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프랑스 도팽)] [include(틀:역대 부르고뉴 공작)] ||<-2>
'''부르고뉴 공작[br]{{{+1 프티 도팽 루이}}}[br]Louis, Duc de Bourgogne'''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yacinthe_Rigaud_-_Louis_de_France%2C_duc_de_Bourgogne_%281682-1712%29_-_Google_Art_Project.jpg|width=100%]]}}} || || '''이름''' ||루이 드 프랑스[br](Louis de France)|| || '''출생''' ||[[1682년]] [[8월 16일]][br][[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 '''사망''' ||[[1712년]] [[2월 18일]] (향년 29세)[br][[프랑스 왕국]] 마를리 마를리 궁전|| || '''장례식''' ||[[1712년]] [[2월 23일]][br][[프랑스 왕국]] [[생 드니 대성당]]|| || '''배우자''' ||[[사보이아 가문|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br],,(1697년 결혼 / 1712년 사망),,|| || '''자녀''' ||[[루이 15세]] 등|| || '''아버지''' ||[[그랑 도팽 루이]]|| || '''어머니'''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 || '''형제''' ||[[펠리페 5세]], 샤를|| [목차] [clearfix] == 개요 == >'''하느님께서는 [[프랑스 왕국|프랑스]]에 과분한 왕자를 보내셨도다. 이 땅은 그를 맞이할 만한 가치가 없었고 그는 이미 영원한 천복을 누리기 충분한 존재였다.''' >- [[생시몽 공작]] >'''어린 공작은 국가를 파괴하고 전쟁에서 실수만 거듭했다.''' >- 뤼메지의 사제 [[프랑스 왕국]]의 왕세손. 루이 14세의 아들인 그랑 도팽 루이의 장남으로 프티 도팽 루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그랑 도팽 루이]]가 아직 왕세자(Dauphin de France)였기 때문에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해 아버지를 '''[[그랑 도팽 루이|그랑 도팽 루이(Grand Dauphin Louis)]]'''라고 하고, 아들 부르고뉴 공작 루이를 '''프티 도팽 루이(Petit Dauphin Louis)''' 혹은 '''부르고뉴 공작 루이'''로 불린다.[* 그랑 도팽은 大 도팽(왕세자), 프티 도팽은 小 도팽(왕세손)이란 뜻이다. 아버지 루이는 왕세자 루이 (Grand Dauphin Louis), 본인은 왕세손 루이 (Petit Dauphin Louis)라고 불린 셈.] 젊고 미남이었으나 매우 고집이 강했으며 플랑드르에서의 삽질로 백성들, 아버지, 할아버지에게 모두 욕을 먹었으나 귀족들에게는 이권을 보장해 주려고 해서 생시몽과 같은 귀족들에게는 인기가 좋았다. 천연두에 걸리기 전까진 딱히 잔병치레가 없었기에 사혈치료가 아니라 제대로 치료해서 살았더라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루이 16세'''가 되었을 인물이다. 군사적으로는 매우 무능하여 베테랑이었던 방계왕족 방돔 원수의 말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다 프랑스군이 오우데나르데에서 대패하는 가장 큰 원인제공자가 되었고 말버러 공이 릴을 포위하였는데도 소심하게 행동하다 릴을 빼았기는 참사를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반성은커녕 방돔 원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했고 백성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다. == 생애 == 프티 도팽 루이는 당시 [[프랑스 왕국|프랑스]] 왕세자였던 [[그랑 도팽 루이]]와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는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발루아의 엘리자베트]]의 먼 후손[* 발루아의 엘리자베트의 외손자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의 외손녀가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이다.] 이기에 프티 도팽 루이는 모계로 발루아 왕조의 후계자인 셈이다. 동시에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의 어머니가 앙리 4세의 외손녀이기도 해서 부르봉 왕가의 핏줄도 있었다. 프티 도팽 루이는 8세에 어머니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를 잃었다. 루이는 두 남동생 앙주 공작 필리프와 베리 공작 샤를과 매우 사이가 좋았다. 프티 도팽 루이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지 않았고, 대주교의 영향으로 매우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 성장했다.[* 이는 동생인 [[펠리페 5세|필리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
[[파일:Lodewijk_XIV-Marriage.jpg|width=100%]] || || 결혼식을 올리는 프티 도팽과 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 [br]주위에는 할아버지 [[루이 14세]][* 검은 가발을 쓰고 지팡이를 짚은 사람.]와 작은 할아버지 [[필리프 1세(오를레앙)|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금발 가발을 쓰고 뒷짐을 진 사람.], 곁에는 형제들이 있다. || 프티 도팽 루이는 [[사보이아 가문|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 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장녀로, 외조부가 [[필리프 1세(오를레앙)|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이다. 즉, 루이 14세의 종손녀이므로, 프티 도팽과는 6촌간이다. 또한 동생 [[펠리페 5세]]의 첫 번째 왕비 마리아 루이사의 언니이기도 하다.]와 결혼해 아들 3명을 두었다. 아들 3명 중 장남과 차남은 일찍 사망하고. 3남이 [[루이 15세]]가 되었다. 프티 도팽 루이는 아내를 매우 사랑했고, 젊고 발랄한 마리아 아델라이데는 경직되어 있던 궁정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특히 루이 14세가 어린 손자며느리를 아꼈다고 한다. 다만 당시 왕비와 왕세자비 모두 사망한 이후라 마리아 아델라이데가 프랑스의 [[퍼스트 레이디]]가 되었는데, 그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익숙치 않아서 공식 행사에서 폐를 끼치기도 했다. 프티 도팽 루이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동생 [[펠리페 5세]]에 협력했고,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왕이 되었다. 더불어, 펠리페 5세는 1711년 ~ 1712년 [[프랑스]] 왕실에 [[천연두]]와 [[홍역]]이 유행했을 때 스페인에 있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프티 도팽 루이는 아버지의 개혁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할아버지 [[루이 14세]]와 아버지 [[그랑 도팽 루이]]에 비해 정치적인 활동이 극히 적었다. 또한 [[루이 14세|할아버지]]와 [[루이 15세|아들]]과는 다르게 소문난 [[애처가]]가 였다. == 플랑드르에서의 삽질 == 1708년 루이 14세는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손자에게 군사적 역량을 학습하라는 의도로 방돔 원수가 있던 플랑드르 전선에 총사령관으로 파견하였고 손자에게 방돔 원수의 말을 잘 들으라는 진심어린 충고를 해 주었다. 그랑 도팽 루이는 장군들의 말에 귀기울이는 온화한 성격이었기에 손자도 베테랑 장군의 말을 들을 거라 기대했으나 '''이는 오산이었다.''' 아버지와는 달리 루이는 매우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이었고 자신이 플랑드르 전선을 감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프랑스와 스페인에 비극을 가져왔다. 루이는 플랑드르에 도착한 뒤 열심히 일하는 방돔 원수를 까내렸고 전쟁장관 샤미야르의 말도 듣지 않는 오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방돔 원수는 위이를 공략하자고 제안했으나 루이는 그 말을 묵살하고 브뤼셀 정면공격을 주장해서 결국 브뤼셀 공격을 하려 했으나 당연히 말버러 공작에게 막혔다. 오우데나르데 전투가 벌어질 때 동맹군은 다리를 건너는 중이었기에 방돔 원수는 공격을 개시했고 루이에게 좌측면을 공격하라고 요청했으나 루이는 황당하게도 그냥 가만히 있었고 방돔은 고립된 상태로 힘겹게 전투를 벌이다 결국 패배했다. 더욱 더 충격인 것은 루이가 방돔 원수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대인들은 루이의 삽질을 잘 알고 있었고 루이는 아버지인 그랑 도팽에게 비판받았다. 그럼에도 루이는 여전히 오만했고 이는 또 다른 참사를 만들어냈다. 이후 방돔 원수는 루이에게 동맹군 보급선을 공략하자고 제의했으나 루이는 위험하다고 거부했다. 이 황당한 사태에 루이 14세조차 손자에게 편지를 보내 위험을 감수할 때도 있어야 한다며 비판했다. 그리고 동맹군이 릴을 포위하자 방돔 원수는 즉각적인 공격을 요청했으나 루이는 또 거부했고 결국 릴은 함락되었다. 루이 14세는 손자의 무능함에 답답해했고 프티 도팽 루이는 베르사유로 돌아와서도 변명으로 일관해서 백성들에게 온갖 욕을 먹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프티 도팽의 유약함을 비난하는 노래까지 만들어질 정도였으니 루이의 삽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프티 도팽의 삽질로 프랑스 북부 방어선에 큰 균열이 생겼고 이는 빌라르와 부플레르 원수가 수습해야 했다. 그리고 루이가 비난한 방돔 원수는 1710년 스페인 전역에서 맹활약하며 프티 도팽이 틀렸음을 입증했다. == 비극적인 죽음 == 1711년, [[프랑스 왕국|프랑스]]에는 마치 저주 같은 비극이 일어났다. 1711년 [[4월 14일]], 아버지 [[그랑 도팽 루이]]가 [[천연두]]로 사망했다. 1712년 [[2월 12일]], 이번에는 아내 마리아 아델라이데가 [[홍역]]으로 사망했다. 프티 도팽 루이는 아내를 병간호했으나 끝내 사망하자 매우 슬퍼했다. 곧이어, 프티 도팽 루이 본인도 몸져눕더니 6일 후인 1712년 [[2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루이 14세]]는 프티 도팽의 동생이었던 베리 공작 샤를을 여러번 껴안으며 '내게는 이제 너밖에 없다' 말하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후 얼마 안 가 베리 공작 샤를은 1714년 사냥 중 낙마사고로 인해 할아버지 루이 14세보다 더 일찍 사망하고 만다.] 게다가 1712년 [[3월 8일]]에는 차남인 브르타뉴 공작 루이가 [[홍역]]으로 사망했다. 게다가 3남 루이 역시 몸져누웠다. '''그러나''' 가정교사 방타두르 공작부인이 루이의 [[사혈]]치료를 막으려고 격리시켜서 루이는 살아남았고, 그는 1715년 [[9월 1일]], [[루이 14세]]가 죽자 [[루이 15세]]로 즉위했다.~~[[프랑스 혁명|부르봉 왕조 입장에서 보면 격리시키지 말았어야 했다.]]~~[* 프랑스 혁명은 루이 16세 치세에 일어났으나 루이 15세의 실책들이 혁명을 일으켰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루이 14세의 책임이 가장 크긴 하다. 루이 15세 바로 다음가는 계승권자들인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은 처음부터 입헌군주제 지지자로 유명했으니 루이 15세가 그냥 그대로 죽어서 왕위가 오를레앙 가문으로 넘어갔다면 프랑스 혁명을 막았을 수도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 프티 도팽의 죽음은 루이 15세 치세 초기 프랑스와 스페인 관계가 험악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유아사망률이 높았던 시절, 갓 2살밖에 안 되었던 루이 15세가 자녀를 남길 때까지 생존할 것이라곤 장담할 수 없었고, 애초에 그 전에 성인으로 성장할지도 의문이었다.[* 그런 예상과는 반대로 루이 15세는 64세까지 당대 기준으론 장수하긴 했다. 성욕도 왕성해서 후계자 걱정 할 필요 없이 2남 8녀를 낳기도 했다. 단지 중요한 것은 루이 15세의 성격과 능력이었다. ] 그랬기 때문에,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위를 아들에게 넘기고 자신이 프랑스 왕위를 얻을려는 구상도 꽤 했었다. 만약, 프티 도팽이 오래 생존했다면 더 나아갈 것도 없이 프티 도팽이 왕위를 바로 물려받을 것이기 때문에 펠리페 5세가 그런 마음을 먹을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이다. == 가족관계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rie_Ad%C3%A9la%C3%AFde_of_Savoy_%281685%E2%80%931712%29%2C_Duchess_of_Burgundy_in_1710_by_Gobert.jpg|width=100%]] || || 아내 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 || * 할아버지 : [[루이 14세]](1638년 [[9월 5일]] ~ 1715년 [[9월 1일]]) - [[프랑스 왕국|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3대 왕. * 할머니 : [[마리아 테레사(스페인)|스페인의 마리 테레즈]](1638년 ~ 1683년) -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 [[펠리페 4세]]의 6녀. * 아버지 : [[그랑 도팽 루이]] (1661년 [[11월 1일]] ~ 1711년 [[4월 14일]]) - [[프랑스 왕국|프랑스]]의 왕태자(도팽). * 어머니 :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1660년 [[11월 28일]] ~ 1690년 [[4월 20일]]) * '''부르고뉴 공작 루이'''(1682년 [[8월 16일]] ~ 1712년 [[2월 18일]]) * 아내 : 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1685년 ~ 1712년) * 장남 : 루이(1704년 [[6월 25일]] ~ 1705년 [[4월 13일]]) - 부르타뉴 공작 * 차남 : 루이(1707년 [[1월 8일]] ~ 1712년 [[3월 8일]]) - 부르타뉴 공작. * 삼남 : [[루이 15세]](1710년 [[2월 15일]] ~ 1774년 [[5월 10일]]) - [[프랑스 왕국|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4대 왕. * 남동생 : [[펠리페 5세]](1683년 [[12월 19일]] ~ 1746년 [[7월 9일]]) - [[스페인]]의 왕. * 남동생 : 샤를(1686년 [[7월 31일]] ~ 1714년 [[5월 5일]]) - 베리 공작. [[분류:프랑스의 도팽]][[분류:부르고뉴 공작]][[분류:부르봉 가문]][[분류:1682년 출생]][[분류:1712년 사망]][[분류:전염병으로 죽은 인물]][[분류:생 드니 대성당 안장자]][[분류:베르사유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