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프랑수아즈 질로'''}}}[br]'''Françoise Gilot'''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질로.jpg|width=100%]]}}} || ||<|2> '''출생''' ||[[1921년]] [[11월 26일]] || ||[[프랑스 제3공화국]] [[일드프랑스]] [[오드센]] [[뇌이쉬르센]] || ||<|2> '''사망''' ||[[2023년]] [[6월 6일]] '''(향년 101세)''' ||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 || '''직업''' ||[[화가]]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프랑스)] || ||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br][[소르본 대학교]][br]아카데미 줄리안 미술학교 ||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의 [[화가]]. == 생애 == 어렸을 적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아버지의 요구로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자국의 대학교인 [[소르본 대학교]]에서 철학, 법학 등을 공부했다. 아들을 바랬던 아버지가 질로에게 남자아이의 옷을 입히고, 고소공포증을 극복하라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0년대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그 일부인 [[서부전선]]이 발생하여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침공하자 죽기 전 하고 싶은 일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카데미 줄리안 미술학교를 다녔다. 그 유명한 스페인의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를 유일하게 차버린 여성이었다. 당시 질로는 20대, 피카소는 60대였다. 당시 [[연인]]이었던 사진 작가인 도라 마르와 옆 식탁에 앉아 있었는데 질로를 발견한 피카소는 체리를 들고 다가왔고, 질로가 화가라는 말을 듣고는 자신의 스튜디오에 초대했으며, 두 사람 다 화가이기도 해서 미술로 친해졌고,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당시 피카소는 질로를 두고 "저렇게 아름답게 생긴 여자는 화가가 될 수 없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피카소와 10년 넘게 함께 지내며 슬하에 딸과 아들도 두면서 삶을 보냈지만, 결국 파국을 맞았다. 피카소가 질로 본인도 잘 알고 있는 지인이었던 주느비에브 라포르트와 만난 사실을 알게 된 질로는 이별을 결심하였고, 이별을 고하자 피카소는 "나 같은 남자를 떠나는 여자는 없다"며 격분했다고 한다. 피카소는 불을 붙인 담배를 질로의 뺨에 갖다 대며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자 질로는 피카소에게 “나는 내 사랑의 노예이지, 당신의 노예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떠났다고 한다. 후에 질로가 피카소에게 한 말은 명언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이후 피카소가 의도적으로 파리 유명 인물들에게 압력을 넣어 질로가 작품 활동을 못 하게 하자, 질로는 미국 뉴욕으로 무대를 옮겼고, 이후 화가로서 승승장구했다. 피카소와 헤어진 뒤인 1955년에 연인이었던 예술가 뤽 시몽과 결혼해 딸을 낳았으며, 이혼 후에는 미국 세균학자이자 소아마비 백신 연구원이었던 조너스 솔크와 재혼하기도 했다. == 여담 == * 상술했다시피 “나는 내 사랑의 노예이지, 당신의 노예가 아니다”는 이후 질로의 명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분류:1921년 출생]][[분류:2023년 사망]][[분류:뇌이쉬르센 출신 인물]][[분류:프랑스의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