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토론토)] [목차] [clearfix] == 개요 == [[토론토]]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이다. 북아메리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뉴욕|요크]], [[런던(캐나다)|런던]] 등 영국식 지명과 비교해 상당히 이질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데, 토론토의 역사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깊은 관계를 알면 이해가 될 것이다. == 연혁 == === 17세기 유럽인의 도래 === 본격적인 토론토의 역사는 [[17세기]]부터 시작되지만, 사실 이전부터 토론토를 비롯한 온타리오 남부 지역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의 지명인 토론토 역시 [[아메리카 원주민]] 토착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장 유력한 어원은 [[이로쿼이 연맹]]의 [[모호크]] 족 어휘 '트카론토(Tkaronto)'이다. 트카론토는 '물 속에 서 있는 나무'(Trees standing in the water)라는 뜻으로, 오늘날 토론토 북부의 쿠치칭 호(Lake Couchiching)와 심코 호(Lake Simcoe) 사이의 좁은 물길을 부르는 단어였다. 일각에서는 휴런 족(Huron)의 단어인 '토론톤(Toronton),' 곧 '만남의 장소'가 토론토의 어원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수 세기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정착지였던 토론토 일대는, 프랑스인 탐험가 에틴 브룰리(Etienne Brule)가 지금의 토론토 땅에 발을 딛으며 외부인들에게 알려진다. 브룰리는 [[퀘벡]]의 개척자였던 사무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의 지시로 [[1615년]] 배를 타고 [[오대호]] 일대를 돌아보던 중 우연히 토론토 지역을 밟게 되고, 당시 원주민들이 지역을 부르던 이름인 '트카론토'를 자신의 일지에 기록한다.[* 브룰리 일행은 트카론토를 'Lac Taronto'로 기록했었고, 이걸 영어로 음차하면서 'Lake Toronto'로 바뀌게 되었다.] 브룰리의 방문 이후 [[이로쿼이]] 원주민들에 의해 마을 몇 개가 더 세워지지만, [[1701년]] 앨곤퀸 족(Algonquin)의 일부인 애니쉬나비 족(Anishinaabe) 사람들이 토론토 일대를 침략하며 이로쿼이 원주민들로부터 땅을 빼앗는다. === 영국령 캐나다 === ||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파일:FortYork1804.jpg|width=100%]]}}} || || '''{{{#fff 1793년 완공된 포트 요크}}}''' || 한편 토론토의 존재를 알게 된 [[프랑스]]는 [[1750년]] 상인들을 통해 루이 요새(Fort Rouillé)라는 이름의 모피 교역소를 세우지만, 얼마 가지 않아 [[7년 전쟁]]이 터지며 파괴된다. 7년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결국 토론토 일대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동시기 영국에게 할양된 [[퀘벡 주]]와 함께 영국령 캐나다의 일부가 된다. 영국인들은 당시 토착민들이었던 애니쉬나비 족과 협상을 통해 토론토 일대의 영토를 가져왔으며, ~~항상 그래왔듯이~~ 지역에 '요크'(York)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요크는 미국에서 쫓기듯 도망쳐 온 10만 명의 영국계 충성파(Loyalists)들에게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고,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며 성장하기 시작한다. ||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파일:Celebrating_the_incorporation_of_the_City_of_Toronto.jpg|width=100%]]}}} || || '''{{{#fff 1834년 토론토 시의 승인을 축하하는 시민들}}}''' || [[1793년]] 영국령 캐나다 총독 존 심코(John Simcoe)는 [[미영전쟁]]의 전운을 감지하고, 행정 기능을 보호하기 위해 캐나다의 수도를 본래의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 나이아가라 온 더 레이크(Niagara on the Lake)에서 요크로 옮긴다. 곧이어 발발한 미영전쟁은 요크마저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지만, 머지않아 토론토 주교였던 존 스트라찬(John Strachan)이 [[미군]]과 협상에 성공하며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1834년]] 캐나다는 요크의 이름을 원주민들의 언어에서 따 온 토론토(Toronto)로 바꾸었으며, [[영국인|영국계]], [[아일랜드인|아일랜드계]][* 동시기 [[아일랜드 대기근]]이 찾아오며 고향 땅을 떠나 북아메리카로 향한 아일랜드인들이 정말 많았다.], [[흑인|아프리카계]][* 대부분 노예 출신이었으며, 영국계 충성파들도 드물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 캐나다의 독립과 산업화 === [[1867년]]에 캐나다 연방이 성립되며 정식으로 수도를 지정할 필요가 생겼고, 당연히 그때까지 영국령 캐나다의 수도였던 토론토가 유력 후보에 오른다. 당시 수도 선정 과정에서 [[프랑스]]계 [[인구]]가 많이 사는 [[몬트리올]]과 [[영국]]계 [[인구]]가 많이 사는 토론토[* [[프랑스어]] 사용자는 토론토 인구의 1.5%에 불과하다. 참고로 몬트리올의 영어 사용 인구는 18.5%]가 옥신각신했지만, 연방정부는 국가 균형 발전을 위해 중간에 위치한 마을 하나에 깃발을 꽂고 수도라고 선언해버린다. 새 수도는 인구 2만이 채 될까말까 한 작은 마을이었지만, 국가 차원에서 예산을 들이부으며 [[심시티]]를 벌인 덕에 금세 버젓한 도시가 되었다. 이게 지금의 [[오타와]]다.[* [[시드니]]와 [[멜버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캔버라]]를 세운 [[호주]]과도 유사하다. 아니 [[캔버라]]가 [[오타와]]를 본받았다고 보아야 할 듯.] 나름 [[지못미]] 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영-불 갈등 이외에도 오타와 강의 상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오타와]]가 미국의 공격에 대한 방어에 상대적으로 적합하다는 [[빅토리아 여왕]]의 전략적 판단도 한 몫을 했다.[* 미국 독립전쟁과 영미전쟁 당시 [[토론토]]와 [[몬트리올]]이 공격받은 경험도 있었고, 사실 [[2차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캐나다]]의 [[주적]]은 다름아닌 [[미국]]이었다. 심지어 캐나다군의 작계상에서는 [[영일동맹]]을 근거로 일본-캐나다-호주-영국이 미국을 상대로 [[세계대전]]을 벌이는 시나리오가 엄연히 존재했다. 이건 [[미군]]도 마찬가지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캐나다 침공 계획이 폐기되지 않았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파일:Toronto's_first_Union_Station.jpg|width=100%]]}}} || || '''{{{#fff 1858년 토론토 유니언 역의 승강장}}}''' || [[산업혁명]]이 불러온 산업화의 바람은 온타리오 호와 맞닿아 수운에 유리했던 토론토를 공업 도시로 발전시켰고, 19세기 후반 개정된 이민법과 함께 토론토로 향하는 이민자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기에 [[1825년]] 완공된 이리 운하(Erie Canal)와 [[1858년]] 그랜드 트렁크 레일웨이(Grand Trunk Railway) 및 노던 레일웨이 오브 캐나다(Northern Railway of Canada)의 합작으로 지어진 [[유니언역(토론토)|유니언 역]]은 번성하던 토론토에 [[레드불|날개를 달아준다.]] [[운하]]와 [[철도]]는 이주민들과 물자가 토론토로 유입되는 속도를 훨씬 빠르게 만들어 주었다. 20세기 초 토론토는 이미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계 이주민들과 [[러시아]],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출신 이주민들, 거기에 [[동유럽]]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과 [[태평양]]을 건너 온 [[중국인]]들까지, 그야말로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이민자들로 북적이는 다문화 도시가 되었으며, [[몬트리올]]에 이어 캐나다 제2의 도시로 부상한다. 당시 성장세가 어느 정도였냐면, [[1834년]] 1만명이 채 되지 못했던 인구가 100년만에 100만명을 찍었을 정도. === 현대 === ||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파일:1280px-Toronto_map.png|width=100%]]}}} || || '''{{{#fff 토론토 6개 구(區)}}}''' [[https://en.wikipedia.org/wiki/Amalgamation_of_Toronto|출처]] ||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토론토도 성장 과정에서 인근 행정구역을 흡수한다. 그중에서도 [[1998년]]의 행정구역 대개편이 가장 유명하다. 당시 토론토는 광역 토론토(Metropolitan Toronto)라는 이름 아래 5개의 다른 도시와 같은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다. 토론토를 포함한 6개 도시 모두 사실상 한 도시처럼 기능했지만, 법적인 행정구역이 분리된 상태였기에 주요 행정 업무가 파편화되어 불필요한 예산 소모가 너무 많았다. 보다 못한 [[온타리오]] 주지사 마이크 해리스(Mike Harris)에 의해 행정구역 개편안이 제시되었고,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주민 투표 결과 찬:반 비율이 거의 1:3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캐나다 정치 구조상 주민 투표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고, 해리스는 반대 세력을 무시한 채(...) 통합을 강행한다.] 광역 토론토 하위 행정구역을 하나의 도시로 통합한다. 당시 토론토로 편입된 도시는 이토비코(Etobicoke), 요크(York), 노스 요크(North York), 이스트 요크(East York) 그리고 스카버러(Scarborough)로, 편입 이후 토론토의 구(區)로 전환된다. ||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파일:CN-Tower_GettyImages-615764386.webp|width=100%]]}}} || || '''{{{#fff CN 타워와 토론토의 스카이라인}}}''' [[https://www.cntraveler.com/activities/toronto/toronto/cn-tower|출처]] || 무시무시한 팽창에도 한동안 [[몬트리올]]에 밀려 [[콩라인]]을 벗어나지 못하던 토론토는, 아이러니하게도 경쟁자인 [[몬트리올]]의 자멸과 함께 캐나다의 종주도시가 된다. [[제1차 세계대전|두 차례의]] [[제2차 세계대전|세계대전은]] 토론토행 이민자들의 수를 늘려 줄 뿐이었고, 전후 호황과 함께 토론토 및 캐나다의 성장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거기에 [[20세기]] 중후반 몬트리올이 온갖 삽질을 반복하며[* 캐나다 그 자체라고 불리던 몬트리올은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의 실패, 그보다 좀 이전인 1960년대 [[영어]] 금지령 이후 대다수 대기업들의 탈출 등 연달아 자살골을 넣은 이후 토론토에 밀려나 버렸다. 심지어는 몬트리올 은행(BMO, Bank of Montreal)의 본사마저 법적으로만 몬트리올에 있을뿐 사실상 토론토로 이전한 상태이다.] 침체기에 접어들자 [[어부지리]] 격으로 역전에 성공해 마침내 캐나다 내 최대 도시 자리에 올라섰다. 이후 꾸준히 성장을 거듭한 결과 1990년대 이후로는 이견 없는 캐나다의 얼굴로 변신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토론토, version=750)] [[분류:토론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