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북연 황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48 0%, #32127a 20%, #32127a 80%, #000048)" {{{#ece5b6 '''태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모용선비/왕사)]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48 0%, #32127a 20%, #32127a 80%, #000048); color: #ece5b6" '''북연 제2대 천왕[br]{{{+1 태조 문성제 | 太祖 文成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풍발.webp|width=100%]]}}} || ||<|2> '''출생''' ||연대 미상 || ||[[후연]] [[허베이성|장락군]] [[헝수이시|신도현]][br](현 [[허베이성]] [[헝수이시]]) || ||<|2> '''즉위''' ||[[409년]] [[11월 6일]] || ||[[북연]] [[랴오닝성|창려군]] [[진저우시|극성현]][br](현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 || ||<|2> '''사망''' ||[[430년]] [[9월]] || ||[[북연]] [[차오양시|화룡성]][br](현 [[랴오닝성]] [[차오양시]]) || || '''능묘''' ||장곡릉(長谷陵) || ||<|2> '''재위기간''' ||'''{{{#ece5b6 제2대 천왕}}}''' || ||[[409년]] [[11월 6일]] ~ [[430년]] [[9월]]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풍(馮) || || '''휘''' ||발(跋) || || '''부황''' ||[[풍안|선황제]] || || '''배우자''' ||왕후 왕씨, 부인 송씨 || || '''자녀''' ||100남 1녀 || || '''아명''' ||걸직벌(乞直伐) || || '''자''' ||문기(文起) || || '''묘호''' ||'''[[태조]](太祖)''' || || '''시호''' ||문성황제(文成皇帝) || || '''연호''' ||태평(太平, [[409년]] ~ [[430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세]] [[중국]]의 [[위진남북조]] [[오호십육국시대]] [[북연]](北燕)의 제2대 [[황제]]. 자는 문기(文起), 북연의 제3대 소성제 [[풍홍]]의 형이었다. == 생애 == 장락 사람으로 [[서연(오호십육국시대)|서연]]에서 제7대 [[군주]] [[모용영]]을 섬겼다가 [[후연]]의 제1대 세조 성무제 [[모용수]]에 의해 모용영이 패망하자 동북의 화룡(용성)으로 옮겼으며, [[후연]]에서 중위장군을 지내다가 [[혜의제|고운]]의 뜻과 법도를 기이하게 여겨 친구가 되었다. 후연의 [[폭군]]이자 [[암군]] 제4대 소문제 [[모용희]]에게 죄를 지어 모용희가 풍발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하자 산택으로 망명했으며 407년 형제인 풍소불, 풍만니와 함께 몰래 수도인 화룡성으로 들어가 [[반란]]을 일으킨 후 [[혜의제|고운]]을 [[천왕]]으로 추대하고 모용희를 시해했다. 후연이 멸망하고 고운이 [[북연]]을 세우면서 [[개국공신]] 풍발은 [[도독|도독중외제군사]], [[개부의동삼사]], [[녹상서사]]의 자리에 올랐다. 409년 혜의제 고운이 부하들 이반, 도인에게 살해당하면서 제2대 천왕으로 추대되었고, 이내 창려에서 즉위해 대사면령을 내리면서 [[연호]]를 [[태평]](太平)이라고 정했다. 풍발은 모후 장씨를 [[태후]]로 높이고, [[처]] 손씨를 [[왕후]]로 세웠으며, 아들인 풍영을 [[태자]]로 삼고, 동생 범양공 풍소불을 거기대장군·녹상서사로 삼았다. 또한 손호를 [[상서령]], 장흥을 [[좌복야]]로 삼고, 동생인 급군공 [[풍홍]]을 우복야로 삼았으며, [[사촌]] 동생인 광천공 풍만니를 [[유주(중국)|유]]•평 2주목으로 삼고, 상곡공 풍유진을 [[병주|병]]•[[청주(중국)|청]] 2주목으로 삼았다 이때 풍만니, 풍유진은 스스로 [[종실]]에다가 큰 공로가 있어, 응당 공보(公輔. [[삼공|3공]]과 4보)가 될 것이라고 여겼는데 천왕 풍발이 풍만니, 풍유진은 [[번왕|2번(藩)]]으로 임중(任重. 임무가 막중함)하니, 오래도록 징소하지 않았다. 이에 두 사람 모두 풍발을 원망했다. 당시, 풍만니는 요서군의 비여(肥如)에, 풍유진은 창려군의 백랑(白狼)에 진수해 있었다. 410년 말 풍유진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 풍만니에게 알리길 >"저에게 모의가 있으니 함께 도모코자 합니다." 고 하니 풍만니가 마침내 백랑으로 달려가, 풍유진과 더불어 함께 배반했다.(풍만니•풍유진의 난, 410년 말) 이에 천왕 풍발이 급군공 풍홍과 좌복야 장흥을 파견해 보•기 20,000명으로 토벌케하고, 먼저 사자를 보내어 화복(禍福. 재앙과 복)을 유세케하니 풍만니가 항복하려 했으나, 풍유진이 반대했다. 그후 풍홍이 복병을 숨겨놓고 기다리다가 많은 불을 함께 일으키고 복병이 요격(邀擊. 맞받아침)하니 반란군을 남김없이 사로잡고 참수했다. 이에 풍만니와 풍유진이 두려워 나가 항복했으나, 퐁홍이 모두 참수했다. 풍발이 태자 풍영을 영대선우로 삼고, 4보(四輔)를 두었다(411. 7)[* 호한분치'의 선우대에, 당시 북연은 좌·우 2보를 두었는데, 이때 전(前)·후(後)보를 더 설치한 것이었다.] 411년 [[유연(민족)|유연]]의 제2대 애고개가한 [[욱구려곡률]]이 사자를 보내 말 3,000필을 바치자 풍발은 [[딸]] 낙랑공주 풍씨를 욱구려곡률의 처로 삼게 하는 한편, 정사에 부지런히 참여해 농사와 누에 치는 것을 권장하면서 요역와 부세 등을 줄이고, 매번 수령을 파견할 때 정사를 위한 것을 물어 그들의 재능을 관찰해 북연 사람들이 기뻐했다. 414년에는 저광의 조언을 받아들여 [[거란]], [[해족|고막해]] 등을 항복시켰고, 416년 창려윤 손백인과 질지을발 형제가 북연의 개국 때 공이 있어 이에 풍발에게 개부를 요구했다가 풍발이 이를 거절하자 그들이 원망하는 말을 하여 죽였다. 또한 [[요동]][[태수]] 무은제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무은제를 죽였다. [[북위]]의 제2대 태종 [[명원제]] 탁발사가 동쪽을 순행했는데 북쪽의 유원(濡源. 유수의 발원지)과 감송(甘松. 위치?)에 이르러(418. 5) 정동장군 장손도생, 안동장군 이선, 급사황문시랑 해관을 파견해 정예 기병 20,000명으로 북연을 습격하게 하고, 효기장군 연보와 유주자사 위낙에게 유주에서부터 북위군을 이끌고 요서군으로 향하게 해 성세(聲勢. 성원하는 세력)로 삼았다. 그리고 명원제 본인은 창려군의 평강(平剛) 서북쪽 돌문령(突門嶺)에 주둔해 성과를 기다렸다. 장손도생 등은 평강 동남쪽의 을련성(乙連城. 현 객자심좌익현 부근)을 함락시키고, 나아가 북연의 수도인 화룡(和龍)을 공격해, 북연의 선우우보 고니를 격파하고 그 장수인 황보궤를 죽였다. 하지만 북연의 풍발이 농성하며 스스로 지켜, 북위군이 공격해 이기지 못하니 그 백성 10,000여 가(家)를 노략질하고 돌아갔다 425년 2월 [[성전환|여자가 남자로 변화한 괴이한 일이 생기자]], 상서좌승 부권이 말하기를 >"신하가 장차 군(君. 임금)이 될 징조입니다." 라고 했다. 다음해 태자 풍영이 죽으니, 풍발이 차남 풍익을 태자로 세웠다(426. 8) 430년 태조 문성제 풍발이 병들어 누우니, 중서감 신수와 시중 양철을 내전(內殿)으로 불러 후사(後事. 뒷일)를 부탁했다. 병이 점점 심해지자 풍발은 연(輦, 가마)을 타고 평대에 나와앉아,(430. 9) 태자 풍익에게 >"국사(國事)를 섭정해 병사를 점검하며, 정사를 듣고 처리하면서, 비상시에 대비하라." 고 명령했다. 당시 송부인이 아들인 풍수거를 천왕으로 세우고자 해, 태자 풍익에게 >"황상의 병이 곧 완쾌될 것인데 어찌 급하게 천하를 임통치하려 하는가!" 라고 말했다. 이에 성품이 인약(仁弱. 어질고 약함)했던 태자 풍익은 마침내 [[동궁]](東宮)으로 돌아가, 매일 3번씩 가서 부황 풍발의 병을 살폈다. 야심으로 가득찬 송부인은 교조(矯詔. 거짓 조서)로 안팎을 끊고, [[내시]]를 보내어 전문(傳問. 통하여 물음)케 할뿐이었으니 태자 풍익 및 여러 [[황자]]와 [[대신]]들이 나란히 천왕 풍발을 알현할 수 없었고, 오직 중급사 호복만이 출입하여, 금위(禁衞)를 오로지 관장했다. 중급사 호복은 송부인이 마침내는 그 모의를 성공시킬 것이라고 생각해 풍발의 동생 사도·녹상서사·중산공 풍홍에게 이를 말하니 풍홍은 장사(壯士. 힘센 병사) 수십 명과 함께 갑옷을 입고 금중(禁中)에 들어갔다. 이때 숙위(宿衞)들은 모두 싸우지 않고 흩어졌다. 당시 송부인이 >"동합(閤/ 작은 문)을 닫으라." 고 명령했으나 풍홍의 가동(家僮. 집안의 노복)이었던 고두두가 경첩(勁捷. 굳세고 날램)과 용력(勇力. 용기와 힘)이 있어 합(閤)을 뛰어넘어 들어가 황당(皇堂. 황제의 침실이 있는 궁)에 이르러, 여어(女御. [[궁녀]]) 한 명을 사살(射殺. 활쏘아 죽임)했다 이로 인해 문성제 풍발이 놀라고 두려움에 빠져 붕어했다. 풍발이 붕어하고, 동생 [[풍홍]]이 즉위한 후, 선제 풍발의 [[묘호]]를 [[태조]], [[시호]]를 문성황제(文成皇帝)라고 했다. == 기타 == 풍발이 붕어할 당시 [[정력왕|아들이 무려 100여 명이나 있었는데]], 즉위한 숙부 풍홍에게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 대중매체에서의 풍발 == === [[광개토태왕(드라마)|광개토태왕]] === 배우는 [[정호근]]. 작품 내내 고구려와 적대하는 악역으로 나오며, 악역 전문 배우인 정호근의 열연이 돋보였다. 비록 악역 포지션이나 개그 캐릭터스러운 모습도 보이며,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다시금 악착스럽게 생존하는 모습을 보여 후연쪽 주인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youtube(pu07CS8Pl_4)] 작중 [[여석개]]를 도발하기 위해 말하는 대사 중 >'''"도대체 얼마나 쳐먹는 게야! 돼지 같은 놈..."'''(0:27) >'''"아이고, 무서워라!"'''(0:46) 대사가 압권이다. 이 중 전자의 도발은 다이어트를 공언하는 인터넷 방송인이 방송 중 그런 모습을 안 보이거나 막 의식할 경우 시청자들이 약올리는 용도로 자주 쓴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진서)]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황제]][[분류:430년 사망]][[분류:헝수이시 출신 인물]][[분류:인터넷 밈/영화 및 드라마/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