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6>|| ||<-6>|| ||<-6><:>{{{#ffffff {{{+4 '''Trakai'''}}}[br]트라카이 }}}|| ||<-1><:>{{{#FFFFFF '''국가'''}}}||<-5>[[리투아니아]]|| ||<-1><:>{{{#FFFFFF '''주'''}}}||<-5>[[빌뉴스 주]]|| ||<-1><:>{{{#FFFFFF '''면적'''}}}||<-5>497.1km²|| ||<-1><:>{{{#FFFFFF '''인구'''}}}||<-5>4,141명[* 통계인구, 2020년 기준.]|| ||<-1><:>{{{#FFFFFF '''시간대'''}}}||<-4>UTC+02:00([[서머타임]] 적용)|| ||<-6>{{{#!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Trakai,너비=100%,높이=300px)]}}}|| [목차] [clearfix] == 개요 == 트라카이는 오늘날에는 5천여 명 남짓 거주하는 조그만 소도시이지만 서기 14세기 문헌에부터 꾸준히 언급될 만큼 역사적으로는 중요한 도시였다. 호수들 사이에 건설된 요새로서 방어에 특화된 위치였기 때문이다. 특히 [[크림 반도]]의 [[카라임 유대인]]들의 사업 기지가 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카라임 유대인들이 유의미한 수준으로 거주하지는 않으며 도시 인구 대부분은 [[리투아니아인]](시 인구의 66.5%)과 [[폴란드인]](19%)이다. == 언어별 표기 == || [[리투아니아어]] || Trakai || || [[폴란드어]] || Troki(트로키) || || [[독일어]] || Tracken/Traken(트라켄) || || [[벨라루스어]] || Трака́й/Trakáj(트라카이) || == 역사 == [[파일:5D0BEF15-E52F-4BD4-BED7-4231D1877F8B.jpg]] * 트라카이 요새 리투아니아 구전 전승에 따르면 13세기 [[게디미나스]] 대공이 이 지역에 요새를 건설했다고 하며 [[튜튼 기사단]]의 연대기에는 14세기부터 트라켄이라는 지명이 직접 언급되기 시작한다. 게디미나스 대공이 [[빌뉴스]]에 자리잡으면서 트라카이 요새는 그의 아들 중 하나인 케스투티스에게 물려주는데 케스투티스는 이 요새를 거점 삼아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사모기티아 지방을 방어해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동군 연합과 이후 사모기티아와 트라카이 요새를 위협하던 튜튼 기사단이 몰락하면서 트라카이에도 성당이 들어서고 1409년부로 도시는 [[마그데부르크]] 법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1413년에는 도시 내 주교구가 따로 설치될 정도로 인구가 증가하였다. 1410년 비타우타스 대공은 [[그룬발트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을 궤멸시킨 것을 기념하여 트라카이 성 내에서 7일 동안 축제를 벌였다 한다. 1397년 [[비타우타스 대공]]은 크림 반도에서 노예 무역을 하던 [[카라임 유대인]] 일부를 리투아니아로 초청하였는데 카라임 유대인들은 여기에 호응하여 빌뉴스와 트라카이에 상당수가 정착하였다. 다른 유대인들보다 덜 차별받고 훨씬 더 부유한 편이었던 카라임 유대인들은 말을 타고 다니며 리투아니아와 크림 반도 사이를 왕래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토크타미쉬 칸]]이 귀순할 때 함께 온 [[타타르인]] 일부가 비타우타스의 호위병으로 발탁되어 트라카이 성에 정착하였다. 오늘날 트라카이에서 성으로 올라가는 언덕 길에는 단색으로 칠한 통나무 집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 집들은 타타르 방식으로 지어진 집이라 한다. [[립카 타타르]]인들이 먹던 키비나스([[엠파나다]] 닮은 요리, [[삼사#s-9]]를 모방한 것으로 추정)라는 요리도 지역 특산품이다. [[파일:E810B0FF-B869-42F5-9976-97C60C73B065.jpg]] 1569년 [[루블린 조약]] 이후 트라카이는 과거와 같은 정치적인 중요성을 잃고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트라카이 요새는 유지되었지만 트라카이 시는 [[빌뉴스]], [[크라쿠프]] 같은 다른 도시에 밀려 조금씩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1477년 [[카지미에시 4세]]가 베네치아 사절을 트라카이에서 맞이하는 이벤트도 벌어졌지만, 이후 트라카이는 정치적으로 몰락한 왕족이나 귀족들을 밀어넣는 사실상의 유배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17세기 중반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사이의 전쟁에서 트라카이 시내가 철저하게 약탈당하면서 명맥만 유지하던 도시로서의 기능도 마비되고 말았다. 18세기 초에는 대북방전쟁의 여파로 트라카이 일대가 가뭄과 역병에 시달리면서 도시는 결정타를 맞았다. 1795년 [[폴란드 분할]] 이후 트라카이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1차 대전]] 와중에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무너지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독립하는 와중에 폴란드가 트라카이를 장악하고 폴란드야말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계승한다는 프로파간다를 위해 10여년에 걸쳐 공을 들여 트라카이 요새를 재건하였다. == 현대 == [[2차 대전]] 초반부 폴란드 동부를 공격한 소련군들이 이 지역을 잠시 장악하였으나, 이후 나치 독일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트라카이를 점령한다.[* 이 과정에서 트라카이 인근에 거주하던 유대인 5,000여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치 독일 패망 이후 소련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의 국경을 리투아니아 쪽으로 유리하게 재조정하면서 트라카이 시는 [[리투아니아 SSR]]의 영토가 되고 폴란드인 주민 상당수는 다시 폴란드로 이주하게 되었다. 트라카이를 접수한 리투아니아 측에서도 1961년부터 90년대 초까지 정치적, 역사적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중세 트라카이 요새를 복원 및 개축 공사를 진행했다 한다. 중세 시대 튜튼 기사단을 막아내고 20세기 내내 복원되던 트라카이 요새는 오늘날 트라카이 시의 랜드마크로 기능하고 있다. 트라카이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와 차로 30~40분 정도 되는 거리이다보니, 빌뉴스를 방문하는 배낭여행객들이 자주 방문하는 코스이기도 하다. 빌뉴스에서 열기구를 타고 트라카이 성을 둘러보는 코스도 있고, 트라카이 구시가지의 오두막집들을 둘러보며 전통 음식을 먹는 투어 코스도 있다. [[파일:키비나이.jpg|width=400]] 상술한대로 지역 특산물로 키비나스 혹은 키비나이(Kibinai)라고 불리는 음식이 있다. 키비나이 자체는 리투아니아 전역에서 먹는 음식이긴 한데, 트라카이가 키비나이의 원조로 알려지면서 관광 상품화된 것. [[비타우타스 대공]]과 [[토크타미쉬 칸]]을 따라 트라카이에 정착한 타타르족 호위병들이 먹던 중앙아시아식 페스트리 고기 파이[* 대표적으로 우즈베키스탄 요리 중 [[삼사#s-9|삼사]](Samsa)가 있다.]에서 유래한 음식으로 추정되며 안에 양고기와 양파가 들어간다. 물론 트라카이는 [[카라임 유대인]] 상인들의 무역소가 있었던 만큼, 카라임 유대인들이 들여온 조리법이 기원이라는 설도 있다. [[파일:0FD00F27-7D77-436F-B0C1-7FB85BB45EA1.jpg]] [[파일:85FE88F4-20F3-477F-8F58-FE4B3A330C58.jpg]] 종종 지역 주민들이 비타우타스 대공과 토크타미쉬 칸을 기리는 행사를 하면서 미녀들한테 립카 타타르 전통 의상 코스프레를 입히고 사진을 찍는 등 지역 전통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오늘날 트라카이 주민들도 조상 중에 립카 타타르인이 있는 경우가 꽤 있기 때문에 이런 행사도 가능한 듯. [[분류:리투아니아의 도시]][[분류:옛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