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프로이센 왕국의 대외전쟁)] [include(틀: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대외전쟁)] ||||||<#030> {{{#ffffff '''프로스트키 전투'''}}} |||| ||||||<#2e8b57> {{{#ffffff '''날짜'''}}} |||| |||||| 1656년 10월 8일 |||| ||||||<#2e8b57> {{{#ffffff '''장소'''}}} |||| |||||| [[폴란드]] 비르미아마주리 주 프로스트키 |||| ||<#2e8b57><:> ||<#ff0000> {{{#ffffff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0000ff> {{{#ffffff '''스웨덴, 브란덴부르크'''}}} || ||<#2e8b57><:> {{{#ffffff '''교전국'''}}} || [[폴란드-리투아니아]] [br] [[크림 칸국]] || 스웨덴 [br]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 [br] [[프로이센 공국]] || ||<#2e8b57><:> {{{#ffffff '''지휘관'''}}} || 코르빈 고시에프스키 [br] 수반 가지 아기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 ||<#2e8b57><:> {{{#ffffff '''병력'''}}} || 8000명~10000명[* 크림 칸국의 타타르 기병 2000 포함.] || 4000명[* 대부분이 소총병과 용기병으로 구성.] [br] 포병 9 편대 |||| ||<#2e8b57><:> {{{#ffffff '''피해 규모'''}}} || 200~250명이 죽거나 부상당함 || 스웨덴군 약 1500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힘 [br]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의 손실 병력 불명 [br] 대포가 대부분 노획당함 || ||||||<#2e8b57><:> {{{#ffffff '''결과'''}}} |||| |||||| [[발카 전투]]와 이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측이 승리함에 따라[br] 스웨덴은 폴란드와 평화 협정을 맺음. |||| [목차] [clearfix] == 개요 == [[영어]] : Battle of Prostki [[폴란드어]] : Bitwa pod Prostkami [[스웨덴어]] : Slaget vid Lyck [[북방전쟁]]에서 일어난 전투로, 1656년 10월 8일, [[폴란드-리투아니아]], [[크림 칸국]]과 [[스웨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 그리고 [[프로이센 공국]][* 이 당시의 프로이센 공국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과 휘하에 속해 있었다.]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 배경 == 폴란드 전역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이 거세짐에 따라, 스웨덴과 브란덴부르크는 바르샤바에서 퇴각했고, 코르빈 고시에프스키가 지휘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대는 브란덴부르크 휘하의 프로이센 공국령을 공격한다. 프로이센 공국의 지휘관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이를 요격하고자 프로스트키로 출전하고, 엘크 강과 다리 근처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군을 요격하기로 계획한다. == 시작 == 그러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계획과는 달리 전투가 벌어진 10월 8일 아침, 스웨덴측 군대 중 약 1000명과 대포 12기 만이 강을 막 건넜으며, 2000명 이상과 나머지 대포는 강을 건너는 중이었다. 리투아니아 기병대와 타타르 기병대가 먼저 프로스트키에 도착했고, 곧 전투가 벌어졌다. == 전개 == 스웨덴 측은 강을 반도 건너지도 못한 채, 강 주변의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하여 있었고, 퇴각하기에도 불리한 조건에 처했다. 폴란드측은 동맹군인 타타르 기병대를 엘크 강 쪽으로 보내 스웨덴측의 지원군이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무방비로 평야지대에 노출된 보병대 위주의 스웨덴 군[* 용기병들은 전투시 말에서 내렸다.]에게 기병대 위주의 병력을 돌진 시켰고, 강 건너에 위치한 스웨덴측 군대는 대부분이 죽거나 사로잡혀 궤멸하게 된다. 또한, 폴란드군은 스웨덴 군의 진지에도 병력을 보내 500여명을 포로로 잡는다. == 미디어 매체 == * 폴란드의 영화 [[크미치스]]의 클라이막스 부분이 이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분류: 폴란드의 역사]][[분류:독일-폴란드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