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독일의 역사)] ||<-3><#fff> {{{#000 {{{+1 '''프로이센 공국'''}}} [br] '''Hartogdom Preußen | Herzogtum Preußen'''}}} || ||<:><-2> [[파일:프로이센 공국 국기.svg|width=130]] ||<:> [[파일:프로이센 공국 국장.svg|width=80]] || ||<-2><:><#000> {{{#fff '''국기'''}}} ||<:><#000> {{{#fff '''국장'''}}} || ||<-3><:> [[파일:프로이센 공국 지도.svg|width=100%]] || ||<-3><:><#000> {{{#fff '''1525년 4월 10일 ~ 1701년 1월 18일'''}}} || ||<-2><#000> {{{#fff '''성립 이전'''}}} ||<#000> {{{#fff '''왕국 승격 이후'''}}} || ||<-2><#fff> [[독일 기사단국|{{{#000 '''독일 기사단국'''}}}]] ||<#fff> [[프로이센 왕국|{{{#000 '''프로이센 왕국'''}}}]] || ||<:><#000> {{{#fff '''위치'''}}} ||<-2>중동부 유럽 || ||<:><#000> {{{#fff '''수도'''}}} ||<-2>[[쾨니히스베르크]] || ||<:><#000> {{{#fff '''정치체제'''}}} ||<-2>[[전제군주제]] || ||<:><#000> {{{#fff '''국가원수'''}}} ||<-2>공작 || ||<:><#000> {{{#fff '''언어'''}}} ||<-2>[[독일어]], 저지 [[독일어]], [[폴란드어]], 고대 프로이센어 || ||<:><#000> {{{#fff '''종교'''}}} ||<-2>[[루터교]] || ||<:><#000> {{{#fff '''종족'''}}} ||<-2>프로이센 독일인, 발트계 프로이센인, 폴란드인 || ||<:><#000> {{{#fff '''주요사건'''}}} ||<-2>1525년 건국[br]1618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으로 통합[br]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공국 동군연합 || [목차] [clearfix] == 개요 == 1525년 [[튜튼 기사단]]의 기사단장 [[알브레히트(프로이센)|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안스바흐]]가 [[루터교]]로 개종하며 [[가톨릭]] 교회와 절연하고 [[독일 기사단국|기사단국]]을 세속화하면서 형성된 국가. == 역사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lag_of_Brandenburg-Prusia.png|width=300]] 튜튼 기사단국은 1466년 제2차 토룬 조약을 체결한 이래로 [[폴란드 왕국]]의 신하로 전락하였으므로 1625년에 새로이 탄생한 프로이센 공국도 폴란드의 봉신국으로 출발하였는데, 이때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안스바흐의 외숙부였다. 이러한 혈연 관계는 프로이센 공국의 탄생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프로이센 공국의 상속은 알브레히트의 후손만이 계승할 수 있도록 정하였다.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안스바흐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브란덴부르크]] [[선제후]]였던 [[호엔촐레른 가문]]의 프랑켄 방계인 안스바흐-쿨름바흐 변경백 프리드리히의 3남으로 역시 본가 안스바흐도 형 게오르크[*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작센)|프리드리히 3세]], [[요한 프리드리히 1세]], [[헤센]] [[방백]] [[필리프 1세(헤센)|필리프]]와 더불어 독일 [[종교 개혁]]사에서 중요한 제후로 손꼽히는 인물로, 오촌 조카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어]]의 개종에도 영향을 끼쳤다. 젊은 시절 [[헝가리 왕국|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 밑에서 일했으며, 사치와 향락에 빠진 부친을 큰형 카지미어와 함께 몰아내고 카지미어는 쿨름바흐를, 본인은 [[안스바흐]]를 나눠먹었다. 덕분에 알브레히트부터는 받을 영지가 없어 외부로 나가 알아서 생존해야했는데, 알브레히트는 튜튼 기사단장이 되었고 혈연을 이용해 프로이센 공작으로까지 즉위했다.]에 의해 루터교 국가가 되었다. 1569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어]]는 처남인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와 조약을 맺어 만약 프로이센 공국의 [[호엔촐레른 가문]]이 절손되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본가에서 프로이센 공국을 물려받을수 있도록 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1618년,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1572년부터 정신병을 앓아서 친척인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변경백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프리드리히]] 등이 계속 대리로 섭정을 맡았다. 이 시점부터 호엔촐레른 본가에 넘어간 셈이나 다름없었다.]가 남자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맏사위이자 같은 가문 친척[* 초대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의 외증손이기도 하다.]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장인의 영지를 승계하였고 이에 따라 호엔촐레른 가문의 통치 하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을 이루게 되었다. 원칙대로라면 봉신국의 봉신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 종주국인 [[폴란드 왕국]]이 그 영지를 회수하는 것이 옳으나 몇 년 전 러시아의 [[혼란 시대]]를 틈타 러시아에 개입했다가 혼란 시대를 수습한 [[로마노프 왕조]]와의 전쟁의 수렁에 빠지면서 힘에 부치게 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지그문트 3세]]가 선대에 체결된 조약도 있고, 요한 지기스문트가 프로이센 공작으로서 폴란드의 형식적인 봉신으로 남는다는 조건으로 영지 승계를 허용해주었다. 요한 지기스문트는 칼뱅파로 개종[* 신앙심의 문제가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의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국 상속 문제에서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에게 잘보여 지원을 얻어낼 목적으로 개종했다.]한 이력이 있어 영지 내의 다른 귀족들이 루터파를 믿는 가운데 왕가는 칼뱅파를 믿게 되면서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인 면을 취했다. 우유부단하고 무능했던 [[게오르크 빌헬름]]은 매부인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게 끌려다녀[* 게오르크 빌헬름은 자신의 주군이었던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에게 충성을 바쳤고, 지그문트 3세와 스웨덴 왕위 분쟁이 있던 구스타브 2세를 매우 싫어했다. 구스타브 2세와 여동생 마리아 엘레오노라의 결혼도 그가 즉위하면서 파토난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는데 어머니 프로이센의 안나가 구혼하러 온 구스타브 2세를 보고 무조건 결혼시켜야겠다 마음먹어서 [[베를린]]에서 멀리 떨어진 프로이센 공국까지 건너가 협상해서 결혼시켰다.] [[30년 전쟁]]에 개신교편으로 반강제로 참전하였다. 결국 본토인 브란덴부르크는 주 전장이 되면서 많은 인구가 사망하고 도시들이 초토화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프로이센 공국은 멀쩡했고[* 전쟁 피해는 입지 않았는데 구스타브 2세가 프로이센의 주요 항구를 대가 없이 임차해버리는 바람에 수입이 확 줄었다.] 나중에 대선제후(Große Kurfürst)로 불리게 되는 후계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주도면밀한 외교정책으로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힌터포메른[* 원래대로라면 후사가 끊긴 [[포메른|포메른 공국]]을 브란덴부르크에서 온전히 다 받아야 했는데 구스타브 2세 때문에 절반만 가져갔다. 심지어 중요 항구도시인 [[슈테틴]]도 스웨덴에게 빼앗겼다.]과 [[마그데부르크]], 할버슈타트, 캄민, 민덴 4개 주교령을 확보하였다. 1656년에는 스웨덴편으로 [[대홍수(역사)|대홍수]]에 개입[* 처음에는 종주국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측으로 참전했으나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개박살나고 프로이센 공국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스웨덴편에 섰다. 다만 스웨덴이 잘나가니 이에 편승해서 폴란드로부터 종주권을 청산할 목적도 있긴 했다.]하였으며 이후 폴란드에게 전세가 유리해지는 듯 보이니 폴란드편으로 갈아타는 등 기회를 잘 보다가 1657~58년 벨라우-브롬베르크 조약으로 형식적인 봉신 관계까지 청산하며 폴란드와 완전히 결별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와 프로이센 공국의 신분제 의회를 강압적으로 통합하면서 행정적인 통일을 이루었다.[* 이는 꽤나 중요한데,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서는 베를린에서 편하게 통치했지만 [[동군연합]]이었던 프로이센 공국 통치를 위해서는 [[쾨니히스베르크]]까지 건너가야 했다. 그런데 프로이센 공국의 [[융커]]들을 박살내 브란덴부르크 신분제 의회에 프로이센의 신분제 의회를 통합시켜버렸으니, 이제 귀찮게 쾨니히스베르크까지 갈 필요 없이 베를린에 앉아서 통치할 수 있게 된 셈.] 이후 세력 확장을 위해 칭왕을 원했던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프로이센)|프리드리히 3세]]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합스부르크 왕가]]에게 군대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로부터 왕국으로의 승격 승인을 받았다. 1701년 1월 7일, 프리드리히 3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하였고,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은 완벽하게 통합되어 [[프로이센 왕국]]이 되었다.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은 사실상 브란덴부르크가 주도하는 통합이었으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왕위를 칭할 때에 브란덴부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 산하의 제후국이었으므로[*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왕'이라는 칭호는 차기 황제 후계자인 [[로마왕]][* 독일왕이라고도 한다. 신성 로마 제국이 독일인을 중심으로 한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제후인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 왕]], 오직 2명만이 왕을 칭할 수 있었다.] 제국 영토 바깥에 위치한 독립 공국인 프로이센을 국명으로 썼다. 즉 프로이센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 있는 영토가 아니고 바깥의 독립 지역이기 때문에 독립국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왕 칭호를 사용하기 위해 프로이센 지역의 왕국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로 인해 '프로이센에서의 왕(König in Preußen)' 이라는 작위가 생겼다.--[[외왕내제]]의 유럽판[* 간단히 말해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칭하고 프로이센 왕국 내에서는 왕을 칭했다. 대외적으로도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이전까지 공식적인 국가 명칭은 브란덴부르크였고, 각국의 외교문서나 신문에서도 브란덴부르크로 불렸다.]--이후 역사는 [[프로이센 왕국]] 문서 참조. == 역대 공작 == [include(틀:역대 프로이센 공작)] || 대수 || 이름 || 생몰년 || 재위기간 || 비고 || || 1 || [[알브레히트(프로이센)|알브레히트]] || 1490년 5월 17일 ~[br]1568년 3월 20일[br]향년 77세 || 1525년 4월 10일 ~ 1568년 3월 20일 || || || 2 ||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 1553년 5월 7일 ~[br]1618년 8월 27일[br]향년 65세 || 1568년 3월 20일 ~ 1618년 8월 27일 || || || 3 || [[요한 지기스문트]] || 1572년 11월 8일~[br]1619년 12월 23일[br]향년 47세 || 1618년 8월 27일 ~ 1619년 12월 23일 ||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사위[br]이때부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임 || || 4 || [[게오르크 빌헬름]] || 1595년 11월 13일 ~[br]1640년 12월 1일[br]향년 45세 || 1619년 12월 23일 ~ 1640년 12월 1일 || || || 5 || [[프리드리히 빌헬름]] || 1620년 2월 16일 ~[br]1688년 4월 29일[br]향년 68세 || 1640년 12월 1일 ~ 1688년 4월 29일 || || || 6 || [[프리드리히 1세(프로이센)|프리드리히]] || 1657년 7월 11일 ~[br]1713년 2월 25일[br]향년 55세 || 1688년 4월 29일 ~ 1701년 1월 18일 || 1701년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 국왕]]이 되면서 공작위 폐지 || [[분류:18세기 멸망]][[분류:개신교 국가]][[분류:독일의 역사]][[분류:공국(공작)]][[분류:프로이센의 역사]][[분류:유럽의 이민족계 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