에 다시 [[스쿠데토]]를 차지한 순간, 그리고 라바의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스쿠데토를 차지한 시즌에 그는 정작 조연에 머물렀다. 1950년, 스쿠데토를 뒤로 하고 라바는 다시 유벤투스를 떠났다. [[AC 밀란]]의 영입 제안이 있었지만 비안코네리의 직접적인 경쟁자의 전력을 강화시킬 순 없어서 라바는 대신 [[노바라 칼초]]로 이적했고 이곳에서 파란만장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 ==== 라바는 [[세리에 A]]에 데뷔한 지 1년도 되지 않았지만 [[1936 베를린 올림픽|올림픽]]에 참가하게 되었다. 올림픽에 참가할 당시 라바는 20살로 파시스트 대학 그룹에 속한 학생이었지만 어떤 시험도 치르지 않은 채 올림픽에 출전했다. 하지만 라바의 대표팀 데뷔전은 영 좋지 않게 끝났는데 퇴장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라바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 대표팀]] 역사상 처음으로 심판에 의해 퇴장당한 선수가 되었다.] 그래도 라바의 퇴장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에 1대0으로 승리를 거둬 계속 경기를 할 수 있었다. 라바는 올림픽의 모든 경기에서 [[유벤투스 FC]] 팀동료이자 풀백 파트너 [[알프레도 포니]]와 호흡을 맞추며 이탈리아의 우승에 공헌했다. 그렇게 라바와 포니는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년 월드컵]]에서 호흡을 맞췄던 [[루이지 알레만디|알레만디]]와 [[에랄도 몬첼리오]]의 풀백 조합을 대체해갔다.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938년 월드컵]]에서도 [[노르웨이 축구 국가대표팀|노르웨이]]와의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라운드#s-1.2|첫경기]]를 제외하면 라바와 포니의 풀백진은 그대로 가동되었고[* 첫경기 노르웨이전만은 라바와 몬첼리오가 호흡을 맞췄다.] 이탈리아는 월드컵 2연패를 달성했다. 라바는 이 대회의 추억을 잊을 수 없지만 특히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과의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8강 이후#s-4.1|4강전]]과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헝가리]]와의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8강 이후#s-5.1|결승전]]을 꼽았다. 그는 브라질과의 4강전을 실질적인 결승전이자 가장 중요한 경기라 생각하고 임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결승전 당시 [[영국]]의 기자들은 이탈리아의 수비는 영국의 요새만큼 단단하다는 평을 남겼고 그 중심에는 라바가 있었다. 월드컵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유럽 국가들의 모든 [[A매치]]는 중단되었고 이탈리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라바의 마지막 A매치는 1946년 12월의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오스트리아]]전이었고 이탈리아가 3대2로 승리했다. 라바가 대표팀에서 출전한 30경기 중 이탈리아가 패배한 경기는 단 한경기에 불과하다. === 감독 === 선수 은퇴 이후 라바는 감독직을 수행하면서 전 [[유벤투스 FC|팀]] 동료이자 후임 주장 [[카를로 파롤라]]와 스포츠 용품점을 경영했다. [[노바라 칼초]]에서 [[선수 겸 감독]]직을 끝내고 라바는 [[칼초 파도바]]에서 1952년에 전업 감독으로 데뷔했다. 짧은 파도바에서의 생활 후에 라바가 카라레세 칼초 1908를 성공적으로 지도하자 파도바가 다시 라바를 데려왔다. 하지만 파도바가 강등 위기에 처하자 라바의 자리는 [[네레오 로코]]로 대체되었다. 쿠네오에서 팀의 성적은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라바는 긍정적인 경험을 쌓았고 이 경험은 [[AC 몬차|시멘탈몬차]]에서 효과적인 역습 전술로 빛을 보았다. 1956년, 이 전술로 라바는 [[세리에 A]]의 [[UC 삼프도리아]]의 감독이 되었고 이것이 그의 감독 커리어 중 최고의 경력이었다. 하지만 팀의 회장과 갈등 끝에 시즌 종료 직전에 경질당했다. 그 이후에 라바는 주로 하부 리그 팀들의 감독을 맡았다. === 이후 === 감독에서 은퇴한 후 라바는 리볼리에서 [[운전학원]]을 운영했다. 1998년 [[부정맥|심장마비]]로 쓰러진 이후 라바는 죽을 때까지 [[치매|알츠하이머 병]]으로 고생했다. 2006년, 라바는 [[토리노]]의 마티니 병원에서 [[낙상]] 후 대퇴골 수술을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한 채 영면에 들었다. 라바의 무덤은 토리노의 파르코(Parco) 공동 묘지에 있다. == 스타일 & 평가 == === 선수 === 카를로 펠리체 키에사의 평에 의하면 라바는 피지컬적으로 뛰어나고 헤딩에 능하며 두 발을 모두 잘 쓰고 예상 가능한 수비수였다고 한다. 그는 깔끔한 몸짓과 활기찬 움직임으로 상대 공격수들에 민첩하게 대처하는 풀백이었다. 또한 투쟁심도 있어서 가끔 난투극이 벌어지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난투극들 중 특히 유명한 경기는 1947년의 [[데르비 디탈리아]]였는데 라바는 이 경기에서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테르]]의 공격수 [[베니토 로렌치]]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가격의 이유는 로렌치가 [[잠피에로 보니페르티|보니페르티]]에게 침을 뱉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정작 로렌치는 보니페르티에게 침을 뱉지 않았었다. 라바가 대부분의 커리어를 보낸 [[유벤투스 FC]]에서도 라바를 유벤투스 명예의 거리 50인에 헌정하는 등 라바의 업적을 기념하고 있다. >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풀백 >---- > [[비토리오 포초]] > 라바는 공격수들에 매우 아름답고 격렬한 열정으로 맞대응한다. [[움베르토 칼리가리스|칼리가리스]]를 연상시킨다. 또한 빠른 시간 안에 최대의 슈팅 파워를 낼 수 있고 종종 하프백들을 생략한 채 공격진에 침투하기도 한다. [[알프레도 포니|포니]]보다 라바가 더 침착하고 통제된 스타일이다. 둘은 기술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관계였다. >---- > 에토레 베라(Etorre Berra, 이탈리아의 기자. 칼리가리스와 포니, 라바를 비교하면서) > 라바는 공을 매우 잘 찼고 가차없이 풀백이 해야 할 몸싸움에 참여했다. 그는 점프도 잘 뛰었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의 평정심을 놓고 보면 그의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대표팀]] 선배들인 칼리가리스와 [[루이지 알레만디|알레만디]]를 능가한다. >---- > 알베르토 파자노(Alverto Fasano, 이탈리아의 기자) > 공중의 큰 한 스푼(Grandi Cucchiaiate Nell'aria) >---- > 줄리오 나심베니(Giulio Nascimbeni) > 유벤투스의 상징이자 역사를 만든 사람 중 한 명 >---- > 조반니 아녤리 === 감독 === [[라스탐파]]의 1958년 기사에 의하면 감독으로서의 라바는 다소 거칠었던 선수 시절과는 다르게 극도로 세심했다고 한다. 성급한 혁신과는 거리가 멀었고 선수들에게 끊임없이 수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55~56시즌에 [[AC 몬차|시멘탈몬차]]를 이끌 때 라바는 선수비 후역습 전술을 썼기 때문에 실용성과 스피드를 중점에 뒀다. == 어록 == > 나는 강력한 왼손잡이 선수였고 피치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 > 피에트로 라바. 자신의 현역 시절 플레이를 회상하면서 == 여담 ==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라바는 장교로 소련 켐페인에 참가했고 [[우크라이나]]에서 6개월을 머물다 휴가를 이용해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2003년 라레푸블리카(La Repubblica)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망가진 전쟁으로 표현했다. * 라바는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938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 대표팀]] 멤버들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 수상 == === 선수 === ==== 클럽 ==== * [[세리에 A]] 우승 1회: 1949~50([[유벤투스 FC]]) * [[코파 이탈리아]] 우승 2회: 1937~38, 1941~42(유벤투스 FC) * 세리에 A 준우승 3회: 1937~38, 1945~46, 1947~48(유벤투스 FC) ==== 국가대표 ==== * [[FIFA 월드컵]] 우승 1회: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938]] * [[올림픽]] 우승 1회: [[1936 베를린 올림픽|1936]] ==== 개인 ====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훈장: 2003 [각주] [[분류:1916년 출생]][[분류:1935년 데뷔]][[분류:1952년 은퇴]][[분류:2006년 사망]][[분류:알레산드리아 출신 인물]][[분류:이탈리아의 축구선수]][[분류:수비수]][[분류:유벤투스 FC/은퇴, 이적]][[분류:US 알레산드리아 칼초 1912/은퇴, 이적]][[분류:노바라 칼초/은퇴, 이적]][[분류:이탈리아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분류:FIFA 월드컵 우승 선수]][[분류:이탈리아의 올림픽 참가 선수]][[분류:1936 베를린 올림픽 참가 선수]][[분류:이탈리아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1936 베를린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이탈리아의 올림픽 메달리스트]][[분류:1936 베를린 올림픽 메달리스트]][[분류:이탈리아의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분류:1936 베를린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분류:선수 겸 감독/축구]][[분류:이탈리아의 축구감독/은퇴·사망]][[분류:노바라 칼초/역대 감독]][[분류:칼초 파도바/역대 감독]][[분류:카라레세 칼초/역대 감독]][[분류:AC 몬차/역대 감독]][[분류:UC 삼프도리아/역대 감독]][[분류:팔레르모 FC/역대 감독]][[분류:US 알레산드리아 칼초 1912/역대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