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이피로스 친왕국 군주)] ||<-2> '''{{{#white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10대 데스포티스[br]{{{+1 Тома Прељубовић | 토마 프렐류보비치 }}}}}}''' || || '''{{{#white 칭호}}}''' ||데스포티스 || || '''{{{#white 생몰년도}}}''' ||? ~ [[1384년]] 12월 23일 || || '''{{{#white 재위기간}}}''' ||[[1367년]] ~ [[1384년]] 12월 23일 || || '''{{{#white 성}}}''' ||프렐류보비치 || || '''{{{#white 휘}}}''' ||토마 프렐류보비치(Тома Прељубовић)[br]토마스 콤니노스 팔레올로고스(Θωμάς Κομνηνός Παλαιολόγος)|| || '''{{{#white 아버지}}}''' ||그레고리오스 프렐류브 || || '''{{{#white 어머니}}}''' ||이리나 || || '''{{{#white 배우자}}}''' ||[[마리아 앙겔리나]] || || '''{{{#white 자녀}}}''' ||이리나 프렐류보비치 || || '''{{{#white 종교}}}''' ||[[정교회]] || [목차] [clearfix] == 개요 ==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제10대 [[데스포티스]]. == 생애 == [[세르비아 제국]]의 [[테살리아]] [[총독]] 그레고리오스 프렐류브와 [[스테판 두샨]]과 불가리아의 헬레나의 딸 이리니 사이에서 출생했다. 부친 프렐류브는 세르비아의 영토 확장에 큰 기여를 하여 스테판 두샨으로부터 "무용, 용기, 그리고 경험 면에서 최고의 인물"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355년]] 말 또는 [[1356년]] 초 알바니아 부족과의 전쟁 도중 전사했다. 이후 어머니 이리니에 의해 테살리아 신임 총독으로 선임되었지만, [[1356년]]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가 테살리아로 쳐들어오자 세르비아로 도주해야 했다. 이리니는 보데나의 통치자인 라도슬라프 흐라펜과 결혼했고, 그는 라도슬라프의 의붓아들이 되었다. [[1359년]] 니키포로스 2세가 알바니아군을 상대로 아이톨리아의 아켈로오스 전투를 치르다 전사했다. 이에 [[시메온 우로시]]가 테살리아로 재빨리 진격해 그곳의 귀족들로부터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이후 이피로스로 진격해 알바니아군의 침략에 직면한 몇몇 도시로부터 데스포티스로 인정받았다. 라도슬라프는 시메온이 이피로스로 간 틈을 타 의붓아들인 토마 프렐류보비치를 대신하여 테살리아를 침략하려 했다. 시메온은 카스토리아를 라도슬라프에게 넘기고 딸 [[마리아 앙겔리나]]를 토마와 결혼시키는 것으로 그를 달랬다. 그 대신 라도슬라프는 시메온의 종주권을 일정 부분 인정했다. 1366년, 시메온은 이피로스의 마지막 소유지였던 북부 요안니나를 사위인 토마에게 줬다. 그는 [[1366년]] 또는 [[1367년]]에 요안니나에 도착한 뒤 그곳의 통치자로서 활동했다. 그는 요안니나 교회 재산을 빼앗아 세르비아 출신 [[신하]]들에게 나눠줬고 지역 귀족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1382년]] [[요안니스 5세]] 황제를 대신하여 요안니나 [[대주교]]로 임명된 마테오스가 그에게 [[데스포티스]] 칭호를 부여했다. 그러나 토마는 나중에 교회 재산 몰수 문제로 마테오스와 다투다가 요안니나에서 추방했다. 그는 교회 재산을 몰수하는 것 외에도 생선과 과일을 포함한 여러 생필품에 세금을 매겼다. 이렇게 해서 재정을 확보하여 군대를 육성시킨 뒤, 아르타와 앙겔로카스트론의 알바니아 부족과 전쟁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하지만 알바니아인들의 만만치 않은 저항 때문에 쉽사리 승기를 잡지 못하자, 1370년 알바니아의 지도자 중 한 명인 페터르 로샤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킴으로써 갈등을 종식시켰다. [[1374년]] 페터르 로샤가 아르타에서 [[역병]]으로 사망한 뒤, 그존 슈파타가 이끄는 부족들이 아르타를 장악한 뒤 요안니나를 포위 공격하면서, 주변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토마는 [[1375년]] 여동생 헬레나를 그존과 약혼시킴으로써 달래야 했다. 하지만 또다른 부족장 말라카시오이가 요안니나를 침략했고, 그들을 가까스로 격퇴한 직후인 [[1379년]] 5월 그존이 평화 협약을 위반하고 요안니나의 [[시골]] 지역을 약탈했다. 결국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토마는 서방 국가들과 [[오스만 베이국]]에 구원을 청했다. 서방 국가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지만, 오스만 베이국은 [[1381년]] 지원병을 파견했다. 토마는 이 [[투르크]] 전사들을 활용하여 [[1381년]]부터 [[1384년]]까지 알바니아 부족들을 공격하여 많은 요새를 공략하고 수천 명에 달하는 알바니아인들을 학살했다. 이로 인해 그는 '알바니아 도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384년]] 12월 23일, 토마는 호위병들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마리아 앙겔리나]]가 바실리사([[여황제]])를 자칭했다가, 1385년 2월 [[에사우 부온델몬티]]와 재혼하여 그에게 군주의 자리를 넘겼다. [[분류:세르비아계 그리스인]][[분류:이피로스 전제군주국 군주]][[분류:1384년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