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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1 '''{{{#white 프란시스코 호세 데 파울라 산탄데르 이 오마냐[br]Francisco José de Paula Santander y Omaña}}}'''}}}|| ||||||<#ffffff>{{{#!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Santander_by_Acevedo_Bernal.jpg|width=100%]]}}}|| ||||<:><#000000>'''{{{#white 출생}}}'''||[[1792년]] [[4월 2일]][br][[스페인 제국|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 [[쿠쿠타]]|| ||||<:><#000000>'''{{{#white 사망}}}'''||[[1840년]] [[5월 6일]] (향년 48세)[br]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보고타]]|| [목차] [clearfix] == 개요 == [[콜롬비아]]의 [[군인]].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 생애 == [[쿠쿠타]]의 크리올계 카카오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학생으로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1810년 '''18세'''의 젊은 나이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시몬 볼리바르]]의 부관으로 1819년 8월 7일 [[보야카 전투]]에서 [[스페인]]에게 승리해서 그들을 [[누에바그라나다 독립 전투|콜롬비아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1821년 11월 3일에 그란콜롬비아의 부통령직을 맡게 되었는데, 여기서 남미의 독립을 위해 투쟁할 것을 부탁한 시몬 볼리바르에게 연방제를 주장하면서 대립했고 1827년 9월 19일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년 후 시몬 볼리바르의 암살 미수 사건과 관련하여 사형을 선고받지만 증거 부족으로 [[프랑스]]로 이송되어 징역형에 처해진다. 1832년에야 귀국하여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직을 맡기 시작했으며 재임기간 동안 정교분리 정책을 추진하고 노예 무역 폐지, 공교육 확립, 보호 무역에 의한 산업의 발전 등 민정에 힘을 쏟았다. 다만 볼리바르파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약간의 소요가 일어났고, 실패로 끝났지만 호세 사르다 장군이 정부 전복을 시도하기도 했다. 1840년 5월 6일에 [[보고타]]에서 [[담석]]으로 사망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 2년에 걸쳐 커다란 내부 갈등이 일어났다. == 여담 == [[파일:attachment/콜롬비아 페소/colo35.jpg]] 과거 [[콜롬비아 페소]] 지폐에 도안으로 자주 등장했다. [[분류:콜롬비아의 독립운동가]][[분류:1792년 출생]][[분류:1840년 사망]][[분류:노르테데산탄데르 주 출신 인물]][[분류:화폐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