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당 황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ece5b6 '''태종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돌궐 가한)] ---- [include(틀:오대십국시대 십국/추존)] ---- [include(틀:당나라의 상서령)] ---- [include(틀:당나라의 태위)] ---- [include(틀:역대 당 황태자)] ---- ||<-5><#a48252> '''[[당나라|{{{#ece5b6 당}}}]]''' '''[[사도|{{{#ece5b6 사도}}}]]''' || || (당 건국) ||←||<#a48252> '''{{{#ece5b6 이세민}}}'''[br],,{{{#ece5b6 621 ~ 626}}},, ||→|| [[이원길]] || ---- [include(틀:수말당초 주요 세력)] ---- [include(틀:고구려-당 전쟁)]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8E096, #F4EEB0 20%, #F4EEB0 80%, #E8E096); color: #2d2f34" '''돌궐 제13대 가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55557C 0%, #666699 20%, #666699 80%, #55557C); color: #ece5b6" '''남당 추존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color: #ece5b6" '''당 제2대 황제[br]{{{+1 태종 문황제 | 太宗 文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TangTaizong.jpg|width=100%]]}}} || ||<|2> '''출생''' ||[[598년]] [[1월 23일]] || ||[[수나라|수]] [[산시성(섬서성)|경조군]] 이연 사저[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셴양시]] 우궁현) || ||<|2> '''즉위''' ||[[626년]] [[9월 4일]]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동궁 현덕전[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사망''' ||[[649년]] [[7월 10일]] (향년 51세)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취미궁 함풍전[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 '''능묘''' ||[[소릉]](昭陵) || ||<|6> '''재위기간''' ||'''{{{#ece5b6 당의 황태자}}}''' || ||[[626년]] [[9월 3일]] ~ [[626년]] [[9월 4일]] || ||'''{{{#ece5b6 제2대 황제}}}''' || ||[[626년]] [[9월 4일]] ~ [[649년]] [[7월 10일]] || ||'''{{{#2d2f34 제13대 가한}}}''' || ||[[630년]] [[5월 2일]] ~ [[649년]] [[7월 10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이(성씨)|농서 이씨]] || || '''휘''' ||세민(世民) || || '''부모''' ||부황 [[고조(당)|고조]][br]모후 [[태목황후]] || || '''형제자매''' ||22남 19녀 중 차남 || || '''배우자''' ||정실 [[문덕황후 장손씨|문덕황후]][br]후궁 [[측천무후|재인 무씨]], [[현비 서씨]] 등 || || '''자녀''' ||14남 21녀 || || '''작호''' ||진왕(秦王) || || '''묘호''' ||'''[[태종]](太宗)''' || || '''시호''' ||문무대성대광효황제[br](文武大聖大廣孝皇帝)[* [br][[649년]] 문황제(文皇帝)[br][[674년]] 문무성황제(文武聖皇帝)[br][[754년]] 문무대성대광효황제(文武大聖大廣孝皇帝)] || || '''한호''' ||천가한(天可汗) || || '''연호''' ||[[정관(연호)|정관]](貞觀, [[627년]] ~ [[649년]]) || }}}}}}}}} || [목차][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제2대 [[황제]]이자 [[돌궐 제국]](동돌궐)의 제14대 [[가한]]. 휘는 세민(世民).[* '''제세안민'''(濟世安民)으로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世와 民이 모두 일상에서 많이 쓰이는 상용 한자였기에 많은 [[피휘]]가 걸리게 되었으며 피휘 최악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군주의 이름조차 직접 쓸 수 없어서 이세민은 비슷한 뜻과 모양의 '이대씨'(李代氏)로 표기되었다. 또 [[잉어]]를 '리'(鯉)라고 읽으니 당 황실의 성씨와 겹친다며 먹지도 않게 되었다. 이렇게 신분이 격상된 잉어는 이후로 '붉은 비늘 선생'(赤鮮君)으로 불리게 되었다. [[노자]]의 성씨가 이씨니 그를 갑자기 조상으로 모셔 추존까지 하고 태상노군이라 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사실 수백 년 전에 살던 노자가 이연의 조상이라는 물적 증거는 같은 성씨 외에 전혀 없다.] [[양제(수)|수양제]] 이후 혼란스럽던 정세를 정리하고 중원을 평정했으며 여러 인사들을 포용한 정치를 통해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 태평성대인 '''[[정관지치]]'''를 이루었다. [[동돌궐]] 등 주변국을 공격해 외치에서도 성과를 거두었으나 반대로 업적의 이면에는 적지 않은 오점이 남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형제인 [[이건성]]과 [[이원길]]을 죽이고 아버지 [[고조(당)|이연]]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현무문의 변]]'''이다. 이 때문에 자신의 권력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기록에서 형제들이나 아버지의 공을 가능한 한 축소하고 자신의 업적은 과장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집권할 때까지 학살을 적지 않게 저질렀으며 말년으로 갈수록 초심을 잃고 해이해져 충신들의 간언을 귀담아듣지 않아 후계자 문제로 일을 그르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패퇴한 황제로 잘 알려져 있는데 [[신성(성)|신성]], 건안성, [[안시성]] 등에서 패퇴해 요동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때문에 태종 말년에 전쟁 후유증으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그는 [[고구려-당 전쟁|여당전쟁]] 패배 뒤 자신이 굴욕을 겪었던 것을 은폐해버렸고 '''《[[진서]]》'''를 비롯한 사서들을 자기 입맛대로 편찬했다. == 묘호·시호·제호·칸호 == * 묘호: 태종(太宗) * 시호: 문무대성대광효황제(文武大聖大廣孝皇帝) * 칸호: 천가한(天可汗) 몇몇 사서는 본 묘호에서 유래하여, 태종을 '''태제'''(太帝)로 지칭하기도 한다. [[http://thesaurus.itkc.or.kr/search/view?dataId=11557&sType=_detail&q=&secType=uf&&fq=cateType2_fct%3A%EC%9D%B8%EB%AA%85%2F%EC%99%95%EC%8B%A4%2F%EA%B5%AD%EC%99%95&fq=catePeriod1_fct%3A%EC%A4%91%EA%B5%AD&fq=catePeriod2_fct%3A%EC%A4%91%EA%B5%AD%2F%EB%8B%B9|출처]] [[시호]]의 경우 약칭 문황제, '''당문황'''(唐文皇)이라고도 한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으로 교차 검증되는 사실이다. [[연호]]는 [[정관(연호)|정관]]인데, 본 [[연호]]에서 유래하여, 태종을 '''정관천자'''(貞觀天子)로 통칭하기도 한다. [[http://thesaurus.itkc.or.kr/search/view?dataId=11557&sType=_detail&q=&secType=uf&&fq=cateType2_fct%3A%EC%9D%B8%EB%AA%85%2F%EC%99%95%EC%8B%A4%2F%EA%B5%AD%EC%99%95&fq=catePeriod1_fct%3A%EC%A4%91%EA%B5%AD&fq=catePeriod2_fct%3A%EC%A4%91%EA%B5%AD%2F%EB%8B%B9|출처]] >당의 황제는 동돌궐을 무너뜨리고 그 지배하에 있던 북방 민족까지 복속한 것을 기념하여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곧이어 이민족 군장들이 입궐하여 당의 황제에게 천하의 칸을 뜻하는 '''텡그리 칸'''으로 등극하길 청했다. 황제가 "나는 중국의 천자인데, 칸의 일까지 맡아도 되는가." 라며 수용의 뜻을 내비치자, 모두가 만세를 부르며 텡그리 칸으로 추대했다. [[칸호]]의 경우, 630년 [[동돌궐]] 복속에 성공하여 얻은 칭호로 중국 [[황제]]의 직함에 [[돌궐]]의 [[가한]]직이 귀속되었다. 즉, 가한 직책이 황제 직책의 당연직(當然職)이 된 것이었다. == [[태종(당)/생애|생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태종(당)/생애)] == 평가 == 당태종은 관점에 따라 [[중국사]] 최고의 [[명군]] 혹은 [[성군]]으로도 평가받지만, 실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양립한 인물이다.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아예 이세민을 [[양제(수)|수양제]]와 동급 내지는 이하의 인물로도 평가하며, 심할 경우에는 "[[양제(수)|수양제]]는 실제로는 성품이 온화하면서 유능한(!) 황제였는데, 이세민에 의해 폭군으로 왜곡됐다."고 까지 하는 경우도 있고, 이세민을 거품만 잔뜩 낀 인물이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또한 [[골육상쟁]]인 [[현무문의 변]]에 있어서도 비슷한 이유를 들어 태자 이건성을 재평가하고 이세민을 부정적으로 본다. 한마디로 '''"[[역사는 승자의 기록|역사는 승리자가 쓰는 것]]이다."'''고로 당태종을 찬양하는 사서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라는 논리다.[* [[인터넷]]에서 보면 [[환빠]]들이 이세민을 폄훼하고, [[중빠]]면 이세민을 빤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이세민에 대한 평가는 중빠·환빠 문제와 관련없다. 오히려 국수주의자들 중에서 "이세민은 대단하다. 그러나 그를 막아낸 [[연개소문]]은 더 대단하다."라는 논리로 그를 극찬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도 적을 고평가하는 것은 나름 흔한데 자기가 빠는 인물이 특정 누군가에게 졌을 경우, 그 누군가를 까내리면 덩달아 그에게 패배한 빠는 사람도 까내려지기에 당연히 고평가하고, 반대로 자기가 빠는 인물이 특정 누군가를 이겼을 경우, 그 특정 누군가를 고평가해 자연스레 그를 이긴 빠는 사람도 올라가는 효과가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부터가 [[안시성주]]를 극찬할 때 이 논리를 사용하여 [[안시성주]]의 대단함을 칭송했다.] 비판하는 쪽에서는 당태종 이세민은 형제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황위에서 끌어내렸으며 형제들의 아내들을 첩실로 취한 [[패륜아]]이자 자신의 공적을 높일 목적으로 역사를 조작한 자로 차갑게 평가한다. 실제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태종 이세민에게는 저런 비판이 일리가 있는 것이 '''이세민의 최대 실책은 사서를 제멋대로 개찬하여 후대 황제들로 하여금 역사서를 자기 멋대로 쓰는 악습을 남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일으킨 현무문 사변을 자기 입맛에 맞게 기록하라고 했고, 개국 과정에서 자신의 공로가 오로지 으뜸이라고 기록하면서 아버지를 모자란 사람으로 적었으며, 형과 동생의 기록을 말살하고 자신의 공적을 조작했다. 또한 위징을 비롯한 다른 신료들이 사서 열람에 대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기록과 사서를 열람하고 그것을 자기가 보기에 '옳은 방향'으로 수정하라는 명령을 내려 [[역사 왜곡|곡필]]을 저지르고 말았다. 태종은 [[고구려-당 전쟁#s-3|제1차 여당전쟁]]에서 대패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고구려가 대패했다고 알려진 [[주필산 전투]]에서 이세민 자신이 가장 두려워했다는 내용과 주필산 전투에서 승리한 50일 동안의 공백, 신성과 건안성 전투 패배[* 장검과 [[장량(당나라)|장량]] 등이 건안성을 공격했으나, 대패했다. 장검은 건안성에서 고구려군 1,000명을 죽였다는 기록만이 나와 있고 그 이후에는 기록이 없으며, 장량은 제1차 여당전쟁 직후 무고로 인해 처형당했다.][* 《삼국사기》에는 신성, 건안, 주필산에서 패배하고 죽은 병사의 수가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등 많은 부분을 빼놓고 자신들이 승리했다는 것만 강조하였고, 또한 《[[진서]]》 편찬에서는 고구려와 [[백제]] 자체를 아예 빼버리고 삼국을 마한·진한·변한으로 기록했다. 이는 후대 황제들이 자신들의 입맛대로 사서를 왜곡하는 악습을 초래했다.[* 당나라 때 역사서를 보면 역사 왜곡이 심각하다. 우선 당나라때의 관찬 사서들 가운데 태종이 편찬에 관여한 《[[진서]]》와 《[[수서]]》의 경우엔 뛰어난 사관들이 편찬에 참여했음에도 선대 왕조를 비하하기 위해 각종 야사와 비방을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집어넣게 하여 사서의 객관성이 크게 훼손된 것으로 비판받는다. 또한 중국이 이민족에 패한것도 멋대로 왜곡했다. 대표적으로 《전당문》에 있는 [[장열]]의 문서와 《자치통감》에는 하내왕 [[무의종]]이 거란을 공격하기 위해 출전했으나 조주를 버리고 달아난 내용이 나타나 있는 반면,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 [[고구려-당 전쟁#s-6|제2차 여당전쟁]] 당시 누방도행군의 행보(총관 정명진이 죽었다는 기록만 나온 것), 패강도행군 총관 임아상의 죽음, [[글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이 연남생을 압록수에서 대패시켰으나 당고종의 조서를 받고 회군한 것이 그것이다.][* 그로 인해 중국 사서는 인과관계가 불명확하다는 비판이 많다.] 당태종은 [[골육상쟁]]을 통해 즉위했으므로 정통성을 다지는데 큰 신경을 썼으며, 이로 인하여 역사 기록에 매우 많은 왜곡이 가해진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당태종의 역사 왜곡은 어느 집권세력이나 집권 이후 흔히 하기 마련인 '''집권 세력의 은근한 [[프로파간다]]''' 수준을 넘어 '''황제 본인이 직접 주도하는 역사 서술'''이 이루어져서 여러모로 왜곡된 부분이 많다고 여겨진다. 《케임브리지 중국사》나 역사학계도 이 점을 지적한다. 《[[정관정요]]》에 따르면 [[유교]]적 윤리관에서 [[폭군]]이나 한다는 [[사초]]를 실제로 보고 [[현무문의 변]] 관련 기록의 수정을 명령했다고 하며, [[위징]]이 죽은 후 그가 올렸던 상소가 모두 별도로 기록되었고 사관이 그것을 보았다는 것을 들은 후의 격노한 반응 등을 보면 이를 부정하긴 힘들어 보인다. 이로 인하여 《[[구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당고조]]의 거병에서의 이세민의 역할, 황태자였던 [[이건성]]의 군공 축소 등은 훗날 [[사마광]]의 《[[자치통감]]》 등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실 보통 새로 집권한 군주들은 대놓고 사료 조작을 했다는 역사의 심판을 받기 싫어 적당히 미화나 윤색한 기록을 자연스럽게 아랫사람들을 시켜 조금씩 다듬어 넣는 법인데, 이세민의 경우는 태생이 길거리--양아치--무부 출신이어서 그런지 본인이 직접 굉장히 무식하게 우격다짐으로 여기저기 무리하게 개입했고, 이 때문에 대량의 사서조작 과정이 대놓고 드러나서 더 욕을 먹는다. 예컨대 《구당서》 등 정사 기록에는 당태종 스스로가 [[봉선]]에 반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자치통감》은 《[[위징|문정공]] 전록》을 인용해 천하를 통일하고 뛰어난 정치로 천하태평을 이루어 백성을 행복하게 한 성천자는 봉선을 올릴 자격이 있다고 하여 태종도 봉선할 생각이었으되 [[위징]]이 반대했고, 마침 하남 지방에 수해가 일어나 봉선은 중지되었다고 적었다. 태종 자신이 겸손한 군주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실록에 그렇게 기록한 것이 《구당서》에 적힌 것이다. 또한 사마광은 《자치통감고이》에서 '''태종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아버지 당고조가 저지른 것으로 실록에 적은 것이 잘못되었다'''고 냉정하게 비판하며 태종이 저지른 학살을 자치통감에 기록했다. [[조선]] 초 대신인 양촌 [[권근]]이 "당 태종이 [[선덕여왕]]을 왕으로 임명하여 [[측천무후]]가 황위를 찬탈했다."는 말을 했지만, '''정작 당태종은 초기에 선덕여왕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측천무후는 태종이 죽은 이후에 제위에 올랐다'''. 권근의 논평이 자못 황당한 감이 없지 않아 있고, 더욱이 《[[정관정요]]》가 조선에서 꽤 많이 욕을 먹으며, 당태종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평은 아니었으나 정작 《[[대학연의]]》와 더불어서 《정관정요》라는 책을 동시에 본 것도 조선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경우는 평가를 양분했는데 "당태종의 '''장점은 인정하나 명예를 좋아하는 군주로 자뭇 부끄러운 덕도 많았다.'''" 라고 평가했다. 유학자들은 대체로 "치적은 몇 개 있으나 유학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했다." 고 많이 비판한 편이었다. [[유교]]의 단점 중 하나인 [[국수주의]] 문제를 만든 시초가 당태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도 그럴 것이 무장형 군주였고, [[수나라]] 멸망 직후 다시 혼란해질 통일 중국을 굳건히 하기 위해 유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태종(송)|송태종]] 같은 군주와 자뭇 달랐다. 가령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철학자)|주자]]는 "태종의 마음은 제가 보기에 한 가지 생각이라도 인욕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고, 다만 인과 의를 빌려 사욕을 채운 것 뿐입니다. 그런데 당시 그와 싸운 자들은 재능과 지식이 그보다 못했고, 또한 인의로 꾸밀 수 있다는 법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공업을 이룰 수 있었을 뿐입니다."라고 당태종을 평가절하했다. 당태종 본인이 뛰어난 군주였다는 것은 이런저런 왜곡을 고려해보더라도 분명하다. 당태종 이세민은 [[양제(수)|수양제]] 시기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한 나라의 여력으로 통일 중국의 기틀을 다시 다지고 여러 국난을 잘 헤쳐나간 군주였다. [[수당교체기|수말당초]]라는 대혼란 수습과 더불어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에서 [[돌궐]] 등의 대외 문제를 잘 추스린 점에서도 그런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을 재통일하고 유목민족과 [[실크로드]]를 정복하는 군사 업적을 달성하면서도 인구나 세수가 지표상으로는 동시에 꾸준히 성장하기도 했고, 비슷하게 대외원정을 중시한 [[한무제]]나 [[영락제]]가 북쪽에 꼴아박았던 것을 고려하면 당태종이 낸 훌륭한 성과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자면 정권 다툼에서 없던 사실을 날조한 것들은 후대의 관점으로 볼 때 개념없는 패륜아 소리는 해도 군주로서는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데, 정말 공과를 평가할만한 치세의 기록조차 이세민 본인한테 불리한 사실들을 지운 흔적들이 너무 많아 정확한 진실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했다는 점은 그에 대한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평가를 갈수록 힘들게 하는 원인이다. 아무리 잘한 업적처럼 보여도 그것이 당태종 본인의 프로파간다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에 후대인들 입장에서는 그 공로도 일단 깎아서 봐야 한다는 시각이 안 생길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다른 역사적 인물들도 역사학적으로 보자면 냉정하게 공과를 따져야 하고 1차 문헌이라 해서 무조건 신뢰하면 안 되는 사안이기는 하지만, 당태종은 그 정도가 유독 심한 군주이다. 결국 당태종은 본인의 과를 지운답시고 역사 왜곡을 벌이다 본인의 공까지 그 진실성을 깎아먹은, [[자승자박]]을 저지른 인물이다. 또한 당나라의 힘 자체만 봐도 당태종 본인보다는 그 아들 [[당고종]] 이치 때부터 강성해졌고, 그 뒤를 이은 측천무후-현종 초기가 당나라의 전성기였으니 이세민의 치세가 당나라의 전성기라도 보기에도 사실 무리가 있다. 건국 기틀을 잘 잡은 것 같긴 하지만, 사실 이는 숨겨진 명군이요 전근대에는 저평가가 심했던 아들 고종의 업적이었다거나, 긍정적인 측면만 과장돼서 기록됐다거나 했던 면도 정말 많아 그가 정말 성군인지는 판단에 주의가 필요하다. [[일본]]의 거장 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당태종의 [[정관지치]]가 대단하다기보다는 인구가 많이 줄고, 시대가 좋았던 영향이 큰 것에 가깝다고 보았다. 이는 그가 [[청나라|청]] 성조 [[강희제]]에 대해 내린 평가와 같다. 사실 전근대 국가들은 이런 식으로 전성기에 과도한 [[멜서스 트랩|인구 트랩]]에 걸려 전성기가 끝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기에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평가는 꽤 예리하게 문제를 지적한 바라 하겠다.[* 앞서 미야자키가 예시로 든 강희제의 증손자 [[가경제]] 역시 뛰어난 군주였음에도 청 부흥에 실패했는데, 이는 가경제 시대부터 중국이 인구 트랩에 걸려 과부하가 걸리며 청나라 자체가 한계가 봉착하였기 때문이다.] == 대중매체 == 한 시대를 풍미한 호걸인만큼 등장하는 [[사극]]이 정말 많다. 중화권에서는 [[측천무후]]와 함께 [[당나라]]를 다룬 사극이나 영화의 인기 소재이자 [[주인공]]으로도 많이 나왔고, 측천무후가 주인공인 창작물에서는 조연급이지만 그래도 [[카리스마]]나 무게감있는 [[군주]]로 종종 그려진다. [[대한민국]]에서도 고대사와 관련해서 등장하는데 [[고구려-당 전쟁]]의 장본인이고 [[삼국통일전쟁]]에도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 이 시기를 다룬 한국 사극이 많다 보니 한국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외국]] 군주가 되었다. [[안시성 전투]]에서 화살로 눈 한 쪽을 잃는 장면은 관련 이야기가 [[야사(역사)|야사]]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필수적으로 나온다. 그래서 당태종이 한국 사극에 등장하면 대부분 눈 한 쪽을 잃고 가지만 [[대왕의 꿈]]에서는 신라가 주인공이라 그런지 외눈 신세가 되지 않았다. [[중국]] 사극에서는 고구려의 경우, 남북한 때문인지 아니면 격퇴당한 것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소수민족 문제 때문인지 드라마 〈정관의 치〉를 제외하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정관장가〉의 경우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와 관련한 것은 등장하지도 않고, [[판빙빙]] 주연의 〈무미랑전기〉에서는 북방의 반란군으로, 〈설인귀전기〉에서는 가상의 국가로 나오는 묘사를 해두었기에 고구려-당전쟁을 중국의 영상매체로 보는 것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 [[중화권]]([[중국]]·[[홍콩]]·[[대만]]) === * 〈당태종 이세민〉: 임준현 * 〈수당연의〉: 두춘(두순) * 〈수당영웅〉: 위사오췬(여소군) * 〈정관장가〉: 탕궈창(당국강) * 〈진왕 이세민〉: 허룬동(하윤동) * 〈천하장안〉: 친쥔지에(진준걸) * 〈대운하〉: 류칭윈(유청운) * 〈결전현무문〉: 먀오챠오웨이(묘교위) * 〈소림사(영화, 1982)〉: 왕광권 === [[대한민국]] === * [[삼국기]]: [[임병기]] * [[연개소문(드라마)|연개소문]]: [[이주현(배우)|이주현]]→ [[서인석]] * [[대조영(드라마)|대조영]]: [[송용태]] * [[대왕의 꿈]]: [[윤승원(배우)|윤승원]] * [[안시성(영화)|안시성]]: [[박성웅]] === [[일본]]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세민.jpg|width=100%]]}}} || || {{{#000000 삼국지 14}}} || 일본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의 〈[[삼국지 11]]〉 베타 데모판의 더미 데이터로 나왔지만 〈[[삼국지 14]]〉 파워업키트에서 와서야 [[고대무장]]으로 등장했다. 통솔 92, 무력 81, 지력 90, '''정치 100''', 매력 92, 총합 455라는 높은 수치를 배정받았다. 그동안 〈삼국지 시리즈〉에서 특정 능력치를 처음부터 100을 받은 인물은 무력 100 여포, 지력 100 [[제갈량]]인데 정치 능력치에서 [[시황제|진시황]] 다음으로 당태종이 100을 받게 됐다. 또한 개성은 금색 개성인 임재, 청색 개성인 질주, 영명, 문화, 인정을 받았다. == 기타 == * 동맹국이었던 [[신라]]는 당시 [[선덕여왕]]의 치세였는데, 당태종은 '''신라는 [[여왕|여자가 왕위]]에 있기 때문에 남들이 우습게 본다'''고 신라를 디스했다. 그리고 당태종 사후, 자신의 [[후궁]] 중 하나였던 재인(才人) 무씨, 즉 무조(무미랑)는 '''[[중국사]]에서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가 된다. 그나마 선덕여왕은 성골이자 공주라서 혈통상 문제가 없기라도 했지, 이를 비웃던 당나라는 농서 이씨 혈통이 아닌 인물이 황제 자리에 오르는, 세습군주제 왕조에게 있어 악몽 같은 일을 겪게 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farm8.staticflickr.com/7759380630_ecd04cf0d8_c.jpg|width=100%]]}}} || * 태종부터 [[희종(당)|희종]] 이전까지 당나라의 역대 황제들은 산을 능으로 삼아 굴을 파고 여러 통로를 만들어 채색과 수많은 방을 만들며 가짜 통로와 방을 만들고 재궁과 부장품을 두었는데, 그 시초가 태종부터였다. [[고조(당)|당고조 이연]]은 [[진시황릉]], [[전한|서한]] 황제들, [[문제(수)|수문제 양견]]처럼 평지에 묻혔다. 그러나 당 말기 때, [[군벌]]이었던 온도(温韬)의 손에 도굴당했다고 하며 [[고종(당)|고종]]과 [[측천무후|무측천]]의 건릉만 무사했다. 현재는 정비가 되었고 국내에 소개가 안 돼서 그렇지, 산 정상과 가까운 곳에 10평 크기의 굴이 나오는데 여기가 소릉이다. 소릉에는 태종이 전쟁에서 탔던 6마리의 준마(駿馬)들을 부조(浮彫)로 표현해 놓았는데 모두 태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들을 아꼈던 태종은 자신의 무덤에 '''육준'''(六駿)을 조각했는데 각각의 이름은 '''특륵표'''(特勒驃), '''삽로자'''(颯露紫), '''청추'''(靑騅), '''권모과'''(拳毛瓜), '''십벌적'''(什伐赤), '''백제오'''(白蹄烏)였다. 그런데 1914년 [[위안스카이]]의 차남 위안커원 등이 중국과 [[미국]]의 골동품상과 결탁하여 삽로자와 권모과 두 석각을 훔쳐갔다. 이들은 1918년 다시 잠입하여 나머지 네 석각도 훔쳐가려 했으나 중간에 발각되어 반출을 면할 수 있었다. 현재 남은 네 석각은 조각난 채로 시안비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미 해외로 반출된 두 석각은 현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박물관에 있다. 때문에 두 석각은 시안 비림박물관에 [[레플리카]]로 전시되어 있다. 위 사진은 미국으로 반출된 삽로자로 군데군데 금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반출 당시 무거워서 훔쳐가기 편하게 여러 조각으로 잘라냈기 때문이다. 반면 시안에 있는 삽로자와 권모과의 레플리카는 잘라낸 흔적이 없다. * 당태종의 어록인 '''《[[정관정요]]》'''는 사후 [[인종(송)|송인종]], [[흥종(요)|요흥종]], [[세종(금)|금세종]], [[쿠빌라이 칸|원세조]], [[고려]]의 [[광종(고려)|광종]], [[예종(고려)|예종]], [[조선]]의 [[세종(조선)|세종]], [[영조]], [[정조(조선)|정조]], [[청나라]]의 [[건륭제]], [[일본]]의 [[호조 마사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부인이자 [[여걸]]로 일명 '''비구니 [[쇼군]]'''이라고 불렸다.]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메이지 덴노]] 등 한자 문화권의 많은 제왕이나 정치가들의 애독서가 되었다.[* 다만 고려 [[공양왕]]이 [[정몽주]]에게 《정관정요》를 강독하게 할 때, [[윤소종]]이 말리면서 "중흥군주로서 [[요순]]과 [[삼대]]를 모범으로 삼아야지 당태종은 따를 것이 못 된다"며 《정관정요》 대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을 것을 권했다고 한다. 당태종을 춘추의리로 비판했던 전형적인 성리학자들의 태도를 볼 수 있다.] * [[서예]]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는데, [[왕희지]]의 글씨를 광적으로 좋아했다. 때문에 전국에 있는 [[왕희지]]의 글씨를 헌납하라고 요구했는데, 왕희지의 글씨 중 걸작이라고 찬양받는 '''《난정서》'''만은 얻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수소문 끝에 왕희지의 7대손이자 [[승려]]였던 지영이 입적한 뒤, 그의 제자 변재[* 지영은 [[승려]]라 결혼하지 않고, 100세의 고령으로 입적 직전 제자인 변재에게 《난정서》를 물려주었다.]가 가지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는 그를 황궁으로 데리고 왔다. 그래서 《난정서》를 내놓으라고 신하들까지 동원하여 설득했으나, 변재는 절대로 이를 팔지 않았고, 아예 존재 자체도 부인했다. 이에 태종이 머리를 써 감찰어사, 즉 [[감사원]]급 직원이었던 소익을 [[선비]]로 위장시켜 변재 스님에게 제자로 들어가게 한다. 소익이 몇 년 동안 극진히 모시자 마음이 동한 스님이 "자네에게만 보여주는 거야"라며 《난정서》를 보여주었는데, 이때 제자로 위장한 소익은 《난정서》를 빼앗아 태종에게 바쳤다.[* 바둑 두다가 바꿔치기 했다는 설도 있다.] 이후 태종은 《난정서》를 포함한 왕희지의 글씨를 자신의 무덤에 묻어달라고 했고, 결국 태종 사후 왕희지 작품은 태종의 무덤인 소릉(昭陵)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덤으로 변재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그나마 907년 [[당나라]] 멸망 이후 [[오대십국시대]]에 [[군벌]] 온도(溫韜)에 의해 황릉이 도굴되면서 유실되고 말았다. * 참언(讖言)[* 앞일의 길흉화복에 대하여 예언하는 말.]을 신봉한 [[군주]]이기도 했는데 정관 22년, 당태종이 태사령 이형풍에게 "'''본 [[왕조]]가 3대를 넘긴 이후에 여주무왕이 천하를 대신한다'''는 [[예언]]이 믿을 만한 것이냐"고 묻자 이형풍은 "'''이 인물이 지금 [[시안시|장안]]에 살고 있는데 30년 후에 [[왕]]이 되어 천하를 다스릴 것이며 당의 황손들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태종은 '''의심이 가는 인물을 찾아내 죽여 버리면 후환을 막을 수 있지 않겠냐'''고 물었으나 이형풍은 '''천명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며 그를 죽여봤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고 반대했다. 이때부터 당태종은 무장들 가운데 성이 무씨인 사람을 특별히 경계했다. 그 중 이군선(李君羨)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의 아명이 오'''낭'''(五'''娘''')[* 다섯째 아가씨]이며 관적이 위주(魏州) '''무'''안('''武'''安), 관직은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으로 현'''무'''문(玄'''武'''門)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관직에 '''武'''자가 많고, 아명에 '''娘'''이 들어가는 바람에 당시 '''여주무왕의 예언'''에 전전긍긍하던 당태종의 본보기가 되어 이군선을 화주(華洲) 자사로 전출시켰고, 이어 [[사도(동음이의어)#s-1.5|사도]]를 신봉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여주무왕으로 몰아 멸문시켰다.[* 훗날 이군선의 누명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주무왕의 당사자였던 [[측천무후]]'''가 벗겨줬다고 한다.] * 야사에 의하면 당태종이 붕어하기 직전에 [[장손무기]]에게 "[[측천무후|무씨 성을 가진 여인]]을 결코 [[궁궐]]로 들이지 말라"와 함께 "무씨 성을 가진 여인이 이 대당을 뺏을 것이다." 라고 했다고 하며 장손무기에게 "그대의 과잉 [[충성]]은 언젠가 그대를 죽게 만들 것이오"라고 했다고 하는데 측천무후가 훗날 벌일 짓을 예견이라도 한 듯 하다. 학계에서 "장손무기가 당태종에 대한 과잉 충성으로 죽지 않았냐"는 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 이유로는 장손무기가 무씨 성을 가진 여인의 궁궐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종이 무조를 궁궐로 들이려고 하자 자기가 동원 가능한 모든 [[힘]]을 총동원해서 사력으로 [[측천무후|무조]]의 입궐을 막을려고 했으며 무조가 기어이 궁궐 내로 들어오자 어떻게 해서든 쫓아내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장손무기 죽음에 관한 [[떡밥]] 중 그가 죽기 직전에 아래와 같은 말을 한 뒤에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고 하는데 정작 [[정사(역사)|정사]]에서는 장손무기는 '''목을 매어 자살'''해서 해당 야사가 후대에 쓰여진 [[소설]]이 아니냐는 의견들이 학계에서 팽배하다. 장손무기가 측천무후를 배척한 것도 [[문벌귀족]]인 [[관롱집단]]의 일원이자, [[고종(당)|고종]] 초기 집권자로 왕씨 [[황후]]를 지지했기에 신참 세력인 측천무후를 배척했다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 불교사에서 유명한 법림(法琳)이라는 승려에게 [[패드립]]을 들었다는 야사가 있다. 당시 당태종은 본인의 선조가 노자라고 하며 도교를 우대했는데, 법림이라는 승려가 도교 도사들과 싸우다가 잡혀온 일이 있었다. 그때 법림은 '폐하가 노자의 후손이라고 하시는데, 노자의 아버지가 절뚝거리며 귀는 어둡고 눈은 흐리기에 처가 없어, 나이 70세에 이웃집 노비와 [[간통]]하여 노자를 얻었다는 것은 아십니까? 그리고 폐하가 노자의 후손이 아니며 농서 이씨 출신이 아니라 (선비) [[탁발부|탁발씨]] 출신인 것은 모두가 아는데 왜 사실을 숨기시는 겁니까?' 라는 말을 했고, 분노한 당태종은 법림을 죽이려다가 결국 유배시키는 것으로 끝냈다고 한다.[* 부연된 야사에서는 당태종이 "관음보살을 외우면 창칼도 비껴나간다던 법림이니 7일 동안 보살에게 빌게 하고 죽여라"라고 했는데, 막상 당일 법림은 "7일간 폐하의 이름을 불렀다. 폐하가 바로 관음보살이기 때문"(...)이란 극강의 아부로 목숨을 건졌다고들 한다. 관세음보살에 세짜가 들어가니 그것까지 노린 아부인 셈.] * [[황충(곤충)|황충]]떼가 장안을 덮치자 답답한 마음에 산 메뚜기를 산채로 삼켰다고 한다. '''탄황'''의 고사라고 하는데 비슷한 인물인 조선의 [[태종]] 역시도 같은 일화가 있는걸 보면 후대에서 당태종과 조선 태종에 대한 이미지를 비슷하게 [[프로파간다]]로 만든 경향으로 보인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 [include(틀:신당서)] ---- [include(틀:당시기사)] [[분류:태종(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