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수당시대/공주]][[분류:665년 출생]][[분류:713년 사망]][[분류:시안시 출신 인물]] [include(틀:신당서)] [목차] == 개요 == 太平公主 (665년 ~ 713년 7월)[* 향년 48세] [[중국]] [[당나라]]의 황족.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4남 2녀 중 차녀. [[청나라]] 때 쓰인《전당서(全唐書)》에서는 이름을 이영월(李令月)이라고 하나 이설도 있다. == 생애 == 동복언니 [[안정공주]]는 [[측천무후]]가 [[후궁]] 시절에 낳은 아이인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측천무후가 일부러 안정공주를 죽이고는 [[폐후 왕씨(당고종)|황후 왕씨]]와 [[숙비 소씨]]를 범인으로 몰아 모함했다는 설이 있다. [[측천무후]]와 외모나 성격이 닮아서 측천무후가 가장 총애하는 자식이었다고 한다. 특히 측천무후가 황제로 즉위했을 때는 그녀의 곁에서 정치를 보좌하였으며, 세력을 크게 쌓았다. 측천무후 사후에는 [[당중종]]을 재옹립하는 데 도움을 주어 권세를 유지하였다. 705년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주살하는 데 참여한 공으로 진국(鎭國)의 태평공주로 봉해졌다. 당중종 사후에는 후의 [[현종(당)|현종]]이 되는 조카 이융기와 결탁하여 [[위황후]]와 [[안락공주]] 모녀를 죽이고 이융기의 아버지 [[예종(당)|예종]]을 (재)옹립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사건이 바로 [[당륭정변]]이다. 정변 이후 태평공주의 권세는 절정에 달해서 [[식읍|봉읍]]이 1만호(戶)에 달하고, 자신의 자식 3명을 모두 왕에 봉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정권을 잡은 후 7명의 재상 중 5명이 태평공주의 심복 출신 인물로 채워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권세는 이융기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이후에 713년 재상 두회정(竇懷貞) 등과 함께 모의하는 등 이번엔 황태자 [[이융기]]와 대립하게 된다. [[당예종]]이 이융기에게 양위한 뒤, [[당현종]]이 된 이융기와 더 심하게 대립하게 된다. 그래서 이융기는 태평공주를 더는 봐줄수 없어서 태평공주가 반란을 일으키려한다며[* 물론 이는 핑계일 가능성이 높다.] 병사 300명을 이끌고 태평공주의 자택을 공격하여 태평공주 일파를 멸망시킨다. 태평공주는 종남산(終南山)의 절인 남산사로 도망가서 숨어있었으나 끝내 당현종이 보낸 추격병들에게 발각되어 붙잡혔고 그들이 휘두른 칼을 맞고 죽는다. 이 사건을 [[선천정변]]이라고 한다. 유약한 오라버니 [[당예종]]을 대신하여 '''실권을 휘둘러 그 거동과 위세가 [[황제]]와 같았다고 한다.''' 애초에 황태녀의 자리를 요구하며 [[측천무후]]에게 자리를 물려받으려고 했으나, >"네가 뛰어나다는 건 나도 잘 안다. 그러나 또 여자가 황제가 되려면 신료들을 또 다시 대숙청해야 할텐데 나도 그렇게 황위에 올랐지만 그건 다시 보고 싶지 않다." 며 더 이상의 [[숙청]]을 꺼린 측천무후가 거부했다. 측천무후와 태평공주가 닮았다고 하지만 한 가지 닮지 않는 것은 어머니 측천무후는 정적들을 [[숙청]]해가며 황제로 즉위하고 천수를 누리다 갔지만 딸인 태평공주는 그녀의 권세를 경계한 [[예종(당)|예종]]과 황태자 [[현종(당)|이융기]]에게 역으로 숙청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사실 예종과 현종에게 태평공주는 유능하며 휘하 군사력과 정치세력이 있어 너무나 위험한 정적이었기에 수틀리면 반란을 일으키고도 남아서 하루빨리 처리해야만 했다. 특히 예종은 현종한테 태평공주를 죽이지는 말아달라했으나 현종은 그녀가 너무 위험해서 살려두면 안된다고 거절하여 소용없었다.] == 매체 == || [[파일:LinMiaoke(4).jpg|width=100%]] || || 2012년 드라마 <태평공주>에서 어린 시절의 태평공주를 연기한 [[린먀오커]](임묘가)[* 청년 역할은 [[정솽]], 중년 역할은 [[가정문]]이 연기했다.] || [[반영자]], [[린먀오커|임묘가]][* 어린 시절의 태평공주] 등의 배우가 드라마에서《태평공주》를 연기했다. 반영자는 [[드라마]]《[[일대여황]]》에서 태평공주의 어머니 [[측천무후]]도 맡아 1인 2역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