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광주광역시의 자연지리)] ||<-2> {{{#fff '''{{{+1 태봉산}}}'''[br]胎峰山}}} || ||<-2> [include(틀:지도,장소=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121번지,너비=360px,높이=320px)] || || {{{#fff '''위치'''}}} ||[[광주광역시]] [[북구(광주광역시)|북구]] 신안동 121번지 일원 || || {{{#fff '''높이'''}}} ||52.9m || || {{{#fff '''면적'''}}} ||약 10,0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태봉산_1967.jpg|width=100%]]}}} || || 1967년 태봉산의 모습 || [목차] [clearfix] == 개요 == [[광주광역시]] [[북구(광주광역시)|북구]] 신안동 121번지 일원에 있었던 조그만 [[산]]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산이 있던 곳을 지나가는 무등로에 '태봉산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 역사 == === 태봉산 설화 === [[조선]] 시대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와 왕비는 피난을 가게 되었고, 피난 중에 왕자([[용성대군]] 이곤)를 얻었으나[* 실제로는 난이 진압된 후인 1624년([[인조]] 2년) 10월 24일 [[경희궁|경덕궁]]에서 태어났다.] 어린 왕자가 잔병이 많아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근심 끝에 왕비가 백일 불공을 드리자 꿈에 도사가 나타나 "왕자의 태를 묻은 곳은 땅 기운이 불순하여 태를 괴롭혔기 때문이니 광주 고을 복판에 있는 [[여의보주|여의주]](如意珠) 모양의 둥글고 작은 산에 태를 옮기고 금을 태와 함께 묻으라."라고 하여서 왕자의 태를 이곳에 이장하였더니 병이 나았고, 그래서 태봉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 태실 발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ata40/2009/1/29/249/img_0052_nak1090.jpg|width=360px]]}}}|| || 광주시립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태실의 모습 || >皇明天啓四年九月初三日辰時 誕生王 王男大君阿只氏胎 天啓五年三月二十五日藏 >[[천계제|천계]] 4년(1624년) 9월 3일 진시에 대군 [[용성대군|아기씨]](阿只氏)를 낳았고 그 태를 천계 5년(1625년) 3월 25일에 묻는다 >---- >- 석판에 적힌 명문 [[1929년]] [[7월]], 광주에 [[가뭄]]이 심하게 들자 마을의 나이 많은 노인들은 태봉산에 누군가 몰래 무덤을 써서 재앙이 닥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우리나라 시골 마을에서 꽤 흔하게 존재하는 전설이다. 마을의 진산에 어떤 명당이 있으나, 그 명당에 묘를 쓰면 묘를 쓴 집안은 복을 받되 마을에는 가뭄 등 재앙이 닥친다는 것이다. 이런 전설이 전해지는 산에는 툭하면 누군가가 남몰래 관을 묻어, 마을 사람들이 청년들을 데리고 뒤져보면 발견되곤 했다. 운 좋게 안 들킬 수도 있는데, 마을 사람들 몰래 관을 쓰고 봉분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무덤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 줄도 모르고 드러내놓고 성묘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산 꼭대기를 파헤쳤는데, 이때 태를 담은 백자 항아리와 태실(胎室), 금박(金箔) 1돈 5푼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태를 묻었다'는 전설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 사실 태봉산은 1939년 "광주시가지계획"이 수립되었을 때부터 헐릴 예정이었다. 이 계획은 1960년대 후반에 와서 거의 그대로 시행된다. 태봉산이 사라진다고 했을 때 근처 어르신들은 '화룡승천'이란 [[풍수지리]]를 들먹이며 완강하게 반대했는데, "여의주인 태봉산이 있어야만 용이 하늘에 오를 수 있어 광주가 재난을 받지 않고 발전할 수 있다.", "만약 태봉산을 헐어 없애면 10여년내로 광주에는 큰 난리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칠 것이다."라는 극단적인 도참설까지 들고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후일 1980년 실제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겨 이 예언이 이뤄지고 만다.] 하지만 이런 반대 의견은 지역 주민들에 국한되었으며 시민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아쉽지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였다고 한다.[[http://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480047|#]] 결국 [[1967년]]∼[[1969년]] 광주시가지 정리계획에 따라서 [[경양방죽]]과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 참고 문헌 == * 광주광역시 시청각자료실, [[http://gjarchive.kr/p_view/3731|태봉산]]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http://gjsgcc.or.kr/ko/28/view?SEQ=1106|태봉산 태실]], 2018. * 조광철, [[http://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386115|[광주갈피갈피]태봉산]], 2008. * 조광철, [[http://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480047|[광주갈피갈피]경양방죽과 운명 함께 한 태봉산]], 2017. == 여담 == * [[광주역사민속박물관]]으로 가면 태봉산을 알 수 있다. [[분류:광주광역시의 지리]][[분류:북구(광주광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