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오를레앙 공작)] ||<-2>
'''오를레앙 공작[br]{{{+1 페르디낭 필리프}}}[br]Ferdinand Philippe, Duc d'Orléans'''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Ferdinand-Philippe_d'Orléans.jpg|width=100%]]}}} || || '''이름''' ||페르디낭 필리프 루이 샤를 앙리 조제프 도를레앙[br](Ferdinand Philippe Louis Charles Henri Joseph d'Orléans)|| || '''출생''' ||[[1810년]] [[9월 3일]][br][[양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 '''사망''' ||[[1842년]] [[7월 13일]] (향년 31세)[br][[7월 왕정|프랑스 왕국]] [[뇌이쉬르센]]|| || '''배우자''' ||[[헬레네 루이제 엘리자베트|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헬레네 여공작]] ,,(1837년 결혼),,|| || '''자녀''' ||필리프, 로베르|| || '''아버지''' ||[[루이필리프 1세]]|| || '''어머니''' ||[[마리아 아말리아(양시칠리아)|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 '''형제''' ||[[루이즈 도를레앙|루이즈]], 마리, 루이, [[클레망틴 도를레앙|클레망틴]], 프랑수아, 샤를, 앙리, 앙투안|| || '''종교''' ||[[가톨릭]]||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의 마지막 국왕 [[루이필리프 1세]]와 [[마리아 아말리아(양시칠리아)|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의 장남. == 생애 == === 어린 시절 === 1747년 4월 13일 가족이 망명해 있던 [[양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에서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3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외할아버지 양시칠리아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왕정 복고]]가 이루어지면서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로 향했다. 이후 오를레앙 가문의 후계자이자 왕족으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 인기있는 왕족 === 1830년 [[7월 혁명]]으로 아버지 루이필리프 1세가 프랑스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아버지의 오를레앙 공작위를 이어받은 페르디낭 필리프는 왕세자가 되었다.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시원시원하고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다. 때문에 왕세자임에도 고리타분한 인물이 많은 [[왕당파]] 사람들과 종종 충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성향 덕분에 국민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다. 1831년 11월 [[리옹]]에서 노동자 봉기가 발생하자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봉기를 진압시켰는데, 이때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모습이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1832년 [[콜레라]]가 퍼졌을 때는 직접 환자들을 만나며 전염병 종식을 위해 노력했다. 사람들은 그를 가난한 민중을 신경쓰는 유일한 왕족이라고 칭송했다. 1830년대에 [[프랑스령 알제리|알제리 침공]]을 시작으로 군 경력을 쌓았다. 군인으로써 소질이 있었던 페르디낭 필리프는 각종 전투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 결혼 === 아버지 [[루이필리프 1세]]의 즉위가 정통성 면에서 문제가 많았기에[* 일단 페르디낭 필리프의 할아버지 [[루이필리프 2세|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는 [[프랑스 혁명]] 당시 왕위에 욕심을 내며 친척인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을 찬성해서 프랑스 전역을 충격에 파트리고, 정작 본인도 오를레앙 왕조를 옹립하려는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똑같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해 아들인 [[루이필리프 1세]]까지 망명 시절 [[부르봉 왕조]] 친척들에게 왕따당하게 만들었다. 루이필리프 역시 당시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직계 남성으로 명백히 계승 서열이 앞서는 [[앙리 5세|샹보르 백작 앙리]]를 제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워낙 정통성이 없어서 아내 [[마리아 아말리아(양시칠리아)|마리아 아말리아]]마저 재앙 그 자체라며 즉위를 반대했고 재위 기간 내내 전 유럽의 왕실에게 폭동왕이라고 비난받아야만 했다.] 페르디낭 필리프는 왕세자임에도 신붓감을 찾기 쉽지 않았다. 유럽의 통치 가문에서는 루이필리프 1세를 찬탈자라고 비난했고, 불완전한 왕족에게 딸을 내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1837년 5월 30일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1세]]의 손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헬레네]]와 결혼식을 올렸다. 헬레네는 개신교도였지만 주요 통치 가문과 친척이었기에 프랑스 왕실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결혼 생활은 행복했고 부부는 슬하에 아들 2명을 두었다. === 죽음 === 1842년 7월, 페르디낭 필리프는 생오메르로 여행을 떠나기 전 아내와 아들을 만나 인사하기 위해 [[뇌이쉬르센]]으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가던 중 갑자기 말들이 날뛰는 사고가 발생했다. 마차 밖으로 튕겨져 나간 그는 두개골이 골절되었다. 얼마 안 가 페르디낭 필리프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31살의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6년 뒤 [[프랑스 2월 혁명]]으로 루이필리프 1세는 왕위를 잃었다. 이후 장남인 파리 백작 필리프가 본가의 당주가 되어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였고, 그 장남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가 자식 없이 사망한 뒤 페르디낭 필리프의 차남 로베르의 아들이자 필리프의 사촌인 기즈 공작 장[* 후계자 앙리를 비롯한 1남 3녀를 두었다. 차녀 프랑수아즈는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의 막내아들 크리스토폴로스 왕자와 결혼했고, 3녀 안은 사보이아 왕가의 방계 가문인 아오스타 공작가의 3대 공작 [[아메데오 디 사보이아아오스타|아메데오]]와 결혼했다.]이 명목상의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 이후의 계보는 계속 아들로 이어져 기즈 공작 장의 증손자인 현 오를레앙 가문의 수장 장(1965~)으로 이어지고 있다. == 자녀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 '''1남''' || 파리 백작 필리프 왕자[br]{{{-2 (Prince Philippe, Count of Paris)}}} || [[1838년]] [[8월 24일]] || [[1894년]] [[9월 8일]] || 오를레앙의 마리 이자벨 공녀[br]슬하 4남 4녀[* [[아멜리 도를레앙|포르투갈의 왕비 아멜리아]], [[엘렌 도를레앙|아오스타 공작부인 엘레나]] 등] || || '''2남''' || 샤르트르 공작 로베르 왕자[br]{{{-2 (Prince Robert, Duke of Chartres)}}} || [[1840년]] [[11월 9일]] || [[1910년]] [[12월 5일]] || 오를레앙의 프랑수아즈 공녀[br]슬하 3남 2녀 ||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루이필리프 1세, version=350, paragraph=5)] [[분류:오를레앙 공작]][[분류:프랑스의 왕자]][[분류:오를레앙 가문]][[분류:1810년 출생]][[분류:1842년 사망]][[분류:팔레르모 출신 인물]][[분류:사고사한 인물]][[분류:태자]][[분류:드뢰 왕실 예배당 안장자]][[분류:즉위하지 못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