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브르타뉴 공작)] |||| [[파일:피에르 2세 드 브르타뉴.png|width=100%]]|| || '''이름''' ||피에르 2세 드 브르타뉴(Pierre II de Bretagne)|| || '''출생''' ||[[1418년]] [[7월 7일]][br][[브르타뉴 공국]] 낭트|| || '''사망''' ||[[1457년]] [[9월 22일]][br][[브르타뉴 공국]] 낭트|| ||<|2> '''재위''' ||<#E7E7E7,#424242>[[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1450년]] [[7월 19일]] ~ [[1457년]] [[9월 22일]]|| || '''아버지''' ||[[장 5세 드 브르타뉴]]|| || '''어머니''' ||잔 드 발루아|| || '''형제''' ||안, 이자벨, 마르그리트, 카트린, [[프랑수아 1세 드 브르타뉴|프랑수아 1세]], 질|| || '''아내''' ||프랑수아 당부아즈|| [목차] [clearfix] == 개요 ==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카스티용 전투]]에 참가했지만 몇년 후 사망했다. == 생애 == 1418년 7월 7일 브르타뉴 공국 낭트에서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와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인 잔 드 발루아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안[* 1409 ~ 1415, 요절], 이자벨[* 1411 ~ 1442, 라발 백작 기 14세의 부인], 마르그리트[* 1412 ~ 1421, 요절], 카트린[* 1415 ~ 1412, 요절], [[프랑수아 1세 드 브르타뉴| 프랑수아 1세]], 질 드 브르타뉴[* 1420 ~ 1450, 샹토세 영주.]가 있었다. 일찍이 갱강 백작이 되었으며, 1449년과 1450년에 삼촌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 함께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군과 맞서 싸워 쿠탕스, 생로 등지를 공략하는 데 일조했다. 1450년 7월 19일,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가 사망했다. 당시 프랑수아 1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제임스 1세]]의 딸인 스코틀랜드의 이사벨라와의 사이에서 두 딸 마르그리트와 마리가 있었지만 형제인 그를 공작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에 스코틀랜드 정부가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50년 11월 3일, 피에르 2세는 투르 인근의 몽바종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권고를 따라 막내 동생 질 드 브르타뉴를 해친 간수들을 추격해 올리비에 드 멜 등을 체포한 뒤 1451년 6월 8일에 처형했다. 살인의 선동자로 지목된 아르튀르 드 몽토방은 탈출한 뒤 파리의 셀레스틴 수도원에 숨어 [[루이 11세]] 치세 때까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 명목상 총사령관으로서 참여했으며, 뒤이은 보르도 공방전에 참여해 프랑스 왕국이 [[가스코뉴]] 전체를 병합하고 백년전쟁을 마무리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기옌에 1,500명의 기사단을 파견해 잉글랜드군이 차후에 가스코뉴에 상륙하려는 걸 저지하도록 했다. 이후 건강이 악화되었고, 자식이 없어서 승계 문제가 야기될 소지가 생기자, 그는 형 프랑수아 1세의 장녀인 마르그리트를 사촌인 에탕프 백작 프랑수아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1455년 11월 16일 반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낭트 주교 기욤 드 말레스트로이트의 주관하에 거행되었다. 1457년 9월 22일 낭트에서 사망한 뒤, 삼촌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아르튀르 3세'로서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그는 1442년 6우러에 투아르 자작 루이 당부아즈의 딸인 프랑수아즈 당부아즈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프랑수아즈 당부아즈는 남편이 사망한 뒤 수녀원에 들어간 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1463년 장 소레스와 함께 프랑스 최초의 카르멜 회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1863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다. [각주] [[분류:브르타뉴 공작]][[분류:1418년 출생]][[분류:1457년 사망]][[분류:백년전쟁/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