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초나라의 영윤]][[분류:춘추전국시대의 공족]] [include(틀:초(춘추전국시대)의 영윤)] [include(틀:초나라의 왕족)] |||||| {{{#ece5b6 '''{{{+1 자문[br]子文}}}'''}}}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투누오도.jpg|width=400]]}}} || |||| '''[[직위|{{{#ece5b6 최종직위}}}]]''' || 영윤(令尹) || |||| '''[[성씨|{{{#ece5b6 성}}}]]''' || 미(羋) || |||| '''[[본관|{{{#ece5b6 씨}}}]]''' || 투(鬪) || |||| '''[[이름|{{{#ece5b6 명}}}]]''' || 누오도(穀於菟)[* 穀는 㝅의 통가자이다.] || |||| '''[[자(이름)|{{{#ece5b6 자}}}]]''' || 자문(子文) || |||| '''{{{#ece5b6 아버지}}}''' || [[투백비]](鬪伯比) || || '''{{{#ece5b6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5월 5일 ~기원전 ???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초(춘추전국시대)|초(楚)나라]]의 명재상. [[투백비]](鬪伯比)의 아들. [[성득신]]의 종형제. 자는 자문(子文).[* 그리하여 '투자문'이라고도 불리며, 《[[열국지]]》에서 [[초성왕]](楚成王)이 이름 대신 자로 부르라고 할 때부터 '자문'이라고만 나온다.] [[초성왕]](楚成王) 대에 영윤(令尹)[* [[상국]]에 해당하는 초나라의 관직이다.]을 지냈는데, 성왕 대의 초나라의 강성함은 투누오도의 공헌이 컸다. 제 환공에게 [[관이오|관중]](管仲)이, 초 장왕에게 손숙오가 있었다면 초 성왕에겐 투누오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생애 == === 비범한 출생 === 모년[* 투누오도가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 없어서 이렇게 표기한다.] 5월 5일 초나라 주위의 소국인 [[운#s-3|운(鄖)나라]] 여자와 [[투백비]]가 사통하여, 그를 낳았다. 투백비는 투누오도를 버렸는데, 투누오도는 호랑이의 젖을 먹으며 자랐다고 한다. 이에 투백비는 투누오도를 기이하게 여기고 그를 길렀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이 투누오도가 되었다. 穀은 초나라에서는 㝅(젖 누)와 통하니 '누'로 읽으며, 於는 사람 이름으로 쓸 때는 어가 아닌 '오'로 읽고, 菟는 호랑이라는 뜻이니 '도'라고 읽는다. 그래서 투곡어도 혹은 투곡어토가 아니라 '투누오도'라고 읽는 것이다. 애초에 투누오도의 이름 자체가 [[중국어]]가 아니라,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에서 널리 쓰이던 [[몽몐어족|원시 몽몐어]]로 된 이름이라고 추정되는데, '오도'가 몽몐어족 계통 언어로 [[호랑이]]를 뜻하는 말이다. === 그 뒤의 생애 === 초성왕 초기에 자윤이 반란을 일으켜 투반(鬪般)[* 투누오도의 아들이다. 투반의 아들 투극황(鬪克黃)은 [[투월초]]의 반란이 진압되고 투씨 일족이 멸족되는 와중에 홀로 항복하여 투씨 가문을 이어나갔다.]을 죽였다. 초 성왕 8년(기원전 664년) 성왕이 자윤을 물리친 공을 기려 영윤으로 봉했다. 그리하여 초나라의 국력이 커져 국가가 안정되고 중원의 패권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초 성왕 17년(기원전 655년) 현(弦)나라, 초 성왕 24년(기원전 648년) 황(黃)나라, 초 성왕 25년(기원전 647년) 영나라를 멸망시키고 채나라, 수나라, 서나라, 강나라를 압박해 남방의 패자가 되었다. 그리고 투누어도는 늙어 성득신을 영윤으로 추천한 후 은퇴했다고 한다. 그리고 [[투월초]]의 사악함을 일찍이 알아보고 투씨 가문의 멸망의 원인이 될거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늑대와 같은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