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로'''(平盧)는 [[당나라]]의 행정구역 중 하나이다. == 역사 == [[개원(연호)|개원]] 7년([[719년]]), 평로군사(平盧軍使)를 평로군절도(平盧軍節度),경략하북지도(經略河北支度)로 승격시켰고, 치소를 영주(營州, 현재 [[랴오닝성]] [[차오양시]])에 두었다. 개원 28년([[740년]])을 전후하여 당나라 조정은 평로군절도사(平盧軍節度使) 오지의(烏知義)에게 칙령을 내려 "[[발해]]와 흑수(黑水)는 최근 국가로 복귀하였으니, 역시 경에게 절도(節度)를 위임한다."라고 하였다. [[현종(당)|당 현종]] 말에 [[안록산]]을 평로군사(平盧軍使) 겸 영주도독(兼營州都督)으로 승진시켰는데,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평로는 안록산의 근거지 중 하나가 되었다. 안사의 난 후기인 [[상원(연호)|상원]] 2년([[761년]]), 안록산의 부장이었으나 당나라에 귀순한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 [[후희일]]이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의 위협을 받자 남쪽 치청(淄靑, [[산둥성]] [[칭저우시]])으로 옮겼고, 이때부터 평로는 산동(山東)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화하였다. 안사의 난 이후 평로군의 전력은 매우 손상되었고, 당나라 중기 이후 여러 번진들이 할거할 때 치청, 즉 평로는 [[이정기]]가 점거하였다. 이때부터 54년을 [[이정기]], [[이납]], [[이사고]], [[이사도]]에 의해 통치되다가 최종적으로 당나라 조정에게 평정되었다. 그 기간 동안 치청절도사(淄靑節度使),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度使), 평로절도사 등의 칭호는 서로 교체 사용되었다. [[분류: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