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일:Fredy Bickel.jpg|width=100%]] || || 이름 ||알프레트 비켈[br](Alfred Bickel) || || 생년월일 ||[[1918년]] [[5월 12일]] || || 사망년월일 ||[[1999년]] [[8월 18일]] (향년 81세) || || 국적 ||[[파일:스위스 국기.svg|width=28]] [[스위스]] || || 출신지 ||[[독일 제국]] 엡슈타인 || || 포지션 ||센터 포워드 || || 신체조건 ||180cm | 82kg || || 소속팀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935-1956)''' || || 국가대표 ||71경기 15골 (1936-1954) || || 감독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958-1960)[br][[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963-1964) || || 가족관계 ||아들 [[토마스 비켈]] || [목차] [clearfix] == 개요 == [[스위스]]의 전 축구 감독 == 생애[*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 == === 선수 생활 === ==== 클럽 ==== 비켈은 1935년 11월부터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에서 뛰게 되었다. 당시 그라스호퍼의 새 감독은 [[카를 라판]]이었고 [[세베리노 미넬리]] 등 많은 스위스 대표팀 주축 선수들과 함께 1948년까지 그라스호퍼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이 되었다. 1936-37 시즌에 그라스호퍼는 [[더블#s-7|더블]]을 달성했고 비켈은 그라스호퍼에서 뛸 동안 5차례 더블을 기록했다. 비켈은 그라스호퍼에서 [[원 클럽 플레이어|21년간의 모든 선수 생활을 보냈으며]], 많은 팀들의 제의를 뿌리치고 그라스호퍼에만 충성한 선수였다. ====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 ==== 1936년 6월 18일, 당시 18세의 비켈은 [[노르웨이 축구 국가대표팀|노르웨이]]를 상대로 첫 [[A매치]]에 출전했다. 그리고 3일 후의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전에서 비록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스위스]]는 2대5로 패했지만 마수걸이 골을 넣었다. 1937년, [[카를 라판]]이 대표팀 감독도 같이 맡게 되면서 비켈의 경기력은 더 좋아졌다. 그러나 10월 31일, [[제네바]]에서 열린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와의 2대2 무승부에서 그는 [[쇄골]] 골절로 전반 28분에 경기에서 빠졌다. 이후 1938년 2월 6일,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과의 시합에서 나티가 인상적인 경기력으로 1대1 무승부를 기록할 때 복귀했다. 1938년 5월 21일, 스위스는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를 2대1로 꺾는 이변의 주인공이 되었다. 비켈은 라판의 지시에 따라 2선 공격수 역할을 하며 [[에디 햅굿]]을 축으로 한 잉글랜드 수비진들의 호흡을 깨뜨렸다. 직접 비켈이 이 경기에서 득점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활약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938년 월드컵]]에서 비켈은 독일과의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라운드#s-1.9|1라운드 재경기]]에서 2대2로 따라붙는 동점골을 넣었다. 스위스는 결국 독일을 4대2로 잡는 이변의 주인공이 되어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8강 이후#s-2.3|8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스위스는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헝가리]]의 벽을 넘지는 못하고 8강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비켈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도 꾸준히 스위스 대표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12년 만에 다시 열린 월드컵]]에 주장으로 출전했다. 그는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의 [[에리크 닐손]]과 더불어 2차 대전 전후의 월드컵에 모두 참가한 유이한 선수가 되었다. 스위스는 [[재키 파통]]의 2골로 호스트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과 2대2로 비기는 선전을 했지만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에 0대3으로 패하는 바람에 브라질에 밀려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결승 리그|결승 리그]] 진출에는 실패했다. 1954년 5월 30일,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1954년 월드컵]]을 앞두고 치러진 마지막 평가전에서 비켈은 대표팀 경력을 마무리했다. 그는 71경기에서 15골을 넣었다.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정확한 크로스와 미묘한 볼 핸들링, 놀라운 트릭을 가진 포워드. 클럽에 대한 충성심도 매우 높아 그라스호퍼 서포터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 사생활 == 비켈이 45살에 본 늦둥이 아들 [[토마스 비켈]]도 축구 선수였으며 [[1994 FIFA 월드컵 미국|1994년 월드컵]]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 수상 == === 선수 === ==== 클럽[* 비켈은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의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 ==== * [[스위스 슈퍼 리그|나티오날리가]] 우승 4회: 1936-37, 1938-39, 1941-42, 1942-43 * [[스위스 슈퍼 리그|나티오날리가 A]] 우승 3회: 1944-45, 1951-52, 1955-56 * [[스위스 컵]] 우승 9회: 1936-37, 1937-38, 1939-40, 1940-41, 1941-42, 1942-43, 1944-45, 1951-52, 1955-56 * 나티오날리가 준우승 1회: 1937-38 * 나티오날리가 A 준우승 1회: 1953-54 * 스위스 컵 준우승 2회: 1948-49, 1952-53 ==== 개인 ==== * 스위스 올해의 스포츠맨 1회: 1953 [각주] [[분류:1918년 출생]][[분류:1999년 사망]][[분류:1935년 데뷔]][[분류:1956년 은퇴]][[분류:헤센 주 출신 인물]][[분류:스위스의 축구선수]][[분류:공격수]][[분류: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은퇴, 이적]][[분류:원클럽맨]][[분류:스위스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분류: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참가 선수]][[분류:스위스의 축구감독]][[분류: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역대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