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326년 출생]][[분류:1395년 사망]][[분류:추저우시 출신 인물]][[분류:명나라 개국공신]][[분류:명나라의 추존 왕]]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대만의 군인, rd1=탕화(군인))] [include(틀:명사)] ||<-2> '''[[명나라|{{{#800000 명나라 개국공신}}}]][br]동구양무왕(東甌襄武王)[br]{{{+1 탕화}}}[br]湯和'''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信國公 東歐襄武王.jpg|width=100%]]}}} || ||<|2> '''출생''' ||[[1326년]]([[진종(원)|태정]] 3)|| ||호주(濠州) 종리현(鍾離縣)[br](現 [[안후이성]] [[추저우시]] [[펑양현]])|| || '''사망''' ||[[1395년]] [[8월 30일]][* [[율리우스력]] [[8월 22일]].] (향년 68 ~ 69세)[br](음력 [[홍무]] 28년 8월 7일)|| || '''[[작위|{{{#800000 작위}}}]]''' ||신국공(信國公)[br][[추봉]] 동구왕(東甌王)|| || '''[[시호|{{{#800000 시호}}}]]''' ||양무(襄武)|| || '''성씨''' ||탕(湯)|| || '''이름''' ||화(和)|| || '''[[자(이름)|{{{#800000 자}}}]]''' ||정신(鼎臣)|| [목차] [clearfix] == 개요 == 탕화(湯和)는 [[명나라]]의 [[군인]], [[장군]]으로 명나라의 [[개국공신]]이다. == 생애 ==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이모]]네 집에서 자랐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주덕흥, [[서달]]과 함께 지주의 소를 치는 목동 노릇을 하며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난]]을 비롯한 농민 반란이 들끓자 [[1352년]]([[혜종(원)|지정]] 12) [[곽자흥]] 휘하 [[홍건적]]에 들어갔다. 이때 [[탁발]]로 전전하던 주원장에게 편지를 보내 홍건적 가담을 권유했다고 한다. [[1353년]](지정 13)부터 주원장 밑에서 [[장군]]이 되어 만호(萬戶), 관군총관(管軍總管) 등을 지내다, [[1356년]](지정 16) [[진강]]을 점령하고 [[서달]]과 함께 회흥익원수부(淮興翼元帥府)의 통군원수(統軍元帥)가 되었다. 서달과 함께 [[창저우시|상주]]를 점령하고 [[1357년]](지정 17) [[추밀원(중국사)|추밀원]] 동첨(同僉)이 되어 상주에 주둔한 뒤 서달, [[상우춘]] 등이 서쪽의 [[진우량]] 전선에서 활약하는 동안 동쪽의 [[장사성]] 전선을 지켰다. [[1363년]](지정 23) 중서좌승(中書左丞)으로 승진하고, 석산(錫山)[* 오늘날 [[장쑤성]] [[우시#s-4]] 시.] 에서 장사성의 [[수군]]을 크게 이긴 공으로 [[1364년]](지정 24) 주원장이 오왕(吳王)이 된 뒤 평장정사(平章政事)로 승진했다. [[1367년]](지정 27) 서달, 상우춘 등과 함께 장사성을 정벌하고 [[어사대부]]가 되었다. 같은 해 나머지 장군들이 [[북벌]]에 나선 동안 탕화는 남쪽으로 가서 [[방국진]]을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1368년]](홍무 1) [[명나라]]가 세워진 이후 오늘날 [[푸젠성]] 일대의 [[원나라]] 세력을 마저 정리한 뒤, [[도독]] 풍승(馮勝)의 군대에서 오늘날 [[산시성(산서성)]] 일대를 정벌했다. [[1370년]](홍무 3) [[닝샤|영하]]를 함락했다. 같은 해 있었던 개국공신 [[논공행상]]에서 중산후(中山侯)로 봉해졌다. [[1371년]](홍무 4) 오늘날 [[쓰촨성]] 일대에 있었던 [[명하]]를 정벌하여 [[서촉 명씨|명승]]을 항복시켰다. 이후 북벌에 마저 종군하다 [[1378년]](홍무 11) 정1품 [[대도독부]] 좌도독(左都督)으로 오랜만에 승진하고 신국공(信國公)으로 봉해졌다. 이후로는 주로 군사 행정 업무에 종사하며 북, 서, 남쪽을 두루 다니다, [[1388년]](홍무 21) 옛 고향의 바뀐 이름인 봉양(鳳陽)에 지어진 새 저택으로 은퇴했다. [[1395년]](홍무 28) 죽고 동구왕(東甌王)이 [[추봉]]되었다. [[시호]]는 양무(襄武)다. == 여담 == 탕화는 대체로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서달]], [[상우춘]] 등에 비해 지나치게 박하게 대우받은 측면이 있다. 이는 탕화가 상주에 주둔하며 [[장사성]]을 방어할 때, [[술]]에 취해 자기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지 떠들다가 들뜬 나머지 '''경솔하게도 장사성에게 붙을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탕화는 개국공신 논공행상에서 [[공작(작위)|공작]]이 되지 못 하고 [[후작]] 가운데 첫 번째가 되는데 그쳤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는 오히려 복이 되었다.''' 탕화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근신했고, 결과적으로 [[홍무]] 연간에 있었던 [[숙청]]을 모두 피해 [[부귀영화]]를 누리며 죽을 수 있었다. 주원장이 탕화가 낙향한 후 뭘 하고 있는지 보려고 [[금의위]]를 파견했는데, 평범한 [[어부]]의 차림으로 사람들과 [[낚시]]를 다닌다는 보고를 받고 안심했다는 일화가 있다.[*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침을 질질 흘리거나 흙을 먹었다는 설도 있다.][* 여러모로 [[주더]]와 비슷한데, 주군보다 몇살 더 많은 [[군부]]의 [[큰형님]] 격이었던 것과 [[처세술|처세]]를 잘해서 [[와석종신]]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 있다.] [[https://www.google.com/maps/place/Tanghemu/@32.9068874,117.4156134,14.25z/data=!4m6!3m5!1s0x35c944dd0343c44f:0xf75e4b1b8ec02897!8m2!3d32.923262!4d117.418118!16s%2Fg%2F155rwrws|묘는 고향 근처의 [[벙부시]] 시내 근교에 있다.]] == 대중매체 == 2006년작 드라마《주원장》에 등장했다. 배우의 이름은 양홍우(양홍무: 楊'''洪武''')인데 [[배우개그|공교롭게도 주군인 홍무제의 그 홍무와 한자까지 같다.(...)]] [[https://zh.wikipedia.org/wiki/%E6%9D%A8%E6%B4%AA%E6%AD%A6|중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2019년 12월 5일에 [[심장질환]]으로 고인이 되었다고 한다. 2022년 중국 드라마《산하월명》에 등장한다. 홍무 말기에 시골 [[농사꾼]]의 행색으로 황궁에 방문해 [[홍무제]]에게 고향 근황을 전하는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 홍무제는 탕화를 형제로 불렀고 "태자에게 인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태자는 탕화 같은 검소한 신하가 조정에 있었다면 나라가 더 잘됐을 거라고 평가했다. 홍무제는 경성 내에서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오직 탕화 뿐이라고 말했다.