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20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br]{{{-1 [[라틴어]]: Publius Cornelius Lentul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20년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시칠리아]]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기원전 237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조부)[br][[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199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아버지)[br]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아들)[br]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62년 || ||<#800080> {{{#ffffff '''전임''' }}}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br][[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기원전 162년 집정관)|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 || ||<#800080> {{{#ffffff '''동기''' }}}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162년 집정관)|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800080> {{{#ffffff '''후임''' }}}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기원전 161년 집정관)|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br][[가이우스 판니우스 스트라보]]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고대 사료에서 전해지는 렌툴루스(Lentulus)라는 코그노멘을 가진 첫번째 인물은 기원전 327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였지만, 기원전 3세기부터 고위 행정관을 잇따라 맡은 렌툴루스 인사들과 이 인물간의 연관성은 불분명하다. 조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기원전 237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는 기원전 237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199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기원전 199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172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국왕 [[페르세우스(마케도니아)|페르세우스]]와 로마간의 갈등이 심각해지자, 원로원은 그리스로 사절단을 파견해 반 마케도니아 동맹을 결성하려 했다. 그는 이 사절단의 일원을 맡아 케팔로니아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부 해안 지대의 도시국가들을 잇따라 방문한 뒤 겨울이 되기 전에 로마로 귀호나했다. 기원전 171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기원전 171년 집정관)|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휘하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맡아 마케도니아로 향하는 원정군에 가담했다. 보이오티아에서 300명을 이끌고 할리아트 요새를 포위햇지만, 법무관 가이우스 루크레티우스 갈루스의 명령에 따라 포위를 풀어야 했다. 기원전 169년 수석 [[조영관]]에 당선된 뒤 동료 조영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과 함께 표범과 코끼리가 포함된 호화로운 서커스 게임을 개최했다. 기원전 168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원정군에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로서 가담해 마케도니아에 다시 향했고, [[피드나 전투]] 후 사모트라케에 숨은 페르세우스를 찾아가 항복을 설득했지만 페르세우스가 항복을 거부해서 실패했다. 기원전 165년 로마 시의 사법 재판을 관장하는 [[법무관]]에 선임되었고, [[원로원]]의 지시에 따라 캄파니아 지방에서 국유지 중 개인에게 넘어간 토지를 반환받는 정책을 실시했다. 기원전 162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과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기원전 162년 집정관)|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가 [[대 그라쿠스]]의 압력에 의해 집정관에서 사임하자,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162년 집정관)|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게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집정관으로서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기원전 156년 동방에 있던 그는 [[비티니아 왕국]]의 [[프루시아스 2세]]가 [[페르가몬 왕국]]을 침공한 일에 관해 원로원에 보고하기 위해 로마로 향했다. 기원전 125년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선임되었다. 그 해 또는 이듬해에 아시아 총독 [[마니우스 아퀼리우스(기원전 129년 집정관)|마니우스 아퀼리우스]]를 속주민 착취 혐의로 고발했지만 패소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이에 대해 아퀼리우스는 분명 범죄를 저질렀지만 뇌물을 받은 판사가 무죄를 선고했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121년 [[호민관]]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원로원간의 갈등이 심각해지자, 그는 원로원 편을 들었다. 이후 로마 시내에서 벌어진 충돌에 참여해 그라쿠스 파벌을 공격했다가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평민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게 되자, 기원전 120년 원로원으로부터 레가투스로 선임되어 시칠리아로 떠났고, 그곳에서 곧 사망했다. 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유피테르]]의 [[플라멘]]이 되었고, 또다른 아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기원전 130년 집정관에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