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82828 0%, #333333 20%, #333333 80%, #282828);" {{{#e0c9a5 '''파울 브라이트너의 역임 직책'''}}}}}} || || {{{#!folding ▼ ||<-5> '''{{{#fff FC 바이에른 뮌헨 역대 주장}}}''' || ||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 [br] (1979~1980) || {{{+1 →}}} || '''{{{#dd0129 파울 브라이트너[br](1980~1983)}}}''' || {{{+1 →}}} ||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br](1983~1984) ||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82828 0%, #333333 20%, #333333 80%, #282828);" {{{#e0c9a5 '''파울 브라이트너의 수상 이력'''}}}}}} || || {{{#!folding ▼ ||<-4> {{{#333333,#cccccc '''둘러보기 틀 모음'''}}} || ||<-4> {{{#333333,#cccccc '''베스트팀'''}}} || || [[월드 사커 올해의 팀|[[파일:월드사커 로고.png|height=55]]]][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ED1C35; font-size: 0.9em" [[월드 사커 올해의 팀|{{{#ffffff '''월드 사커 올해의 팀'''}}}]]}}} ||<-3>[[틀:월드사커올해의팀1972|1972]] · [[틀:월드사커올해의팀1974|1974]] · [[틀:월드사커올해의팀1975|1975]] · [[틀:월드사커올해의팀1976|1976]] || || [[Kicker 올해의 팀|[[파일:Kicker 로고.svg|height=45]]]][br]{{{#!wiki style="display: i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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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브라운슈바이크]]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하며 리그 30경기 10골을 득점하며 브라운슈바이크의 에이스로 활약했고 시즌 후에 다시 친정팀 바이에른 뮌헨으로 돌아온다. === [[FC 바이에른 뮌헨]] 2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cbhippo_xtralargesixteentonine.jpg|width=100%]]}}} || 바이에른 뮌헨에서 주전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한 브라이트너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함께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며 내리막을 걷던 바이에른 뮌헨을 다시 일으켰다. 복귀 후 첫 시즌부터 12골을 기록했고, 대부분 10골을 넘기는 중앙 미드필더로서 경이적인 득점력을 보유한 브라이트너는 중원을 지배하며 1979-80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안겨주었으며, 1980-81 시즌에 리그 17골을 득점하며 [[분데스리가]] 2연패에 공헌했다. 이때의 활약으로 [[1981년]]에 IOC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 유니세프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UEFA 올해의 선수의 전신.]와 서독 올해의 축구 선수에 선정되고 [[발롱도르]] 2위에 오른다. 1981-82 시즌에는 리그 18골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를 경신했으며, [[DFB-포칼]]에서 우승컵을 차지한다. [[UEFA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언컵]]에서도 맹활약, 브라이트너는 4강 CASK 소피아와의 대결에서 1차전에는 1골, 2차전에는 2골을 넣으며 총합 7:4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아스톤 빌라 FC|아스톤 빌라]]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이 후에는 계속되는 부진한 성적과 또 부상이 계속 재발하며 본인도 더 뛸수 있었지만 [[1983년]]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 국가대표 경력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aul-breitner-1.jpg|width=100%]]}}} || 소속팀에서의 활약으로 바로 [[헬무트 쇤]] 감독의 콜업을 받았고 최초의 메이저 대회 데뷔였던 [[UEFA 유로 1972|유로 1972]]에 출전했는데, 레프트백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굳건히 해냈던 브라이트너는 물론이고 특히 골잡이 [[게르트 뮐러]]의 득점력과 [[프란츠 베켄바워]]의 경기 조율로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벨기에]]와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소련]]을 꺾으며 우승을 차지한다. 본인은 토너먼트의 팀에 이름을 올린다. [[1974 FIFA 월드컵 서독|1974 서독 월드컵]]에서도 역시 주전자리를 차지했다. 1차 조별 리그(16강)에서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오스트레일리아]]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사라진 팀#s-2|동독]],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칠레]]가 한 조가 되었는데, 동독에게 패배를 당하며 2승 1패 조 1위로 2차 조별 리그(8강)에 올라가게 된다. 브라이트너는 칠레전에서 전반 18분에 30m가 넘는 거리에서 중거리 슛으로 결승골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이것이 이 경기에서 서독이 기록한 단 두 개의 유효슛 중 하나였다. 희대의 수비수 [[엘리아스 피게로아]]가 버티고 있는 칠레 수비진은 이 날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기 때문에, 만약 브라이트너가 골을 터뜨리지 않았다면 서독은 약체 칠레를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할 뻔했다. 서독이 각성하며 3전 전승을 해내고 브라이트너도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전에서 다시 한번 멋있는 중거리슛으로 골을 만들어낸다. 결승은 당시 돌풍이었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네덜란드]]와의 경기였다. 서로 둘다 [[토탈 풋볼]]과 리베로 시스템이라는 획기적인 전술을 들고 싸웠고 명경기를 만들어낸다. 휘슬이 불리고 1분 만에 [[요한 크루이프|크루이프]]는 [[페널티킥]]을 유도해내고, [[요한 네스켄스]]가 성공하며 한 점을 뒤지고 시작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3S3-ZSrNQI)]}}} || 그래도 서독은 힘을 내었고 [[페널티킥]] 찬스가 왔다. 브라이트너는 침착하게 성공시켜 동점을 만든다. [[베르티 포크츠]]는 [[요한 크루이프]]에게 초반 [[페널티킥]]을 내준 것 이외에는 크루이프를 마크하는 역할을 똑똑히 해냈고 크루이프는 그에게 고전한다. 또 전반 43분에는 [[게르트 뮐러]]가 터닝슛으로 마무리했고 이는 결승골이 되었고,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어 우승을 차지한다. 참고로 브라이트너는 레프트백으로 무려 7경기 3골을 넣었는데, [[UEFA 유로 1972|유로 1972]]보다 빛나는 활약을 한 브라이트너는 올스타팀에 선정된다. 이후 브라이트너는 오랫동안 대표팀 소집을 받지 못하다가[* 당시 유럽 축구 강국들의 국가대표팀 운영 방침은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자국 리그 선수가 아니면 뽑질 않았는데, 브라이트너의 레알 이적으로 인해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가대표와의 연을 끊게 된다. 브라이트너는 이후에도 이때의 이적과 국가대표 은퇴를 개인적인 결정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당시 서독 대표팀 감독이었던 [[유프 데어발]] 감독은 브라이트너의 대표팀 복귀를 유도하였고 브라이트너는 1975년 10월 그리스와의 [[UEFA 유로 1976|유로 1976]] 예선 경기 이후 거의 6년 만인 1981년 4월 오스트리아와의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1982 스페인 월드컵]] 예선 경기 국가대표팀에 복귀한다. 이미 포지션을 중앙 미드필더로 바뀐 뒤였고 서독은 베른트 푀르스터, [[피에르 리트바르스키]], [[울리 슈틸리케]], [[호르스트 흐루베슈]], 또 역시 공격에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듀오를 형성한다.[* 브라이트너와 루메니게의 조합을 '''브라이트니게'''라고 불렀다.] 서독은 [[알제리 축구 국가대표팀|알제리]],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오스트리아]],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칠레]]를 상대로 2승 1패 조 1위로 1차 조별 리그(24강)를 통과한다.[* 여담으로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는 [[히혼의 수치]]로 불리는 승부조작을 했는데, 서독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1골을 넣으며 오스트리아와 서독이 알제리와 승점은 같지만 골득실이 앞서는 상황이 되어 그 둘은 서로 공격을 안하고 볼을 돌리다 게임이 끝난다. 이 사건으로 인해 [[UEFA 유로 1984|유로 1984]]부터는 조별 예선의 마지막 경기는 동시에 진행 되었다.] 이때 서독의 몇몇 선수들은 부상에 시달리며 고생했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2차 조별 리그(12강)에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와는 비기고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에게 2:1로 승리하며 4강에 오른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file2.instiz.net/6e5fa935a4650e005eaf1606400e5bd2.jpg|width=100%]]}}} || || '''1982 스페인 월드컵 서독 vs 프랑스의 서독팀 선발멤버''' || 4강에서는 [[미셸 플라티니]]의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를 상대로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고 [[하랄트 슈마허]]의 선방으로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며 결승에 오른다. 결승 상대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파올로 로시]]가 이변을 일으키며 기세가 상당히 좋았고 서독은 그에 비해 안정적이였으나, 후반에 들어가면서 강력한 모습을 잃어갔다. 때문에 사람들의 예상은 이탈리아였다. 그리고 그에 맞게 이탈리아의 [[파올로 로시]]가 선제골, 뒤이어 [[마르코 타르델리]], [[알레산드로 알토벨리]]가 연속골을 넣었다. 브라이트너는 후반에 만회골을 넣지만 때는 너무 늦었고 이미 굳게 걸어잠군 골문은 열리지 않는다. 결국 3-1로 패배. 아쉬운 준우승이지만 브라이트너는 두 번의 월드컵 결승전에서 모두 골을 넣은 몇 안되는 선수가 되었다. == 플레이 스타일 == 브라이트너는 [[루드 굴리트]], [[요한 네스켄스]] 등과 함께 축구사에서 가장 완벽했던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뽑힌다. 사실 그의 주포지션은 레프트백과 중앙 미드필더. 선수 시절 초창기에는 레프트백으로 활약했다. 완고한 수비력에 그보다 더 빛났던 오버래핑. 기본기가 정말 뛰어났기 때문에 스피드와 드리블로 그가 돌파하면 막기 쉽지 않았다. 더 무서웠던것은 그의 킥 능력인데 정확한 킥을 구사하던 레프트백이니 세트피스 상황이나 페널티킥도 직접 찼고 중거리 슛 능력이 어마무시했다. 뚝 떨어지는 중거리 슛으로는 수도 없이 득점해냈다. 이런 완벽한 선수는 역시 수비에 쳐박아두기 아까운게 보였는지 중미로 포지션을 바꾸고 나서는 마음껏 자신의 역량을 발휘했다. 미친 활동량으로 존재감을 뽐내며 중원을 장악하고 직접 볼을 뿌리며 경기조율에도 힘쓰며 레프트백 시절보다 필드골을 더 많이 넣을 기회가 찾아오니 3경기당 1골이라는 무서운 스코어링도 보여줬다. 브라이트너의 영향력은 루메니게에게도 미쳤다. 브라이트너가 없었을 때의 루메니게는 경기력부터가 차이가 났고 스탯역시 차이가 심했다. 또 이를 증명하는 것은 키커 랑리스테인데 루메니게가 WK[* 월드클래스: 키커에서 직접 뽑은 선수 개인별 최고 등급.]를 받을 때마다 그도 역시 계속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은퇴 역시 부상때문에 한것인데 사실 본인도 충분히 회복하면 폼유지가 능할것 같았다. 시즌 후반을 다 날려먹고도 WK 다음 등급인 IK를 받을 정도니 말이다. 잊지 말자. 루메니게의 괴물같은 모습의 움직이는 다리는 그였다는 것을. == 은퇴 후 == 1998년 [[베르티 포크츠]]에 이어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 물망이 올랐고 실제로 발표가 이뤄졌으나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임명이 취소되었다. 은퇴 후에는 신문에서 축구 칼럼리스트와 TV해설가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07년 [[바이에른 뮌헨)]의 기술고문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2017년까지 친정팀 바이에른 뮌헨에서 매니저로 활약했다. 2018년 그는 [[울리 회네스]]의 지난 긴급 기자회견을 맹비난 하며 VIP 명예회원권 2장을 반납해버렸다. 그는 인터뷰에서 "그동안 바이에른과 48년간 함께 했는데 이 구단이 밑바닥과 약점을 한 번에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라며 매우 강도높게 비판했다. 사실 회네스와 브라이트너의 갈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이번 일로 둘의 관계가 완전히 끝장나게 된 것. 이에 프란츠 베켄바워는 그 둘이 화해하길 바라며 필요하다면 자신이 기꺼이 둘의 화해를 돕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https://www.bild.de/sport/fussball/fussball/hoeness-gegen-breitner-franz-beckenbauer-rauft-euch-bitte-zusammen-58686136.bild.html|#]] == 기록 == === 대회 기록 === * [[FC 바이에른 뮌헨]] (1970~1974, 1978~1983) * [[분데스리가]]: 1971-72, 1972-73, 1973-74, 1979-80, 1980-81 * [[DFB-포칼]]: 1970-71, 1981-82 * [[UEFA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언컵]]: 1973-74 * [[레알 마드리드 CF]] (1974~1977) * [[라리가]]: 1974-75, 1975-76 * [[코파 델 레이]]: 1974-75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74 *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1972 === 개인 수상 === * [[발롱도르]] 2위: 1981 * [[발롱도르 드림팀]] 3군[* LB 3위.]: 2020 * IOC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 1980-81 * [[FIFA 100]]: 2004 * [[FIFA 월드컵]] 올타임팀: 1994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72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1981 * 키커 올해의 미드필더: 1978-79, 1980-81, 1981-82 * [[Kicker 올해의 팀|키커 올해의 팀]]: 1971-72, 1972-73, 1978-79, 1979-80, 1980-81, 1981-82, 1982-83 * 독일 이달의 골: 1981년 5월, 1983년 3월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72, 1974, 1975, 1976 * [[옹즈 드 옹즈]]: 1981 * 바이에른 뮌헨 올타임 XI: 2005, 2017 *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 * 독일 축구 명예의 전당: 2018 * IFFHS 올타임 독일 드림팀: 2021 === 수훈 === * München leuchtet in Gold: 2022 === 출전 기록 === ||<|2> 시즌 ||<|2> 클럽 ||<|2> 소속리그 ||<-2> 리그 || || 경기 || 득점 || || 1970/71 || FC 바이에른 뮌헨 || 분데스리가 || 21 || 2 || || 1971/72 || FC 바이에른 뮌헨 || 분데스리가 || 30 || 4 || || 1972/73 || FC 바이에른 뮌헨 || 분데스리가 || 32 || 4 || || 1973/74 || FC 바이에른 뮌헨 || 분데스리가 || 26 || 7 || || 1974/75 || 레알 마드리드 CF || 라리가 || 29 || 3 || || 1975/76 || 레알 마드리드 CF || 라리가 || 25 || 6 || || 1976/77 || 레알 마드리드 CF || 라리가 || 30 || 1 || || 1977/78 ||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 분데스리가 || 30 || 10 || || 1978/79 || FC 바이에른 뮌헨 || 분데스리가 || 33 || 12 || || 1979/80 || FC 바이에른 뮌헨 || 분데스리가 || 32 || 10 || || 1980/81 || FC 바이에른 뮌헨 || 분데스리가 || 30 || 17 || || 1981/82 || FC 바이에른 뮌헨 || 분데스리가 || 29 || 18 || || 1981/83 || FC 바이에른 뮌헨 || 분데스리가 || 22 || 9 || == 여담 == [[파일:external/s.libertaddigital.com/breitner-comunista.jpg]] 1970년대 초중반에 활약한 서독 레전드들 그 중에서도 바이에른 뮌헨 레전드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지만 모든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괴수급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 서독에서는 5번의 리그 우승과 1번의 포칼 우승, 그리고 1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라리가에서도 2번의 리그 우승과 1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을 기록했다. 거기다 국가대표로서도 1번의 유로 우승과 1번 씩의 월드컵 우승과 준우승을 경험한 완벽에 가까운 커리어를 가진 선수. 그가 메이저 대회에 대뷔한 [[유로 1972]]나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그의 얼굴을 보면 도무지 한국 나이로 22살, 24살의 얼굴이 아니다. 강렬한 아프로 머리와 호쾌한 수염. 이런 범상치 않은 외모에 맞게 성격도 상당히 화끈했는데, 기득권 층에 엄청난 반감을 보였고 좋아하는 책이 뭐내고 물어보면 '마오쩌둥 어록!' 이라고 조건반사적으로 말했고, 체 게바라의 엄청난 팬이었으며, 레닌과 마르크스의 책을 끼고 다녔다고 한다. 심지어 마오쩌뚱 포스터 앞에서 북경주보를 읽는 엄청난 패기까지... 이것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가 영입을 매우 고심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상기 시키지만 이 사람 1970년대 선수고, 1970년대의 중국은 [[문화대혁명]] 시기이며 브라이트너는 냉전의 가장 치열한 경계선이었던 서독인이다(...).[* [[문화대혁명]]과 [[마오쩌둥]]을 숭배하다니 황당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당시 대나무 장막으로 가려져 있어 문화대혁명의 진상이 드러나지 않아 마오쩌둥의 위상은 현대의 [[체 게바라]]와 비슷했다. 아니 체 게바라는 실패한 혁명가이고 그의 과오나 결함이 당시에도 많이 알려졌기에 성공한 혁명가였고 과오가 가려져 있던 마오쩌둥의 위상이 더 높았다.] 이런 직설적인 성격은 대표팀 생활에서도 어디 안가서 대표팀 핵심선수들과도 상당히 껄끄러웠다고 한다. 카더라 통신이긴 하지만 베켄바워에게 '독재자'라고 비난을 했다고 할 정도이니... 지금도 지금이지만 베켄바워의 영향력은 현역시절에도 어마어마했다. 오죽하면 센티미터 단위로 패스를 조절한다고 하는 당대 최고의 패스 마스터이자 플레이메이커로 꼽히던 [[귄터 네처]]가 베켄바워와의 파워게임에서 져서 1974년 월드컵에서 제대로 출전하지 못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는데 그런 베켄바워에게 독재자라고 대놓고 말할 정도였으니 성깔이 대단한 건 맞다. 물론 베켄바워는 냉정하게 손익을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느냐 마느냐가 살생부의 첩경이긴 하다. 또한 [[차범근]]이 존경을 표했던 선수 중 하나다. 차범근은 스스로를 평가하기를 '조금만 더 올라갈 수 있었으면, 같은 시대를 보낸 루메니게나 브라이트너의 경지에 올라가지 못한 것이 아쉽다.'라고 평가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나도 발롱도르 1, 2위급 선수가 된다고 표현하는 차붐의 패기~~ [[파일:attachment/파울 브라이트너/Paul_Breitner_Lars_Ricken_Wembley_2013.jpg]] 2012-13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앰버서더에 선정되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결승전 오프닝 세레머니때 도르트문트의 레전드 [[라르스 리켄]]과 갑옷을 입고 빅이어를 들고 나오기도 했다. ~~표정은 마치 "내가 이 나이에 이런 짓을 해야 하나?" 같다.~~[* 물론 영상으로 보면 굉장히 멋있다. 노년간지의 정석.] 독특한 성격과 더불어 사고도 꽤 많이 쳤는데, 현 바이에른 뮌헨 [[울리 회네스]] 회장과 군복무를 피하려 도망 다니다가 걸려서 데뷔도 못하고 주말에 청소를 하기도 했다. 또 우승이후 수영장에서 나체로 환호하다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또 1976년에는 감자튀김(Potato Fritz)이라는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뮌헨과 DFB, 자본주의 위주의 서독에 불만이 많았는지 위의 나체논란이 일자 뮌헨을 환호도 못하는 똥같은 클럽이라고 하거나 DFB가 변화해야 한다는 등 공격적인 언행을 자주 하기도 했다. [[울리 회네스]]와는 [[레알 마드리드 CF]] 이적 시에도 유일한 친구라고 할 정도로 친한 사이고 젊은 시절 같은 층에서 살았다고 한다. [[귄터 네처]]와도 레알 마드리드 이적 후 친구가 되었다. 뮌헨으로 돌아온 후에는 반성도 많이하고 철이 들었는지 DFB에 대한 비판을 철회하기도 했다.[* 그런데 뮌헨으로 이적 전 브라운슈바이크에서는 동료들을 아마추어 같다고 깠다.] 그러나 1982년 월드컵 결승에서 팀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당하며 이후로는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했다. 데뷔 직전까지는 풀백에서 뛰어본 경험도 없었다고 한다. [[우도 라테크]] 감독이 풀백에서 뛰라고 하자 뛰었더니 그대로 풀백에서 뛰게 되었다고 한다.[[http://www.espn.com/soccer/columns/story/_/id/1177690/the-mavericks:-paul-breitner|ESPN 기사]] [[파일:시대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jpg|width=100%]]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5인을 선정했는데, 1970년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5위에 이름을 올렸다. [youtube(SFICcCBXEoY, start=210)] 1981년에 브라질 국가대표팀과 경기를 치루었는데, 이 경기에서 페널티킥 2연속 실축이라는 흑역사를 생성했다. [[분류:1951년 출생]][[분류:1970년 데뷔]][[분류:1983년 은퇴]][[분류:콜버모어 출신 인물]][[분류:독일의 축구선수]][[분류:수비수]][[분류:미드필더]][[분류:FC 바이에른 뮌헨/은퇴, 이적]][[분류:레알 마드리드 CF/은퇴, 이적]][[분류: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은퇴, 이적]][[분류:독일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74 FIFA 월드컵 서독 참가 선수]][[분류: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참가 선수]][[분류:독일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참가 선수]][[분류:UEFA 유로 1972 참가 선수]][[분류:FIFA 월드컵 우승 선수]][[분류:FIFA 월드컵 결승전 득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