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피렌체 공화국 통치자)]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02C2C, #E40000 20%, #E40000 80%, #A02C2C);" '''정의의 곤팔로니에레[br]{{{+1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br]Piero di Cosimo de' Medici'''}}}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280px-Piero_di_Cosimo_de'_Medici.jpg|width=100%]]}}} || || '''출생''' ||[[1416년]] [[9월 19일]][br][[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 '''사망''' ||[[1469년]] [[12월 2일]] (향년 53세)[br][[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2> '''재임''' ||<#E7E7E7,#424242>정의의 곤팔로니에레|| ||[[1464년]] [[8월 1일]] ~ [[1469년]] [[12월 2일]]|| || '''배우자'''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 ,,(1444년 결혼),,|| || '''자녀''' ||마리아, 비앙카, 루크레치아,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로렌초]],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줄리아노]]|| || '''아버지'''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코시모 데 메디치]]|| || '''어머니''' ||콘테시나 데 바르디|| || '''형제''' ||조반니|| [목차] [clearfix] == 개요 == [[피렌체]] 공화국의 지배자이자 [[메디치 가문]]의 수장으로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의 뒤를 계승했으며, 병악한 체질이라 소년 시절부터 [[통풍(질병)|통풍]]에 걸려 고생해 통풍에 걸린 자라는 뜻인 일 고토소(Il Gottoso)라 불렸다. == 피에로에 대한 묘사 == 두꺼운 눈꺼풀과 비대한 목선 때문에 다소 졸려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동생 조반니 디 코시모 데 메디치보다 미남이었다고 하며, 단호한 턱과 얇지만 굳게 다문 입에는 평생을 괴롭힌 관절염과 습진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함이 엿보였다고 한다. 오랜 지병에도 불구하고 신경질적이지 않으면서 사려 깊고 인내심이 있으며, 예의가 바르면서 냉담한 편이라 아버지 코시모처럼 권위를 가지면서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 우려하는 이도 있었지만 피에로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피에로를 존경했다고 한다. 은행가로서의 재간은 없었지만 방법론적이라 아버지 코시모의 장례식 비용을 예비 비용, 가족들과 시종, 노예의 상복에 든 검은 천 비용, 양초 수, 밀랍의 무게까지 세세하게 기록할 정도로 세심한 성격이었다. == 생애 == === 언덕파와의 대립과 권력 장악 === 젊은 시절에는 열 명으로 구성된 아코피아토리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토르나퀸치라는 성씨를 가졌던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와 결혼해 다섯 명의 자식들을 낳았다. 나이 40세가 돼서도 병악했기 때문에 오래 살 가망이 없어 아버지 코시모의 기대를 받지 못해 관심을 못했으며, 허약해서 은행 업무나 피렌체 시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지만 1448년에는 프리오레로 일하면서 [[밀라노]], 베네치아, [[파리(프랑스)|파리]]의 대사 역할을 수행하거나 1461년에는 곤팔로니에레로 선출되었다. 1463년에 동생 조반니가 죽으면서 1464년에 아버지 코시모가 죽자 계승했으며, 그의 세심한 성격에 탄복한 [[루이 11세]]로부터 메디치 가문의 문장에 있는 원 가운데에 발루아 가의 백합 세 송이를 장식할 수 있도록 특권을 줬다고 하며, 재산 목록을 조사해 아버지 코시모가 손대지 않았던 오래된 채무 관계를 벗기 위해 여러 사람들을 파산시켜 타격이 큰 사람들으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파산한 상인층의 비난을 받았다. 아버지 코시모에 이어서 특권과 존경을 누렸지만 코시모가 사망한 이후 [[루카 피티]]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메디치 가문에 대한 비판으로 공격했으며, 베네치아 영주 대사 [[디오티살비 네로니]]와 힘을 합쳐 메디치 가문을 지지하는 평원당을 반대하는 언덕당을 형성해 파산된 상인층과 결탁하자 피렌체에서 추방된다. 언덕당의 [[니콜로 소데리니]]가 곤팔로니에레가 되었다가 개혁 정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자 다시 복귀했으며, 1466년 3월 8일에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자]]가 죽자 밀라노와의 지속적인 동맹을 주장했으며, 언덕당은 [[베네치아]]와의 동맹으로 복귀하자고 주장해 대립한다. 8월이 되어 병 때문에 카레지 별장으로 실려갔으며, 이 틈을 이용해 언덕당이 베네치아와 페라라의 원조를 요청해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시도하자 아들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를 피렌체로 보내 도착 준비를 하도록 지시했다가 피렌체에 간 로렌초로부터 외딴 길로 오라는 전언을 받았다. 8월 27일에 피렌체에 도착해 상황을 통제하면서 밀라노에 원조 요청을 했으며, 9월 2일에 열릴 선거에 메디치 가문을 지지하는 시뇨리아를 선출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소데리니, 네로니, [[아뇰로 아치아이우올리]] 등 반대하던 자들을 추방하고, 피티는 뒤늦게 항복한 대가로 사면했으며, 네로니와 소데리니 등이 쿠데타를 획책해 1467년 5월에 베네치아의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장군이 이끄는 용병을 토스카나 국경 지대로 진격하자 밀라노, 나폴리에 원군을 요청하면서 피렌체 군대를 모집해 이몰라에서 이들을 격파했다. === 예술가 지원 === 산 미니아토 알 몬테 교회에 [[십자가]]상을 안치할 벽감과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교회에 대리석 비용만 4000플로린이 드는 벽감을 기부했으며, 고대 주화를 수집하면서 메디치 도서관을 위해 희귀본들을 구입해 많은 장서들을 필사해 채색했다. [[안토니오 아베를리노 필라레테]]에 따르면 이런 책들을 몇 시간 동안 보면서 금덩어리처럼 애지중지해 책을 넘겼다고 하며, [[루카 델라 로비아]]에게 메디치 궁의 피에로의 서재 벽에 타원형의 테라코타 양각 세공을 제작해 마루에 타일 장식을 한 것을 의뢰했다. [[파올로 디 도니]]에게는 1432년에 피렌체 가문이 산 로마노에서 알비찌 가문에게 승리한 것을 자축하는 그림 세 폭을 그릴 것을 위탁했으며, [[안토니오 디 자코보벤치]]에게는 메디치 궁을 장식할 대형화 세 점과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업 중 두 가지를 그리도록 의뢰했다. 도나텔로의 노후를 보살피면서 [[산드로 보티첼리]]와 [[베노초 고쫄리]]를 후원해 보티첼리에게서 자신을 칭송하는 용기라는 작품을 봉헌받았으며, 고쫄리에게서는 메디치 궁 1층의 예배실에 [[프레스코]]화를 의뢰했다. === 최후 === 1469년에 병석에 누우면서 시민들이 대리인을 행세하여 도시를 약탈해 행인들을 반 메디치 주의자들이라 매도하면서 돈을 갈취하자 이들을 방에 불러 책망하면서 이런 일이 계속 생긴다면 추방한 가문들을 피렌체로 불러 그들을 통제하겠다고 하여 이들의 폭력과 약탈 행위를 중지하게 만들었으며, 사후 산 로렌초의 옛 성구실에 동생 조반니 옆에 묻혀 반암 석관에 안치했다. == 대중매체에서 == [[파일:Piero de' Medici.webp]] 메디치 가문의 부흥을 다룬 드라마 [[메디치(드라마)|메디치]] 시즌 1과 2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시즌 1은 알렉산드로 스페르두티, 시즌 2는 줄리언 샌즈. 시즌 1에서는 아직 가문의 일을 맡지 못해 불안해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처음에는 시뇨리아[* 피렌체 공화국의 최고행정기관.]에서 비웃음을 당하는 등 자기 몫을 하지 못했으나, 남편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노력하는 아내 루크레치아의 내조로 힘을 얻고 혐의를 받고 있는 아버지를 변호해 성공한다. 한 세대를 건너뛴 시즌 2에서 [[통풍]]으로 고생하는 노인의 모습으로 나온다. 은행 운영에 문제가 생겨 은행이 망할 위기에 처하자 밀라노 공작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에게 빌린 돈을 갚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돈을 갚을 수 없는 밀라노 공작은 대신 정적들을 제거해주겠다고 제안하고, 이를 승낙한다. [[분류:정의의 곤팔로니에레]] [[분류:메디치 가문]] [[분류:1416년 출생]] [[분류:1469년 사망]][[분류:피렌체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