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include(틀:평양의 도성 및 궁궐)] [목차] == 개요 == 豊慶宮 [[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부]]에 있던 이궁(離宮). 한국의 마지막 [[궁궐]]이자 [[행궁]]이다. 이 궁궐을 마지막으로 행궁제도와 이궁제도가 막을 내렸다. 광무 6년(1902)에 평양을 제2의 수도인 [[서경]](西京)으로 육성하려던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공사를 시작했다. == 역사 == 고종의 명에 의하여 짓기 시작했으며, 당시 완공 직전이었고 고종의 어진과 순종 황태자의 예진(睿眞)도 미리 봉안했다. 풍경궁 영건의 의도는 대한제국의 정통성 확립[* 전통적인 동아시아 제국은 양경(兩京: 두 수도) 제도를 운용했다고 한다. 더욱이 평양은 고조선(단군 조선 및 기자 조선)의 수도로서 전통과 예악(禮樂)이 시작된 곳이었으므로 의미를 부여하기에 좋았다.]이었으며 한반도에서 열강(러시아, 일본)의 무력 충돌 발생 시 사용할 대한제국 황실의 피난처를 조성할 목적도 있었다[* 당시 황실은 러시아의 주도하에 관철된 [[삼국간섭]]에 깊은 인상을 받고 친러적 성향을 띠었다. 더욱이 [[을미사변]] 직후였던지라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극대화되어 더욱 러시아에 경도되었던바, 평양에 러시아식으로 편제된 지방군, 진위대가 주둔하고 있었음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에 고종의 입장은 궁궐을 짓긴 하되,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지나치게 성대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장명숙, 2019 p.11) 하지만,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을 보았을 때, 새로운 궁궐을 짓는 것은 아무래도 재정상 무리였고, [[민영철]]과 신우균을 비롯한 관리들의 횡령과 평양에 주둔하던 군인들의 약탈과 강간을 비롯한 범죄행위로 인해 민심이 떨어지게 된다. 사람들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닌 사치스러운 행위라고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구한말 정부의 이미지 추락에 크게 기여한다. 이후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이 [[평양부]]에 들어와서 점거하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되었고 어진도 서울로 다시 되가져갔다. 이후 풍경궁의 주변은 병참기지로 사용되었다. 1907년 8월 7일 해산되기 전까지 40명의 병정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1907년에 풍경궁은 일본에 의해 근대식 [[병원]]인 [[평양부]] 동인의원으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철도 부설 중에 상처입은 노동자들을 치료하는 용도 등으로 사용되었다. 1908년에는 풍경궁의 관제(官制)가 폐지되었고, 봉안되어 있던 어진은 [[덕수궁 정관헌]]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시기인 1913년에는 평양 자혜의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23년에는 풍경궁의 서쪽에 근대식 병원 건물을 새로 짓게 된다. 1933년에는 자혜의원이 평양의학전문학교로 바뀌었고, 지금은 [[북한]]의 평양의학대학이 이 건물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물론 [[경복궁]] 등 다른 궁궐과 같이, 풍경궁도 훼손을 피할 수 없었다. 1925년에 [[조계사#s-2|경성 대화정 조계사]][* 지금의 [[동국대학교]] 자리에 있던 일본식 절. 지금의 [[조계사#s-1|조계사]]와는 다르다.]의 요청으로 풍경궁의 정문인 황건문을 경성으로 가져가 조계사의 산문으로 삼았다. 그래도 사진과 평양의 지도 등을 보면 풍경궁의 주요 건물과 행각 등은 1935년까지만 하더라도 남아 있었지만, 이후 [[6.25 전쟁]] 때 송두리째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풍경궁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https://blog.naver.com/minsu977/221202657680|여길 참고하자.]] 풍경궁에 대해 매우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 건축 == * 태극전(太極殿) : 풍경궁의 정전(正殿)이다. * 지덕전(至德殿) : 편전이다. * 중화전(重華殿) : 동궁전으로 황태자가 사용하는 전각이다. * 황건문(皇建門) : 풍경궁의 정문. [[파일:attachment/HGgate.jpg|width=500]] 황건문(皇建門)은 원래 풍경궁의 정문이었다. 크고 시원하게 뻗은 기둥들의 아름다움으로 이름이 높았다. 1925년에 일본사찰이었던 [[조계사#s-2|경성 대화정 조계사]][* 大和町 曹溪寺:현재의 [[조계사#s-1|조계사]]와는 다른 절이니 주의]에서 이 문을 사들여 산문으로 쓰게 된다. 이 [[절(불교)|절]]은 지금의 [[동국대학교]] 서울 필동 캠퍼스 자리에 있었다. 1926년 8월에는 폭우로 인해 황건문 지붕이 반이 붕괴되어 당시 돈으로 2천만원의 피해가 났다. 해방 이후 이 [[조계사#s-2|경성 대화정 조계사]]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건립되고 황건문은 동국대학교 정문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1971년 학생회관이 옆에 신축되면서 현대식 건물과의 부조화와 유지보수부실로 인해 학교당국에서 해체/철거하였다. 이후 주춧돌마저 도서관 근처로 치워지고, 현판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렇게 유일한 풍경궁의 건축이 사라졌다. [[동국대학교]]의 [[흑역사]] 중 하나. [[경희궁]] 숭정전이 '정각원' 건물로 동국대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로 꼽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 외부 링크 == * [[https://archive.ph/2MJPx|고종, 왜 평양을 새 수도로 정했을까? 뉴스파워 아카이브]] * [[https://archive.ph/vZf8X|"고종, 평양 천도 고려했을 수도" 연합뉴스 아카이브]] * [[https://www.chosun.com/opinion/2021/11/17/GGUWGFYLUNHTFJR6NTHCZHQ6UM/|"외국은 수도가 둘이다. 평양에도 궁궐을 지으라" 시대착오의 상징 평양 풍경궁 조선일보]]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601501|대한제국기 고종의 풍경궁 건립을 둘러싼 제 인식. 장영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학회.]] *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11&totalCount=11&itemId=mk&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0&levelId=mk_002_0050_041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D%92%8D%EA%B2%BD%EA%B6%81&searchKeywordConjunction=AND|풍경궁을 수호하던 병사를 해산시키고 일본군대의 수비 등을 보고함. 1907년 08월 07일자 각사등록 근대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4012010_001|서경에서 돌아온 대신 이근명을 소견하다. 고종실록 43권, 고종 40년 12월 10일 양력 1번째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https://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3110886&from=%EC%8B%A0%EB%AC%B8%20%EA%B2%80%EC%83%89|종병살민. 대한매일신보 1906년 01월 10일.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report.html?actionUrl=search%2FchildListExpressionInner&selectedGroup=&collsGroup=&m201_id=10083566&indexForSearch=&executeQuery=&listPerPage=4&searchDiv=SYS&dataTypeCd=¤tGroup=&selectedColls=&sortType=&dbGubun=SD&metaDataId=&m310_arti_id=&local_id=10096480&category=Report|대한제국기 고종의 풍경궁 건립을 둘러싼 제 인식]] == 같이보기 == * [[고종(대한제국)|고종]] * [[동국대학교]] * [[서경#s-1.1.1|서경]] [[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분류:행궁]][[분류:방화로 소실된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