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65년 범죄]][[분류:제3공화국/살인사건]][[분류:종로구의 사건사고]] [include(틀:사건사고)] [목차] == 개요 == [[1965년]] [[6월 13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창동]][* 1975년 [[종로구]]에 편입되었다.]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바람난 [[아내]]에게 [[가정]]으로 돌아오도록 호소하던 [[남편]]이 이를 거절당하자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사건이다. == 상세 == [[1965년]] [[6월 13일]] 오전 9시 20분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창동 75번지 [[세검정]] 만하장(萬河莊) 관광호텔[* 종로구 평창동 108-2번지에 있었다. 1964년에 개업하여 1982년 신관을 준공하면서 '호텔 서울 올림피아'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2001년 9월 제5차 남북장관급회담이 이곳에서 열리는 등 유명세를 타기도 했으나 수익성 악화로 인해 2005년 11월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97608#home|폐업했다]]. 현재는 이 자리에 [[http://naver.me/5lZPN1jp|평창롯데캐슬로잔아파트 112세대]]가 들어서있다.] 뒷산 중턱 밤나무숲속에서 [[동대문구]] [[전농동]] 530번지에 거주하던 이문휘(李文徽, 당시 34세, 상업)가 [[식칼]]로 아내 유옥순(兪玉順, 당시 28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5061400329207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06-14&officeId=00032&pageNo=7&printNo=6047&publishType=00020|1965년 6월 14일 경향신문 기사]]에서는 '유옥준'(兪玉'''{{{+1 濬}}}''')으로 표기하였다.]의 어깨와 등, 가슴 등 3곳을 찔러 살해한 뒤 자신도 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황해도]] [[연백군]]이 고향인 이 씨는 어려서부터 [[고아원]]에서 자라나 성격은 내성적이면서 온순했다. 1950년 [[6.25 전쟁]] 때 월남하여 곧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였고 1955년경 [[상사(계급)|상사]]로 [[강원도]]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유 씨의 고향인 [[영월군]]에서 유 씨와 만나 결혼하기에 이르렀으며 1958년 제대한 뒤에는 유 씨와 함께 상경하여 전농동 486번지에 '신신(新新)집'이라는 [[주점]]을 경영하였다. 이들은 자식들을 꼭 음악가로 만들겠다는 결심과 함께 10년간 줄곧 부부로 지내오면서 열심히 [[노력]]하였고 3년 전부터는 살림도 다소 나아졌다. 그러다가 이 씨 부부는 사건으로부터 1년 전인 1964년 여름부터 [[해군해양의료원|진해해군병원]] 보일러실에 근무하던 이태종(李泰鍾, 당시 30세) [[대한민국 해군]] [[중사]]를 한 집에 하숙시켜 왔는데 별안간 이 중사는 유 씨와 눈이 맞아 결국 [[간통]]을 저질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 씨는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며 여러 차례 간청과 설득을 반복하며 아내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하였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유 씨는 1965년 5월 27일 [[종로구]] [[세종로]]에 있던 B모 다방에 '마담'으로 들어갔고 그해 6월 11일에는 아예 보따리를 싸서 집을 나가 버렸다. 사건 전날인 12일 오후 5시 이 씨는 아래와 같이 장문의 유서 4장을 미리 써서 바지 뒷주머니에 간직하고 식칼을 품은 뒤 식모에게 '아이들을 잘 돌봐주라'고 부탁하고는 아내가 일하는 [[다방]]으로 향했으며 사건 당일인 6월 13일 아침 8시 20분쯤 다방으로 찾아가 자식들을 생각해서라도 집으로 돌아오라 타일렀지만 유 씨는 남편 이 씨도, 내연 관계의 이 중사도 누구도 따를 수 없다며 냉정하게 거절했다. 결국 이 씨는 택시를 이용해 아내를 세검정 부근으로 유인해내어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이 씨는 미리 준비한 유서에 '어린 자식 넷을 두고 나가버린 바람난 처를 죽이고 나도 죽습니다. 참된 아내로 되돌아 올 것을 애원했으나 허사, 이제 그 여자 없이는 내 행복이 있을 수 없어 열 번 생각 끝에 무서운 범죄를 저지릅니다. 부디 어린 아이들을 보살펴 주시길…', '불쌍한 어린 아이들은 죽일 수 없군요. 뜻 있는 분은 영신(永信, 당시 10세, 전농국민학교 3학년)·규홍(圭弘, 당시 8세, 전농국민학교 1학년)·규하(圭何, 당시 7세)·규남(圭南, 당시 5세) 이 4남매를 외국인에게 입양시켜 주십시오'라고 썼다. 사건 직후 이웃아주머니가 4명의 고아들을 보호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5061400329207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06-14&officeId=00032&pageNo=7&printNo=6047&publishType=00020|당시 사건을 보도한 1965년 6월 14일 경향신문 기사]]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5061500239107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5-06-15&officeId=00023&pageNo=7&printNo=13579&publishType=00010|당시 사건을 보도한 1965년 6월 15일 조선일보 기사]] == 둘러보기 == [include(틀:살인사건/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