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파일:피에르 드 지악.jpg|width=100%]]|| ||<-2><:> '''성명''' ||<(> 피에르 2세 드 지악[br]Pierre II de Giac || ||<-2> '''생몰년도''' ||<(> [[1380년]]경 ~ [[1427년]] [[2월 9일]] || ||<-2> '''출생지''' ||<(> [[프랑스 왕국]] 지악 || ||<-2> '''사망지''' ||<(> [[프랑스 왕국]] 부르주 || ||<-2> '''아버지''' ||<(> 루이 드 지악 || ||<-2> '''어머니''' ||<(> 잔 뒤 페신 || ||<-2> '''아내''' ||<(> 잔 드 네일락, 카트린 드 릴부샤르 || ||<-2> '''직위''' ||<(> 프랑스 총리 ||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 왕국]]의 귀족, 정치인. [[샤를 7세]]의 시종장이다. == 생애 == 1380년경 프랑스 왕국 지악에서 지악과 샤토가이 성의 영주 루이 드 지악과 르 페신 영주 앙볼트 브룬의 딸 잔 뒤 페신의 아들로 출생했다. 조부 피에르 1세 지악은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형제이자 베리 공작이었던 [[장 드 베리]]의 고문이었으며, [[샤를 6세]] 치세 초기 프랑스 사법장관을 역임했다. 일찍이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휘하에 있었고, 1419년 용맹공 장이 몬테로 다리에서 [[샤를 7세|도팽 샤를]] 일행과 몬테로 다리에서 회담을 가졌다가 도팽 샤를의 부하인 [[타네기 3세 뒤 샤스텔]] 등에게 피살당했을 때 현장에 있었다. 이후 도팽 샤를의 종자가 되었고, 1424년 재무관으로 선임되었으며, 1425년 부르주 의회 의장으로 선임되었고, [[피에르 프로티에]]를 대신해 시종장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계와 군부에 많은 간섭을 하고 자기 사람을 대거 임용했으며, 재정을 낭비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도팽 샤를의 [[루이지 2세]]의 부인인 아라곤의 욜랑드와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은 그를 적대시했고, 결국 1427년 2월 8일 아르튀르 드 리뮤송의 부하들에게 암살당한 뒤 강물에 던져졌다. 도팽 샤를은 그를 적대시한 이들의 지지 없이는 왕권이 유지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살인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물지 않고 넘어갔다. 그는 생전에 네일락, 뒤 블랑 및 샤토브룬의 여성 영주 잔 뒤 네일락과 결혼해 아들 루이, 딸 루이즈를 낳았다. 아들 루이는 기사가 되었고, 딸 루이즈는 론의 영주이며 부르봉 공작가의 시종인 자크 드 라 퀘이유와 결혼헀다. 잔 뒤 네일락이 사망한 후 릴부샤르, 두에, 정쎄, 호슈포흐-슈흐-르와흐의 여성 영주인 카트린 드 릴부샤르와 재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카트린 릴부샤르는 피에르 2세 드 지악 살해에 관여했던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와 재혼했다. [[분류:프랑스의 귀족]] [[분류:프랑스의 정치인]] [[분류:1380년 출생]] [[분류:1427년 사망]][[분류:백년전쟁/인물]][[분류:암살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