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1차 세계대전의 전투 목록)] |||||| {{{+1 '''피아베강 전투'''}}}[br]Battles of Piave River || |||||| [[파일:피아베강 전투 지도.jpg|width=100%]] || ||||||<:><#C0C0FF> '''날짜''' || ||||||<:> 1918년 6월 15일-1918년 6월 23일 || ||||||<:><#C0C0FF> '''장소''' || ||||||<:> [[이탈리아 왕국]] [[피아베강]] || ||<:><#C0C0FF> '''교전국'''||<^|1>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width=20]][[이탈리아 왕국]][br][[파일:프랑스 국기.svg|width=20]][[프랑스 제3공화국]][br][[파일:영국 국기.svg|width=20]][[영국]] ||<^|1>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width=20]][[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C0C0FF> '''지휘관''' ||<^|1>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width=20]]아르만도 디아츠 ||<^|1>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width=20]][[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br]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width=20]] [[스베토자르 보로에비치]] [br]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width=20]] 아르투어 폰 슈트라우센부르크 || ||||||<:><#C0C0FF> '''결과''' || |||||| '''이탈리아 왕국의 결정적인 승리''' || ||||||<:><#C0C0FF> '''영향'''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쟁의지 급감''' || ||<#C0C0FF><:> '''병력''' ||965,000명[br]야포 5,650문[br]항공기 676기 ||946,000명[br]야포 6,833문[br]항공기 540기|| ||<#C0C0FF><:> '''피해규모''' ||87,181명 ||118,042명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피아베 강 전투1.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2C6A5 0%, #72C6A5 0%, #72C6A5 80%, #72C6A5)" {{{#ffffff '''강 너머로 포격을 가하는 이탈리아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피아베 강 전투2.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2C6A5 0%, #72C6A5 0%, #72C6A5 80%, #72C6A5)" {{{#ffffff '''전투를 준비하는 이탈리아군'''}}}}}} || [목차] [clearfix] == 개요 == [[제1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 전선]]의 결과를 사실상 결정지은 전투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이탈리아 왕국군]]에게 참패하였다. == 배경 == [[1915년]] [[이탈리아 전선]] 개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 양측은 험준한 [[알프스 산맥]]에 틀어박혀 큰 전선의 이동 없이 수만~수십만의 병력을 투입하여 [[이손초 전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독일군의 하드캐리를 받은 오스트리아 헝가리군에게 이탈리아가 참패하면서 12차례에 걸친 이손초 전투가 종결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이탈리아 영토 내로 진격하였다. 카포레토 전투의 참패 이후 이탈리아군은 일시적으로 붕괴해버렸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역시 공세 종말점에 도달하면서 이탈리아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그리파 전투에서 간신히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1918년]]이 되면서 동맹국은 사실상 한계에 다다랐으나 동부전선의 러시아가 사실상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여유가 생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번에야 말로 이탈리아를 끝장내어 [[이탈리아 전선]]을 종결하고자 하였고 마지막 남은 모든 역량을 끌어모아 국가의 운명을 건 공세를 기획하였다. 한편 카포레토 전투 이후 이탈리아 왕국은 [[로마]]가 점령되고 [[시칠리아]]로 밀려나도 항복은 없다면서 항전의사를 불태웠고 국가의 호소에 청년들의 자원입대 역시 줄을 이어갔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목표는 베네치아 지역을 점령하여 이탈리아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였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선 상황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베네치아 사이의 유일한 자연적 방어선인 [[피아베강]]에서 양측의 운명을 건 전투가 시작되었다. == 전투 == [[6월 15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포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병력을 둘로 쪼개어 역 ~자 모양의 피아베강 중 회첸도르프의 군대는 돌출된 중류지역을 돌파하고 보로에비치는 해안을 따라 진격하면서 남쪽으로 꺽여진 강 중하류 지역을 돌파하여 이탈리아군을 포위하려 하였다. 보로에비치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강을 따라 늘어선 이탈리아군의 참호를 향해 포격을 가하고 강을 건너 교두보를 차지하려 하였다. 보로에비치의 군대는 이탈리아군의 포격으로 잠시 후퇴하였지만 이후 다시 도하를 시도하여 이탈리아군의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교두보를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협상국]] 항공기들과 포병의 포격으로 강의 다리들이 파괴되어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탈리아군은 사실상 강에 가로막혀 포위된거나 마찬가지였던 보로에비치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공격하였다. 결국 보로에비치는 교두보를 포기하고 [[6월 19일]] 병력들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몰려오는 이탈리아군을 격퇴하면서 질서정연한 후퇴를 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고 결국 강의 다른 곳을 통해 도하한 이탈리아군에 의해 측면을 공격당하여 패주하였다. 수많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이탈리아군의 포격에 전사하거나 익사하였고 몇몇 지역에서는 백병전도 벌어졌다. 한편 회첸도르프의 군대 역시 이탈리아군에 의해 피해를 입고 철수하였다. 6월 22일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0만명이 넘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황제 [[카를 1세]]가 후퇴를 명령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공세는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 영향 == 이탈리아군은 대승을 거두었으나 처음에는 이 전투의 의미를 [[트렌티노 공세]]처럼 단순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좀 큰 규모의 공세를 방어해낸 전투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공세는 말 그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모든 역량을 끌어모아 쥐어짜낸 것이였으며 전투의 패배로 안그래도 삐걱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구심점을 잃고 내부로부터 붕괴되면서 사실상 멸망의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이 전투의 패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넘어 [[동맹국]] 전체에게 대단한 충격이였는데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이 전투의 소식을 듣고 패배를 직감했다고 할 정도였다. [[파일:피아베그림.jpg|width=100%]] 당연히 이탈리아에서는 해당 전투를 패전의 위기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구국의 전투로 평가하며 신이 승리를 도왔다는 식의 선전화가 쏟아져 나왔고 [[피아베 강의 전설]]과 같은 노래가 만들어진다. [[분류:제1차 세계 대전/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