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토스카나 대공)] ||<-3>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br]{{{+1 페르디난도 3세}}}[br]Ferdinando III, Granduca di Toscana''' || ||<-3>{{{#!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Ritratto_di_Ferdinando_III_di_Toscana_di_Joseph_Dorffmeister_nel_1797.jpg|width=100%]]}}} || ||<|2> '''이름''' || 독일어 ||요제프 요한 밥티스트[br]Joseph Johann Baptist|| || 이탈리아어 ||페르디난도 주세페 조반니 바티스타[br]Ferdinando Giuseppe Giovanni Battista|| || '''출생''' ||<-2>[[1769년]] [[5월 6일]][br][[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 || '''사망''' ||<-2>[[1824년]] [[6월 18일]] (55세)[br][[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 ||<|3> '''재위''' ||<-2><#E7E7E7,#424242>[[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 || 1차 ||[[1790년]] [[7월 22일]] ~ [[1801년]] [[8월 3일]]|| || 2차 ||[[1814년]] [[4월 27일]] ~ [[1824년]] [[6월 18일]]|| ||<|2> '''배우자''' ||<-2>[[나폴리 왕국|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시칠리아]]의 루이사 공주[br],,(1790년 결혼 / 1802년 사망),,|| ||<-2>[[작센 왕국|작센]]의 마리아 페르디난다 공주 ,,(1821년 결혼),,|| || '''자녀''' ||<-2>[[레오폴도 2세]], 마리아 루이사, 마리아 테레사|| || '''아버지''' ||<-2>[[레오폴트 2세]]|| || '''어머니''' ||<-2>[[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 '''형제''' ||<-2>마리아 테레지아, [[프란츠 2세]], 마리아 안나, [[카를 루트비히|카를]], 알렉산더 레오폴트, 요제프, 마리아 클레멘티나, 안톤 빅토어, 마리아 아말리아, 요한, 라이너 요제프, 루트비히, 루돌프[* [[올로모우츠]] 대주교 겸 [[추기경]]이었으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제자로 유명하다.]|| [목차] [clearfix] == 개요 == 페르디난도 3세는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작위)|대공]]으로 [[합스부르크 가문]] 토스카나 방계의 시조이다. 토스카나 대공국을 빼앗긴 1803~1814년 사이에는 [[잘츠부르크]] [[선제후]][* 1803~1805]이자 [[뷔르츠부르크]]의 선제후[* 1805~1806] 및 대공[* 1806~1814]이었다. == 생애 == [[토스카나 대공국]]의 수도 [[피렌체]]에서 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가 되는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도와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맏형은 마지막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초대 [[오스트리아 제국]] [[카이저|황제]]인 [[프란츠 2세]]이며 동생으로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한 [[카를 루트비히]]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제자로 유명한 루돌프 등이 있다. 어린 시절 [[독일인]]-[[이탈리아인]] 가정교사들로부터 교육받았다. 부친이 큰아버지 [[요제프 2세]]의 뒤를 이어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고 [[합스부르크 제국]]을 물려받아 [[빈(오스트리아)|빈]]으로 가게되자 형 프란츠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차기 후계자로 내정되었고 차남이었던 그가 토스카나 대공국을 물려받았다. 1792년 [[프랑스 왕국|프랑스]]에서 [[프랑스 대혁명|혁명]]이 일어나자 혁명 정부를 처음으로 승인한 유럽의 군주가 되었으며, 프랑스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페르디난도 3세의 고모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전쟁]]이 일어나자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영국]]과 [[러시아 제국]]은 대 프랑스 동맹에 참여할 것을 압박했고 이에 마지못해 참여하기는 했으나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다. 1795년 3월 1일, 대 프랑스 동맹에서 제일 빨리 빠져나왔다.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으로 한동안 토스카나 대공국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나 피렌체에서 공화주의 정부가 들어서자 본가인 빈으로 도피했으며, 1801년 아란후에스 조약으로 토스카나 대공국을 포기할 것을 강요당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뤼네빌 조약]]으로 없애버린 [[파르마 공국]]에 대한 보상으로 [[에트루리아 왕국]]을 만들어 [[부르봉 왕조|부르봉-파르마 가문]]에게 주었고, 그는 보상으로 세속화된 잘츠부르크 선제후국을 받았다. 그러나 1805년 형 프란츠 2세가 나폴레옹에게 패전하고 [[브라티슬라바|프레스부르크]] 조약을 맺어 잘츠부르크도 포기할 것을 강요당했고, 결국 뷔르츠부르크로 옮겨갔다. [[나폴레옹의 몰락|나폴레옹이 몰락]]한 1814년에서야 [[토스카나 대공국]]으로 돌아갔다. == 가족 관계 == 1790년 [[나폴리]]에서 루이사 마리아(1773~1802)와 결혼했는데 루이사 마리아는 고모인 [[마리아 카롤리나]]와 외삼촌인 [[나폴리 왕국]] 및 [[시칠리아 왕국]] 국왕 [[페르디난도 1세|페르디난도 4세]]의 딸이었고 형수인 [[마리아 테레사(양시칠리아)|마리아 테레사 황후]]의 여동생이기도 하였다. 루이사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얻었는데 장녀 카롤리나 페르디난다(1793~1802)와 장남 프란체스코 레오폴도(1794~1800)는 어릴 때 사망했다. 토스카나 대공국을 이어받은 [[레오폴도 2세|레오폴도]]와 차녀 마리아 루이사(1798~1857), 3녀 마리아 테레사(1801~1855)만 성인으로 컸고, 마리아 테레사는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와 결혼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제노바 공작 페르디난도[* [[이탈리아 왕국]] [[움베르토 1세]]의 숙부이자 장인.]를 두었다. 마리아 루이사는 1802년 출산 중 합병증으로 사망했고, 1821년 5월 [[작센 왕국|작센]]의 마리아 페르디난다와 재혼했으나 자녀를 두지 못했다. [[분류:1769년 출생]][[분류:1824년 사망]][[분류:토스카나 대공]][[분류:오스트리아의 왕자]][[분류: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분류:피렌체 출신 인물]][[분류:산 로렌초 성당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